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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마산창원 역사 읽기 (31) - 9산 선문의 남쪽 끝, 봉림사

by 허정도 2014. 12. 22.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6  9산 선문의 남쪽 끝, 봉림사

 

봉림산 중턱까지 올라가노라면, 산들바람을 벗삼아 옛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봉림사 옛터에 이르게 된다.

흔적만 쓸쓸하게 남아있는 건물지, 탑지, 연못지 등은 우리의 기억을 천년 전의 아득한 세월 속으로 이끌어 당긴다.

나말여초! 이 땅에는 사회변동의 기운과 전쟁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믿음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무너져가던 신라왕실이나 왕실·중앙귀족과 밀착된 화엄종 등의 교종은 이제 더 이상 그들이 기댈 곳이 아니었다.

여러 곳에서 자라나던 지역의 세력가들이나, 미륵신앙·선종 등이 희망으로 떠올랐다.

천년 전 우리 지역인 김해와 진례에서도 경주의 중앙정부와 독립된 세력가들이 나타났으며, 이들이 선종의 뛰어난 고승을 불러들여 이곳에 머물게 하였다.

이 땅의 남쪽자락인 창원 봉림산 기슭에 들어선 9산선문의 하나인 봉림산문이 그것이다.

<봉림사 터>

<창원시 상북초등학교에 있는 봉림사지 삼층 석탑>

 

-만들어진 천년 전의 인연-

19193월 경복궁 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봉림사의 옛 터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비」에는 봉림사가 만들어진 천년 전의 인연을 다음과 같은 흔적으로 남겨두고 있다.

 

(진경 대사 심희는) 얼마 후 김해의 서쪽에 복림이 있다는 말을 멀리서 듣고, 갑자기 이 산을 떠나 남쪽으로 가겠노라 하였다. 진례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리니, 이에 … 진례성 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가 도를 사모하는 정이 깊었으며 (대사의) 소문을 듣고 뜻이 간절하여, 경계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성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절을 고쳐주며 법의 수레를 머물도록 청하였는데,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였고, 병든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의원을 만난듯하였다. …

이 절은 비록 터는 산맥에 이어져 있었으나 문은 담장 밑까지 기울어져 있었다. 대사는 경치가 기이하고 빼어난 곳을 찾고 가렸으나, 날쌘 말이 서쪽 산봉우리에서 놀고 올빼미가 옛터에서 우는 곳만을 어찌 대사의 생각에 과연 마땅하고 신인의 …에 깊이 흡족하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은 절을 고쳐지어 발길을 멈추었으며, 봉림(鳳林)이라 이름을 고치고 다시 선우(禪宇)를 열었다.

이보다 앞서 지 김해부 진례성 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이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임금에게는 충성을 다하였으며 선문에 귀의하여 절을 고치는 것을 도우니, 대사는 마음 속으로 …을 기꺼이 여겨 그 곳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고자 생각하고, 그윽한 가르침을 크게 베풀었고 불도를 널리 떨쳤다.

 

연구자들은 이 내용을 두고 달리 해석하기도 하나, 본 주제와 관련하여 두 사실에 주목하였다.

선, 김해지역에서 세력가들의 등장 순서와 그들 상호간의 관계이며, 다음으로 봉림사 개창의 후원 인물이다.

전에는 김(소)충자·율희 형제가 김인광 세력을 몰아내고 김해의 세력가로 자리 잡았으며, 봉림사의 개창도 김율희가 도와주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진례성의 김율희 형제가 김해의 금관성을 빼앗아 그들의 근거지를 그곳으로 옮기면서 진례성의 직책을 김인광에게 맡겼으며, 김인광이 봉림사의 개창을 지원하였다고 한다.

이제 이같은 견해를 우리의 머리 속에 담고서 천년 전의 인연을 찾아보기로 하자.

진경대사 심희가 897년 무렵 김해지역에 머물게 되면서 봉림산문이 열릴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진례성의 세력가인 김율희는 심희를 극진하게 맞아들이고, 고친 절에 머물게 하였다.

그는 사굴산문의 행적, 수미산파의 이엄, 가지산파의 국운, 원주 흥법사의 충담 등과 같이 뛰어난 선종 승려들도 김해지역으로 불러들여 이 지역사회를 ‘선종의 요람’으로 만들어 갔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김해지역 세력이 중앙정부와 독립할 수 있고, 지역사회 내부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지원 받고자 이들 고승들을 불러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그 가운데 심희는 금관가야 왕족인 김유신계의 후손이면서 이미 그의 아버지 때에 몰락하여 중앙정계의 진출이 막혀 있었다.

이러한 출신성분은 심희가 김해지역과 연고권을 가질 수 있고, 반신라적인 성향을 띨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당대 불교계나 왕실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현욱에게 출가하여, 불교계 내부에서 명망과 위상을 크게 얻었다.

그가 강진의 송계서원과 설악산에 머물 때, “배우는 사람들이 비오듯 모였고, … 선객이 바람처럼 달려 왔다”라는 내용에서, 그는 김해지역으로 옮겨오기 전부터 이미 명망과 위상을 크게 얻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심희의 이러한 성향과 조건은 당시 금관가야의 전통을 회복하면서 중앙정부로 부터 독립하려는 김해지역 사람들의 정치적 바램에 부응하는 것이며, 지역사회를 한 곳으로 묶을 수 있는 영향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율희 세력이 심희를 적극 불러 머물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심희도 김해지역에 대한 자신의 연고권과 함께, 김해세력을 통해 자신의 이상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김율희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심희가 김해에 머물게 되니, “마치 고아가 자애로운 아버지를 만난 듯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의원을 만난 듯하였다” 라는 내용은 그가 김율희를 비롯한 김해지역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김해에 머물 때, “국왕(효공왕)이귀의하고 당시 사람들이 공경하며 우러른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라고 한 내용에서도 그의 명망과 위상이 왕실에까지 떨치고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다만, 그는 효공왕의 일방적인 귀의에도 불구하고 경주로 가지 않았으며, 이러한 행동은 당시 그와 김해 사람들의 반신라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명망과 위상은 봉림산문을 열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심희는 효공왕(897912) 무렵 창원의 봉림산에 있던 작은 절을 수리하여 봉림사라 고치고 봉림산문을 열었다.

이 불사는 김해지역의 최고 세력가인 김율희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진례성의 김인광이 실질적으로 도와주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김인광은 상당한 유교적 소양을 가진 6두품 가문출신으로 관직에 있다가 김해지역과 연고를 맺었으며, 김율희를 이어 진례성의 장군으로 성장한 인물이라 한다.

그는 유학적 성향을 가졌으면서도 심희가 “그곳(봉림사)에서 죽을 때까지 머물고자 생각”할 만큼 봉림사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가 이 불사를 도운 연유는 위의 내용처럼 자신이 선문(선종)에 귀의한 종교적 인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출신성분이 같은 옛 가야계 후손이라는 연대의식도 작용하였으며, 김인광이 진례지역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사상적 근거를 심희에게서 지원받고자하는 측면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여주 혜목산의 고달사에 있던 원감국사 현욱에게 배웠던 진경대사 심희는 김해지역의 세력가인 김율희 형제의 초청을 받아 머물면서 봉림산문을 열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김율희의 지원과 진례성 김인광의 실질적인 도움으로 효공왕 무렵 창원 봉림산의 옛 절을 고치어 ‘봉림사’라하고 ‘봉림산문’이라는 독립된 9산 선문을 열었던 것이다.

<창원 용지공원에 있는 봉림사지 탑비 모조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한 이념을제공했다-

봉림산문을 연 뒤, 심희는 경명왕의 초청으로 경주를 다녀왔으나, 입적할때까지 김해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불법을 가르치고 불도를 널리 떨쳤다.

과정에서 찬유, 경질, 융체 등을 비롯하여 500여명의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현욱을 개조로 하고 자신을 제 2조로 하는 봉림산문의 터전을 닦았다.

또한 그는 김해지역을 독립시키고 지역사회를 묶을 수 있는 사상적 근거도 제공하였으며, 봉림산문의 위상을 신라 전역까지 넓히기도 하였다.

경문왕이 “대사가 당시에 천하의 존경을 받아 신라에서 따를 사람이 없다”라고 표현할 만큼 심희와 봉림산문의 지명도는 전국에서 드높아지고 있었다.

그 결과 경명왕은 재위2년(918) 심희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효공왕 11년(907) 무렵부터 경명왕이 즉위할 때까지 자립적인 군사 능력을 상실하여 후백제 등의 침략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중국과의 해상 교통로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신라 왕실은 경주의 변방에 위치하면서 강력한 정치·군사력을 가진 김해 해상세력과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으며, 봉림산문 심희의 초청을 성사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래서 효공왕은 정법대사 여환을 보내면서까지 심희에게 일방적으로 귀의하였으며, 경명왕은 심희를 당대 최고의 선승이라 칭송하면서 흥륜사 상좌인 승려 언림과 중서성 내량인 김문식을 보내어 극진하게 예우하면서 초청하였던 것이다.

심희는 결국 경명왕의 초청을 받아들였으며, 그 이유는 신라왕실이 김씨에서 박씨로 바뀌면서 김유신과 그의 후손의 지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라 한다.

초청 뒤에도 경명왕은 백관들에게 심희가 머물던 곳에 가서 칭송하게 할만큼 그를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심희는 경주에 머물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을 제시하여 그의 이상정치를 설파하였으며, 신라 왕실의 대고려·후백제 외교정책, 정치적 안정과 권위를 높일 수 있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한편 봉림산문 개창은 김해 및 창원을 비롯한 우리 지역사회의 문화적 성장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경주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던 불교문화는 9산선문의 개창으로 지역사회까지 확산되면서 우리 지역의 문화적 창조능력을 높이게 되었다.

선종의 절을 만들거나 수리하면서도 건축물·공양구와 같은 불교 조형물, 승려 개인의 생활집기 등을 같이 만들게 되었으며, 그 결과 지역사회의 문화적 창조와 수공업적 기술 능력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절은 세속인에게 신앙의 안식 및 제례와 같은 생활신앙이나 일상의례, 의료·구휼과 같은 사회사업, 도적의 방지나 여행자의 편의 제공과 같은 사회적 혜택도 제공하였다.

나말여초 봉림사도 그러한 기능을 담당하여, 우리 지역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이나 삶의 질을 한 단계 더 끌어 올렸을 것이다.

더구나 이 당시는 사람들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항상 노출되어 있었으며, 봉림사가 이 지역 사람들의 중심적인 안식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 기능과 의미는 더욱 크게 생각해볼 수 있다.

이처럼 봉림산문의 개창은 경주 중심의 중앙집권적 현상을 탈피하고, 지역사회의 자생적 능력이 그 지역사회의 생존과 발전을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사상적 근거와 실천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경복궁에 있는 봉림사지 보월능공탑>

 

-그날의 뜻이 오늘에도-

심희는 경주에서 돌아온 이후 그가 입적할 때까지도 신라왕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명왕 7년(923) 4월 심희가 봉림사에서 입적하자 국왕은 소현 승 영회를 먼저 보내어 조문하게 하였으며, 이어 사신을 특별히 파견하여 부의하는 물자를 보내는 한편 ‘진경대사’라 추증하여 시호를 내리고 탑명을「보월능공지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비문을 찬술하여 다음 해인 경애왕 1년(924) 4월에 봉림사에 그의 탑비를 세워주었다.

봉림사가 경애왕 초기까지도 왕실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 때는 아직 김율희의 세력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봉림산문이 창원 지역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심희의 사법제자이자 봉림산문의 제3조인 찬유가 이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견훤이 경주를 침략한 경애왕 말년(927) 무렵에는 김율희 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게 되며, 그에 따라 창원 봉림산의 봉림산문도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에 찬유는 봉림산문의 개조인 원감대사 현욱이 입적할 때까지 머물렀던 혜목산의 고달사로 봉림산문의 근거지를 옮겨가게 되었다.

삼국 전쟁의 막바지 기운에 휘말렸던 김해에서 봉림산문은 떠나게 되었다.

제 남쪽 끝자락에 있었던 봉림산문은 전쟁의 기운이라는 세상의 크나큰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그 근거지가 경기도 여주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봉림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기까지 그 명맥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찬유는 고달사를 크게 중창하여 고려 광종 때에 와서 전국 3대 선찰의 하나로 발전시켰으며, 선종교단의 통합과 법안종의 수입 등 불교개혁의 근거지가 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사회에서도 봉림산문의 위상과 역할이 더욱 넓혀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반은 창원의 봉림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 봉림사 옛 터를 내려오면서 천년 전 이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들에게 남긴 흔적을 생각해 본다.

천년 전 그들은 신라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면서 우리 지역의 자생적 능력을 한데 묶어서 그들의 믿음과 삶을 기댈 수 있는 안식처를 봉림산 기슭에 마련하였다.

그런데 현재의 우리들은 지방자치제의 확대 시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 가는 중앙집권화 현상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천년 전 그들의 바램이나 실천이 실현되고 있지는 못하지만, 196080년대의 민주화 투쟁이 우리 지역에서 움텄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따름이다.<<<

 

호 / 당시 동아대학교 석당전통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