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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 (12) - 임진왜란으로 비롯된 창원대도호부

by 허정도 2014. 8. 11.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5 임진왜란으로 비롯된 창원대도호부

1960년대 이래 비교적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온 임진왜란에 대한 최근의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하나는 전쟁의 승패논쟁인데 명과 일본측의 기존연구는 대체로 자국의 승전에 초점을 두고 전개되었으며 조선에서는 패전관이 우세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국에서 승전론이 우세해지는반면, 일본측의 연구자들이 패배한 전쟁으로 평가하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특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하나는 전쟁발발 원인과 관련한 성격 및 명칭에 대한 문제이다. 대부분 임진왜란을‘국가적인 규모의 왜구’들에 의한 약탈전쟁으로 보아 ‘임진왜란’ 혹은 ‘임진왜화(壬辰倭禍)’로 표현해 왔다.

이러한 입장의 이면에는 성리학적 사상을 지닌 조선관료들의 중국중심의 세계관이 내재되어있다. 중국의 명나라가 중화이고 조선은 소중화였으므로, 일본의 조선침입은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전쟁이었으므로 ‘왜란’이라 규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탈피한다면 국가간의 전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일전쟁’ 내지는 ‘7년전쟁’ 등의 명칭을 고려해볼 수 있다.

임란의 초기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전쟁발발 이듬해인 선조 26년(1593) 11월에 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국측의 사신이 파견되어 왔을 때 영의정 등이 왕에게 올린 보고문이 주목된다.

중국에 보내기 위하여 작성된 이 보고문은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전황에 대한 허위나 가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의하면, 왜란이 발생되기 1년 전인 선조24년 여름에 일본에서 승려 현소(玄蘇)를 파견하여 무례한 외교문서를 전달한 일이 있었다.

그 후 선조 25년(1592) 3월에 대마도의 추장 평의지(平義智)의 배가 부산에 정박하였는데 첨사에게 전달한 글 속에는 길을 빌린다는 따위의 말이 있어 이들을 변경에서 모두 쫓아내게 하였다.

그 후 413일에 적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고, 첨사 정발(鄭撥)·부사 송상현(宋象賢)·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 이하 수만여명이 전사하였다.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성 밖에서 왜적과 교전하였으나 대패하였다.

흩어진 군졸을 수습하여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로서 충주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수비하였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포위하였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자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강에 빠져 강물이 흐르지 못할 지경이었다.

충주를 잃으면 서울을 지킬 수가 없는 상황인데 신립과 이일이 많은 병력을 이끌고 험로를 방어하고 있었으므로 승전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자 선조는 전황이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

개전초기의 상황은 파죽지세와 같이 왜적의 일방적인 승리로 전개되고 있었으며 국내의 희생 또한 컸다.

이런 상황에서 왜구는 거의 전국을 유린하게 된다. 그러나 다행히 명의 원군과 국내의 경상 우도를 중심으로 한 의병들의 분전에 힘입어 사직을 지탱해 갈 수 있었다.

국가의 비상사태 속에서 의병운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경상남도의 지역적 특성 속에는 왜란 발생 약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명 조식(아래 그림)의 삶과 그 사상적 감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점은 당시 의병장들의 대부분이 남명의 제자들이었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즉 창원·마산을 포함하는 경남권에서 왜적과 맞서 끝까지 싸우며 국가와 민족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들의 고귀한 희생 속에서 이 지역의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며 그 이면에는 16세기 남명 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지역의 역사적, 인문적 환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치열 했던 전쟁터-

부산에 상륙한 왜적은 3로(路)로 나누어, 고니시(小西行長)는 중로, 가토(加藤淸正)는 동로, 구로다(黑田長政)는 서쪽으로 진격해 왔다.

이후약 7년간 조선 8도는 거의 전장화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경상도는 더욱 심하였다.

전쟁발발 2년경, 경상도에 적이 있는 곳은 울산의 서생포와 동래·부산·양산·김해·웅천·창원 등으로 주로 해안선에 집중해 있었다.

조선의 군사들이 왜적과 전투하다가 함안과 진주 사이에서 전사한 자가 무려 수만여명에 달하였고 왜적은 경상 좌도와 우도에 걸쳐 그 적세가 수백리에 뻗쳐 약탈을 자행하는 지경이었다.

창원지역을 내습한 왜적은 구로다의 제3군 휘하의 병력이었으며 김해와 창원·진주를 공략하였다.

마산은 고려 충렬왕 때 ‘합포’를 ‘회원’으로 개칭한 이래 조선건국 이후에도 회원현으로 존재하였으며 태종때 의창현과 회원현을 통합하여 창원부로 승격시켰다.

당시 마산은 창원도호부(都護府)에 속하여 창원의 한 구역이었다. 이 지역의 특성과 연관하여 임란기 항전 사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노현(露峴) 및 창원성 전투 :

부산을 떠난 왜적은 김해성을 함락한 후 약 2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선조 25924일 서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상우병사 유숭인(柳崇仁)은 약 2천여명을 거느리고 창원성에 있다가 이러한 보고를 접하고 출동하여 노현일대(창원시 동읍 신방리 서쪽 고지)에 포진하였다.

24일 오후부터 적의 척후병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25일 오10시경부터는 총포를 쏘면서 포위작전으로 진격해 왔다.

아군과 적의 병력차가 많았으므로 진지를 고수할 도리가 없음을 판단하고 창원성안으로 들어와 수비하였다.

그날 밤 늦은 시각에 적병들이 성안으로 난입하여 상호 교전하였다. 그러나 창원성은 점령당하였고 왜적은 창원과 함안에 주둔하면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면서 진주성을 포위, 공격코자 하였다. 창원성은 왜적들이 서진하는데 있어 우선적으로 공격과 점령의 대상이 된 곳이었다.

의병장 최강(崔堈)이 분전한 안민고개 전투 :

전쟁이 발발한 지 1년여가 지난 선조 269월 하순경에 창원에 주둔하고 있던 고니시의 막료가 지휘하는 일부 병력은 함안방면에 나와 지역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농작물을 약탈하고 있었다.

의령현에 있던 전라병사(兵使) 선거이(宣居怡)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출동하였으나 대패하였다. 고성에 있던 의병장 최강이 관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이동중 안민고개에서 왜적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왜적의 기습으로 적의 포위망에 걸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최강은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적을 공격하니 왜군은 일시 후퇴하였다. 그 틈을 이용하여 포위된 군사들을 이끌고 일시 후퇴하는 왜적들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합포해전 :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연합함대는 선조 25년 57일 옥포 앞바다에서의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적의 함선 26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린 뒤 거제 장목 해상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날 오후 4시경 장목에서 멀지않은 해상에 왜군의 함선 5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추격을 시작하여 합포앞(마산시 내서면 산호리)바다에서 교전하다가 적의 대형함선 4척과 소형선 1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안골포해전 :

선조 25년 7월, 한산도해전에서 우리측에 대패하여 패주하던 왜군 함선과 부산포에서 지원, 증파된 왜군의 증원함선을 우리측의 연합함대가 웅천만에서 섬멸시킨 해전이다.

40여척의 왜의 함대가 안골포에 집결해있다는 적정을 탐지하고 710일 새벽 이순신의 함선 40척·원균의 함선 7척·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선25척 등 모두 72척의 연합함대를 편성하여 안골포로 진격하여 왜함들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는 10일 하루종일 계속되었으며 해질 무렵 왜군전함 20여척을 격파하는 전과를올리게 된다.

한편 임란기 왜적은 전쟁 장기화의 방편으로 남해안권에 성(城)을 수축 또는 축성하였는데 지금 마산 산호동의 용마산에 있는 왜성도 그 하나의 흔적이다.

<진해 안골포>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하지 않았다-

전후 7년간의 전쟁의 참상과 비극속에서도 외침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존과 자주의식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외세를 격퇴한 불굴의 저항의식과 희생정신은 이 지역의 전통 속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특히 임란기를 통하여 경남지역의 의병항쟁이 가장 활발하였으며 그 성과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장기간의 전쟁의 와중에서도 이 지역사람들은 거의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한 사람이 없어 왜란후 창원을 행정과 군사상 요충지인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는 사실에서도 그 전통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내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6세기 일본은 각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大名]들이 실질적인 독립세력으로서 서로 경쟁하던 전국(戰國)시대였다.

이 혼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각지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며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도요토미는 이 다이묘들에게 배분할 새로운 영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국내 불만세력을 전쟁에 참여시켜 힘을 소모하도록 하는 것도 도요토미의 계책이었다. 대외교역의 확대를 원하는 일본 상공업자들의 요구도 전쟁의 한 원인이었다.

전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커다란 피해를 입은 것은 조선 내부상황에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건국 이후 약 200년만에 발생한 이 전쟁은 발 1세기전으로 되돌아가 보면 본격적인 사림의 중앙정계 진출속에서 연산군 4년 이후 사화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사화가 종결되는 시점에서는 사림세력 내의 자체분열현상이 있었다. 즉 선조 8년 동·서 분당을 기점으로 이후 300여년간 이른바 붕당의 정쟁이 주로 남인중의 경남(京南)과 서인 내의 노론계와의 사이에서 권력장악을 위한 다툼이 치열하게 지속되는 것이다.

관료들 상호간의 정쟁이 지속되면서 국력의 내실을 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국가의 역량이 쇠퇴해 가고 실천보다는 관념론적인 성리학의 이론과 예학에 치중하게 된다.

그 결과 임진년의 왜란과 같은 참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정쟁의 와중에서, 전쟁의 참화 속에서 그 피해와 부담은 거의 대부분 국가와 일반 민들에게 전가되고 있었다. 일반 민들의 처지는 18세기 이후 항쟁의 형태로 구체화되고 있었으며, 19세기에 들어 본격적으로 전국적인 농민항쟁으로 치닫게 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반추해 보면서, 국가를 대표하는 자와 국가경영에 참여하는 관료들의 책임의식을 촉구하지 않을수없다.

‘임진왜란’이 4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는 역사의 교훈성은 이런 측면에서도 읽어질 수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16세기의 시대성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던 창원·마산 지역을 포괄하는 경남의 의병항쟁과 그 사상은 꺼지지 않는 역사의 빛이 될 것이다.<<<

최정용 / 당시 창원대학교 사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