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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11) -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by 허정도 2014. 8. 4.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4 일본정벌의 전진기지, 합포

 

정동의 일이 시급한데 / 농삿일을 누가 생각하랴 / 사자는 끊임없이 이어져 / 동으로 서로 달리네 / 백성을 거두어가니 고을은 텅텅 비고 / 말들은 달려 강가로 향하고 있네 / 밤낮으로 나무베어 /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 한 자의 땅도 갈아놓지 않았으니 / 백성들은 무엇으로 목숨 이어가나 / 집집마다 묵은 양식 없고 / 태반은 벌써 굶주려 우는데 / 하물며 다시 농업마저 잃었으니/ 볼 것은 죽음뿐이로구나

 

위의 시는 원 간섭기를 살았던 수선사(修禪社 오늘의 송광사) 승려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沖止)가 당시 일본정벌로 말미암아 고통 받고 있던 민중의 처지를 동정하며 읊은 것이다.

몽고와의 처절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의 살상과 토지의 황폐화를 가져와 삶의 터전을 잃고이리저리 떠돌고 있던 고려 민중들에게, 일본정벌은 이들을 다시 헤어날 수 없는 파멸의 위기로 몰아 넣고 있었다.

일본정벌은 정복전쟁이라는 민족적, 국가적 사업이기 전에 민중들에게 또다른 고통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고려 충렬왕 즉위년(1274) 103일, 원나라 도원수 홀돈(忽敦)과 고려 도독사 김방경(金方慶)의 지휘하에 4만의 군사가 900척의 전함에 나눠 타고 합포항을 출발하여 대마도로 향하고 있었다. 일본정벌에 나선 여원(麗元) 연합군의 우렁찬 항진이었다.

이제까지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기만 했던 고려가 비록 원나라의 강요때문이기는 하였지만, 원정이라는 시험대에 오르고있었던것이다.

 

-합포, 고려의 군사항으로 떠오르다-

일본정벌이 시작되면서 오늘의 마산, 곧 합포(合浦)는 그 전진기지로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조그마한 항구였던 합포가 제국을 건설하려는 몽고의 의도에 따라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고려시대 합포는 오늘날 김해지방인 금주(金州)의 속읍이었다. 신라때 골포현(骨浦縣)이라 하여 오늘날 창원의 속읍이었던 합포는 고려에 들어와서 김해의 속읍이 되었고 뒤에 가서야 감무가 파견되는 정도였다.

몽고와의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원의 지배가 시작될 무렵 합포는 이에 저항하는 삼별초 항쟁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원종 12년(1271) 2월에 삼별초가 합포에 출몰하여 감무(監務)를 생포해 갔으며, 원종 13년(1272) 11월에는 다시 합포를 공격하여 전함 22척을 불사르고 몽고의 봉졸(烽卒) 4명을 생포하여 돌아갔다.

원종14년(1273) 1월에 다시 합포를 공략한 삼별초는 전함 32을 소각하고 몽고병사 10여명을 잡아 죽였다.

이같이 삼별초가 세 차례나 합포를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남해안 연안 고을이 그 영향권에 들어갔고 주민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합포가 일본정벌의 전진기지로서 역할한 것은 그 입지조건 때문이었다.

합포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남해안에서 항구로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몇 안되는 고장이었다. 이곳은 포구가 길고 거제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태풍의 영향을 덜 받는 천연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진(鎭)이 설치되어 있었는 데다, 일본과의 직선거리도 짧았기 때문에 발진기지로서 활용하기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조류를 감안할 때, 합포에서 출발하여 거제(巨濟)를 거쳐 대마도-일본 본토로 들어가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이 때문에 정벌이 있기 전, 일본을 초유(招諭)하기 위한 사신들도 이 길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게다가 합포에는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조창(漕倉)이 있어서 인근 지역의 조세가 일단 이곳으로 수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량의 확보에도 다른 연안지역보다는 훨씬 유리하였다.

이러한 조건들 때문에 합포를 일본정벌의 전진기지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조운로와 조창>

 

-일본 정벌의 험난한 길-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은 두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다. 충렬왕 즉위년(1274)의 제1차정벌과 충렬왕 7년(1281)의 제2차정벌이 그것이다.

대제국을 건설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는 정벌에 앞서 여러차례 일본을 설득하여 무력사용없이 종속시키고자 하였다. 회유를 위한 사신을 자주 파견했던 것은 이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원종11년(1270) 경부터 정벌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흑산도를 비롯한 고려의 연해지역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형을 정찰하기도 하고, 김해지방 등 10여 곳에 둔전경략사(屯田經略司)를 설치하여 군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고려정부에게 군량을 보조하도록 하고 전함의 건조를 독촉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충렬왕 즉위년(1274) 103일 여몽연합군은 일본정벌을 시작하였다. 본래 이 해 7월에 출격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5월에 이미 연합군이 합포에 집결해 있었다. 그러나 원종이 6월에 사망함으로써 연기되었다가 장례를 마치고 이때에 정벌을 시작한 것이다.

1차정벌에 동원된 여몽연합군은 군사 약 4만, 전함 90척이었다. 군사는 고려에 주둔해 있던 몽고군과 요동 및 한반도 북부출신으로 몽고에 귀부한 군인으로 구성된 몽한군(蒙漢軍) 25천명, 고려 군사 8천명, 뱃사공 67백명 정도였다.

지휘부는 원나라 홀돈(忽敦)이 도원수, 홍다구((洪茶丘)가 우부원수, 유복형(劉復亨)이 좌부원수였고, 고려의 김방경(金方慶)이 도독사, 김신(金侁)이 좌군사, 김문비(金文庇)가 우군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103일 합포항을 출발한 연합군은 거제도를 거쳐 5일 밤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서해안 사스우라[佐須浦]로부터 공격을 개시, 대마도를 정벌한 뒤 14일에는 이키도[壹岐島]를 쳐서 그 성을 함락하였다.

다시 북구주의 다자이부[太宰府]를 공략하기 위해 히젠[肥前]의 마쓰우라[松浦]를 짓밟고, 19일 하카타만[博多灣]으로 들어가 20일 미명에 하카타·하코사키[箱崎]·이마쓰[今津] 등지에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군세를 규합해 연합군에 대항했으나 공성(攻城)과 야전에 능숙하고 화기를 사용하는 연합군의 적수가 되지못하였다.

그런데 하루만인 21일 연합군의 선단이 하카타만에서 사라졌다. 여원연합군이 철수를 시작한 것이다. 마침 태풍이 불어 연합군은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었으며, 좌군사 김신이 물에 빠져 죽는 등 막대한 손실을 입고 합포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때 돌아오지 못한 자가 절반이 넘는 13500명이나 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1차정벌을 일본에서는‘문영(文永)의 역(役)’이라 부르고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부르며 추앙하고 있다.

                                             <여원연합군의 일본공격 루트>

 

1차 일본원정이 이렇게 실패로 끝났음에도 원 세조는 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충렬왕 2년(1276) 예부시랑 두세충(杜世忠)을 일본에 선유사(宣諭使)로 파견하는 한편, 전쟁준비를 계속지시하였다.

충렬왕 5년(1279) 남송을 완전히 정복하여 어느 정도 여력을 갖추게 되자 다시 일본정벌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탐라(耽羅)에 목마장을 두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정동행성(征東行書省)을 고려에 설치하였다.

한편, 일본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국서(國書)를 전했으나 그 사신들이 모두 살해되었다.

이에 원나라는 충렬왕 7년(1281) 제2차 일본정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여원연합군은  동로군(東路軍)·강남군(江南軍)의 양군으로 편성되어 동로군은 합포에서 출발하고, 강남군은 중국의 명주(明州)·정해(定海) 등 강남에서 출발하였다.

동로군은여·원연합으로 편성되어 총병4만명에 전함 9백척이었다. 그 중 원나라가 3만명, 고려가 1만명이었으며 전함과 사공 15천명, 군량 11만석, 무기 등은 고려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강남군은 총병력 약10만 명에 함선 약3,500척이었다.

동로군은 제1차 때와 같이 김방경과 홀돈의 지휘하에 512일 합포를 출발, 거제도에 15일 정도 대기하여 있다가 526일 대마도에 도착한 후, 이키도를 비롯해 구주 연안의 모든 섬을 공략하고 하카타만을 향해 공격하였다.

출발이 늦어진 강남군은 원장(元將) 범문호(范文虎)의 지휘하에 강남을 출발, 구주 연안의 오도(應島)에서 동로군과 합세하고, 다자이부를 향해 공격하였다.

그러나 730일 저녁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하여 밤중이 되자 폭풍우가 일면서 다음날인 윤 71일 하루 내내 폭풍우가 밀어닥쳐 연합군을 강타하였다.

2차원정도 다시 태풍을 만나 인명과 전함에 막대한 손실을 입고 실패로 끝나고 있었다.당시 북구주의 해안에는 파괴된 선박과 익사한 시체가 겹겹이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원사』일본전에는 10만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3명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는 원정에 나갔다 돌아오지 못한 자가 무려 10만 명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어 각각 막대한 인명의 손실을 입었음을 말하고 있다.

                 <당시 몽고군에 의한 우물이라고 알려진 마산 자산동의 몽고정 표지석>

 

-정벌이 드리운 그림자-

두차례에 걸친 일본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조는 여전히 일본정벌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김해지방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를 설치하고, 고려에 전함과 군량을 준비하게 하며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동태를 살피는 등 제3차 정벌을 준비하였다.

그런데 당시 원나라에서는 내안(乃顔)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고려에는 내안의 무리인 합단(哈丹)이 만주에서 동계(東界)로 침입해 철령을 넘어 양근(楊根: 지금의 경기도 양평)을 휩쓸고 충청도까지 남하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강화로 피난하는 한편, 원나라에 원병을 청해 여원연합군으로 연기(燕岐)에서 그들을 크게 무찔러 몰아냈다.

이렇게 원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고려에는 합단이 침입해 사태가 복잡해진데다가 세조가 죽음으로써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정벌은 어느 쪽의 승리도 없이 원, 고려, 일본 모두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시도한 것은 여러가지 목적이 있었다. 우선 세계 대제국 건설이라는 국가 목표를 실현하자는 것이었고, 고려와 일본 모두를 견제·약화시키면서 동아시아 사회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벌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세계제국 건설이라는 목표와 위신에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고려는 주도적으로 정벌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고려 역사상 최초의 원정이었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때 국가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패로 끝남으로써 오히려 인명의 살상과 경제적 피해를 당해야만 했다.

게다가 정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전함의 건조, 군량 확보에 따른재정적 부담을 안아야했다. 물론이 모든 것은 민중의부담으로돌아오는것이었다.

일본은 여원연합군의 대함대를 막아냄으로써 일단 원에 의한 종속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더욱이 두 차례의 전쟁이 모두 태풍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신풍(神風)’의 가호를 받는 나라로 이미지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마도의 경우가 더 심했다. 연합군이 들이닥쳤을 때 보이는 사람은 모두 타살되었다 하며, 처자를 이끌고 산 속으로 도망가 숨으면서 어린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게 목졸라 죽여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오늘의 마산, 곧 합포는 일본정벌 기간 동안 군사도시의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함 건조 등 요즘으로 치면 군수업체가 생겨났을 것이고, 이곳 저곳에 군사시설이 들어섰을 것이다.

게다가 각지에서 들어오는 군량이 집산되어 시장의 활성화를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더욱이 정벌을 독려하기 위하여 충렬왕이 행차하기까지 했으니 마치 임시수도와 같은 규모였을 것이다.

정벌이 끝난 후 정부에서 합포를 회원(會原)으로 고치고 현령을 파견한 것도 그 공로를 인정해서였다. 그러나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나 지금이나 국왕, 고급관료, 장수들의 왕래가 결코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합포를 비롯하여 인근지역은 정벌준비에 쉽게 동원되어 가혹하게 조세를 부담하고 노동력을 징발당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원감국사 충지는 일본정벌로 고난의 길을 걷고 있던 영남지방 민중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영남의 쓰라린 모습 / 말로 하려니 눈물이 앞서네 / 두 도에서는 군량을 바치고 / 세 산에서는 전함을 만드느라 / 세금은 백배나 늘었고 / 역역은 삼년에 걸쳐 / 징발은 성화같이 급하고 / 호령은 우레같이 전하네 / … /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네 / 저승과 이승은 다르건만 / 목숨 보전을 어찌 기약하랴 /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 뿐 / 억지로 살려니 얼마나 고달프랴 / 고을마다 반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모두 황폐한 토지로다.<<<

김광철 /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