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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 (25) - 문화권력, 이은상

by 허정도 2014. 11. 10.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8  문화권력, 이은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고향생각>, 1923년)

봄처녀 오시누나 새 풀옷을 입으셨네 / 하얀구름 너울쓰고 구슬신을 신으셨네 / 꽃다발 가슴에 안고 누굴 찾아 오시는고. (<봄처녀>, 1925년)

내 고향 남쪽바다 /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 꿈엔들 잊으리요 / 그 잔잔한 고향바다 / 지금도 / 그 물새들 날으리 / 가고파라 가고파. (<가고파>, 1932년)

 

앞의 두 노래는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우리에게 친숙한 곡이고, 마지막 노래는 우리 국민들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다. 이 노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이은상이다.

<가고파>가 국민들이 애창하고 또 마산을 상징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지면서 이은상은 마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노산 이은상 (1903~1982)>

 

-노산, 그는?- 

노산 이은상은 19031022에 마산에서 교육가 이승규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부친이 관계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한다. 창신학교 시절 그는 안확(자산)의 민족주의와 국학에 대한 연구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는다.

1923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부와 동양문고에서 사학과 국문학을 공부한 후 귀국한다.

1928년 마산에 돌아와 고향의 노비산(鷺飛山)에 올라 시조 한 편을 쓴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 예 섰던그 큰 소나무 베허지고 없구려 (<옛동산에올라>, 1928)

 

이은상은 고향의 산인 노비산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노산’으로 짓는다.

그는 1929년 월간잡지『신생』의 편집장을 한 후, 1931년-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조선일보사에서 발행되는『조광(朝光)』의 편집주간을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홍원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일제 말에 전라도 광양에 은신해 있다가 해방이 되자 노산은 광주에서 194512월에「호남신문」을 창간하여 1947815일자부터 처음으로 가로쓰기로 종합일간지를 간행했다.

이은상은 일제하에 낭만적 민족주의자로서 전통시조를 계승하여 많은 시조를 창작하였다.

1933년에 나온『노산시조집』은 생동적이면서도 뛰어난 언어적 기교를 발휘한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시조 창작과 기행문 등을 통해 조선의 자연을 노래하고 우리말을 지키는 노력을 했다.

노산의 작품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지한 역사의식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또『조광』의 편집주간을 한 것 등 때문에 그의 일제 때 친일 행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분명하게 입증된 것은 없으므로 일단 기존의 연구 결과에 따르기로 한다.

일제 때의 소박한 낭만적 민족주의자들이 해방 후 좌우익의 갈등에서 우파적이 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노산은 일찍이 1920년대 후반 카프(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해 국민문학을 주창하고 이에 기초한 작품활동을 했으므로 그에게 이승만에 의해 주도된 분단국가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국가였다.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북한공산주의 집단에 대한 분노와 북진통일(‘고지’)에 대한 염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 고지(高地)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 (<고지가바로저긴데>, 1953년)

 

이처럼 소박한 민족주의자로서 또 반공주의자로서 노산은 이승만정권 하에서 전남대학교 재단이사장, 이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 등 굵직한 직함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한다.

3·15가 일어나기 얼마 전 이은상은 ‘문인유세단’을 조직하여 자유당 대구 유세에서 당시 시국을 임진왜란과 비교하면서 “이순신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1960년「서울신문」35일자에는 “대통령선거 유세 중에 시인 이은상씨는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과 아울러 이기붕 의장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인간성을 설명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39일 오후 1시 마산무학초등학교에서 정부통령 선거유세를 지원하는 강연회가 열리는데 이 때 소설가 박종화 등과 함께 이 강연에 참여하여 선거유세를 했다.

그러므로 마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3·15민주화의거가 일어나자 노산은 이를 비판하면서 3·15의거는 “무모한 흥분”으로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불합리·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이며 따라서 시위가 확대되는 것을 ‘마산사람’으로서 염려하며 마산시민들에게 “자중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이은상이 박종화 등과 함께 마산무학초등학교에서 리승만의 선거유세를 한다는 벽보>

 

-박정희를 미화하고-

이승만 외에도 이은상이 이순신 같은 구국의 영웅으로 미화한 또 다른 인물이 박정희이다.

박정희는 만주국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1944년에 만주군 보병부대에 배치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 부대에 있으면서 항일무장투쟁 세력에게 총부리를 겨눈 경력이 있다.

박정희는 해방 후 한때는 남로당의 박헌영 계열에 속해 있다가 군내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숙군작업에서 자신의 동료들을 팔아 목숨을 건졌고, 6·25를 거치면서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소장으로서 5·16쿠데타를 주도하여 군사정권을 세운다.

이은상은 5·16쿠데타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협력했다는 사실도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은상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고 박정희의 문화행정 자문역으로 민족문화협회장 등 다양한 감투를 쓰고 박정희정권의 문화,교육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은상은 박정희 묘비 헌시비문에 “…조상의 얼과 전통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 내디뎠기 /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외다”라고 찬양할 정도로 독재자 박정희를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숭배하였다.

<이은상이 지은 박정희 조곡>

 

노산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협조와 찬양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도 협조하고 찬양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이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자『정경문화』19809월호에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글을 실“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경하하며”,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쓰고 다음 해 4월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이 된다.

 

노산은 다음 해(1982년) 9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노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극단적이다. 뛰어난 시조작가이자 민중시인으로 또 훌륭한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제시대의 친일 혐의를 제기하고 특히 해방 후의 독재정권에 아부하여 출세하고 명예를 얻으며 권력을 좇아 산 어용 지식인으로 폄하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볼 때 노산의 문학적 업적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가 이승만,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심지어는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까지 찬사를 보낸 것이 명백히 사실로 드러난 이상, 노산에 대해 다시 냉정하게 평가해야할 시점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재현 / 경남대학교 인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