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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진 도시이야기

추석에 산호동 효자각을 찾아갔습니다

by 허정도 2009. 10. 6.

<추석에 산호동 효자각을 찾아갔습니다>


팀 블로거인 건축사 신삼호 씨의 권유에 따라 추석에 마산 산호동 용마산 기슭에 있는 효자각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역사학자 유장근 교수와 지역사에 밝은 박영주 선생이 동행했고 신삼호 건축사도 함께 했습니다.

2009/09/29 - [도시 이야기] - 추석엔 산호공원 옆 효자비 한 번 둘러보세요

자동차에 내리는 순간 우리 일행은 비각 처마를 받치고 있는 공포의 현란함에 놀랐습니다.

이미 신삼호 건축사의 글과 사진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는 감동과 놀라움에 전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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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비각의 건축적 가치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신삼호 건축사에게 맡기고 저는 비각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 효자비의 주인공인 그 효자는?-

한문에 능통한 유장근 교수가 읽어 내린 비문과 각기(閣記)에 의하면,
이 효자각은 일제시기였던 1927년에 건립하였으며 두 개의 비석에 새겨진 김해 김씨 선문(善文)과 중여(重呂)는 부자지간으로 현종(재위 1659-1674)기와 숙종(재위 1674-1720)기를 살다간 분이었습니다.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며 완월리(현 완월동)에 묻혔다는 걸로 보아 대대로 마산에서 살았던 분인 것 같았습니다.

선문(善文) 씨는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자 원인을 알기 위해 어머니의 똥을 먹어보기도 하고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로 어머니를 살려낼 정도로 효심이 극진한 분이었습니다.

비석의 주인공과 비각을 세운 이 사이에는 200여 년의 시차가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일제시기에 크게 성공한 어느 집안에서 선조의 덕을 기리면서 가문을 은근히 내세우기 위한 정려각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 성행했던 일로, 전국적으로 약 1,500개소 이상 건립되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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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각이라 적힌 비각의 현판>



비각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중 이웃에 사는 통장 아주머니를 만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일행을 보고 비각으로 올라온 통장 아주머니는

“비각을 관리하는 자손이 창원에 살고 있는데 가끔 비각에 찾아온다”
“명함 받아 놓은 것이 있으니 나중에 전화번호를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답사를 마치고 저녁식사 자리로 이동하던 중,
통장 아주머니가 비각을 관리하는 분의 전화번호를 알려 왔습니다.
이름이 '김기석'이라고 했으며 나이는 나와 비슷해보였다고 했습니다.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바로 전화를 했더니 현재 창원에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분과의 통화 후 여러 경로를 통해 산호동 효자각에 얽힌 내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비각은 원래 석전동 삼거리(현 석전사거리)에 있던 큰 은행나무 옆에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집과 멀지 않은 곳이어서 그 은행나무와 비각을 자주 본 탓에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1975년에 회산다리에서 석전동으로 가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산호동으로 이축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축할 때 건물을 완전히 해체한 후 다시 조립했는데 해체한 분량이 작은 트럭으로 열대 정도의 분량이었으며, 지붕부분 해체가 안 되어 경주불국사에서 전문가 한 분이 내려와 해체를 도왔다고 했습니다.

김기석 씨의 말에 의하면,

비각을 건립한 이는 자신의 조부님들인데 일제기 마산 어시장에서 사업으로 큰돈을 번 김두영, 한영, 기영, 준영 네 형제였다고 합니다.

전화통화에서 ‘어시장’과 ‘준영’이란 말이 나오자 함께 앉았던 박영주 씨가

“오래 전에 김준영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상공회의소 초대회장이었으며 마산 어시장의 마지막 객주였던 분이다. 혹시 그 분 아닐까?” 라고 했습니다.

확인하고 싶어서 즉각 마산상공회의소 윤종수 부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준영이란 함자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찾아보겠다”고 하면서 밤에 이메일로 알려왔습니다.

- 해방 후 마산상공회의소 초대회장 김준영 -

지금의 마산상공회의소는 1900년에 발족한 ‘마산상호회’가 기원입니다.

해방이 되자 마산상공계 유지들은 일본인이 장악 주도하던 경상남도 상공경제회 마산지부를 접수하고, 해방직후인 9월5일 마산상공경제회로 조직 개편을 서둘렀습니다.

마산상공경제회는 김준영, 손성수(전 마산시장), 김종신(마산MBC사장), 이만희 등이 발기하여 10월5일 창립총회를 가졌습니다.
마산의 상공업자 1,348명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의원57명을 선출한 후 회두(지금의 회장)에 김준영, 부회두에 손성수를 선임하여 발족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준영 선생은 마산상공회의소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1946년까지 회장을 지냈으니 사실상 일제 후 우리 자력으로 설립한 마산상공회의소의 초대 회장인 셈입니다.

거기다가 네 형제 중 둘째인 김한영 선생은 1940년 12월 1일에 17명의 해산물 도매업자들이 자본금 13만 엔을 투자해 합동으로 설립한 마산해산주식회사의 사장이었으며 앞의 김준영 선생이 전무이사를 맡기도 했습니다.

- 전설적인 무용가 김해랑 -

김기석 씨의 친조부인 맏형 김두영 선생은 어시장에서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했다는 것 외에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김두영 선생은 바로 본명이 김재우(金在宇)인 마산출신의 전설적인 무용가 김해랑(1915-1969) 선생의 부친이었습니다.

김해랑 선생은 일본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현대무용과 고전무용을 두루 섭렵한 한국근대무용 1세대입니다.

우리나라 신무용 70년사를 뒤적이다 보면 빼놓을 수 없는 분으로, 6.25동란 직후 한국무용 예술인협회(현 한국무용협회 전신)를 창설하여 초대이사장과 회장을 지낸 한국무용계의 대들보였던 분입니다.

마산지역 혹은 전국적으로 그의 예술에 관한 연구발표와 추모공연도 많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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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문예회관에서 열린 김해랑 추모공연 포스터>


그는 일제시기부터 마산에 무용소를 개설해 평생 마산에서 후진양성을 했으며 돌아가신 후에는 마산시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던 분입니다.

한 기록을 보니 그에 관한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누구나 춥고 배고팠던 시절 어려웠던 상황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내 이갑선씨 사이에 1남 1녀(기석, 영선)를 두었던 김해랑은 춤을 사랑한 춤꾼이었을 뿐.........’

내가 통화한 분은 여기에 나오는 ‘기석’ 씨였습니다.

추석 지난 다음 날,

한 비각을 통해 밝혀진 마산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효자비의 주인공들이 묻힌 완월동 무덤들은 마산고등학교에 편입되었다는 이야기와 선조들이 만날재 아래 월영리(현 월영동)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얼핏얼핏 해주는 김기석 씨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치 먼 나라에서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