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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도시이야기

기억을 찾아가다 - 2

by 운무허정도 2017. 10. 23.

 2. 봉암동 형성

 

팔용산에 수원지가 건설된 것은 1930년이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일인 1일 급수량 170리터 기준으로 인구 16,000명을 예상하고 만들었다가 증축을 하기도 했다. 광역상수도 확장사업이 완료된 1984년 말까지 마산시민의 식수원이었다.

수원지 물은 송수관을 타고 추산동 산중턱에 있었던 정수장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50년대 후반에 민원을 받아 송수관 중간에 지관시설을 하여 정수장으로 가기 전의 원수를 봉암동 주민들에게 주기도 했었다.

수원지 길 들머리에서 백여 미터 올라가면 왼쪽 계곡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여럿 늘려있고, 오른쪽 석벽엔 아직도 홈을 새긴 것 같은 길쭉한 다이너마이트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어, 당시 난공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산악타기 초보자들의 암벽등반 연습장처럼 활용되고 있는 그곳의 암벽도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백여 미터 더 오르면 수원지지역 출입문이 나오고,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십여 미터 다리 너머(지금 운동기구 놓인 자리)에 일본식 건물인 산지기집 두 채가 있었다. 삼사십 평짜리들로 잘 지어진 집들이었다.

해방 후에도 이전 체제를 이어받아 산을 잘 관리하여 도회지 복판의 산인데도 많은 짐승들이 살았었다. 고라니, 노루, 여우, , 늑대, 오소리, 산돼지, 산토끼 등이었다.

정문에서 백 수십여 미터 안에 있는 둑 문 위엔 여천무극(與天無極, 댐 높이를 비유적으로 표한 듯)’이란 글이 시멘트 바탕에 음각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봉암수원지(鳳岩水源池)’라고 써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름 1m 정도의 원통형 공간이 댐 꼭대기까지 뚫려있고, 그 벽엔 쇠사다리, 그 옆엔 눈금 따라 깊이 표시가 씌어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철판덮개를 밀고 나와 둑 위에 섰던 일이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 볼 때의 아찔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둑은 195312월에 증축되었는데 상단 직립부분이 그것이다.

수원지 길을 다 내려오면 마진국도와 맞닿는데, 왼쪽은 봉암다리로 오른쪽은 마산으로 향한다. 지금의 작은 공장들 사이 도로가 그것이다.

오른쪽 길 아래 이삼십 마지기 논 옆엔 청수들(청수淸水는 일본인 매축공사자의 이름으로 추정) 농수 공급용의 오륙천 평 저수지가 있었고(지금 영락원 일대), 서쪽으로 이십여 만 평의 논과 갈대밭이 양덕천까지 전개되어 있었다.

둑길은 저수지로부터 1km쯤 직선으로 뻗었다가 자동개폐식 수문(큰 수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각 100m50m 정도 가다가 팔룡산에서 오는 내()를 건넌다. 이어서 또 하나의 수문(작은 수문)을 거쳐 200m쯤 나간 후 오른쪽으로 100m쯤 가면 끝난다(지금 자유무역지역 후문 근처).

 

<1951년 제작된 봉암동 일대 지도>

 

둑길은 바다와 갈대밭을 끼고 있어 거닐기에 참 좋은 길이었다.

2차 매립공사(현 봉암동과 자유수출지역 사이의 도로, 즉 옛 마진국도를 기준으로 위쪽을 1차 매립지, 아래쪽을 2차 매립지하고 표기)는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해방을 맞은 듯 공사 현장이 1940년대 말까지 우리들의 놀이터 구실을 했다.

팔룡산 자락에 흙 파는 현장이 넓게 있었고, 흙을 싣는 수레(우리는 그것 흙구루마라 불렀다)도 있었으며, 레일도 한길을 가로 건너 바다 둑 근처까지 길게 놓여있었다.

둑을 막고 팔룡산의 흙을 날라 갯바닥을 메우는 공사 방식을 짐작해 본 것은 내가 성인이 된 후였다. 그런 후에야 동네 동쪽의 팔룡산 자락이 급경사로 되어 있는 이유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수레를 위 끝까지 밀고 올라가서는 아래로 밀면서 내려와 속도감을 즐겼는데, 속도에 욕심을 내다가 수레가 탈선하는 바람에 무릎을 깬 일도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차 매립지 상단에 새로 닦다가 해방을 맞아 중단된 큰 도로로 있었다. 우리는 새 한질(새로 난 큰 길의 뜻)’이라 불렀다.

기존도로보다 넓었던 이 도로는 아직 덜 될 부분이 많아 개통은 안 되고 비어 있었기에 동네사람들이 타작마당으로 이용하거나 50년대 중후반에 많이 다녔던 떠돌이광대들이 공연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 길은 1960년대 중후반에 개발되었고, 더 확장되어 지금의 마진국도가 되어 있다.

1930년대에 닦았던 도로는 봉암동 경남은행 뒤의 소방도로로써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