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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2

by 운무허정도 2018. 12. 3.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1

 

수혈주거로 시작된 인간의 거주양식이 드디어 아파트라는 형식에까지 도달했다. 생활에 필요한 내외조건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달라졌고 인간의 삶을 담았던 주거시설의 형식도 변했다.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자연조건과 생산의 수단 및 관계 변화였지만 때로는 정치 사회의 변화가 요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주거형식이 가장 비약적으로 변한 시기는 소위 근대적 건축술이 등장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시작된 개항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직접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과 서구의 건축술도 들어왔다.

개항장에 건설된 일본인 주택들은 당연히 일본 자본에 의해 일본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시행되었다.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주택과 점포를 겸한 단층 혹은 이층의 주상(住商) 복합건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은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 등으로 나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서 등장한 주택으로 대개 전통주택에 일식(日式) 혹은 서양식을 일부 채용한 형식이다.

하지만 토막민(土幕民)이라 불린 도시 빈민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토막(土幕)이란 땅을 파서 주거공간(움집)을 만든 뒤 짚이나 거적을 덮어 지붕과 출입구를 만든 집으로 가장 열악한 주거형태였다.

1945,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이어진 전쟁은 주거상황을 더욱 깊은 질곡에 빠뜨리고 말았다.

1961년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수출중심 경제정책을 택했고 그 결과 발생한 이농현상은 도시의 주택난을 심화시켰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가구들은 집을 마련할 경제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도심지에 세()를 얻을 형편에도 미치지 못한 가구가 많아 이들 중 상당수는 도시 변두리의 산이나 하천 등 국·공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했다. 무허가 판잣집과 달동네의 출현이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제3공화국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에 주택 정책을 도입했다.

1962년 대한주택공사를 설립하였고 같은 해 도시계획법 및 건축법, 1963년에 토지수용법과 주택자금운용법 및 국토건설종합계획법 등을 제정하여 민간부분의 주택 건설을 촉진하였다. 1969년에는 주택은행도 설립하였다.

후의 일이지만 1979년에는 토지금고(한국토지개발공사)를, 1981년에는 국민 주택기금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이 모두는 국가의 공공 재정이 아닌 민간재정을 투입하는 주택정책이었다.

우리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0년대 말 이후 마산수출자유지역, 한일합섬, 창원기계공단 건설 등으로 인구가 급증하였고 이로 인해 주택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마산의 석전·양덕·합성동 일대를 아우르는 동마산 개발도 이 때문에 시작된 사업이었다.

이 시기의 주거는 대부분 단독주택이었다.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미된 개량형 주택으로 취사 및 난방연료는 주로 연탄이었다.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급속히 커진 주택시장은 공공 또는 민간 주도의 아파트, 집장사가 지은 주택, 건축가가 설계한 일부 고급주택, 무허가 주택 등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주택시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집만 지어 팔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심리 때문이었다.

수요급증으로 폭등한 집값으로 무주택 서민층의 내 집 마련이 어렵게 되자 1977년 정부는 주택 청약제도와 함께 분양가 상한제를 시행했다.

하지만 이 제도가 오히려 고소득층에게는 아파트를 싸게 구입해 이윤을 붙여 되팔 수 있는 기회로 둔갑되어 투기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분양가 상한제의 또 다른 부작용은 획일화된 아파트 공급이었다. 분양가격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창의적인 건축보다는 정해진 값으로 똑같은 아파트 짓기를 강요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분양가 상한제 실시 1년 후인 1978, 공동주택을 시공 단계에서 분양할 수 있는 선분양 제도를 도입하였다. 건설업자들의 재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조감도 밖에 없는 그림 속의 아파트를 사고팔았고, 그림 속 아파트 분양 당첨을 위해 가족들이 교대해가며 밤새 줄을 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선분양 제도가 기업의 재투자를 촉진하고 그로 인해 주택시장 활성화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토지확보만으로 거액의 분양수익이 창출되었던 기형적인 시스템이 기업주의 과도한 이윤욕을 부추겨 유수한 주택건설업자들이 도산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조성 중인 창원공단 제1단지. 창원대로와 남천이 뚜렷하다. 사진의 왼쪽하단 일대가 대원1구역 / 1976년 항공촬영, 국가기록원 소장>

 

신도시 창원은 이러한 상황과 함께 탄생하였다. 하지만 창원 신도시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던 시기에 정부가 바뀌었다.

국가중공업산업의 중흥을 꿈꾸며 창원벌판에 신도시 계획을 세웠던 유신정권은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고 그 뒤를 이어 제5공화국이 등장하였다. 유신정권은 끝났지만 또 다른 형태의 유신체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달라진 것은 경제였다. 때맞춰 불어든 3(저유가, 저환율, 저금리)현상으로 좋아진 경제사정 때문에 국내건설업계에도 봄바람이 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국제경쟁력을 갖춘 산업이 없었다.

따라서 건설업의 국민총생산 차지비율이 높았고 타산업과의 연계효과와 고용효과도 높았다. 거기다가 사회간접자본도 현저히 부족했던 때였다.

정부는 이런 상황을 인식, 경기부양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건설경기부양책을 폈다.

60년대부터 산업화되기 시작한 마산은 물론, 1980년 독립 시()로 분리된 창원지역의 건설경기가 상대적으로 더 활발하였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아파트의 대중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