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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도시이야기

건축이 도시에게 내어준 길

by urbandesign 2009. 6. 9.


palimpsest [pǽlimpsèst] n. ; 거듭 쓴 양피지의 사본.
먼저 쓴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글을 쓴 양피지(羊皮紙)’를 뜻하는 것이다.

도시와 건축에 대해 고민하던 학창시절, 한참이나 골머리를 싸매고 염두에 두었던 단어이다.
장소성과 그 도시의 컨텍스트(Context)와 관련되는, 적어도 나에게는 지표와도 같은 단어였다.

산업화 시대, 386세대 이전의 기성세대에게 도시란 살기위한 기회의 터전으로, 각 개인의 시간의 궤적 그 자체이다.
노후된 주거지나 특정지역을 재개발, 재건축을 통해 싹 밀어버리고 새롭게 만드는데 익숙해진 우리들로선
다시 한번 새겨보아야 할 분명한 주제이다.

예전에 인사동의 쌈지길을 찾은 적이 있다.



인사동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우리것을 보기위해 종종 찾는 너무나도 대중적인 길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이제껏 도시의 공간을 차지하여 섰던 건축이
이제는 도시에게 길(Promenade, 건축적 산책로)을 내어주기 시작한 건축물이 있었다.



연면적 1299평, 4층 규모의 이 길(?)은 2001년 인사동 터줏대감 격인 금속공예점 ‘아원공방’ 등 12곳의 가게가 철거될 위기에 처하자 쌈지(천호균 사장)에서 이 터를 사들여 만든 것으로 현재 전통공예점, 생활용품점 등 72개 점포가 있다.
인사동의 거리풍경을 ‘오름길(ramp)’을 통해 입체화한 것이다.



이 과정에 있어서 12곳의 가게에서 일부 헐린 옛 건물의 목재와 주춧돌, 간판 등을 다시 가져와 인테리어에 이용되었으며,
옛날 인사동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인사동에 새로운 개념의 복합문화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문화를 살리기도 한 것이지만  옛 길의 공간을 다시 내어준 것이기도 하다. 



입체화된 건물의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쌈지길’이라는 분명한 길 이름을 가진 것은 그것이 가지는 거리풍경(Streetscape) 때문이다.
건물 안의 나선형 길은 늘어 서 있는 거리풍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주인 천호균 사장이 처음 제안한 ‘쌈지공예골목’이라는 건물명은 건축가가 제안한 ‘쌈지길’로 개명되었다.
건축가 최문규 씨(가아건축)는 “쌈지길은 인사동의 멋을 담은 골목길을 나선형으로 연결해 쌓아올린 것으로 길과 길이 이어진 ‘수직적 골목길’ 개념의 개성 있는 건물입니다. 작고 정겨운 가게를 천천히 구경하다보면 어느새 하늘정원이 보이는 옥상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죠.”라고 말하며, ‘쌈지길’이 이름처럼 건물이기보다는 길의 의미, 즉 사람들이 걸으며 만나고 이야기 하며 느끼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며 설계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오름길은 ‘건축적 산책로(Promenade)’라 할 수 있는데, 이 각각의 꺾어진 산책로는 내부로 향해 있는 72개의 상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그 가운데 중정을 통해 하나로 융합된다. 명절에는 문화공연이 펼쳐지고 주말에는 입주자 위주로 야외장터가 생긴다.

저잣거리를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Community) 공간으로 사회적 교류의 장이 되는 길이 건축에게서 제공받은 것이다.

옛 시절 우리네 동네에서 크고 작은 골목길은 아이들에게는 주된 놀이공간이 되고, 청년들에게 완력기 등을 이용한 운동의 공간, 남자 어른들에게는 장기나 바둑을 두는 여가의 공간이 된다.
동네 아줌마들에게는 길에 선채로 대화를 나누는 커뮤니티공간으로서 인근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운동장보다 훨씬 더 많이 이용되는 장(場)이었다.


건물에 길의 개념을 관입함으로서 더욱 비중이 큰 공간으로 전이시켰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도시민들에게 공동체적 개방공간(Community Open Space)은 ‘길’이 아닐까 한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