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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29. 면·마포상들, 30- 마산인구의 추세

by 허정도 2015. 7. 6.

29. ·마포상(綿·麻布商)

 

마산 시내의 외래 면포와 마포 도·소매상들은 대부분이 현재의 부림동과 남성동에 집중해 있었는데

청국인 상점의 상호로는 원생호(源生號), 취성호(聚星號), 덕성호(德盛號), 서상호(瑞祥號), 동성호(東盛號) 등 다섯 개가 있었으며

일본인의 그것은 길전상점(吉田商店), 고직상점(谷直商店), 전중상점(田中商店) 등이고 한인으로서는 남사겸(南士兼), 이기일 등이 있었다.

한국 토산품인 저(/ 모시), 마포(麻布) 도매상으로는 이순길, 강창언 등이 손꼽을 만했다.

그 외는 군소 소매상들인데 거의 모두가 일상생활에서 뺄 수 없는 필수품들을 취급했다.

황화(荒貨) 즉 동래 자주(東萊 紫紬), 상주 자주(尙州 紫紬)는 국내에서 굴지의 염색물이며 그 외 한산세모시, 남해 모시, 북포(北布), 한양저(漢陽苧), 인조사 등은 동서양의 관절품(冠絶品)으로 평가되었으며,

대중물로서는 개화 전후를 통하여 당목(唐木), 광목(廣木), 옥양목(玉洋木), 견주(絹紬), 본목(本木), 청목(靑木), 각종 견포류(絹布類) 등을 갖추었고, 독일제 안료, 수은, 유황, 비소, 삼합실, 오합실, 바늘 등 손님이 구하는 것은 가히 없는 것이 없었으며,

바늘은 세창바늘을 첫손가락 꼽고 소위 서울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바늘 부탁을 하는 시절도 있었다.

이렇게 구색을 갖춘 것은 난점(노상 상인)도 매 한가지였는데 다만 점포를 가진 곳에서는 틀(재봉기) 한 대 씩을 비치해 놓고 (당시 미국제 싱거미싱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한 대에 150, 원부 350전이었다) 한복 기성복을 비롯하여 버선, 조끼, 삯바느질까지 햇는데 단골이 아니라도 잘 드나드는 손님은 나그네와 독신자였다.

이들 중의 혹자들은 즉석에서 개장(改裝)하고 즉석에서 홍등가로 줄달음치는 자도 있었다. 

 

30. 마산 인구의 추세

 

1914년 면적 10.32평방, 인구밀도는 평방 당으로 마산 부제(府制)로 실시되었으나 당시의 인구와 인구밀도 관계는 내용이 없음.

1926년 면적 10.32, 인구 22,901, 인구밀도 2,219

1930년 면적 10.32, 인구 25,810, 인구밀도 2,500

1935년 면적 10.32, 인구 29,858, 인구밀도 2,893

1940년 면적 10.32, 인구 41,546, 인구밀도 4,025

194310129.07, 당시 인구와 밀도 관계는 내용이 없음. 행정구역 확장, 창원군 일부 편입.

1947년 면적 29.07, 인구 82,519, 인구밀도 3,935()

1949년 면적 29.07, 인구 91,291, 인구밀도 4,353()

1951년 면적 29.07, 인구 132,658, 인구밀도 4,563()

1952년 면적 29.07, 인구 105,416, 인구밀도 3,603()

1955년 면적 29.07, 인구 118,284, 인구밀도 4,069()

1958년 면적 29.07, 인구 151,569, 인구밀도 5,213()

1960년 면적 29.07, 인구 157,547, 인구밀도 5,419()

1962년 면적 29.07, 인구 152,436, 인구밀도 5,244()

1965년 면적 30.80, 인구 158,625, 인구밀도 5,150()

1968년 면적 30.80, 인구 172,574, 인구밀도 5,603()

1969년 면적 30.80, 인구 177,369, 인구밀도 5,759()

1970년 면적 30.80, 인구 190,992, 인구밀도 6,201()

1971년 면적 30.80, 인구 194,976, 인구밀도 6,330()

1972년 면적 30.80, 인구 211,159, 인구밀도 6,856()··<<<

<강점기 신마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