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99. 헌병 사가의 밀주 수색

by 허정도 2016. 7. 4.

99. 헌병 사가(私家)의 밀주 수색

 

 

1939(소화 15) 여름 모일, 마산세무서 주조합(酒組合)에 탁주밀고의 고발 투서가 날아들었다.

 

여기에 신명이 난 동서(同署)의 직원(1)과 업자(5)가 투서의 내용을 그대로 믿고 전광석화적(電光石火的) 행동을 개시했다.

 

상일(常日)에는 세리(稅吏)만이 행동했던 것이나 업자가 5명이나 이에 가담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물론 이러한 투서가 날아들면 묵인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직책이요, 또한 투서들이 사실과 틀린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약기(躍起)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의 출동은 차례차례 허탕이었다.

 

마지막에 손을 댄 곳이 석정(石町, 창동) 상양삼랑(相良三郞, 일본인-편자 주)의 전당포 입구 좌측 두 번째 집이었다.

 

그들은 이 집에 돌입했다. 딴 집에서 하던 그 식대로 다짜고짜 주방을 위시해서 장독대 그리고 실내를 샅샅이 뒤졌으나 이 또한 허탕이었다.

 

그래 놓고 이들은 돌아갈 때 그 집 부인에게 일언반구의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보통 조선인 서민에게 자행하던 것과 같이 무사할 수가 없는 곳을 건드린 것이다.

 

알고 보니 마산 헌병분유대(憲兵分遺隊) 현역 헌병 분견대 장석홍의 집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장 이하 전 대원은 노발충천하여 업자들을 직접 연행하고 엄히 추궁했는데, 이것은 일본 제국군인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라 하여 명예훼손, 불법 가택수색은 두 말 할 것 없고 일반이 상상도 못한 군용지 침범죄로 다스릴 기세였다.

 

이렇게 사건의 처리 방향이 엉뚱한 데로 확대되고 몇몇 일문(日文) 일간지가 중대 사건으로 보도 취급하게 되어 사건의 귀결점이 자못 주목할 만했다.

 

이 일이 만약 조선인만의 일이었더라면 화를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날의 밀주 수색에는 일본인 탁주 양조업자인 선일(鮮一)의 김미(金尾)라는 자가 간여해 있었기 때문에 취조하는 헌병이 다소 참작을 했을 것이고,

 

당시 마산세무서장 소천 청(小川 淸)의 진사(陳謝), 그리고 지방의 일본인 유력자들의 거중(居中) 교섭으로 그 어마어마한 군용지 침범죄 문제도 일단락을 지었지만 세무서 당국자나 업자들은 시정의 한 무뢰한의 밀조나 투서에 혹하여 경솔한 행동을 했다 하여 빈축을 샀던 것이다.<<<

 

 

(현존하는 마산헌병분견대 건물. 1926년에 지었으니 위 사건이 발생한 1939년  당시 헌병분견대는 이 건물을 말한다. 2005년 9월 14일 등록문화재 제198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