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기억을 찾아가다 - 16

by 운무허정도 2018. 2. 5.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 우리들의 선망대상으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뛰어난 기량을 보였거나 남다른 재능이나 인기 끌 요소까지 겸비한 선수는 우리들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우리들 의식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기도 했다.

매년 815일이 되면 방학 중인데도 모든 학생들은 등교하여 기념식에 참석해야 했다. 식이 끝나면 바로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마산 인구는 전쟁 피난민이 보태져 10만 명이 조금 넘었을 정도였는데도 도로가의 시민들 참여도도 높고 하여 지금 세태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장관을 연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산시내만 사오천 명 되던 중고생들이 학교 위치에 따라 두 시간 정도 행진을 벌였는데, 맨 앞엔 당시 거의 모든 남자고교에 두고 있었던 밴드부가 서고 그 뒤를 학생들이 중대·소대별로 행진했다.

초등학생들은 행진 대열의 앞과 옆을 오가며 잔치 분위기를 돋우었고 구경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어서 그랬겠지만 시민들도 연도에 몰려나와 성황을 이루었다. 변두리 지역을 제외하곤 시내 전체가 축제분위기에 젖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맨 앞줄에 선 악장들의 지휘봉을 이용한 재주피우기와 멋 내기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또 여고로선 유일하게 있었던 제일여고 고적대의 인기도 상당했다. 날씬한 몸매의 고적대가 드럼을 치면서 행진해 갈 때 수많은 조무래기들이 주위를 따르면서 발을 맞추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른다.

<여고 고적대 퍼레이드는 당시 큰 인기였다>

 

행진이 끝나면 오후부터 이틀 반 동안의 체육대회로 들어갔다.

마산시내 모든 중고교들이 그 학교에 두고 있는 체육종목에 참여함은 물론 통제부 팀, 81항공창 팀(공군) 등의 군부대 팀과 초등교사 팀, 신흥방직 팀 같은 직장 팀 등도 종목에 따라 참여해 그야말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진 체육축제였다.

그러니 경기 장소도 모든 학교운동장들이 동원되었다. 그 중 인기 있는 종목 경기가 많이 열렸던 마산상업고등학교(용마고 전신), 무학초등학교의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국수, 국밥, 비빔밥 등과 막걸리를 파는 천막식당들이 들어차 축제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마라톤 경기(1962) / 마산시내 수성동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때도 우리 동네 친구들은 대부분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몇몇 친구들은 국수와 아이스케키 값 정도를 어떻게든 마련하여 아침 먹고 만나 경기장으로 갔다.

이 학교 저 학교 관심 가는 데를 골라 다니며 하루 종일 배고픔도 잊고 돌아다니다 해거름 쯤 집으로 돌아오면서 게임이야기와 선수들 잘잘못 이야기로 신났던 기억은 지금도 즐거운 상념을 불러온다.

그때 우리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대스타가 잊혀 지지 않는다.

정재문이라는 2년 선배였는데 그는 내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동네 형들로부터 이름을 여러 번 들었을 정도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입학식 날 대대장으로서 구령을 붙이던 때였는데, 그때 본 모습은 소문대로 참 훤칠했다. 키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도 준수했다. 대대장으로서의 통솔력도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런 그가 당시 마산시내 중학교 최고의 투수에다 공부도 상대가 없을 정도로 우수했으니 명성이 자자했던 건 당연했다.

특히 8·15경축기념체육대회에 대비하느라 합숙훈련을 하면서도 휴식시간엔 가교사로 된 합숙소 앞 그늘에 책걸상을 내어놓고 공부하던 모습과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마산동중과의 야구경기에서 강속구를 뿌려 열 몇 개의 삼진을 잡아 우리를 열광시키던 모습은 워낙 인상이 깊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그는 그 후 선생님들의 권유로 전국의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경기고등학교에 응시하여 3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선생님들이 자랑삼아 얘기하여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도 투수로 활약하면서도 2학년 올라갈 때는 수석 했다는 소식도 같은 경로로 들었다.

그 후 40년도 더 지난 뒤 듣게 된 후일담.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갔고 장성 계급장을 달지 못했다고 했다.<<<

(편집자 주 ; 196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정재문 씨는 월남전에 참전(1969~1970)하였고 1985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그후 쌍용그룹에 입사하여 쌍용건설 전무이사를 지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을 찾아가다 - 18  (0) 2018.02.19
기억을 찾아가다 - 17  (0) 2018.02.12
기억을 찾아가다 - 15  (0) 2018.01.29
기억을 찾아가다 - 14  (0) 2018.01.22
기억을 찾아가다 - 13  (0) 2018.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