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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도시이야기

진해 충의동 유곽이야기

by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5. 30.

진해 충의동 유곽이야기

- 진해에 유곽이 있었다는 사실은 문헌을 통해 익히 들었지만, 실제 건물의 존재유무에 대해서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터라 언제가는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했읍니다.

- 얼마전 진해 근대건축 현황조사를 하던중에 충의동에 있는 한 건물이 조사하던 중, 유곽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물을 발견하였읍니다. 마침 할머니가 계셔서 집의 내력을 알아본 결과, 일제시대에 청루라는 유곽이었는데, 해방후 불하를 받아서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읍니다.

- 현재 1층은 주택으로 사용하고, 2층은 애들이 크면 사용할 계획으로, 지금은 비워둔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읍니다. 2층을 꼭 보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공개를 꺼려해 외관 모습만 담아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진해유곽의 역사

- 진해 유곽의 역사는 시가계획에 따라 연작정, 현재의 충의동에 획정되었다고 합니다. 연작정은 진해와 창원을 있는 기차역인 진해역에서 동남쪽으로 10정 정도 떨어진 곳으로 12곳의 유곽이 있었다고 합니다.

- 접대부는 70명 정도였으며, 이 중 50여 명이 일본 구마모토현과 나가사키현의 여성들이었고, 20명은 조선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 이들은 모두 기생과 접대부를 동시에 겸하는 이매감찰로 1시간에 2원, 1박에는 7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요리집의 하루 매상이 6원에서 10원 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 이용대상자는 당시 신시가지 공사와 마천수원지 공사장의 노동자가 2천여명 이상이 됨에 따라 매춘부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유곽을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1930년 '일본유람사'는 아예<전국유곽안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유곽을 관광상품화 하였다고 합니다. 즉 철도역이 있는 곳과 일본인 거류지가 있는 곳이 유곽여행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 당시 진해에 있던 유곽의 이름은 녹도루, 취월루, 금시루, 옥천루, 청천루, 진해루 등이 있었으며, 이러한 유곽은 현재는 모두 개축되어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진해지역 일본인 생활상/ 창원대 김선희 석사논문 에서 발췌

외관모습1 :  4채의 집이 나란히 붙어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나가야 형태를 띠고 있다.

외관모습2 :  각 주호당 1개의 현관을 가지고 있으며, 현관의 개별 수리에 의해 각양각색이지만 2층 판벽에 의한 외벽마감과 창호는 훼손되지 않고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외벽모습 :  2층 지붕과 1층 처마지붕기와는 최근에 보수되어있다.

- 좌측의 집은 1층 외벽마감이 적벽돌로 보수공사를 하여 인접가구와 다른 모습이다.

- 2창호의 덧문이 각각 다른모습이다. 판재, 철판을 오려 붙인 모양이 이채롭다. 2층 상단의 목재가구와 회벽칠(지금은 페인트 마감) 부분은 원형 그대로 이다.

- 2층 외벽은 비늘 목재판벽 마감이 잘 살려져 있으나, 1층 부분은 제각각 적벽돌, 시멘트 모르터, 페인트 마감등으로 되어 있지만, 본래의 원형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 특히 우측에 면한 가구는 2층 목제 창호와 난간살 등이 원형 그대로 인 듯 하다.

왜 근대건축인가?

- 근대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근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유효한 것이 근대건축물이다.

- 유곽건물 하나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주거상황, 건축기술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수 많은 실타래들이 낡은 건물에 숨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