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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9. 노일전쟁과 율구미

 

139. ·(·) 전쟁과 율구미(栗九味)

 

 

노국의 조계지인 율구미는 190315일을 마지막으로 노국 수변 8명이 철수한 후에는 공지화되었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노국 영사 카자코브는 치지코브라는 자에게 그곳을 관리 시켰다. 관리 조건은 마산포에 입항하는 노국 군함에 공급할 용수정(用水井) 하나를 마련할 것과 산에 감시인을 두기로 하고 매월 10원씩 주던 것을 무급으로 하되 한국인에게 소작을 시켜 수확된 절반을 취득케 하였다.

 

노일 전쟁이 일어나 18일 치지코프가 마산포를 철수할 때 그가 가졌던 상품을 일본인 강기(岡崎)라는 자에 매도한 것이 연고가 되어 율구미 조계지를 이 강기(岡崎)가 관리했다.

 

또 부산에 살던 일본이 강본(岡本)이라는 자가 로인(露人)과 친했기 때문에 치지코프로부터 호텔 관리를 의뢰받은 관계로 같이 그 관리에 관계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 뒤 1904518일 조선정부는 조로(朝露)조약을 폐기키로 선언했다(·로 조약폐기칙선언서·露 條約廢棄勅宣言書). 1조에 한·(·()) 양국 간에 체결한 조약과 협정은 폐파(廢罷)하고 실시(實施)할 사().

 

따라서 190064일 외부통상국장 정대유와 마산 노국부영사(露國副領事) 소코브가 이에 체결한 율구미호약(栗九味互約)도 폐기됨과 동시에 율구미 노국 조계지는 자동적으로 조선정부에 복귀된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조로(朝露) 조약의 폐기와 아울러 감리서에게 훈령하여 이를 정식으로 접수하고 주체적 입장에서 지방민을 위해 유효하게 활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하무인격으로 횡포를 자행하던 일인들이 율구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즉 길야문길(吉野文吉)이라는 자는 전쟁이 일어난 1904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율구미의 재목을 맘대로 벌채한 것이 오천 원어치나 되고 그 수는 부지기수였다. 그 후 전술한 로인(露人) 치지코프가 철수할 때 그의 상품을 샀다는 강기(岡崎)90여 만원어치나 벌목하여 울창했던 율구미는 황폐하고 말았던 것이다.

 

율구미가 무방위 상태에서 일인들의 남벌로 황폐해가는 것을 보고도, 중앙 정부로부터 지령이 없어 감리(군수)는 외부대신에게 그것을 관리함이 타당한지 여부를 질문했던 것이다. 일본 영사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은 이 기회를 틈타 율구미를 일본 세력권 내로 확보해두기 위해 일본 천엽현(千葉縣) 어업단을 이주시킬 계획을 추진시켰던 것이다.

 

그때 천엽현 어민들은 고기가 잡히지 않아 조선 남해 연안의 적지(敵地)에 그들 어민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천엽수산시험장장(千葉水産試驗場長) 이하 그 관하 어업 대표자가 시찰차 마산에 오게 되었다.

 

이들은 1904929일 마산 일본영사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를 찾아가 그에게 협조를 구했다. 삼포(三浦)는 이들 시찰원들을 데리고 이곳을 답사했는데 먼저 50, 200명을 이주시키겠으며 1호당 일백 원씩 모두 오천 원의 보조로 19054월에 이주 실행을 하겠다고 했다.

 

이 조계지 면적은 30여만 평인데 그 5분의 3은 산지와 경사지이며 거기서 받은 30만 평(원문에는 두락) 중 논은 2백여 두락이고 수전(水田)수확은 벼 150석이 된다.

 

벼 일석을 5원으로 치면 총액 750원이 되고 밭에서는 연 수입 백 원은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는 종래의 조선인 소작 14, 15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땅은 이주 어민의 경작지로 정하고 연 수입은 어민들의 적립금만 제외하고는 모두 그들이 찾아가도록 할 것이라 했다.

 

이 무렵 천엽현(千葉縣) 수산시험장장(水産試驗場長)에게 마산 일본영사가 어민 이주를 위해 사전조건을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1) 마산 일본영사의 독단으로 율구미의 사용을 묵허(黙許)하는 것이므로 전쟁 계속 중에는 아무 일이 없겠으나 영원한 것은 보증하기 어렵다.

(2) 이주 어민이 올 때는 감독인을 보낼 것.

(3) 이주 어민이 다른 곳으로 전업하여도 억제하지 않겠으나, 단 전업에 관한 제정(提定)을 요한다.

(4) 이주자 조난을 위해 그 적립금을 마산 일본영사에 납입한다.

(5) 어민은 군용어부의 명의로 율구미에 이주시키고 조선 해수산조합 이외에 둔다.(이때 해수산조합의 감독권은 부산 일본영사가 가지고 있었다.)

 

시찰원 일행이 전기(前記) 사항에 합의를 본 106일 귀국 도상에 올랐는데 마산 일본영사는 곧 이 사실을 일본 외무대신에게 품청(稟請)했다.

 

율구미는 노국 조계지였으나 그 조약이 폐기되어 조선 정부에 복귀된 것인데도 이같이 법적 원칙을 무시하고 마산 일본영사가 그들의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일본 어민을 이주시킬 계획을 서둘렀다. 이 얼마나 침략적이며 만행이냐. 이 한 가지 일로써 나머지 일을 상상해 보라.

 

마산 일본영사의 품청(稟請)에 대해 외무대신은 동년 1025일자로 회훈(回訓)을 통하여 재마산 노국 조차지가 소멸할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으나 일단 소멸한 이상은 조선 정부에 복귀해야 된다는 유권적 해석으로 훈령하였다.

 

그 후 천엽현(千葉縣) 지사와 마산 일본 영사는 거듭 어민 이주를 청허해 줄 것을 일본 외무대신에게 요청하였으나, 동년 1122일 부산 일본 영사에게 한 훈령 마산포의 노국 조차지에 관한 외무성 의견서가운데 광무 4330일의 조약 제3항에 의하면 만일 조차지 내에 조선인민의 토지·가옥 등이 있을 때는 조선 정부에서 이를 매상(買上)하여 노국에 인도한다. 운운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해() 민유지(民有地)는 조선 정부에서 매상(買上)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다시 노국(露國) 정부에 인도한 것으로 단순히 해() 지소(地所)를 조선으로부터 다시 조차한데 불과하고 노국 정부에서 직접 민유전(民有田)을 매수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로조(露朝)조약의 폐기 결과 해조차권(該租借權)은 당연히 소멸하였으니 율구미 조차지는 조선 정부에 귀속한다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아랑곳없이 19051월 일본 천엽(千葉) 어업자 20여 명의 총대표 길야문길(吉野文吉, 千葉縣 夷隅郡 수산조합 이사)은 다시금 율구미의 일부를 어업 가근거지로 사용케 해줄 것을 마산 일본 영사에게 출원(出願)하였다.

 

이때 마산 일본 영사는 일시 사용이라는 조건하에 통감정부의 허락을 받아 드디어 이를 허가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주체성이 상실되어 친일 매국노가 가득 차 있어 일본 영사들이 이러한 불법을 감행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산 일본 영사의 허가를 받은 일본 천엽촌 수산연합회는 현비(縣費) 보조 4천원을 얻어 먼저 20명의 어부를 선발하여 19052월 전 율구미 북서안에 불법 이주를 감행했다.

 

 

<일본 어업이민지였던 율구미 천엽촌 / 율구미는 국립마산병원과 창원기상대 일대의 산 전체를 말하며, 일본어민들이 정착했던 천엽촌의 위치는 창원기상대 인근에 보이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

 

 

이를 근거로 어획물 정리장을 건설하여 약권현망일통(鰯權現網一統), 조정승(鯛廷繩), 수조망(手操網) 등에 종사케 하고 19065월 중에는 다시 일본 당국에 80여 명의 이주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노국과의 전후 고말(姑末) 교섭이 완결되지 않아 허가하기 어렵다는 것을 동현지사(同縣知事)에게 통보하였다.

 

이 결과 50명만이 이주했는데 이 해 대실패를 하여 사망자와 귀향자가 생기고 잔류자는 30명에 불과하였다.

 

동년 12월 통감대신은 조선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재마산 구로국(舊露國) 조차지는 일본 어민의 근거지로 극히 적당하여 전년 이래 해목적(該目的) 이용 중에 있으므로 당분간 차용하겠다는 것을 조회하여 동년 1220일 조선 친일 매국 정부의 동의를 받아 천엽(千葉)어업단의 사용이 묵허(黙許)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로(日露) 전쟁이 일어난 뒤로부터 전쟁이 끝나고 로인(露人)이 다시 율구미로 돌아올 때까지 율구미 관리 상황은 그 조계지에 조선인 소작인이 14,5이나 되었다. 이들 작물은 사음(舍音) 하성겸(河聖兼)이 받아 매각하여 그 대금 약 270원을 전후(戰後) 치지코프가 돌아 왔을 때 이를 지불했던 것이다.

 

1906년에 이르러 부산 노국영사 티 아이 봐시리트가 마산 겸임 영사로 마산을 관리하게 된 뒤, 종전에 치지코프가 가진 것과 동일한 조건으로 노국에 귀화한 조선인 이봉형(러시아 명 키리코오프)에게 관리시켜 취득케 했다.

 

관리 로인(露人)이 마산으로 돌아오고 율구미의 황폐가 문제로 대두되자 마산 일본 영사는 일인의 도벌을 조선 측에 전가시키기 위해 그곳 토지와 산판송추(山坂松楸)의 관리를 감리서에 의뢰했다.

 

이에 감리측은 응낙하지 않았다. 19066월 초에 귀환했던 로인(露人)이 돌아와 율구미의 책임을 일본 측에 추궁하게 되자, 일본 측은 우리는 무관하며 감리서에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여 감리 측은 여러 번 추궁을 당하게 됐다.

 

천인공노할 일본의 간사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감리는 로() 영사가 래주(來駐) 이전에 이에 대한 조선 측의 대책을 외부대신에게 청훈(請訓)하였던 것이다.

 

한편 1907년에 율구미에 불법 이주한 천엽현 어업단은 다시 실패하여 동년 말에는 재류자 11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1908년에는 어획의 호조를 가져와 이주자 19명의 증가를 보게 되고 19096월 현재에는 52명으로 증가하였다.

 

1909년으로부터 3년간은 매년 5천원의 현비 보조를 받게 되어 있었다. 이들 자본과 현비 보조는 다음과 같다.(1909년까지)

 

율구미 천엽(千葉) 어업단의 자본 및 현비 보조액

자본 수입액, 현비 보조액 4,000원 합계 4,000(비고 ; 수산연합회 보조) / 원본에는 1906년으로 실려 있으나 그 이전의 것으로 보임

1906년 자본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8,000원 합계 12,500

1907년 자본금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7,500

1908년 자본금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7,500

1909년 자본금 수입액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5,000

 

그 뒤 율구미 노국 조계지는 일본 육군성이 노국에서 4만원에 이곳을 매수하여 일본 육군 군용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율구미에 불법 이주한 천엽 어업단도 1915년에는 보조의 길이 끊어져 어호(漁戶)의 태반은 귀향하고 그곳은 마산 중포병대의 군용지, 군용림이 되었다.

 

일제 치하는 마산 일본학교 조합이 그 관리를 위촉받아 그 수입을 교육비에 충당해 오고 있었다,

 

율구미는 1904518일 조로(朝露)조약이 폐기됨에 따라 이같이 일인들이 불법 점거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는 것은 마산 항민은 말할 것 없고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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