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7.01.0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2. 아라사 함대 입항

132. 아라사 함대 입항

 

 

아라사(노국의 별칭) 함대가 마산포에 투묘(投錨)한 것은 1899(광무 3, 명치 32)이 처음이었다.

 

주한공사인 파브로프가 탑승한 군함 만츄리아 호가 인천에서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상해로 간다 하고는 줄곧 마산으로 들어왔다.

 

 

<알렉산드로 파브로프 주한 러시아 공사>

 

 

그 뒤를 이어 같은 동양함대 사령장관 마카로프가 좌승(座乘)한 루리크호 외 한 척과 합류했다.

 

그들은 마산만을 중심으로 일대의 해심과 연안을 상세하게 측량하고 군사상 필요한 육지를 구획, 포목을 꽂았다.

 

그들은 광대한 토지를 점거하여 용암포와 같이 해군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해군 반거지(蟠據地)로 타정(唾涏) 삼척(三尺) 욕심을 갖고 있는 일본이 한국정부를 위협하는 동시에 강경하게 노국에 항의한 경과 그들의 계획은 일단 좌절되었다.

 

그 이듬해 19003월에 한로조차조약이 체결되어 지금의 마산해수욕장인 밤구미(栗九味)를 해군기지로 하려했으나 지세가 부적(不適)하므로 포기하고 신마산의 요지인 월영동 일부를 매점(지금의 일성펌프제작공장, 현 경남대 정문 앞 북편)하여 영사관을 설치했다.(조선철도사 제1권 참조)

 

파브로프와 마카로프가 탑승한 만츄리아와 루리크호가 돌아간 6년 뒤(1905) 5월 노서아(露西亞) 발틱함대가 거제도 외해(外海)에서 일본 해군 연합함대에게 산산조각이 나고 쫓기고 쫓기어 울릉도 앞에서 백기를 든 것은 삼백년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신호와 다름없었으나(이 해 1월에 여순개성旅順開城, 3월에 봉천패전奉天敗戰) 극동에 해군기지를 점거할 야망은 추호도 변하지 않아 북으로 청진, 서에 용암포, 남쪽에 마산포 등 부동항을 찾아 헤매었으나,

마산의 경우 노국이 서남 해안선 일대를 조차한 것과 때를 전후하여 일본이 지금의 월영초등학교 이남의 대부분을 99개년 기한으로 조차하여 노골적으로 노국과 각축했다.

 

이러한 무렵 한국해안에 노함(露艦)이 자주 출몰하더니 급기야 1908(?) 함명(艦名) 미상의 노함(露艦) 1,2척이 저도 앞뒤에 투묘(投錨)하고 수많은 수병이 마산에 상륙했다. 그때는 이주해 온 일본인도 적었고, 일본 군대도 아직 주둔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이면 만나는 족족 폭행을 했으나 조선인 아동은 무던히 귀여워해서 구마산에서 신마산 선착장까지 안고 가기도 하고, 과자를 사주기도 했다.

 

그러나 물건을 살 때 낯선 돈을 내놓기 때문에 일본 돈이 아니라 해서 거절을 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때 마산에 거류하고 있던 일본인은 대개 장사꾼들이라 일체 외출을 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갇혀 있었다.

 

일부 수병들은 지금 구마산 부림시장 터에 있던 경무청으로 들어갔는데, 생후 처음 보는 황발벽안(黃髮碧眼)에 지레 겁을 먹은 관원들이 다 피신해 버리자 옥사의 창을 부수고 죄인들을 몽땅 풀어 놓았으나 그 가운데 낮잠에 깊이 등 죄수 한 사람은 이들 수병의 모처럼의 은전(?)을 받지 못했다는 넌센스도 있었다 한다.<<<

 

 

 

 

 

 

신고
Trackback 0 Comment 0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년 3월 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오늘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2. 영불의 함대 입항

142. 영·불(英·佛) 함대 입항 1920년 여름, 안남(安南, 월남)에 있는 불함(佛艦)이 마산 저도 좌편 안쪽에 투묘(投錨)했다가 삼일 후에 출항한 뒤를 이어, 상해에 주둔하고 있는 영함(英艦) 호오킨스호가 동도(同島)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1. 개항과 각국 영사관

141. 개항과 각국 영사관 강화조약에 의해 부산, 원산, 인천이 개항된 후 다음과 같이 항구와 시장이 개방되었다. <조선의 시장과 조약항> 부산 개항(開港)·개시일(開市日) ; 고종 13년(1876) 10월 14일(일본에게)..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0. 마산포와 열강

140. 마산포와 열강 1901년 노국은 북청(北淸)사건을 이용하여 만주에 군사적 관리권을 확립했다. 1902년에는 동청(東淸)철도도 개통되고 1903년에는 시베리아 철도의 본선도 완성되었다. 노국의 경제적 세력은 광산, 기타..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9. 노일전쟁과 율구미

139. 노·일(露·日) 전쟁과 율구미(栗九味) 노국의 조계지인 율구미는 1903년 1월 5일을 마지막으로 노국 수변 8명이 철수한 후에는 공지화되었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노국 영사 카자코브는 치지코브라는 자에게 그곳을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8. 신상회사와의 투쟁

138. 신상회사(紳商會社)와의 투쟁 신상회사(紳商會社) 혁파 투쟁은 국내 본건지배층에 대한 투쟁이지만 외세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고, 또 마산항민들의 저항심의 성장을 고찰하는데 의의를 가진 투쟁이기 때문에 여기 서론(叙論)코자..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노·일(露·日) 양국인의 마산포 경영에 대하여서는 일본 외교문서 제33권에 당시 마산 일본 영사 판전중차랑(坂田重次郞)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두 가지의 보고 즉 마산포에 있어서 노국간의 경..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6. 1900년대의 국제관계

136. 1900년대의 국제 관계 청일정쟁으로부터 노일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최고의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시대적 특징인 극동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의 심화와 그 확대로..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 국토의 약탈과 국민생활 제재(制裁) 일본은 노일전쟁 전에 거제도 일대(송진포松津浦 / 원문에는 송포진)를 근거로 어업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중 일본 대노국(對露國)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3. 노공관의 점유지

133. 노공관(露公館)의 점유지 1899년 노서아와 일본 정부가 마산에 해군 근거지를 두려고 각축전이 치열했는데 노서아는 서부 마산에 조차 조약을 체결한 뒤 지금의 일성 펌프공장 자리에 영사관을 두고 백조악기점 자리에는 관사..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2. 아라사 함대 입항

132. 아라사 함대 입항 아라사(노국의 별칭) 함대가 마산포에 투묘(投錨)한 것은 1899년(광무 3년, 명치 32년)이 처음이었다. 주한공사인 파브로프가 탑승한 군함 만츄리아 호가 인천에서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상해로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1. 자복포의 매수 각축

131. 자복포(滋福浦)의 매수 각축 조선정부와 영·독(英·獨, 1883년 11월 26일 체결), 아국(俄國, 1884년 7월 / 원문에는 1885년 10월 24일 체결), 의국(義國, / 해방 후 미국을 의국이라 칭하기도 했..

새해인사
새해인사 2017.01.01

2017년, 모든 이들이 희망을 품고 사는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애당초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노신>

한국 100명산이야기 21 : 비파와 거문고 형상의 비슬산

● 국가적으로 우환이 많았던 병신년을 마무리 하기 위해,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 있는 비슬산을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양덕동에서 모여 곰탕으로 유명한 현풍으로 향하였습니다. 현풍의 산업단지라 할 수 있는 '대구테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