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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0. 마산포와 열강

by 허정도 2017. 3. 6.

140. 마산포와 열강

 

 

1901년 노국은 북청(北淸)사건을 이용하여 만주에 군사적 관리권을 확립했다. 1902년에는 동청(東淸)철도도 개통되고 1903년에는 시베리아 철도의 본선도 완성되었다.

 

노국의 경제적 세력은 광산, 기타 사업에 융자하기 위한 노청(露淸)은행의 설립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이 노청(露淸)은행 자본금 15백만 루불은 1895년 말 대 중국 자본 수출을 목적하고 불국(佛國) 금융자본과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식민은행이었다.

 

·일전쟁 후 노국이 대일 배상금 지불 제1회의 인수를 맡아 점차 상해를 비롯하여 일본의 장기(長崎)지점 수표로 조선정부에 납입되었고, 마산포 개항 후 이 거대한 투자는 노청은행의 전통적인 금융자본이었다.

 

그 뒤 이 노청은행의 자매 은행이 노국의 유류, 사탕 등을 판매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는데, 노국의 무역업자들은 가는 곳마다 그림자를 나타내어 그 자본가들은 광산을 채굴하고 제분소를 세우는 등 분주하였다.

 

1900년 말부터 노국은 소위 노청조약 체결을 통한 특수적 권익 범위의 확장을 시도하였다. 이 노청 조약이 열강에 알려지게 되자 미···일 등 열국은 중국에 대하여 일국(一國)과 특별 협정을 맺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여 그들의 이익옹호를 도모하였다.

 

19013월 일본은 단독으로 노국 정부에 대하여 노청밀약(露淸密約) 같은 것은 이를 열국 회의에 제출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말하고, 중국 정부에 대하여는 밀약에 조인하지 말라고 통고하는 등 극력 그 성립을 방해하였다.

 

노국은 일본의 항의에 따라 밀약을 포기하였으나, 북경의 주권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만주 점령 계속을 선언하였다. 일본이 중국, 조선에 대하여 태도를 급격히 적극화시킨 것은 1902년 영·일동맹의 성립부터였다. 우리나라 마산포를 비롯한 남해안에서 노국 세력이 후퇴한 것도 극동 정세의 반영에서였다.

 

영국은 이 영·일동맹의 체결에 따라 청일전쟁 후 급속히 팽창하고 있던 일본의 해군력을 이용하여 인도에 대한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고 또 노국 진출로 인한 중국에 있어서의 이권 침해를 막으려 하였다. 일본은 노국이 추진하고 있는 만주와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자국의 침략 의도를 수행하려 하였던 것이다.

 

제정 러시아로 하여금 시베리아로부터 중국으로 맹진케 한 힘은 기술한 바와 같이 불국(佛國) 금융자본이었다. 노국(露國)과 불국(佛國)을 중국으로 전향케 한 배후의 압력으로 나타난 것은 독일제국주의였다.

 

19세기로부터 20세기 전환기에 있어 이미 세계 식민지 영역의 분할은 거의 완료하고, 각국은 보호 관세가 점차 높아가는 상태에 있었다.

 

기술적 진보와 경제적 조직의 발전에 의한 끊임없는 압박력은 신진 제국주의 독일로 하여금 삼국동맹(····)의 힘을 이용하면서 발칸반도의 자본주의적 침략의 길을 필연케 하여, 그 결과 이 같은 세계 부분에 걸쳐 이전부터 침략을 계획하고 있던 노불(露佛) 양국을 위압하면서 그 정책은 점차 동방, 즉 중국으로 전향케 한 방책도 취하였다.

 

이 같은 사정은 특히 독일과 격렬한 대립관계에 있던 영국으로 보아 근동(近東) 문제에 있어 독일의 압력은 그 대보고(大寶庫)인 이집트 및 인도에까지 영향을 미침과 아울러, 중국에 있어서 새로운 불·로국(·露國)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 사면초가의 정세 가운데 소위 영국의 명예와 고립은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영국은 드디어 영·(·) 동맹의 결의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 간의 격렬한 대립의 필연적 소산이었다.

 

영일(英日) 동맹의 성립은 일본으로 하여금 자신 있는 태도로 노국과 교섭할 수 있게 하였다. 1902915일부터 시작된 노국의 만주 철병은 107일에 완료하였으나, 2기 철병기 19034월에 이르러 태도는 일변하여 드디어 군대를 북한지역에 이동시키고 압록강 상류의 삼림벌채를 개시하여 더 한층 조·(·滿) 경영에 노력하였다.

 

이에 노국의 경영 정책은 더욱 노골화 되어, 1903812일 노국황제 니콜라이는 극동위원회와 그 지령을 극동에서 실행하는 극동 총독 설치의 인칙(認勅)을 내려, 알렉세이브를 극동 총독으로 임명하고 문무일절(文武一切)의 전권(全權)을 부여했다.

 

이 극동위원회는 내각 이외의 직할 관청으로 하고 극동의 경영을 한속에 쥐게 하여 일거 만주 병합의 실현을 기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에 대해 노군의 만주 철퇴를 요구하면서, 그 동안 대로(對露)전쟁 준비를 완전히 갖추어 용암포(龍岩浦) 사건을 계기로 190426일 무력적 해결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18개월간의(19042~19059)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돌아가 포츠마츠조약이 체결되고 노국의 동방정책은 좌절되었다.

 

이 결과 그들의 지위는 태평양 강국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한편 승리한 일본의 최대의 수확은 조선의 완전한 획득(통감기를 거쳐 병합=1910) 반독점지(半獨占地) 만주의 획득(만주 선후조약善後條約에 의해 노국이 청국으로부터 얻은 일절一切의 계승)

 

·(·) 전쟁의 패배를 계기로 1905년 혁명이 일어나 동양으로의 야심은 물론 신흥 독일 자본조의의 약진을 가져와 세계 자본주의의 최대 대립은 영·(·)로부터 영·(·)으로 옮겨져 1914년 제2차 세계대전의 기점을 만들게 되었다.

 

<영국의 부추김으로 러시아와 맞서는 일본을 풍자한 그림. 영국이 “네가 뿔을 잡아당기면 내가 꼬리를 잡을게”라고 외치고 있다. (출처 : ‘풍자화로 보는 러일전쟁’ 지식산업사)>

 

 

이상은 마산포를 둘러싼 근대 노일관계를 고찰함에 앞서 1900년 전후 조선을 둘러싼 극동의 국제관계를 극히 개괄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한편 노일전쟁 직전의 노국 궁정의 내박을 보면, 19038월 니콜라이를 회장으로 하고 외무(外務), 대장(大藏), 육해(陸海) 각 대신을 위원으로 하여 극동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이 위원회는 극동의 광대한 영역에 대한 행정권, 극동 육·해군 전반에 걸친 사령권과 한··청과의 외교의 지배권을 가진 극동 총독이 신설되었다.

 

그러나 노국 내 수뇌 간에 대립 항쟁의 극치가 있었다. 베즈브로크파가 일본과 타협하여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비터 캄스드트로프킨등 일파를 봉쇄하고 그들의 모험주의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베즈브로크파에 의해 극동총독으로 임명된 알렉세이브는 육군에 대해서는 물론 해군에 대하여서까지도 극동의 난관에 처할 식견과 수완을 갖지 못해 황제의 총애에만 의존할 뿐이었다.

 

이리하여 대일 정책에 있어서도 사태의 병화에 적응된 정책을 취하지 못하고 황제와 전문(電文)의 왕복에 긴박한 시일만 공비(公費)하였다.

 

제정로(帝政露)는 이같이 외관상으로는 세계의 강국으로 보였으나 내부적으로 대두하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운동에 의해 동요하면서 수뇌부 내부의 대립 항쟁 가운데 열강의 여론이 무시된 채 강경개전(强硬開戰)으로 돌진했다.

 

이들은 대일전(對日戰)에 근소한 승리로 위엄을 보지(保持)하려는데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부 정세는 노일 전쟁 개시 후 작전 수행에도 영향을 끼쳐 총사령관 알렉세이브와 만로(滿露) 군사령관 크로프도킹 사이에 심한 대립이 일어나 전략상에 커다란 오류를 범하게 되었던 것이다.

 

크로프도킹은 노국이 전쟁 준비가 정비될 때까지 일본군과 근소의 전투를 하면서 하르빙까지 퇴각하여 전투력을 강화한 후 맹공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을 알렉세이브의 적극적인 주장에 눌려 드디어 여순(旅順), 요양(遼陽), 봉천(奉天)의 패전을 초래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