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78. 일경부의 피습, 79. 일기루의 화재

by 허정도 2016. 3. 14.

78. 일경부(日警部)의 피습

 

1905(광무 9) 2월 모임 마산포 주재(일본 영사관 소속) 경부 경익태랑(境益太郞, 병합 후 마산초대서장)은 낙동강 하류 연안에 수렵갔던 귀로(歸路),

일몰로 해서 창원군 내서면 근주(近珠, 일명 살구징이) 한인객사에 투숙했다가 밤중에 괴한 십수명이 기습하여 그가 소지한 엽총, 탄환, 행이(行李) 등을 탈취한 후 흉기로 난자하여 경()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일본 영사 삼포(三浦)는 일헌(日憲)과 일경(日警), 한경(韓警)에 급히 연락하여 즉각 인군(隣郡)에 비상망을 펴고 범인 체포에 활동하였으나 수색 8개월이 되도록 단서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간단한 실마리로 함안읍에서 수괴 정원길을, 일미(一味) 8명은 창녕읍에서 타진,

마산경무청(현재 부림동 시장에 있었음)으로 압래(押來)하여 창원감리서(마산) 현학균의 주심으로 전원 강도모살죄(强盜謀殺罪)로 사형판결이 내려 범인들의 다리를 분질러 지게에 싣고 구강당산(舊江堂山) 남쪽 기슭에서 교수 집행하였다.

이 끔찍스런 광경을 본 심약한 부녀자 중에는 졸도 혹은 탈분(脫糞)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범인 일미(一味)를 타진한 일인 순사 갑비(甲斐)2계급 특진하고 일본 영사 삼포(三浦)는 현학균 창원감리에게 한인 권임(權任, 지금의 경감) 한용신도 계진(階進)토록 상신(上申)하라고 공문으로 요청한바 있어 외무대신 이하영에게 26호로 보고한 일이 있었다. 

 

79. 일기루(日妓樓)의 화재

<1908년 신마산에서 시작한 일본 요정 망월루> 

 

명치 41년이면 서기 1908년이다. 그때는 은행도 전기도 없던 마산이다.

기루(妓樓)도 구마산에 생기지 않았을 때인데 길촌(吉村)이라는 일인이 구마산 서성동(후에 일인 安達이 경영하던 조선 창녀로서 吾妻亭이란 옥호로 청루 자리)에 일본 태본현(態本縣, 쿠마모도) 천초도(天草島)에서 창녀를 끌어들여 목조 2층을 짓고 명월루(明月樓)란 이름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전기(前記)한 해 늦은 봄에 포주 길촌이 새벽잠을 깨어 변소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천장에 달아둔 램프를 들이받아 다다미와 침구에 석유가 쏟아짐과 동시에 삽시간에 온 방안이 불바다가 되자,

밤늦게까지 남자들과 운우의 흥을 일으키다 늦잠이 든 기녀들은 별안간 불벼락을 맞아 탈출구를 찾아 헤매었다.

기녀들의 도주를 방어하기 위하여 출입문을 굳게 잠가두는 것이 비인간적인 포주들의 공통된 심리인지라 단말마적으로 허둥대던 기녀와 동침하던 남자들은 명월루 뒤뜰로 뛰어내려 인근의 구조를 호소하였다. 물론 반나체였다.

화마는 사방을 둘러쌌고 열띤 기왓장이 이웃으로 튀고 있었다.

신마산 변두리에 있는 일본 군대의 소방차가 당도하였을 때는 이미 다 타고 도괴(倒壞) 직전인 때이었다.

화기 때문에 아무도 얼씬 못하던 때인데 그 집 나까이계집이 금고를 집으러 뛰어감과 때를 같이하여 불타던 건물은 그녀를 덮쳐 영락없이 타죽고 말았다.

그의 소사(燒死)한 시체는 소방대원의 곡괭이에 걸려 나왔는데 마치 생선 탄 몰골이 되어 금고를 꼭 껴안고 있었다고 한다.

주인을 위해서였을까? 돈이 아까웠을까? 그 한창 나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