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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8) - 강점기 정리

by 허정도 2014. 1. 27.

강점기 동안 있었던 마산의 도시변화 중 <시가지 확산>에 대한 내용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개항기 원마산의 시가지 범역 규모는 약 0.19㎢였고 이는 1910년 합방기까지 변화가 없었습니다.

1910년대 들어서 경제적 잉여를 목적으로 시행된 남성동의 매립과 구마산․북마산 두 역의 발달로 인해 유통이 활발해지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시가지가 확산되었는데 이미 인근에 자리하고 있던 자연취락까지 연결될 정도의 확산양상을 보여 1930년에는 0.9㎢로 약 470%나 확장되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1920년대 이후부터 확산의 강도와 속도가 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원인은 산업의 발달에 따른 도시인구의 증가와 철도역으로 인한 인근지역과의 교류 때문이었습니다.

확산의 방향은 원마산의 자연적 조건(원마산을 지형적으로 보면 남쪽 신마산 방향은 환주산과 해안선의 거리가 짧아 몽고정 일대가 오목하여 더 확산될 여지가 없었으며 서쪽은 환주산, 동쪽은 바다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말함)과 철도역세권 등의 이유로 북쪽방향으로 폭넓게 확산되었으나 1930년대 이후에는 남쪽의 중앙마산 건설, 동쪽 해안 쪽의 매립, 그리고 서쪽으로는 환주산 저단부까지 주거지로 변하는 등 사방으로 시가지 범역이 강하게 확산되었습니다.

신마산 지역은 조계지의 서쪽 산사면(山斜面)이 미처 개발도 되지 않은 채 개항기에 이미 북쪽으로 시가지가 확산되어 동서축이 좁고 남북축이 긴 형태의 장방형 약 0.64㎢규모로 시가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원인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전하고 그에 따라 일본인이 대량으로 이주해 온 것과 마산 역의 역세권 때문이었지만 이렇게 급성장한 신마산이 1910년 이후 약 10년 동안에 침체기를 맞게 됩니다.

1920년대에는 철도용지가 해제되어 중앙마산지역이 중심가로를 중심으로 세장형 0.11㎢규모의 시가지가 조성되었다가 1930년대 이후에는 중앙마산지역 전체가 시가화 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해안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매립되었으며 그때까지 개발되지 않고 있었던 조계지와 중앙마산지역의 서쪽 산사면(山斜面)의 해발 악45m전후까지 주거지가 확산되어 최상부 말단에 현재의 고운로가 개설되었습니다.

와 같은 과정을 거쳐 1935년경 원마산과 신마산이 서로 맞닿게 되고 도시는 둘에서 하나로 변했습니다.

시가지 외곽경계를 살펴보면 동쪽으로는 매립 후 조성된 해안의 직선 호안이었고 남쪽은 산지까지 맞닿아 현재의 고운로까지 연결되었으며 남쪽은 육군중포병대대 입구(현재의 경남대 정문 일대)까지, 북쪽으로는 회원천 경계주변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회원천을 경계로 이남지역의 가용지는 대부분 시가화 되고 북쪽으로 현재의 석전동․양덕동․합성동은 농지로 남게 되었던 것입니다.

1945년 기준으로 시가지의 규모는 4.37㎢이었는데 이는 최초 원마산의 0.19㎢에 비해 무려 23배에 달하는 면적이며 시가지 형태는 크게 보아 동서축이 좁고 남북축이 긴 대상형(帶狀型)이었습니다.

마산의 시가지가 이와 같은 확산과정을 거치게 된 요인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그 중 시가지 확산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매립은 회사령 폐지 이후 가용지 부족이라는 사회경제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보다 규정적 요인은 자연적 조건이었습니다.

마산은 서쪽으로 무학산록과 동쪽으로 마산만 사이의 세장형으로 좁고 긴 해안평지에 도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장축(長軸)은 해안을 따라 평지로 형성되었으며 단축(短軸)은 사면(斜面)으로서 여러 개의 하천이 서쪽 무학산에서 동쪽인 마산만으로 흘러내리는 지형입니다.

이와 같은 자연조건 때문에 해안에는 무려 폭 70m에서 최고 200m까지의 간석지가 있었으며 심지어 봉암동 지역은 간석지의 폭이 1㎞에 달했는데, 바로 이 간석지가 매립을 촉진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 때 사용한 매립토는 인접한 산사지(山斜地)에서 공급하기도 하여 결과적으로 산이 위치한 방향(西)과 바다가 있는 방향(東)의 시가지 폭이 점점 넓어지는 양상으로 시가지가 확산되었던 것입니다.

시가지 확산의 다른 요인으로 192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 중앙마산 조성을 들 수 있는데 철도용지로 묶여있던 이 중앙마산지역이 시가화 되면서 원마산과 신마산이 연결되었고 이로 인해 시가지가 확산되었던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마산 도시가 그 때까지 두 곳으로 나누어져있었던 원인은 중앙마산지역이 철도용지로 묶여 시가화(市街化)되지 않았던 정책적 요인도 있었지만 위치상 두 도시의 한 가운데인 현 몽고정 부근 일대의 지형이 해안이 깊고 환주산이 돌출하여 지형적으로 병목형태이던 자연적 요인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두 개의 철도 노선과 한 개의 도로까지 지나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도 두 도시가 연담화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요인이 철도용지 해제와 신포동 지역의 0.21㎢에 달하는 대규모 매립이라는 방식으로 동시에 해결되었는데 시기적으로는 1920년대 중반 동시기에 검토․착수되어 10여 년이란 세월을 거쳐 1935년경에 완료된 시점이었습니다.

이 변화는 단지 원마산과 신마산의 시가지 연결이라는 도시의 지형적 측면뿐만 아니라 한국인과 일본인의 공간적 경계완화 및 도시의 지형 변화라고 하는 사실상 마산 도시에 있어서 최대의 변화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산도시의 시가지 확산과정을 축약한 후 시기 별로 나누어 그림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호리(옛 오산리), 즉 용마산 동편 아래쪽인 자유무역지역 정문 앞 일대에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시가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림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