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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도시이야기

생각이 도시를 바꾼다, 꾸리찌바의 거리와 광장

by 허정도 2009. 6. 19.

꾸리찌바 이야기 2 (거리, 광장)

24시간 거리

시침은 24시간 주기로, 분침은 60분 주기로 표식이 구분되어 있는 원형시계 (박용남 선생은 이 시계를 포스트모던 형이라고 했다)가 입구 상단에 높이 부착되어 있었으며 골조는 노란 색 칠을 한 원형 파이프를 곡 가공하여 세우고 지붕에는 투명한 아크릴을 씌운 우아한 아케이드 형의 몰(Mall)이었다.

1991년 시작된 이 공사는, 원래 시민들이 별로 사용하지 않아 위험스럽기까지 했던 도시지역의 한 길을 반 옥외 공간 형태의 아케이드로 만들고 '24시간 거리'라고 명명했는데 이름처럼 24시간 활용되는 장소다.

                                                                                    
  밤새도록 놀기를 놓아하는 브라질 인에게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길이 120m 폭 12m의 작은 거리인 이 건물은 실내로 햇빛이 투과될 수 있다는 것과 이용자들이 비와 냉기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민들에게 인기가 높다.


단순함과 경제성 그리고 신속성이라고 하는 꾸리찌바 시의 행정 철학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시설물이었다.

내부는 약국, 선물가게, 은행, 빵집, 꽃집, 미용실, 서점, 기념품, 커피점, 주점, 식당 등의 작은 가게들과 경찰부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상점은 총 34개이다.



내가 갔을 때가 오후 2시 경이었는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Mall 중앙부 오픈스페이스의 많은 간이 테이블은 낮에는 패스트푸드 테이블로 이용되었지만 밤에는 전부 생맥주 광장으로 변했다.


밤의 분위기는 낮과 달리 매우 동적이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간이 공연도 열렸는데 몇 곡을 들었지만 단 한곡, 비틀스의 ‘Let it be’ 외에 내가 아는 노래는 한 곡도 없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젊었으나 이용하는 세대는 남녀노소 편중이 없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연인과 함께 자유롭게 어울리고 있었다. 소란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꾸리찌바 시는 시설을 통해 수익을 얻고 있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지자체와는 달리 가게 주들에게 임대료와 세금만을 부과해 시설의 운영비용을 거두어들인다고 했다.



자유시장 터 오소리오 광장


자이메 레르네르는 ‘부자의 게토(Ghetto)이건 빈민의 게토이건 게토를 가진 도시는 이미 도시가 아니다’고 했다. 이런 지도자를 가진 꾸리찌바 시민이 부럽다.

그의 이런 도시철학은 꾸리찌바의 도시 변화 속에 단지 물리적인 부분 외에도 많은 내용들이 배려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하며 실제로도 그 사례는 많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 역시 무주택자가 점점 늘어났으며 그 결과 작은 손수레에다 상품을 싣고 다니며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노점상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들 노점상에게 시가 내린 최종 결론은 ‘떠나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며 ‘만약 이 도시가 그들에게 직업을 제공할 수 없다면 우리들은 그들이 일을 할 수 있도록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오소리오 광장이 자유시장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이런 고민의 결과다.

꾸리찌바 시에 있던 노점상들에게 합법적인 판매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공원이자 광장인 이곳에 주말 혹은 일정 기간 영업을 하도록 해주어 ‘자유시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공원에 나와 있던 한 시민은 ‘주말에만 영업을 하는데 주로 3월부터 시작합니다. 딸기와 꿀, 야채 등 계절 특산물들을 주로 팔지요. 꾸리찌바 시민들에게도 인기가 높은데 1월은 계절이 맞지 않아 장이 열지지 않습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공원 안에는 많은 수의 나무벤치가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지만 내가 찾았을 때는 이미 앉을 자리가 없었다.

눈길을 끈 것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어린이 놀이터와 농구와 미니축구를 겸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철책으로 영역을 구별해 놓은 이곳에는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으며 우리의 여느 아파트 단지처럼 일부에는 모래밭 위에 놀이기구가 놓여있었다.


미니 축구장에서 꾸리찌바 젊은이들이 하는 풋살(20m×40m 농구장 규모의 실내 축구, Futsal이라는 용어는 스페인어 또는 프르투칼어의 축구를 의미하는 Futbol 또는 Futebol과 실내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인 Salon 또는 포르투칼어의 Sala를 합성한 것이다)경기를 볼 수 있었다. 펜스와 네트를 이용해 공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시설해 놓고 한 팀에 5명씩 출전하는데 브라질 인들이 매우 즐긴다했다. 우리의 동네 축구 같은 것은 주로 풋살로 경기한다면서, 사용하는 공은 축구공보다 조금 적지만 약간 딱딱하다고 했다.

풋살 경기도 월드컵이 개최되는데 여덟 번이나 브라질이 우승했다는 말도 들었다.

과연 축구의 제국 브라질의 청년답게 볼 콘트롤, 슈팅 등 축구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문외한인 내 눈에는 우리 프로선수보다 발재간이 더 좋아 보였다.



공원 관리사무소 주변에는 붉고 화려한 꽃들이 주변을 장식하고 있었다. 공원의 한 복판을 가로지르는 넓은 공간은 인근 ‘꽃의 거리’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많은 인파를 자연스럽게 공원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꽃의 거리


1970년께, 개발지상주의에 편승한 분별없는 도로 건설이 하나의 유행처럼 번지던 때.

지금은 ‘꽃의 거리’로 불려지면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거리도 조성 당시 주민들의 반대가 많았다. 매상 저하를 우려한 상인들은 시장을 상대로 법률적 행동에 들어갔으며 자동차 클럽의 성난 회원들이 도로 복원 시위에 나섰다. 그런데 시위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공무원들의 계획에 의해 준비된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이 거리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그림 그리기를 차마 방해할 수 없었던 성난 어른들은 어쩔 수 없어 그냥 돌아갔고 거리는 완성되었다. 보행자 천국이 탄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통으로 남아 매주 토요일 오전 10부터 12시까지 거리 미술제가 열리고 있다. 거리가 만들어지고 난 뒤 이 지역은 도시의 중심지역으로 변했고 그에 따라 건물의 상업적 가치도 매우 높아졌다.





 

꾸리찌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널리 알려진 ‘꽃의 거리’는 말 그대로 활기에 넘쳐있었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표정도 밝았지만 형형색색의 꽃들과 벤치, 길 양 옆으로 형성된 각종 가게와 키 큰 나무들, 여기저기 펼쳐진 노천카페, 거리는 정열로 가득 차 있었다. 거리 미술제가 개최되는 길바닥은 단순하며 실용적인 석편이었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거리였다.


아이들의 탁아소로 사용된다는 붉은 색의 폐 전차는 사용하지 않는 듯 문이 잠겨있었다. 옆에 섰던 경찰에게 그 용도를 물으니 전에는 아이들을 위한 용도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낡아 용도를 폐지하고 관광 상품으로만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 곳은 카메라로 촬영되고 있음’이라는 팻말을 붙여 놓은 ‘안전지대’에는 노인 몇몇이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으며 거리로 밀고 나온 카페의 노천 의자에는 젊은이들이 맥주가 가득 찬 잔을 앞에 놓고 뭔가 큰 소리로 지껄이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연주, 마임 등 다양한 거리 공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거리를 처음 만들 때, 영업이 안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는 길 양옆의 상인들을 떠 올리며 이곳이 차 다니는 넓은 도로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보행자 도로를 반대했던 사람들은 지금 이 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상념은 이윽고 왜 이런 공간을 우리는 갖지 못할까로 이어졌다.



‘꽃의 거리’는 동쪽으로 오소리오 광장, 북쪽으로 찌라덴치스(Tiradentes, 브라질의 독립운동가)광장과 역사지구, 서쪽으로는 빠라나 연방대학과 시민보행공원으로 이어지는 꾸리찌바의 심장이었다.

 

빠라나 연방대학 앞을 지날 때, 입구 계단에서 수십 명의 젊은이들이 동일한 붉은 상의를 걸치고 옷과 얼굴에 온통 진흙 칠을 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다같이 외치고 있었다. 가운데는 교수로 보이는 곱게 늙은 여자도 한 사람 있었다.

학교를 상대로 시위를 하는 것인 줄 알고 물었더니 요즘이 대학 합격자 발표 시기라 대학에 합격한 학생들이 전통적으로 하는 행사라고 설명해 주었다. 브라질의 모든 대학에 이런 전통이 있는데 시내로 나가 행사를 하기도 하고 교내에서 하기도 하는데 내용은 대학마다, 전공마다 다양하다고 했다.



과라나(브라질에서 생산되는 과일)로 만든 음료수를 마시면서 잠간 쉬는 동안, 안내를 맡은 민 군이 ‘꾸리찌바는 자신도 처음 오는 곳이지만 상 파울로에 비해 계층 간이 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이해가 잘 안되어 되묻자 ‘상 파울로 시내 공원에서는 여자 혼자 손가방을 들고 저렇게 다니지 못해요.


나도 길거리에서 손목시계를 채여 본 적이 있거든요. 이곳은 다르네요. 가난해 보이는 사람과 부자로보이는 사람이 모두 편안히 길을 다니잖아요. 같이 잘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것 같네요. 상 파울로는 빈부 차가 심하면서 치안이 엉망이라 부자들은 백화점과 고급 레스토랑에만 모여 있고 도심의 공원과 거리에는 잘 나오지 않거든요’ 라고 했다.

이 청년의 말처럼 자이메 레르네르가 꿈꾸었던 ‘계층 간의 통합은 진정 이루어졌을까.



 역사거리


꾸리찌바 도시계획연구소는 도시변화의 계획과정과 그 결과를 네 단계로 구분하고 각 단계는 상호 유기적인 인과 관계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 네 가지 변화는 물리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들은 이들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역사거리는 위의 네 가지 발전 단계 중 마지막 단계, 즉 ‘도시의 문화적 혁명’ 결과인데 이는 물리적 변화의 산물이었고 경제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라는 과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꾸리찌바의 도시문화정책은 이 역사 거리를 비롯하여 도시전역에 걸쳐 문화적 가치 및 민족적 다양성을 보존하도록 하는 일련의 사업들을 포함하고 있다.


일련의 사업들이란 도심을 재생시키거나 역사적 건물과 문화유산을 보호한다거나 혹은 오래된 건물을 새롭게 재활용하거나 문화재단을 설립하는 등을 말한다.


거친 숨결로 물을 뿜는 말(馬)이 조각된 아름다운 분수가 광장입구에 자리한 역사거리는 이 도시의 문화정책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거리는 깨끗하게 잘 간수되고 있었으며 건물들은 한 채 한 채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일요일 오전에는 벼룩시장이 열리지만 내가 갔을 때는 평일이라 벼룩시장 대신 우리의 포장마차와 흡사한 노점상 몇 군데에서 치즈와 햄, 과자, 과일주스 등을 팔고 있었다. 가게를 찾는 사람도 많이 없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에 비해 그 연조야 미미하지만 도시의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게 관리하려는 도시행정 당국의 마음씀씀이를 알 수 있는 공간이었다.


꾸리찌바 시가 '창조된 토지(created surface)'라 명명하여 채택한 도시정책의 결과물인  가리발디 하우스(Garibaldi House)가 광장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창조된 토지(created surface)'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민간소유의 토지와 건물을 공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소유주에게 다른 개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시가 필요한 것을 취하는 역사유적 확보정책이다.

가리발디 하우스도 꾸리찌바 시에 있는 이탈리아노 클럽(Club Italiano)이 소유하고 있던 아름다운 역사적 건물이었지만 과거처럼 복원할 경제적 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꾸리찌바 시는 이 단체에 다른 인센티브를 주면서 복원한 건물이다.


내가 찾았을 때, 마침 가리발디 하우스 내에는 무슨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지 정장차림을 한 남녀가 많이 모여 왁자지껄했다.


                                                                       


 

역사거리를 약간 비껴 나오자 뽀띠 라자로또(Poty Lazzarotto)의 ‘꾸리찌바와 그 사람들’이란 제목의 벽화가 여행자를 맞아주었다. 원통형 정류장과 식물원, 지혜의 등대, 그리고 ‘신선한 물 프로그램’ 등 꾸리찌바의 다양한 특징들을 형상화한 이 벽화는 약 30센티미터 정방형 타일로 모자이크되어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현장에서 페인트로 그린 것이 아니라 타일 한 장 한 장을 구워 만든 작품이었다. 아무렇게나 시공된 콘크리트 위에 원색의 상업성 칠만 보아 온 내 눈에는 그 자체로서 경이로웠다.


뽀띠 라자로또(Poty Lazzarotto)는 이 도시가 낳은 유명한 미술가인데 이 벽화 외에도 도시 여러 곳에 꾸리찌바의 풍물과 역사를 소재로 한 그의 벽화가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