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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 (24) -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by 허정도 2014. 11. 3.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7 「아이들에게 희망을」, 이원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땅에 사는 사람이면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불러 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노랫말을 쓴 사람이 동원 이원수다.

그는 15세 되던 해 방정환이 내던 잡지『어린이』에 <고향의 봄>이 당선된 후 71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옥같은 작품을 수도 없이 남겼다.

동요, 동시, 동화, 소년소설, 아동극, 수필, 시, 아동문학 평론 등 모두 800편의 방대한 작품을 남겨 아동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의 문학은 늘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하였고, 우주 만물의 모든 사물을 소재로 삼으면서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념의 갈등으로 희생되고 서로를 죽였던 처참한 전쟁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우리 겨레의 삶, 외세에 의한 고난 등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한가운데서 어린이와 함께 호흡했다.

또한 부정한 사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목소리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어린이 문학이 현실을 떠나 알록달록한 모습만 그리는 관념적인 이야기들이 난무할 때도 이원수는 늘 아이들이 처한 현실에 주목하면서 아이들 곁을 떠나지 않았다.

 

-민족 수난의 가운데에서-

이원수는 1911년 경남 양산 북정동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1년 뒤 창원으로 이사 와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흘러가는세월속에」, 1980)

 

1920년 마산으로 이사를 간 다음 해에 바로 마산 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신식 공부를 하게 되면서『어린이』와『신소년』을 애독하기 시작했다.

<고향의 봄>으로 아동문학에 입문하던 그 무렵 이원수는 ‘신화 소년회’에 가입하고 민족의 현실에 눈뜨게 된다.

이 소년회의 정신은 그의 자전적 소년소설 <오월의노래>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비록 나라를 빼앗겼다 할지라도 죽는 날까지 조선 사람으로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리 말을 쓰고 우리 혼을 단단히 가져야 한다고, 우리 소년회에서는 늘 서로 말하고 생각하고 해온 것이다. 

 

이원수는 1927년 마산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한다.

1939년 지은 시 <고향바다>에서 확인되듯이〈고향의 봄〉창원과 더불어 마산은 그에게 정신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사회운동의 분위기가 강했던 마산에서 이원수가 소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며 소년회 활동을 한 사실은 이후 그의 문학에 짙게 배인 현실성을 설명해 주는 요소가 된다.

1930년 마산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함안 금융조합에 취직을 한다. 이곳에서 이원수는 일본 사람들에게 착취당하고 굶주리는 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알게 되는데, 그의 시 <여항산>을 읽으면 짐작할 수가 있다.

함안에서 독서회에 참가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학에 대해 배우고 농촌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려 했다.

그러나‘함안 독서회’는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1935년 회원 6명이 모두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독서회에 카프 중앙위원이 끼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이원수는 프로문학에 강한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언도 받게 된다.

19361월 출옥한 그는 3개월 후 수원에 있는 최순애(『어린이』에 <오빠생각>, <가을>을 발표한 동시 작가)와 마산 산호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린다. 산의 한약방 서기로 일하다 이듬해 함안 금융조합에 복직되어 함안에서 살게된다.

1945년 해방은 국민 모두에게 환희였으나 식민지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남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했으며, 그들은 한반도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자주적인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국민들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좌우익의 정치적 충돌은 극심했다. 이러한 상황은 문학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원수도 당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흐름을 이어 받은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다.

이원수는 종래의 동요, 동시 쓰기와 함께 1947년부터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면서 이전보다 더 치열하게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동시대의 작가들이 동심천사주의적인 노랫말이나 이념의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을 때 혼란과 격동기를 살아가는 아이들과 사회의 모습을 그리기에 운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산문으로 전환하여 동화와 소년소설을 발표한다.

압제자는 갔으나 감시자가 더 많아진 조국의, 자리 잡혀지지 않은 질서 위에 이욕에 눈이 시뻘개진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노예근성을 가진 벼락장군처럼 사방에서 큰소리들을 치고, 또 권세와 재물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 이런 동시로써 내 가슴이 후련해질 까닭이 없었다. 동화를 쓰자. 소설을 쓰자. 그런 것으로 내 심중의 생각을 토로해 보자는 속셈이었다. 쫓겨가는 외인에게 주먹을 들어보이며 욕을 하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외인에게는 허리를 굽혀 환영을 한다. 외인의 것이면 물자건 풍습이건 즐겨 받는다. - 이런 세상이 싫었다. (나의 문학 나의 청춘」, 1974)

 

이원수의 첫 장편동화인 <숲 속 나라>(1949)는 당시의 현실을 바탕으로 돈과 권력을 배제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나라로, 이원수가 그리는 이상적인 인간사회를 그린 판타지 작품이다.

이 작품의 사상적 토대는 “자주적 독립, 민족의 눈을 속이는 경제적 침략 등을 경계하는정신” (「아동문학프롬나이드」)이었다.

일제식민지시대를 마감하고 자유와 민주의 나라를 세워 우리 뜻대로 살아볼 희망과 꿈에 부풀어있던 우리 민족은 1950년 민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을 겪게 된다.

이원수는 1·4후퇴 때 3녀 영옥과 3남 용화를 잃게 된다. 그에게 전쟁은 고아들, 굶주림, 이별 등 온갖 고통의 원인이었으며, 세상에서 부정되어야할 모든 것들의 집합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전쟁의 참상은 작품의 중심소재가되었고, 평화를 열망했던 그의 정신이 작품 곳곳을 가득 메웠다.

19604·19겪으면서 이원수는 정치와 사회문제, 분단과 실향의 문제, 무분별한 문명수용에 대한 비판과 고발정신을 담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면서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염원했다.

<'고향의 봄' 가사에서 '울긋불긋 꽃대궐'로 묘사된 근대조각의 선구자 김종영 생가 / 창원시 의창구 소답동 현존>

 

-죽는 순간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최근 이원수의 친일작품이 발견되었다.

조선금융연합조합회의 국책 기관지인『반도의 빛』이라는 월간 잡지 428월호에 <지원병을 보내며>라는 친일 시를 비롯하여 몇 편의 친일 글을 남겼던 것이다.

친일글을 쓰게 되었던 당시 상황의 변명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그의 처지를 글로 남기기도했다.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그런데 이듬해인 일천 구백 삼십 칠년에 나는 함안 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되었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형을 받은 사람을 써줄 턱이 없는 시절이었건만 그 곳의 이사 김정완 씨는 우선 임시 직원으로라도 오라고 했던 것이다. … 일본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세상 살기가 날로 어려워져 갔다. … 정말 막막한 시대였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일본의 노예로 사는 것만이 가장 정당하고 옳은 것 같은 시대였다. …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친일분자의 하나로 보였을 지도 모르고. (<털어 놓고 하는 말>,1980)

 

일제시기를 살았던 대부분의 문인들처럼 그도 일제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고통스러웠다 하더라도 친일글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 만이라도 ‘친일분자로 보였을지도 모르고’가 아니라 진정한 참회의 글을 남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원수가 태어난 1911년부터 세상을 떠난 1981년까지 우리 나라는 격랑의 세월이었다.일제식민지, 해방, 6·25 전쟁, 분단, 4·19, 5·16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극심한 물리적, 정신적 수난은 그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 장년, 노년에 이르기까지 온몸으로 고스란히 겪어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작품에 짙게 녹아 들어있다.

1981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용인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지막 병상에서도 이원수는 정신을 꼿꼿이 해서 갱지 위에 글을 썼다. <때묻은 눈이 눈물 지을 때>(1981)와 <겨울 물오리>(1981)는 눈앞에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그의 심경을 짐작케 한다.

이원수는 스스로 때묻은 눈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어린이를 감싸고, 목을 축여 활짝 피어나게 하는 때 묻은 눈이기를 바란 것이다.

이원수의 호는 ‘동원(冬園)’으로 스스로 겨울들판이 되려고 하였다. 그것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태어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힘겹게 살아온 그의 삶과 관련이 있다.

추운 겨울 들판에 서있는 겨울나무와 같이 수많은 고비를 넘기면서 꿋꿋하게 쓰러지지 않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아이들 편에서 글을 쓰려 했다.

죽어가면서도 그 자세 그대로‘겨울 물오리’가 되어 죽어간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넘쳐 있었던 것이다.<<<

박종순 / 당시 진주교육대학교 강사. 아동문학 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