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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8 07:00

‘유후인’ - 상상력이 만든 유토피아


모든 도시는 나름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
항만, 산악, 내륙 등 자연조건뿐 아니라 교육, 문화, 역사 등 사회적 조건도 도시마다 다르다.
도시의 고유한 특성은 그 도시의 성격을 규정짓고 발전방향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최근 우리나라의 도시개발 흐름을 보면 이처럼 도시의 고유한 특성에 기초한 창발적 개발 보다는 외부의 힘에 의존하려는 사례가 많다.
국가보조금이나 거대한 외래자본의 유입 혹은 정부의 공공사업을 유치하여 그 파급효과를 통해 관련 산업의 성장은 물론 소득이나 고용을 높인다는 계획을 말한다. 이른바 외래형 개발방식이다.
그 자체가 비판 받을 일은 아니지만 모든 지방자치단체에서 이런 식의 개발만 꿈꾸니 문제라는 말이다.

내생적 개발방식은 외래형 개발방식의 상대적 개념이다.

그 도시의 자연적 사회적 조건 중 타 도시에 비해 경쟁력이 있거나 우위에 있는 자원을 활용하여 발전 동력을 찾는 방식이다.
한 방에 뭔가를 해보려는 외래형 개발방식에 비해 규모가 작을 수 있고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다국적 기업이 지배하는 세계경제 아래서 다소 유토피아적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우려와 달리 지방도시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 널리 선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실제 성공을 거둔 도시들도 많다.

내생적 발전으로 성공한 사례 중 대표적인 곳이 일본의 유후인이다. 어떤 이는 유후인을 일러 큐슈의 보물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자그마한 시골마을 유후인의 성공이 우리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크다.
온천마을이기 때문에 마산 양촌이나 창원 북면과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후인의 한 여관 정원>

1960년대까지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던 유후인은, 일본인들이 평생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최고의 휴양지로 변했다.
그 변화에는 대도시로 나갔다가 낙후된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젊은이와 그들을 믿었던 주민들의 결단과 내생적 개발철학이 깔려있었다.

60년대 일본관광산업은 대부분 자연경관이나 문화유산이 대상이었고 밤 시간은 남성위주의 유흥뿐이었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유후인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다섯 가지 성공요건을 만들어 승부를 걸었다.

첫째, 자연이 주는 편안함 속에서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들과 조용히 즐기면서 쉴 수 있는 관광지로 만들었다.
마을 복판을 지나가는 개천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논을 비롯한 산과 호수 등 자연환경을 주요관광자원으로 삼았다. 건물도 2층 이하의 전통양식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연출되도록 했다.

둘째, 안전한 관광지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0년 일본야쿠자 조직 실력자의 출소를 축하하기 위한 잔치를 유후인에서 개최하려고 했다. 하도 큰 조직이라 돈 맛을 좀 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하지만 유후인에서는 당일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 철시운동으로 야쿠자의 잔치를 거부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일본 전역에 알려지면서 유후인에서는 젊은 여자 혼자서 머물러도 아무 탈이 없다는 안전한 관광지로 부각되었다.

셋째, 생각이 깃든 경관을 조성하여 관광객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는 마을로 만들었다.
나무로 담장을 만들고 집집마다 아름다운 꽃을 가꾸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관광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잔잔한 즐거움을 더해주고 있다.

넷째, 관광수입이 지역주민 모두에게 환원되도록 했다.
유명한 관광지일수록 소득 대부분이 대기업이나 다국적기업의 이익으로 연결되는데 비해 유후인만의 매우 독특한 특징이다.
온천여관의 규모를 키우지 못하게 하여 지역민 누구나 여관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름다운 논이 있기에 유후인의 가치가 높아진다고 생각, 관광업으로 올린 수익의 일부는 주변에서 논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돌리기도 한다.

다섯째, 유후인만의 관점에서 옛 전통을 살려냈다.
자신들이 가진 것은 무엇인지, 무엇으로 승부해야 이길 수 있는지 고민했다. 대도시 따라하기만 하면 아무리 해도 도쿄나 벳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안 그들만의 철학이었다.

이 다섯 가지 비전으로 시골의 조그맣고 낙후된 농촌마을이 일본 최고의 휴양지가 되었다.

그 날도 온 마을에 관광객이 넘쳐나고 있었다.
나는 이 작은 마을에서 흘러나온 소문을 확인해볼 요량으로 이곳저곳 샅샅이 살폈다.
대단한 비경도, 위대한 문화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편안하고 맛갈스러운 느낌의 자그마한 관광지였다.
하지만 달랐다.
우리처럼 불쑥불쑥 대형 건물들이 경관 배런스를 깨고 있지도 않았고 가게와 식당의 분위기와 내용도 우리네 온천과는 확연히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람, 자연, 시설, 상품, 음식까지 모두 조화로웠다.

그들은 농촌이라는 특성을 살려 주변의 자연환경을 살렸고, 공장제품이 아닌 자연식품으로 관광객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있엇다.

요리의 원료도 그곳 농민들이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채소와 곡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건강한 생활을 원하는 일본 관광객들로부터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예술적 분위기의 온천거리와 특색 있는 기념품가게는 물론, 전통공방과 미술관까지 갖추었는데 수준이 상당했다. 어떤 이는 '일본관광지 중 최고' 라 자랑하기도 했다.

온천이 딸린 여관의 기념품 가게에서는 그곳 농민들이 직접 만든 잼이나 김치, 목제품 등을 팔고있었다.
가게와 식당은 한 품목만 취급하는 전문점이 많았다.
모양도 색깔도 똑 같은 공장제 기념품을 파는 가게, 똑 같은 메뉴로 손님을 받는 우리의 식당과는 차이가 많았다.

인구가 만 명이 조금 넘는 이 작은 마을에 연간 37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다.
'상상력이 만든 유토피아'  유후인은 그런 곳이었다.

멀리 갈 것 없다. 북면온천과 양촌온천을 보자.

온천욕 후 먹을 음식이 닭백숙과 두부에 막걸리 정도뿐이다.
가족들과 호젓이 걸을 길도 없다.
체험거리도 구경거리도, 그곳에 가야만 살 수 있는 선물거리도 없다.
그저 목욕 후 백숙 먹고 후다닥 돌아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온천지역 내에서는 1박2일 일정잡기도 어려운 시설수준이다.
낯 뜨거운 러브호텔은 왜 그렇게 많은지.

알아야 한다.
온천과 백숙만으로는 경쟁력을 높일 수도, 사람을 붙잡을 수도 없다는 것을.

                        <유후인의 가게거리(위)와 노천온천탕(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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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상완 2010/03/22 21:04 address edit & del reply

    일본관광 펫키지 상품속에 반드시 들어 있는 유후인...

    양촌/북면/유산 숯가마...

    오버랩이 잘 안되는군요...

    누구의 노력이 더 요구되는 것일까요...

    • 허정도 2010/03/23 08:33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안타깝습니다, 이런 문제들 생각하면.

2010/01/24 14:30

‘구(舊) 마산형무소 터’ 의 추억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일곱 번째 길에 나섰다.
1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 반, 코아 양과점 앞, 30여명이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짙게 흐렸고 기온이 낮았다.
코스는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 시작하여→구 마산형무소 터→오동동 일대→오동동 아케이드→용마고등학교→지하련 거주지→산호동 효자각→용마산→구강포구까지였다.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는 특별손님으로 3.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님이 직접 나와 의거에 대해 설명해주어 의미가 더했다.
한때 화려했던 오동동의 밤 문화에 대한 설명은 이승기 선생님께서 맡았는데 두 분은 마산상고 동기생이시다.

가는 곳곳마다 새로운 걸 느꼈고 배웠지만, 여기서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구(舊) 마산형무소 터’에 관한 글을 올린다.

                                    <일곱번째 탐방 코스>

     <3.15의거 발원지 표시동판과 의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백한기 회장님>


8년 전 2002년 벽두,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시민운동을 벌였다.
마산YMCA를 주축으로 ‘한국은행터 공원만들기 마산시민행동’을 조직하고 상임대표를 맡아 운동의 중심에 섰다.
달포 만에 무려 10만 여명의 서명을 받았고, 그것을 마산시의회에 제출 청원하였다.
하지만 부결되었다.

우리들이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려했던 까닭은 ‘도시환경’이라는 측면과 ‘터의 역사성’ 때문이었다.

             <공원만들기 운동의 발대식과 거리서명 캠페인 장면, 2002년>

돌이켜 보자.
마산은 1899년 개항이후 일제 강점기의 무차별한 개발과 매립, 해방 후 귀환동포 정착, 6.25 피난민 정착, 60년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에 의한 산업화 등 다른 도시가 경험하지 못한 격랑의 세월을 겪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언제 한 번도 도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천혜의 자연이 있었지만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기응변으로만 해결했다.

도시의 질이 급격히 낮아졌고, 시민들도 도시환경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구(舊) 마산형무소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고 나선 것이다.
공원으로 하기에 충분한 땅은 아니었지만, 도심에 나온 시민들에게 짧은 여유라도 즐기게 해주고 싶었던 하나의 작은 몸짓이었다.

이야기를 먼 곳으로 돌려보자.
건강한 사회는 시민 스스로 생활의 제반 문제를 대응한데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런던의 하이드파크는 원래 왕이 사냥을 즐기던 숲이었다. 하지만 도심공원이 없었던 런던시민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세계최고의 공원이 되었다.
협상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런던시민들이 울타리를 헐어버렸던 것이다.
이른바 오픈스페이스운동, 하이드파크는 이런 격동의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운동’도 바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자연적 문화적 유산을 시민 스스로 보존하기 위한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영국 전 국토의 1.5%, 해안의 17% 가량을 소유하여 공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런던 하이드 파크>

이야기 하나가 더 있다.
사람살기 가장 좋다는 밴쿠버 이야기이다.

1886년 5월 12일 오후 7시 30분, 밴쿠버 최초의 시의회가 열렸다.
당시 밴쿠버 시민은 2,600명이었다.
이  첫 회의에서 의원들은 영국해군기지였던 땅 120만 평을 공원부지로 결정하였다. 민간에 매각되어 주택지나 산업단지로 개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공원이 밴쿠버가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스탠리파크’다.
124년 전, 인구 2,600명 도시에 120만 평의 공원을 만든 밴쿠버의 결정.
이 결정과 이 비전이 오늘날 밴쿠버를 세계최고의 도시로 만든 주춧돌이었다.

                                         <밴쿠버 스탠리 파크>

밴쿠버 시의회 최초의 결정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깊고도 넓다.
몇년 전, 인구 42만 도시의 마산시장은 1,500평 한국은행 터에 1/3은 건물을 짓고 나머지 천 평만 공원으로 하자는 계획을 발표한바있다.
40만 인구에 1,500평과 2천6백명 인구에 1,200,000평.
왜 마산은 날로 쇠락해가고 밴쿠버는 왜 오늘날 세계최고의 도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리자.
마산형무소 터의 지난 세월은 질곡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일제통감정치시절이었던 1909년에 부산감옥소 마산분감으로 사용된 후 무려 60여 년 간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자리다.
일제 때는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후에는 좌우이념갈등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갇혔던 곳이다.
3.1운동 때에는 유명한 삼진의거를 비롯하여 마산, 함안, 창원, 웅동 등 인근지역에서 만세를 불렀던 모든 선조들이 이곳에 갇혔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여성 정치인 박순천도 갇혔던 곳이다.


           <일제기 마산 형무소>            <'마산형무소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정부가 수립되었던 1948년,
마산의 시인 월초 정진업은 이 형무소에 갇힌 친구를 생각하며 갇히지 않았던 시인의 아픔을 토했다. 「골목길」이라는 시(詩)다.

가치운 몸은 달라도
창살 틈으로 보내는 눈초리는
오직 한마음이라                     

네 손발의 사슬이 풀렸기로
오히려 억압은
첩으로 쌓이는데
아직도 무릎 꿇고
무료히 앉아 있을
벗의 닫혀진 억울한 세월을
너는 어이 잠시라도
잊어보는 것이냐?

고문에 항시 못 이겨        
이를 갈던
공포와 저주는
그래도 잊혀지지 않아                         


총을 멘 보초들 서있는
돌문 앞을 지날 때마다
죄 없이 조라드는
겁 많은 마음이

나무 가지 사이로
철창을 노리고
이룩할 민주의 나라                        
이리 더딤을 한탄하면서                              
밖에서 내 다만 참답게
일 하겠노라
인욕(忍辱)의 벗에게
머리 숙이며 가는
밤마다 정이 드는
나의 골목길이 있다.

식민지시대의 감옥은 단지 신체를 속박시킨다는 의미 외에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다. 공원은 근대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시의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터가 공원으로 변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 「근대시민의 자유공간」으로 바뀐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제시했던 자료 / 왼쪽은 당시 현장상황, 오른쪽은 공원조감도>

이제 세 도시가 통합되면 도시의 큰 그림은 다시 그려질 것이다.
따라서 이 터를 공원으로 하는 문제를 두고 ‘옳다 혹은 그르다’ 식의 논의는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터를 보니 마산의 도심공원 문제가 다시 떠올라 몇 자 적는다.

공원문제가 이 도시의 쟁점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터 외에도 신포동 매립지를 아파트만 지을 게 아니라 일부를 공원으로 하자는 운동도 있었다.
모두 실패하였다. 마산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지정된 마산시의 공원의 면적은 자그마치 240여만 평이다. 이 면적은 마산 인구 일인당 약 6평 가까이 되는 규모다.
도쿄와 오사카의 공원 면적이 1인당 고작 1평 내외, 세계적인 도시 파리가 3평 반, 몬트리올이 4평, 뉴욕이 5평반인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 큰 규모다.
1인당 9평이나 되는 런던보다는 작지만 어쨌든 통계상으로 마산은 공원의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건 말 그대로 통계일 뿐, 현실은 전혀 아니다.
이미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던 산과 계곡을 공원이라 이름 붙여 통계로 잡은 것이다.

이 도시에는 시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제대로 없다.
해변공원은 아예 없고 만날재 공원은 주로 행사용으로 쓰인다. 양덕동 삼각공원은 접근성이 나쁘다.
서항매립이다, 구항매립이다 하면서 20여 만 평의 해면을 매립하고서도 그럴듯한 도심공원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민들과 바다를 단절시켰고 수변공간계획은커녕 해안 전부를 자동차가 씽씽 다니는 길과 수입 원목들이 차지해 버렸다.

지금 계획되고 있는 ‘마산비전 2020’에 중앙공원, 산호공원, 추산공원 개발을 비롯하여 돝섬유원지개발, 구산해양관광단지개발, 팔용유원지개발 등 공원개발 계획이 다양하게 세워져 있지만 어디 한군데 도심공원은 없다.
엄청난 시설비를 요하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산을 공원화하는 것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토록 철저하게 도심공원이 없는 도시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생활 속에서 이용할 수 있는 공원계획이 시급하다.
화려한 언어로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도심 속에서 생활 속에서 쉬기도 하고 걷기도 할 수 있는 공원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시민 1인당 공원 6평이라는 허구를 현실화시켜야 한다.

해안도시라면,
적어도 바닷가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30분 정도는 편안히 걸을 수 있는 공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키 큰 나무 아래 잔디 깔린 바닷가에, 사람들이 걷고 자전거가 달리고 벤치에서 연인의 속삭임이 들려야 해안도시 아닌가?

도심공원이 전무한 도시,
바다가 있지만 바다와 차단된 도시,
역사의 가치에 관심 없는 도시,
그리하여 성장 동력조차 상실한 채 인근도시와의 통합 외에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게 된 도시......

이 도시의 '희망찾기'는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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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림 2010/01/25 11:40 address edit & del reply

    선배님 저도 찬성입니다.
    그 곳이 공원이 되면 아마도 오동동 창동 거리도 조금 북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창동에서의 추억이 많은 세대로서 늘 아쉬운 부분이지요
    어차피 구 상권일바에야 추억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만드는 것도
    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황량한 그 곳의 모습은 지날때만다 늘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통합 새도시에선 ...잘~ 되길 바랍니다.

    가포탐방때 뵐께요 ^^

    • 허정도 2010/01/25 16:38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도심공원이 없는 게 마산의 걱정인데 딱히 이곳이 아니더라도 도심에 좋은 공원하나 들어서면 참 좋겠습니다.

  2. 조원문 2010/01/27 11:11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 회장님 정말좋은 마산의 역사를 배우고갑니다
    저도 마산 토박이인데,,,,죄송 합니다,,너무 모르고 있었읍니다,

    지속적인 마산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많은 자료보도록 하겠읍니다.
    정말 수고 많이 했읍니다...

    • 허정도 2010/01/27 16:11 address edit & del

      반갑소.
      마산과 관련해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2010/01/21 13:00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청주는 일제강점기때 지금의 양주못지 않은 고급술로서 주당들의 사랑을 받았던 술이다. 최근들어 젊은층에서 일본수입산 청주, 본토말로 사케를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마산이 청주 생산의 원조도시로서의 아픈(?) 역사를 찾아보고자 한다. 일제 강점시기에 마산은 청주주조장의 집산지에 해당되었다. 마산에 존재했던 청주공장들을 찾아서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료의 한계로 내용상 명료하지 않은 부문과 오역된 부분에 대한 지적과, 혹 관련자에 대한 제보를 주시면 내용을 보완해 정리할 계획이다. 블로거님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일제 강점기의 주세령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장 먼저 실시하였던 일이 토지조사와 주류조사였는데. 그 이유는 식민지 수탈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이전 까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일곱 집에 한 집꼴로 술을 빚어 마셨다고 하며, 조선조에는 술에 대한 과세나 전매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개인 집에서 다양한 술을 빚어 마시는 가양주문화가 그 특징이었다.

일제는 1907년 7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령 공포로 제일 먼저 주세를 세금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세령이 강제집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전통주는 맥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1916년 1월에는 주류 단속이 강화되는 가운데 전통주류는 약주, 막걸리, 소주로 획일화시켜 우리의 전통 고급주를 사양시켰고, 1917년부터는 주류제조업체가 정비되면서 자가양조를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러한 반면 일본의 청주는 마산에 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04년부터 청주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주세법에 의해 가양주의 전통을 전면 금지한 반면 일인들에 의한 청주공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마산을 청주의 도시로 변경시켰다.

청주의 도시 마산
마산에서 청주산업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려면 1924년 경상남도에서 발행한 마산의 공장통계에서 보면 주조공장이 6개, 장유양조장 1개, 정미소 2개, 제면소 1개, 철공소 2개로 나타나 있다. 개항이후 약 10년에 걸쳐 제법 규모 있는 공장을 분류하였을 때 청주 주조장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조계지를 설정한 구역 내에 제일먼저 조계지 끝 지점에 해당하는 일성펌프자리에 아즈마 주조장(1905)을 시작으로 하여 원마산까지 청주주주장을 만들었다.이후 설립된 공장은 1920년대에 13개의 공장에서 4천 400석을 생산하였으며, 이후 1928년에는 12개 공장에서 1만 1천석을 생산하여 조선의 지역별 청주생산실적에서 부산업계를 제치고 제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변천과정
1900년도에 설립된 청주주조장은(상공회의소 100년사, 마산시사 1996 참조) 최초의 주조장은 신마산 일성펌프자리에 1904년에 설립한 아즈마(東) 酒造場이 있으며, 원마산 서성동에서 1905년에 설립된 이사바시(石橋) 주조장, 장군동에 06년에 설립된 五反田 酒造場, 같은 해에 청계동에 설립된 永武 주조장, 07년 홍문동에 설립된 니시다(西田) 주조장, 08년 상남동의 岡田 주조장, 지시마엔(千島園) 酒造場은 장군동에 09년에 설립되었다.
이미 1900년대에 7개의 청주주조장이 신마산, 중앙마산, 원마산 등지에 설립되었던 것이다.
설립연도가 중복되는 공장이 2개 있는데 이시바시 주조장과 지시마엔 주조장은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과 1925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우 년대가 앞선 자료를 기원으로 보아서 정리하였다.
당시 마산의 주조장은 내수용에서 시작하여 만주와 중국대륙에 수출용까지 생산하게 되어서, 1938년 2만석을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1939년 가뭄으로 인한 쌀 수확의 흉작으로 사용량을 제한하여 당초량 보다 20% 즐인 1만 7천 여석만을 제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시 통제령에 의해 생산량을 제한받아 생산품도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지정하여 생산 공급하였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동란기에 불하를 받은  공장들은 12개의 공장들은 운영부실로 60년대 초반에는 7개의 주조장만 남아 생산을 하다가, 다시 5개의 공장이 없어지고, 3개의 공장이 생겨나서 5개의 공장으로 유지되다가 1973년 지방의 중소주류업체 통합법에 의해 백광청주만 홍문동에 남아 있다가. 70년대 후반에 하나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역사

1. 아즈마(東)주조장(1904) - 하라다(原田)주조장(1923) - 동화주조(정기운)(1946-60? )
 마산에서 최초로 생긴 청주주조장이며 마산의 4대 양조장의 하나이다. 개항기인 1904년 마산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던 아즈마(東) 양조장을 1923년 하라다(原田淸一)가 매수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연간 양조량은 1천석 내외이고 상호는 명주「한목단」(寒牧丹, 간보단)이었다. 이 공장의 연간 생산량은 1,000석 내외였다. 월남동 5가 1번지에 위치하며 해방이후 구.일성펌프(46.7.1, 최성주)공장이 일부 설립되었으며, 하라다 주조장은 미군정청에 접수된 이후 정기운이 불하를 받아서 동화주조라는 상호로 청주를 생산하였다. 이후 1955년 공장명부에 등재되어 있었으며, 1961년 상공회의소의 공장명부에 없는 점으로 보아, 50년대 후반쯤에 청주생산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조장 부지는 일성펌프 공장과 유남상가로 지속되다가 2000년에 신축건물 일성프라자가 공장부지에 들어섰으나, 얼마 후 소유권이 공중분해 되었으며, 현재 상가도 폐가처럼 비어있다. 특이 이 땅은 개항초기에 마산 최초의 러시아 호텔이 있었던 자리로도 알려져 있다. 여러모로 로 유명세를 가진 땅인데, 땅도 주인을 잘만나야지, 옛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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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최초의 청주 아즈마(東)주조장의 현재의 모습)

 2. 이시바시(石橋) 酒造場 (1905.10)- 대흥주조(문삼찬) (1946-60년대?)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2천엔으로 1905년 10월 서성동 16번지에서 석교시태랑(石橋市太郞)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 이시바시(石橋市太郞)가 설립하여 1926년 아들에게 계승된 이후 마산부 幸町(현 서성동)에 공장을 신축해서 연간 500석 가량의 청주를 생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상표「大典正宗, 다이덴 마사무라」이었다.
해방이후 이시바시(石橋)주조는 문삼찬이 불하를 받아 상호를 대흥주조로 바꾸었다. 당시 직원은 6명이 소규모 공장이였으며, 1970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6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상호를 芙蓉으로 사용)

*우리가 흔히 정종이라하는 것은 일본의 청주 상호중에 정종(正宗)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유명한 청주가 많아서 고유명사화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사실은 올바른 표현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상호 예 : 대전정종, 학정종 등)
(현재의 위치는 서성동 덕천상가아파트 필지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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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장의 위치는 덕천상가아파트에 포함됨)

                                                                 
3. 고단다(오반전/
五反田) 酒造場 (1906.10)
장군동에 06년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청주주조장으로 마산야화에 의하면 사입(仕入)에 부주의한 탓으로 파산하였다고 함. 파산시기는 해방이후 귀속주류업체 현황(1953)에 없으므로 해방 전후 시기로 판단된다.
(위치는 마산야화에 의하면 96년에 관광센터가 있던 '푸른집'자리라고 한다.)

3. 엔무(영무/永武) 주조장(1906.11)
신마산 조계지내 청계동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주조장으로 인접한 부지에 적문장유양조장(1906)이 있었다. 당시 생산한 정종은 학정종(鶴正宗)이었다. 마산야화에 의하면 종전(52년) 당시까지 정종을 생산하였다고 하였으며, 1953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지번은 없지만 청계동이 몇필지 않되는 적은 동임을 감안하여 추정할 때, 공장의 위치는 현재 문화동 주민센터이거나 인접 주택필지로 보인다.

4. 니시다(西田) 주조장 (1907)- 삼성주조(신봉희)(1946) - 백광주조(이우현/이성훈)(60-79?)
마산에서는 가장 오래된 양조장의 하나이다. 창업주 일본인 니시다(西田木摠市)에 의해 자본금 2만엔으로 1907년 11월 설립되어 마산부 영정(榮町: 현 홍문동9)에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의 양조량은 1926년에 600석에 불과했으나 3년후인 1929년에는 2배가 넘는 1천300석의 실적을 올렸다. 생산한 청주상표는 「鷄林」(계림, 게이링)이였다. 해방이후 신봉희가 불하를 받아서 삼성주조로 상호를 바꾸어 청주를 생산하였다. 종전(1952년)까지 제품을 생산하였으나 1961년 쥬류제조업체 현황에 의하면 동일 위치에 백광주조장으로 상호가 변경되어 백광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때 대표자는 이우현이었으나 1973년 주류업체의 통폐합에 따라 73년 10월 18일 백광주조장만이 마산에서 청주를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으며, 대표도 이성훈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직원이 33명이었다. 한편 인접한 지역 홍문동 6번지 상의 염록주조장 인수하여 동시에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백광양조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하나만 남아 있다가 연생산량이 3,500kl 내외에 지나지 않아서 7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마산에서 70년대 후반까지 청주를 생산한 마산 최후의 공장으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 공장건물은 80년대 초반까지 남아서 롤러스케이트 연습장으로 사용되었다가. 90년대(?)에 신동아 빌라 공동주택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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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전주조장의 조감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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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전경,중앙상단이 서전주조장, 하단의 공장은 녹수주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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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전주주장은 현재 신동아빌라가 들어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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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백광청주 상표)

5. 강전(岡田) 주조장 (1908.9 - ?)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나타나는 공장이다. 상남동에서 자본금 1만2천엔으로 설립된 기록만 남아있으며, 이후의 기록은 없다. 해방 이전 양조장이 폐업했거나 용도변경(탁주, 소주, 장유)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위치확인은 불가능하다.

6. 지시마엔(千島園) 주조장 (1909.10) - 삼광주조장(손삼권)(1946-73)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5천엔으로 1909년 10월 마산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서 엔도우(遠騰豊吉)에 의해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25년 창립한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생산한 청주는 명주 「彌生」(미생, 야요이)의 상표로 연간 500석 정도를 생산 판매했다.

해방이후 지시마엔(千島園)주조는 손삼권씨가 불하를 받아서 그대로 천도원주조로 했다가 뒤에 삼광주조로 변경하였다. 이후 손삼권씨는 인접필지에서 염국모가 운영하는 칠성주조장을 인수하여 삼강주조로 변경하고 2개 공장 삼광, 삼강을 동시에 운영하다가. 19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엽체 통합조치에 의해 폐업하였다. 다행히 공장건물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창고 및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공장의 규모는 삼강주조장이 더 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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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광주조장의 60년대모습과 현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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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삼광청주 상표)

7. 이데(井手) 주조장(1911.10) - 칠성주조장(염국모) - 삼강주조장(손삼권)(1946-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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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조장의 현재모습, 삼광주조장과 같이 운영되었다.)

 1911년 10월 井手倬次郞에 의해 창업, 마산부 개정(신흥동)에서 연간 500석 정도의 청주 ‘總督’을 생산.1930년부터 상표를 朝乃灘(조내탄, 아사노나다)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이데(井手)주조는 칠성주조(염국모)로 바뀌어 청주생산을 계속하였으나 1961년 이후 인접필지에 있는 삼광청주의 권삼문에 의해 상호를 삼강으로 바꾸어 유지되다가 73년 폐업된다. 공장건물의 외부원형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현재 다가구 주택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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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칠성/삼강주조장과 현재의 후면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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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생산된 삼광청주, 삼강청주)


8. 미요시(三好) 주조장(1913) - 삼일주조장(이우식-정명갑-문병대)
(1952-196?)
마산부 부정(富町: 현 부림동 103)에서 미요시(三好彌三郞)가 1913년에 설립했다. 연간 생산량은 400석 내외이고 상표는 松乃色. 해방이후 - 미요시(三好)주조는 휴전 이후에 삼일주조(이우식)이후 정명갑으로 바뀜 (三一주조장/ 鄭明甲/ 부림동103/ 7), 당시 생산한 청주의 상호는 觀海였으며, 1961년 이후 폐업되었으며, 위치는 부림시장 아래편쪽에 1969년 설립된 백광소주(문삼찬)과 인접한 공장이었다. 지금은 위치는 부림동 구.화남상사건물이 있던 위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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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주조장의 50년대 모습)



9. 히라이(平井) 주조장(1914.4) - 조해주조(서준보)(1946-196?)
1914년 4월 히라이 (平井政太郞)에 의해 창업되었다.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공장을 갖고 명주「취향」(醉香, 스위꼬)을 생산했다. 연간 양조능력 2천석의 대형 양조장이었다.
해방이후 히라이주조는 조해(朝海)주주식회사로 서준보에 의해 불하되어 운영되었다. 위치는 중앙동 2가6번지로 그 터에 현재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1961년 공장등록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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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마산역옆의 조해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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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모습, 마산역은 아파트로 변하였고--)

           
10. 합자회사 시미즈(淸水)
(1927.6) - 대동주조(이병진)(1946-60) - 무학주조(최위승)(1973-84)
마산에서 제일 큰 규모의 양조장이었다. 1921년 시미즈(淸水篤行)에 의해 창업되어 1927년 6월 사원공동 출자15만엔(円)의 법인체로 바꾸었다. 시내 야나기마찌(柳町:신창동13)에 자리한 이 공장의 생산능력은 연간 1만 3천500석 1928년에는 당시의 마산의 양조업계 총생산량인 1만석의 25%에 해당하는 2천500석을 생산했다. 이 회사 생산품인 청주 「대정앵」(大正櫻, 다이쇼 사꾸라)과 <井筒平>은 만주와 중국대륙에까지 판매했다.

해방이후 시미즈 :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해방이후 대동주조(대표 이병진)로 명의가 변경되었다. 당시 대표 이병진은 중앙동에 마산주조회사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온다. 마산주조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공장을 가동하였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 진주 가도변으로 판단되며, 현재 위치는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대동주조도 같은 기간 동안 생산을 하였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후 1973년에 무학주조가 경남지역 36개 소주회사를 통폐합하여 본 대동주조공장으로 이전하여 무학소주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경되어 사용되었다. 이후 1984년 무학이 봉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무학빌라 공동주택이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미즈(淸水)주조장의 흔적은 인접한 창원천의 다리이름 청수교(淸水橋)에서 그 기억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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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수주조장, 대동주조장, 무학주조로 변경된 공장의 과거와 현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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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수주조에 인접한 청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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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주조, 1945-60, 이병진)


11. 하마다(濱田) 주조장 (1923) - 옥포주조(이태익)(1946-60)
마산부 신정(新町 : 현 추산동)에서 하마다(濱田慶治)가 1923년에 설립, 연간 양조량은 500석이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청주 金盃濱鶴
(금배빈학, 긴빠이 하마쯔루)의 명성은 꽤 높았다.
해방이후
하마다(濱田)주조는 옥포주조(이태익)로가 인수
1961년 당시 공장등록대장에 없으므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는 중앙극장 우측 내림길에 있다고 전하며, 현재 지번이 없어 찾을길이 없다.
 
    
12. 무라자끼(村崎)주조장(1925) - 염록주조(김상현)(1946-60)
1925년 당시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있던 다무라(田村) 주조장을 무라자끼 (村崎仁三郞)가 인수하여 영정(營町: 현 홍문동6)에 새 공장을 세워 이전했다. 옛 상표 摠富士였는데 새로「艶綠」(염녹, 쯔야미도리)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무라자기(村崎)주조는 엽록주조(김상현)로 되었다. 인접한 홍문동 9번지에 백광주조장을 가동하던 이우현에게 인계하여 두 공장에서 백광청주를 1970년대 후반까지 생산하였다. (염록은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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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조장의 현재모습)

00 녹수(錄水)주조장/ 李雨鉉/ 홍문동3/ 8-(1950?-1965)
녹수주조장은 53년 공장등록명부에는 없으며, 61년 주류업체 현황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50년대 중후반에 설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공장위치는 홍문동 3번지로 백광주조장과 인접한 위치에 있다. 이후 1965. 11. 10에 청주공장은 최계정에 의해 백광장유양조장으로 전업하여 영업(마산 홍문동 3-4, 최계정)을 개시하여 간장, 된장, 식초를 생산하였다. 당시 직원은5명이었다. 이후에 공장부지에 배진아파트가 들어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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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수주조, 백광양조 공장터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3. 마쯔모도(松本) 주조장 (일제말기 -1945) - 금포주조?(김행도)(1950?-1960)
마산에서는 가장 늦게 생긴 양조장이다. 일제말기 마쯔모도(松本通)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 새 공장을 세우고 명주 月乃浦를 생산했다. 이외 특별한 기록이 없으며, 해방이후 쯔기노우라(月浦)주조가 김행도에게 불하되어 금포주조로 바뀌었다. 둘 다 장군동인 점을 감안하며, 월내포가 월포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허나, 금포주조 역시 5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61년 주류업체현황에 보이지 않는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으로 추정한다.

00 이 외에 나타나는 주조장은 중앙동에 동성주조(주)가 이만희에 의해 해방이후 설립되어 60년도 이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14. 야마무라(山邑)주조 마산공장- 동양주정(1952)-무학주정 -유원산업 창업(동양주정과 합병, 1960)
일본에 본사를 두고 청주 櫻正吉」(앵정길, 사꾸라 마샤요시)을 생산하는 야마무라(山邑)주조 주식회사가 1929년 4월 마산부 본정(本町: 현 월남동)에 마산공장을 세워 만주와 중국에 수출할 청주를 생산했다. 해방이후 야마무라(山邑)주조는 무학주정으로 개칭하며 주정과 소주를 생산하였으며, 65년이후 주정만을 생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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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15. 쇼와(昭和) 주류공업사
일본 야마무라(山邑) 주조의 계열사로 1929년 4월 10일 자본금 50만엔(円)으로 설립된 종합주류회사이다. 1929년 9월부터 본정(本町 :현 월남동) 해안 매립지에 신축한 공장에서 주류생산을 시작했다.
창업 초기에는 년간 청주 1천석정도 생산했으나 1935년부터 청주는 야마무라주조에 넘기고 기타주류(소주, 미린주, 포도주, 기타 위스키, 브랜드 등)을 생산하였다. 이외 합성주인 이연주(理硏酒) 一新과 소주 明月과 양주 등을 생산하였다. 해방이후 유원산업으로 변경, 1952년부터는 증류주만을 생산하였으나 이후 1965년부터 희석식 소주만을 생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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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직후 주조장 현황
시내 13개 청주양조공장들도 해방과 함께 미군정청에 접수되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 청주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이를 맡은 관리인들은 먼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상호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새로이 출발한 청주공장들을 1946년 세무당국으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받아서 나름대로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극심한 식량난 때문에 청주의 원료인 쌀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양조시설 역시 빈약해서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기득한 관리권을 다른 제3자에게 넘겨 버리는 공장도 생겨났다. 이들 청주공장들도 1951년 이후에 연고자들에게 모두 불하 되었다.
6·25사변으로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던 마산의 청주업계는 휴전이 되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이 결과 업자들은 서로 합의하여 서울지역에의 진출을 위해 서울지역 출고분에 한해서
銘花라는 한가지 상표로 공동 판매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업자 서로간의 이해에 얽힌 불신과 갈등으로 공판제 실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후 업자들의 과잉 경쟁으로 덤핑판매가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低質酒가 나돌아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고 경영적자가 누적되면서 문을 닫는 업체도 생겨 1961년 겨우 7개 양조장이 조업하고 있었다.

60년대 이후 현황
1971년 마산의 청주생산량은 청주86만2,100L 이고, 합성청주는 17만1,790L였다. 69년의 생산량 청주 125만2천L, 합성청주33만 1,560L에 비하면 크게 감량된 것이었다. 그 후 1974년 생산량은 더욱 감소되어 청주 71만6,470L, 합성청주 29만4,789L를 생산했는데 70년대 하반기에는 더욱 줄어들어 마산 청주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설립된 청주주조장
1. 寒牡円/한목단 양조장 : 하리다 주조장의 상호를 사용(최태수, 산호동 17-3, 62. 11. 28) : 원조격에 해당하는 하라다주조의 '한목단'상호명을 패러디하여 설립되었으나 73년에 통폐합되어 없어졌다.
2. 신광양조장 (최동렬, 산호동 128, 65. 12. 13)
3. 성광주조장 (손정길, 신포동 2, 69. 1. 3)
상기 3개의 공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백광청주에 의해 통폐합되어서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백광청주 역시 70년대 후반에 세태의 기호변화에 의해 공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외 알아내지 못한 청주공장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쉬운 것은 생산하였던 청주들의 상표 및 상호라도 수집되어 정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혹시 이러한 자료를 가진분이 계시면 협조 보완하여 잘 정리되었으면 한다.

이로서 마산의 청주생산은 1904년 시작하여 1979년(?)까지 75년간 세월의 영욕 속에 사라졌다.
그나마 장군동과 신흥동에 인접해 있는 삼광청주, 삼강청주 2개의 공장은 원형이 점차 삭아져 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의 기억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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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유림 2010/01/22 11:39 address edit & del reply

    와....
    논문같아요..멋집니다.
    이런 자료들 다 어디서 찾아요 ㅎㅎ
    사진속 건물들이 아직 살아 있는 곳은 정말 신기합니다.
    더 삭아지기전에 어떤 조치(?)를 취하면 좋겠구만..
    잘 보고 갑니다 신선생님 ^^

  2. 옥가실 2010/01/22 17:23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했습니다.
    거의 다 찾아낸 셈이네요.
    마산의 술만 연구해도 박사논문은 거뜬하겠는걸요..^^

  3. 삼식 2010/01/22 20:27 address edit & del reply

    불확실한 부분이 아직 많은것 같읍니다.
    지역 어른들의 협조를 받아서
    어찌 해볼까 합니다.
    술을 좋아한 죄로
    시간나는 대로 자료를 보완할 계획입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2010/01/19 07:00

새단장한 구름다리가 달갑지 않은 이유


옛 북마산역 자리의 구름다리가 새단장을 하고 있다.


계단과 육교상판에 합성목재를 덧대고, 기존 철재난간도 모두 잘라내어 합성목재로 난간을 설치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원래보다 한결 깔끔해졌다.

구름다리를 단장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하지만 나는 새단장한 모습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소중히 숨겨두고 간혹 꺼내보는 무언가를 잃어버린듯한 느낌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나에게 이 구름다리는 어쩌다 한번씩 건널때마다 아련한 옛추억을 떠올려주는 고마운 장치 중의 하나였다.

그 추억은 철길로 인해 끊어진 길을 이어주는 '다리'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수없이 지나간 사람들의 발길에 닳고 닳아 자갈이 도드라진 계단판과, 시대를 반영해 다양한 구호가 써 있던 녹슨 아치와, 기성품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사람의 손길이 담긴 허술한듯 정직한 철재난간 따위에서 온다. 

내 기억속에 남아있을 구름다리의 모습


시대에 따라 다양한 구호가 쓰여있던 아치


여기까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것이 못 쓸 정도로 낡은 것이 아니라면 좀 더 필요한 곳에 예산을 쓰는게 효율적이다. 새것도 언젠간 낡는다.
목분과 고분자화합물을 섞어 만든 재료는 얼핏보면 목재와 비슷해 친환경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친환경적인 인공물이 세상에 있을까?

오히려 덜 반환경적이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쓸 수 있으면 그대로 쓰는게 가장 친환경적일 것이다.

지난 세월만큼 정겨운 저 계단판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새난간을 세우기 위해 잘려나간 철재난간


또한 이 구름다리는 신세계 백화점 앞이나 석전사거리에 있는 육교와는 분명히 다르다.
삼역 통합으로 삼십여년전에 사라진 북마산역의 유일한 흔적일 뿐 아니라 제대로 된 건널목이 없었던 시절, 임항선으로 단절된 마산의 동과 서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통로로 수십년을 이어왔다.
그리고 상판을 떠받치는 구조물은 철도레일을 휘어만든 보기드문 형식으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


어떠한 절차를 거쳐 공사가 진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생각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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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삼호 2010/01/16 00:07 address edit & del reply

    하부구조는 제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데요, 일단 다행인것 같은나,
    암튼 껍데기만 씌워서 미봉책으로 하려는것 같네요,
    정말 반갑지 않은 일이 벌어졌네요

  2. 이윤기 2010/01/19 08:48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기가 막히군요.

    지난번 이주영국회의원 정책 토론회 때도, 마산시 담당 국장님께 제발 육교는 고치지 말고 그냥 두자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참 안타깝습니다.

    기차 레일로 만든 저런 육교는 어쩌면 우리나라에 유일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것이지요.

  3. 이진규 2010/01/19 17:54 address edit & del reply

    옛 정취를 저렇듯 싹뚝 잘라내버리고 그저 눈(目)으로 새것처럼 단장하면 마음으로는 영영 볼 수 없기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4. 유림 2010/01/19 19:45 address edit & del reply

    언제 그런 작업을 했지요?
    차를 타고 지나다니니 몰랐기도 했겠지만.
    지난번 탐방때 찍어둔 사진이 어쩜 소중한 자료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안타깝습니다.
    아들하고 한번 둘러볼 생각이였는데..

  5. 류창현 2010/01/19 19:51 address edit & del reply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고, 수많은 아이디어가 있을텐데 왜 이렇게 조급하게 일을 할까요?

  6. 최정건 2010/01/20 12:00 address edit & del reply

    결국 마산시를 보니 저 난간이 고물상에 가지 않아도 다행입니다.
    저 난간이라도 박물관에 보관을 해야하는데

  7. woodam 2010/02/19 06:46 address edit & del reply

    어린시절 수없이다녔던 다린데추억이사라져 버릴까 마음이무겁습니다.

  8. 서마지기 2010/05/10 20:02 address edit & del reply

    글 올려 주신분이나 그리고 댓글로써 서운함을 나타 내시는 분들께 먼저 지역민의 한사람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전합나다, 북마산역에 있는 육교는 일명 구름다리라고 지금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이 육교는 약 40년 전 만들어졌으며 그때 국회의원으로 출마를 했던 한 태일씨가 사비를 투자했다고 지역민은 그렇게 알고 있으며 육교 윗 동네는 교원동으로써 당시 집없는 서민들과(후생주택) 그리고 수재민들을(남영주택) 위해 대지는 시 부지이며 건축물은 개인으로 등재 되어 있었으나 후에 개인에게 불하되었습니다. 처음 당시 한태일 국회의원 후보가 그곳에 전기 가설을 해 주었으며 역시 일명 구름다리(육교)를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한가지 드릴 말씀은 난간대를 없엤다는 것은 원래 제것이 아니었습니다. 몇번 보수및 높낮이 공사도 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옛것이 정겹고 또 한 그대로 보존 가치고 있다고 하지만 노후되어 녹슬고 한 것을 보수하고 덧칠한 것은 도시 미관상과 공원 숲에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합성수지 목재 같은 것은 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박수를 보낼 수 없어도 지켜 봐 줍시다.

    • 허정도 2010/05/10 22:50 address edit & del

      서마지기님의 말씀을 듣자니 마치 교원동 옛모습이 훤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육교 하나가 마산도시 전체에서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서마지기 님처럼 옛일들을 기억하는 분들께는 육교하나라도 소중하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2010/01/17 07:00

빛이 도시를 바꾸다(2)

국내에서도 빛을 소재로한 축제가 열어 눈길을 끌었습니다.
서울 빛 축제. 오는 1월24일까지 열린다니, '이한치한'으로 서울을 한번 구경해봄직합니다.

광화문 광장을 중심으로 프로그램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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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야간조명에서 언젠인가부터 빼놓지 않는 단골메뉴 '루미나리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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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적인 몽유적인듯한 예술조명 연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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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과 함께 걸어본다는것. 인간과 조명의 인터랙티브한 공간이 바로 도시가 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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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서울시(도시균형발전본부)에서는 남산르네상스프로젝트를 통해 남산공원 예술조명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남산을 '빛의 예술산'으로 재창조하여, 관광명소화 하겠다는 뜻입니다.

자연을 대상으로 한 야간조명에서 생태적 위해성 논란을 고려하여 자연생태를 유지하면서도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빛의 성소'로 재단장 하기 위한 것으로서, 남산의 광공해는 과감하게 제거하면서 '보는 소리 빛의 산책길', '인터랙티브 디지털숲'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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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부산에서도 광안대교와 마주하고 있는 광안리 에 '바다, 빛 미술관'의 주제로 도시환경에 빛의 문화를 더하고 있습니다.
광안리 어방축제와 더불어 차별화된 볼거리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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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의 관광명물을 만들어 내는 일.
그러면서도 지역을 특색을 차별화된 예술적 경관조명을 이용하는 일.
충분히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빛과 교감할수 있는 밝고 안전한 숲속 산책길.
또는 정돈되어지는 해변과 해변에 인접한 해안산책로길.

여러분들도 예전 연인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한번 걸어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끝으로, '파리백야'축제 개막에서 파리시장(베르트랑 들라노에)의 서문을 소개합니다.
세계최강 문화수출국의 생각을 엿볼수 있습니다.

"백야는 유일하다.
일하는 밤, 상상과 탈출의 밤, 고독의 밤, 별빛의 밤, 또는 비밀의 밤.
밤을 맞이하는 모든이에게 아름다운 밤의 추억을 연출한다.
밤샘이란 일반적인 개인과 내적행위라 할 수 있으나,
파리는 처음으로 시민들의 도시참여에 새로운 문화의 창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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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류창현 2010/01/17 09:29 address edit & del reply

    어제 새로 조성한 광화문 광장을 걸었습니다.
    시청광장 부터 덕수궁 광화문광장 경복궁 삼청동 쪽으로 탐방을 했는데,
    아직 정돈이 다 안됐지만 많은 볼거리와 시민들을 배려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더군요.
    이곳과 비교하면 마산은 조선시대 정도나 될까요?
    눈은 즐거웠지만 마음은 답답했습니다.

  2. 용팔 2010/01/17 12:27 address edit & del reply

    볼거리가 풍성할것 같군요.
    도시, 빛으로 다시 태어나다...

  3. 이진규 2010/01/18 05:31 address edit & del reply

    전력이 많이 소비되지 않는다면, 볼거리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되면 좋겠네요.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주제로 빛의 테마를 구성하여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면 좋을듯..

  4. 유림 2010/01/18 07:53 address edit & del reply

    작년(?) 12월 아들과 함께 서울 나들이길에 눈이 많이 와서
    옳게 둘러보지도 못하고 왔는데 ..
    일주일 휴가기간중 가볼걸 ...이제서야 알았다니.

  5. 미경 2010/01/18 20:32 address edit & del reply

    참 예뻐요!!
    아쉽게도 다른 곳과 마산은 이런저런 문화적 차이를 많이 느낍니다...

  6. 백은석 2010/01/18 22:06 address edit & del reply

    친구들을 만나러 걸어서 양덕에서 불종거리까지 골목길을 걸어서 갔다가 택시타고 왔다오

  7. montreal florist 2010/04/17 06:19 address edit & del reply

    조명이 삶을 또다른 환상으로 만드네여

2010/01/15 07:00

현장-3


 <2010년 1월 9일 오후 3시, 마산시 산호동>

바람은 없었지만 짙게 흐린 날이었습니다. 많이 추웠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노전에서 채소를 팔고 있었습니다.
오후 한가한 때라 그런지 혼자서 마른 마늘을 까고 있었습니다.
마늘 외에도 고구마, 양파, 대파 등이 프라시틱그릇과 비닐봉지에 담겨있었습니다.

바람을 막기위해 스티로품 판을 등 뒤에 세웠고,  위 쪽은 비닐을 덮어서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주변의 집기들과 박스 봉지 널판지 등에 작은 몸이 파묻혀, 하마터면 할머니가 계신 것을 모르고 지나갈 뻔 했습니다.

마산은 남쪽이라 그나마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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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림 2010/01/15 14:32 address edit & del reply

    용마고 근처인것 같은데
    산호시장인가?

    그래도 추울겁니다
    밖에서 추위를 안고 있으시니..

    • 허정도 2010/01/15 15:19 address edit & del

      용마고 서쪽 길가입니다.

  2. 이진규 2010/01/15 15:58 address edit & del reply

    예전에 외할머니댁이 마산상고(용마고) 담길 부인상회 골목안쪽에 있었습니다.
    어릴때 기억으로는 좌판의 규모가 꽤 큰 시장 노릇을 하던 곳이었는데
    두어달 전인가? 도서관에 갔다가 내려오면서 보니까 황량했습니다.
    도시의 온기가 점점 내려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 허정도 2010/01/15 18:09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
      도시의 온기가 점점 내려가고 있다,,,,
      적절한 표현이네요.

  3. 뭉심이 2010/02/02 14:32 address edit & del reply

    저는 거제에 살고 있어서 마산에 대해서는 잘 알지는 못합니다.
    위에 사진과 글을 보면서...나는 언제 저렇게 따듯한 가슴으로 저분들께 연민을 가져 보았는지 제 자신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따듯한 시선과 걱정하는 그 마음.정말로 닮고 싶네요..^^

  4. woodam 2010/02/19 07:03 address edit & del reply

    우선 감사드립니다.
    이렇게멀리서 고향소식을 들을수있다는것이 얼마나감사한지모르겠어요.
    저의 이모님댁이산호동이라 어릴적 많이다녔는데.........
    기억속의 고향이 쓸쓸해지고 있네요.
    그리고 뭉심이님!
    허정도님은 삼십년전부터 쭈~~~~~~~~~~욱 가슴으로 산과들 우리것을사랑하는
    분이시랍니다.
    마산가시는길에 한번만나보세요. 느끼실겁니다. 가슴으로............

    • 허정도 2010/02/19 10:42 address edit & del

      누구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과찬이십니다.

2010/01/12 07:30

잊혀진 마산의 소주공장을 찾아서(1)


주도마산 (酒都馬山)
마산은 술의 도시, 주도 마산으로 왕년에 유명한 도시였다.
대략 연세가 50을 넘긴 어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마산은 개항이후 전국 생산량 1위를 차지한 청주주조장들로 유명했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서 청주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짐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게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서 탐방시 의문을 남긴 여러 건물들을 찾아서 과거 술공장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고자 한다.
순서는 소주, 청주 그리고 막걸리, 맥주 순서로 소개할 계획이다.

일제 강점기의 소주공장
최초의 청주공장이 1904년에 세워진 이후, 일제는 근대식설비를 동원한 대규모 소주공장을 1929년 9월 마산부 본정(本町: 현 창포동 1가 20번지, 현재 창포 한백아파트 위치) 해안 매립지에 일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소화(小和)주류에 의해 시작되었다.

소화주류회사는 일본에 본사를 두고있는 야마무라(山邑)주조의 계열사 형태로 지어졌으며, 인근부지(창포동 1가 1번지, 현재 창포동성아파트 위치)에 소주공장과 거의 동시에 지어졌다. 야마무라 주조는 청주 櫻正宗(앵정종, 사꾸라 마사무네)을 생산하여 만주와 중국에 수출용 청주를 생산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소화주류는 창업 초기의 소주만 생산한 것이 아니라, 청주, 미린주, 포도주 및 기타 위스키와 브랜드 등을 생산한 종합주류회사 형태였으며, 규모가 상당히 큰 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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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창포동성아파트자리가 야마무라주조, 우측 창포한백자리가 소화주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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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전경: 해안가에 큰 굴뚝이 있는 건물과 뒤편에 낮은 굴뚝이 있는 공장 전경)

 당시의 생산량은 청주 1천석, 소주 1만석, 미린주 150석, 포도주 30석, 기타 위스키, 브랜드 등을 생산키로 했다. 1935년 야마무라(山邑) 주조계에서 독립하여 자본금을 150만엔(円)으로 증자했다.
새로이 발족한 이 회사는 합성주인
이연주(理硏酒) 一新과 소주 明月과 양주  등을 생산하고, 청주 양조는 야마무라(山邑) 마산공장에 넘겨 주었다. 당시 사장은 마쯔무라 (松村茂三郞)라는 일본인이었다.

이후에 설립된 소주공장은 1937년 1월 1일 중앙동3가 2-4번지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설립한 합자회사 마산중앙조선소주로 소주를 전문적으로 생산 판매하였으며, 사장은 산근재길(山根才吉)이라는 일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장이다.
이 공장은 소화주류에 비해 소규모 공장이였다.
마산중앙조선소주공장은 해방이후 탁응조(卓應朝)가 불하를 받아서, (합)마산중앙소주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60년대에 문을 닫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청주 및 소주공장은 한국인들에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재래식으로 생산하는 막걸리 공장만 허용해 주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세원확보를 위해 1928년부터 개인의 자유 양조를 금지하고, 양조를 허가제로 하여 면허를 발급하였다.
주로 한국인 업자들에 의해 경영되던 탁주, 약주 양조업은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업계에 비해서 규모는 매우 영세했다.
일제 강점시기의 마산의 소주공장은 거의 소화주류에 의한 일사 독점체제로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후 소주공장
해방과 함께 적산공장들은 미군정청에 의해 접수되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이를 맡은 관리인들은 먼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상호만 바꿔서 기존을 시설을 이용하여 가동하였다.

새로이 출발한 공장들을 1946년 세무당국으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받아서 나름대로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양조시설 역시 빈약해서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기득한 관리권을 다른 제3자에게 넘겨 버리는 공장도 생겨났다. 이들 공장들도 1951년 이후에 연고자들에게 모두 불하되었다.

한편 해방과 함께 적산공장의 불하에 의해 탄생된 소화주류와 야마무라 주조 외에도 1951년 강남소주(장군동 5가7, 대표 김행윤)가 장군동에서, 1961년 마산양조공업사(장군동 5가1-3,대표 남병주)에서 소주와 약주를 함께 생산하였다.
1961년에 有元, 舞鶴, 마산, 江南 4개의 소주공장에서 소주를 제조하고 있었으나 소주 수요가 늘어나면서 1970년에는 무학, 강남, 백광 삼천리, 永進등 5개 공장으로 늘어 났다.
후발업체인 백광소주(부림동 104-8,대표 문삼찬)가 1969년에, 삼천리와 영진소주는 구순기에 의해 회원동과 오동동에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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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동 백광소주공장 1973년전경(좌측철길 하단 기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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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소주공장터 현재모습 (원래의 공장부지는 새길이 나면서 분리됨)


백광소주는 당시 유명했던 백광청주와 동일상호로, 공장과 사장은 다른 동명이사로 백광청주의 유명세를 활용하기 위해 상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천리소주와 영진소주는 구순기가 같이 경영한 공장으로 공장소재지만 달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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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소주, 삼천리 소주공장터의 현재전경(오동동 4거리 아래편)


(이승기 마산영화자료관장의 말에 의하면 오동동에서 삼천리 소주를 취급했다는 얘기로 보아 상호만 달리하고 소주생산은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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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무라 주조 해방이후 연고자인 한범석이 맡아 있다가 이병각(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형)에게 넘어갔다. 상호도 무학주정으로 개칭하고 소화주류와 경쟁관계에 들어섰다.
이후 1952년에 이병각은
최재형에게 운영권을 인계하고, 서울의 삼강유업을 인수하여 상경하였다.

원래 청주를 생산한 공장이었으나, 한국동란 중 양조 원료인 미곡의 절대적 부족으로 소주를 생산하게 됨에 따라 소화주류와 경쟁구도가 되어 심각한 대립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1960년에 동양주정(소화주류의 상호변경)과 합병을 통해
유원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60년대 초반에는 소주 백매(白梅)
를 생산하였다.
1965년부터 유원산업은 주정회사만 운영을 하다가 우여곡절을 겪는 속에 마산항 서항지구매립사업이 완공되어 공장앞 바다는 육지로 변했고 공장주변이 주택지 등으로 변모하자 80년대 후반
함안군의 칠서 지방공단에 이전하여 주정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현재 확인해 본 바로는 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유원산업은 마산에서 가장 큰 그룹형태의 회사였었다. 유원연료산업에서 유원연탄을 만들기도 하였고, 부산의 대선주조도 인수하고, 경우상호신용금고와 유원개발에서 부곡골프장 건립공사를 하기도 하여 70년대 마산을 주름잡았던 기업인데 지금은 명맥을 찾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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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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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주류 해방과 함께 김종신(4대총선 자유당 국회의원)이 관리를 하였다.

 1949년 김종신은 동양주류주식회사로 개칭하고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였다. 이후 무학주정과의 경쟁과 경영난 속에 1952년 김상용에게 법인을 넘기면서 상호를 동양주정주식회사로 다시 개칭하였다.
김상용은 당시 대동제모 사장을 역임한 능력있는 경영인이었으나, 이후 경영권이 김봉재(당시 국회의원으로 김상용과는 동서지간), 지달순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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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주류(1929)

1960. 3. 24일 무학과의 출혈경쟁으로 회사형편이 어렵고, 탈세조사를 받던중 무학 최재형에게 공장을 넘기게 되었다. 이후 동양주정의 운영권은 1959년 민주당에서 변절하여 자유당으로 간 국회의원 허윤수에게 정치자금 수수 댓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60년 무학주정에 인수되어 유원산업에 포함되었다가, 1965년. 現 무학그룹 최위승회장이 다시 인수하여 무학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포동 13번지에서 희석식 소주인 「무학」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5년 1월부터 시행된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소주의 원료 대체가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전국의 수많은 증류식소주 업체들이 희석식소주로 전환하여 생산하였다.
그 후 필요이상으로 난립상태였던 소주제조장을 국세청은 1973년 7월부터 본격적인 통합작업에 착수하였다.
각도에 1사씩 전국 10개 업체만 존속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무학주조는 경남지역 36개회사를 통폐합,
무학주조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신창동으로 이전하였다. 

신창동 무학주조 공장은 원래 일본인이 경영한 淸水라는 청주공장이 있던 자리인데 해방과 함께 대동주조로 상호를 변경한 뒤, 73년 무학이 경남소주공장을 독점하면서 무학주조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1984년 무학공장이 봉암동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공장부지는 무학아파트가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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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신창동 무학주조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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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년 봉암동 이전후 현재 무학빌라가 들어서 있다.)

뿐만 아니라 창포동부지와 신포동의 공장부지에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소주공장과 아파트,
대체로 공장이 이전한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도심내 주거지부족현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 별 개념없이 지나쳐 온 것 같다

우리는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하게 지나쳐 왔다.
가급적 보존하는것이 우선이지만, 차선으로 기록이라도 제대로 남겨야 할 것이다. 한일함섬이 있던 자리도 기록관하나 없이 깡그리 아파트만 지어서, 후회막급하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지역에서 기록에 남길만한 공공시설이나 중요 산업시설에는
반드시 기록표지석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땅은, 어느 시기에, 어떠한 용도로, 어떤 사람들이 사용 했노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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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생산한 무학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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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무학소주 상표


※ 참고자료 :
- 마산시사 (1996),
- 마산개항 100년사,
- 마산 상공회의소 100년사
- 마산야화 (김형윤),
- 학초 최재형 평전 (김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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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류창현 2009/12/13 20:22 address edit & del reply

    지금은 사라졌지만 4홉짜리 소주심부름 하러 동네점방을 들락였던 추억이 떠올라 감회가 새롭네요.
    큰소주병 사진을 보니 아련했던 옛기억이 스믈스믈 올라옵니다.
    아버지세대는 다들 주당이었나봅니다. 알콜도수도 지금보다 높았을텐데 작은병은 양에 안찼으니 말이죠... 곗날이라도 되면 소주한잔에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한곡조씩 뽑던 모습하며... 옛날은 갔지만 추억은 그대로인것 같습니다.

  2. 신삼호 2009/12/14 17:20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 소주는 지금 소주와 비교가 않되죠,
    엄청 독해서 턱 부르르 돌아갈 지경이였죠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사회상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군요
    요즘 순한소주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듯 하구요!
    됫병을 놔두고 잔술을 구멍가게에서 사 드시던 어른들 생각이 나는군요!

  3. 이진규 2010/01/12 12:21 address edit & del reply

    물좋은 마산의 술 역사가 흥미로웠습니다.
    사진에서 보는 저 술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한 잔 하고 싶은 생각 간절합니다.^^

    • 삼식 2010/01/12 12:57 address edit & del

      술을 통해 옛추억들이 떠올라
      그런 추억을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겠죠

    • 이진규 2010/01/14 10:12 address edit & del

      삼식님은 뉘신지요? 혹시 신삼호 선배님 이셔요?

  4. w저팔계 2010/01/12 13:51 address edit & del reply

    저 정도는 하루에 한 2-3병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지금은 아니지만, 마산의 술 거리를 재현하여 상품화 시키는것도 좋을것 같은데요, 일본의 탄광촌이나, 맥주공장거리,여관촌 등 옛것을 재현시킨 상품들이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거듭나는 것을 우리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 삼식 2010/01/12 17:34 address edit & del

      한창때 얘기겠죠,
      지역사의 산업분야에서라도 잘 정리할 필요가 있을것 같읍니다.

  5. 옥가실 2010/01/13 10:16 address edit & del reply

    예전부터 궁금하던 부분이었는데,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허정도 2010/01/13 11:03 address edit & del

      삼식 씨가 고생했네요.
      평소에 술 좋아하더니만 결국 술에 대한 연구를,,,,

  6. 백은석 2010/01/13 11:57 address edit & del reply

    잘보고갑니다

  7. 허태윤 2010/01/14 15:26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추억에못살든시절이생각이남니다,,

  8. 삼식 2010/01/15 17:32 address edit & del reply

    닉네임이 촌스럽죠

2010/01/10 09:01

빛이 도시를 바꾸다(1)


최근 도시공간의 도시환경을 대상으로
'빛' 콘텐츠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공간을 탄생하게 될 뿐만 아니라 개성을 연출하는 강력한 비법(?)이기도 합니다.

이에는 예술적 감각의 연출을 통해서 조명화 되는 도시의 가치를 높이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또한 도시가 예술적 디자인조명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사업은 지속적으로 유망한 아이템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도시의 인공건조물(소위 말해 빌딩숲이라고 일컫지요)이 예술적 빛의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서 활력과 생동감을 줄 수 있는 '도시숲'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최근 전체 16차로를 10차로로 줄여 2009년도에 준공된 광화문광장도
2010년 1월 1, 2일 이틀간 광화문로 전체를 시민의 광장으로 개방하여 다양한 문화행사를 제공하는데 이에는 역시 '예술디자인 조명'이 한몫 해내는 것 같습니다.

 (이하 광화문 광장 사진출처 - 하이서울뉴스 12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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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나 가로수에 적용한 은하수조명은 물론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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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백남준 선생의 작품인 '프랙탈 거북선' 등이 있습니다.

이중에서 건축물(KT빌딩)에 직접 빛연출하는 사례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술디자인조명은 도시에 사는 시민들에게 도시가 주말이면 무작정 떠나야하는 '일터'가 아닌 '쉼터, 놀이터'가 되는 셈입니다.


"도시를 보여주는 모습에 따라 도시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고 생각합니다.


예술디자인 조명을 통해 도시의 브랜드를 축제 등으로 높이는 사례로 프랑스가 소위 가장 장 나가는 것같습니다.

파리는 라뉘블라슈 '파리백야'를 매년 10월 첫째주 토요일에 열어 시민이 참여하는 축제이기도 하며, 그나라 특유의 예술적 이미지를 도시의 새로운 레이어로 입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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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전역에 백야축제를 실시하고, 축제 장소를 산책로로 연결하여, 이 축제를 통해 2007년도만 해도 2백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하고 2008년도에는 파리 도시내 100군데 이상을 빛의 공간으로 구성했습니다.
이에는 역사유적이나 문화공간의 연계도 있지만, 또한 축제는 마땅히 있어야할 먹고, 즐길거리인 30여군데의 음악회, 미술전시, 요리시식등을 같이 '빛'의 축제와 같이 기획했습니다.


도시조명에서 리용(프랑스)을 또 빼놓을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리용 빛의 축제 'La Fete des Lumieres'는 매년 12월 첫째주말에 열립니다.
공공기관이나 건물의 벽면을 매우 독특하고 예술적인 조명을 단장하고, 공공재인 상징탑, 다리(교량)등에도 물론 야간조명으로 색다른 연출하여, 거닐고 싶은 충동을 느끼도록 하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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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중심가나 각 마을, 우리나라로 말하면 동의 중심공간 40개를 설정하여 연계하여 산책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세계 조명시장에서도 관심을 갖다 보니, 현재 국제도시조명연합(LUCI)의 본부도 리용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LUCI에 가입한 도시로는 서울, 인천, 광주, 김해, 창원(추진중)가 있습니다.)


이태리에도 도시예술조명의 사례로는
토리노가 있습니다.
토리노에서는 '예술가의 등불(루치 다르티스타 Luci d'artista)'이란 이름으로 축제를 열고 있습니다.
빛의 문화도시로서 도시의 가치와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입니다.
세부적인 계획으로는 '장식조명 계획'을 통해 도시내 조명의 밤을 밝히는 실용성 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가치, 상징적인 가치를 신중하게 다루고 도시가치를 부각시키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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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의 조명은 단순한 빛이 아닙니다.
도시공간이 재평가 되는 매개체이기도 합니다.

미술관이나 전시관 안에서가 아닌, 시원한 바람과 활기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같이 느끼며 조명을 통해 도시공간을 예술적으로 바라본다는 것, 참으로 멋진 일인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현재 우리도시의 조명에 만족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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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조원문 2010/01/11 21:04 address edit & del reply

    새로운 세계에서 움직이는 도시같읍니다..

2010/01/07 07:00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여섯 번째 길에 나섰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바람이 없었고 맑아서 걸을 만 했다.
회원도서관에서 만났는데 추운 날씨에도 참석자가 20여명이나 되었다.
봉화산과 이산미산 그리고 지금의 석전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근주 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탐방을 시작하였다.
마산방직→한일합섬→한일전산여고→양덕성당→가톨릭여성회관→합포성지→하이트맥주→국립3·15민주묘지로 이르는 코스였다.

가는 곳곳마다 이야기할 것도 공부할 것도 많았지만 나는 한일합섬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몰락의 과정에 눈길이 많이 갔다.
거대기업 한일합섬의 흔적이 양덕동 일대 온갖 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 교수의 도시탐방대 작은 제목이 「걸어서 만나는 마산이야기」인데 이 글은 「걸어서 만나는 한일합섬이야기」인 셈이다.



<1970-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1964년 자본금 1,500만원으로 일본기술과 제휴하여 아크릴 섬유를 생산하면서 시작된 한일합섬은 1967년 1월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석하여 기공식을 했다.
이른바 섬유왕국의 시작이었고, 마산이 산업도시가 되는 신호탄이었다.

1986년에 펴낸 『한일합섬20년사』에는 ‘양덕동 허허벌판에 기공의 삽을 힘차게 꽂은 지 만 1년, 마침내 준공 테이프를 끊게 된 아크릴 섬유공장은 ․․․․․․’ 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곳은 허허벌판이 아니라 양덕동 석전동 산호동 일대에 살던 마산시민들의 곡창이었고 삼호천과 산호천 사이의 기름진 논밭이었다.

아크릴 섬유로 시작한 한일합섬은 후에 종합섬유회사로 발전하였다.
1967년에 방추(紡錘)가 22,400개였던 것이 1979년에는 무려 344,000 추로 세계 최대 규모까지 성장했다.

고용효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1967년에 4,300명으로 시작했던 사원 수가 1976년경에는 27,000명까지 늘었다. 사원 수가 이랬으니 이 거대기업을 둘러싼 2차고용 3차고용 효과까지 계산하면 그 수가 얼마였겠는가.

‘수출입국’을 지향하던 정부시책에 맞춰 국가경제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67년 68만 불이던 수출액이 71년에 2,286만 불까지 급성장을 이루었고, 1973년 드디어 국내 최초로 수출 1억불을 달성했다.
창립 후 불과 5-6년 만에 수출액 15,000% 성장이라는 기적의 기록을 가진, 그 시절 최고최대의 기업이었다.
소위 '전국 7대도시 마산'도 이의 결과다.

한일전산여고에 얽힌 일화도 많다.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큰 공이었지만 그 유명한 ‘팔도잔디’는 전 국민의 심정을 녹아내리게 했다.
1974년에 설립한 한일전산여고는 첫 해에는 28학급 1,680명 규모였는데 1980년에는 120학급 7,200명까지 되었다. 학급 수가 120, 한 학년에 40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규모다.

이른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였다.

나는 탐방대원들과 함께 양덕동 찬바람을 맞으며 한일합섬의 옛 영화를 되새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 한 쪽에 솟아오르는 물음이 있었다.

국내 최고 최고최대의 화학섬유회사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몰락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잘나가는 SK나 CJ나 코오롱도 비슷한 업종이었는데 왜 한일합섬만 이렇게 몰락하였을까?

답을 찾지 못한채 길을 걷던 중, 눈 앞에 한가닥 실마리가 보였다.
어쩌면 나의 물음에 작은 답이 될수도 있는 '사라진 한일합섬'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

                          <한일합섬이 들어서기 전의 양덕들판>

                                           <건설 초기 모습>

                                           <확장 또 확장>

                   <고향에서 가져운 팔도잔디를 가꾸는 한일여고생들>


         <최고 전성기 때의 한일합섬, 오른쪽 운동장이 한일여고 팔도잔디>


………그것은 아파트였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수는 없겠지만, 한일합섬이 몰락하게된 원인 중 한조각은 짐작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일합섬은 본 공장 외에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소규모 혹은 짜투리 땅들을 대부분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를 지어 분양 처분했다.
규모가 작은 땅들이라 한 채 혹은 두어 채 정도였고 저층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도 양덕동 여기저기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은 건물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모두 ‘한일’이나 ‘한효’가 들어간 이름이었다.
'한일'이야 회사명이지만, ‘한효(翰曉)’는 한일합섬의 설립자인 김한수 회장의 호다.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

집을 짓기만 하면 재미를 보았던 시절이었다.
이 거대기업도 집 장사로 그 시절 재미를 좀 보았고, 사주(社主)는 쉽게 돈버는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

자신을 있게 한 기존의 섬유산업은 수명이 다해, 저 멀리 퇴조의 징후가 보였지만 미래를 위한 진지한 모색도 과감한 투자도 하지 않았다.
연구와 개발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업의 탈출구를 찾는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 장사의 단 맛에 빠져 본격적으로 공장규모를 줄이며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건설규모도 크게 늘려 그 때까지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다.

제품창고 헐고 아파트 지어  ‘1차’
기숙사 헐고 아파트 지어  ‘2차’
모노마 탱크 헐고 아파트 지어  ‘3차’
서쪽 편 공장 헐고 아파트 지어 드디어  ‘4차’까지.



아파트 단지의
차수가 늘어날수록 '한일합섬'은 왜소해졌고, 차수가 늘어날수록 사원들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비례해서 마산경제도 점점 쇠락해 갔다.

사람들은 이 아파트 단지들을 통칭 ‘한일 1차’ ‘한일 4차’ 등으로 부른다.
만약 '한일합섬'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면 최근 태영과 한림에서 지은 대규모 아파트단지 '메트로시티'는 ‘한일 5차’, 바로 그 옆에 마지막 남은 터는 ‘한일 6차’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4차 만에 ‘한일’은 이름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 긴 시간을 한눈에 보면,
논밭이던 땅에 공장이 들어섰고 다시 그 모든 땅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양덕동 일대 주민들 땀이 밴 기름진 양덕 들이 30여 년 만에 아파트 터로 변한 셈이다.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거대기업의 몰락,
섬유왕국 한일합섬의 몰락을 떠올리니 새로운 물음이 생겼다.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의 참혹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온갖 곳 보이는 땅마다 ‘아파트와 아파트’로 채우고 있는 이 도시 마산이 한일합섬 몰락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일까?
새로 탄생하는 통합시는 이 사라져버린 거대기업에서 얻어야할 교훈은 없는 것일까?

석양의 역광에 검게 물든 한일아파트의 수십층 높은 벽이 마치 몰락한 '섬유왕국 한일합섬'의 잔영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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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진규 2010/01/07 11:00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을 대표하던 한일합섭의 시작과 끝을 잘 알게되었습니다. 한일합섬 터 위에 제가 살고 있었네요^^

    • 허정도 2010/01/07 21:52 address edit & del

      후배가 신접살림 차린 곳이 한일2차죠?
      옛날 한일합섬 여사원들 기숙사가 있던 자리.

  2. 옥가실 2010/01/07 13:35 address edit & del reply

    찬바람 맞으며, 도시탐방을 한 값을 많이 찾을 수 있군요^^
    저렇듯이 아파트를 지어대고 있었다는 건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로 마산시민들이 한일의 몰락에서 교훈을 많이 얻었으면 합니다.

    수고했습니다.

    • 허정도 2010/01/07 21:53 address edit & del

      이런 경험할 수 있었던 것도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토요일 또 나가야죠?

    • 옥가실 2010/01/08 16:41 address edit & del

      그러문요!
      지금 그거 준비하느라 등골이 휘청^^

  3. 미경 2010/01/07 17:29 address edit & del reply

    저는 신마산에 살고 있습니다.
    마산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아름다운 바다를 막아서 계속 늘어나는 아파트들을 볼때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 허정도 2010/01/07 21:55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사실, 한 도시를 디자인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실태파악입니다.
      마산에 과연 그렇게도 많은 아파트가 필요한지 어떤지를 정확히 알고 계획을 해야 되는데 아쉬운 게 참 많습니다.

  4. 유림 2010/01/07 18:11 address edit & del reply

    양덕동 일대를 잠시 누비고 다녔던 몇년전 기억이 새롭네요

    조금 더 멀리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더라면...좋았을텐데..

    • 허정도 2010/01/07 21:57 address edit & del

      글쎄 말입니다.
      아무튼, 마산의 자랑이었던 한일합섬이 지금은 마산의 상처로 남았습니다.

  5. 삼식 2010/01/07 22:43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에서 몰락한 기업들의 리스트를 만들면 어떻런지요? 유원산업, 경남건설 등등 많을것 같읍니다. 물론 몰락의 이유를 잘 분석해야겠지요!
    실패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수 있지 않을까요

    • 허정도 2010/01/08 09:46 address edit & del

      글쎄요, 너무 방대한 작업이라서.
      가능한 일이라면 유익한 자료가 되겠네요.

  6. 최정건 2010/01/08 01:43 address edit & del reply

    제가 지금까지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대학가지 나오고 직장을 다니는지라
    관심이 많습니다. 유장근 교수님, 김주완 기자님 블로그도 자주 갑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삭막해진 것 같습니다, 신마산 댓거리도 그렇고,예전에
    고등학교를 창원까지 다녔는데 지금의 밤거리는 사뭇 다른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아쉬운 것은 강남극장, 중앙극장은 몰라도 연흥극장이 아깝습니다.
    지금도 쓸만한 건물인데 마산시에서 적극적으로 매입하여 시민들을 위한
    소규모 공연장으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예전에는 세림상가에 극단마산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보기가 힘듭니다.
    지금의 롯데시네마와 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이전의 극장체계보다 영화가 다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일합섬이 아쉽습니다. 제가 한일유치원을 나오지라 저 팔도잔디에서도
    많이 놀았는데 최소한 양덕동 로타리 쪽으로 공장 한 동이라도 남겨두어 예를들어
    마산 근현대박물관이라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저는 마산이 한국근현대사의 산업화시대의 긍정적인 면 보다 슬픔, 아픔, 모순이 내재된
    도시라고 생각됩니다.

    • 허정도 2010/01/08 09:50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마산에 대한 애정이 많으시군요.
      저 역시 고향이라 그런지 마산에 대한 애정이 많습니다.
      창원진해와 합쳐질 것인데 이것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위기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산의 미래가 걱정입니다

  7. 최정건 2010/01/08 01:48 address edit & del reply

    지금 신마산매립지 아파트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 수출자유지역을

    리모델링이 필요합니다. 공원에 있는 듯한 산업단지.......

    • 허정도 2010/01/08 09:53 address edit & del

      생각해볼만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선진도시에서는 공원과 산업단지를 복합적으로 구성하기도 합니다.
      자유지역이 좁아서 가능할지는 몰라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의지만 있다면.

  8. 개구신 2010/01/08 11:34 address edit & del reply

    많은 교훈을 주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토목*건설로 단기수익만 바라보다가는 근간이 무너진다는걸 현 정부도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자꾸 어디를 파낸다, 어디를 매운다 이런소리만 하고 있으니 걱정됩니다.

    • 허정도 2010/01/08 11:43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국가의 전 산업 중 건설산업 포션을 줄여나가는 것이 선진국대세인데 우리는 계속이렇게 갈건지,,, 걱정입니다.

  9. 말뫼 2010/01/08 13:27 address edit & del reply

    죽은 애 고추 만지기이지만,
    오래 전 한일합섬 철거.이전이 논의 될 때, 그 터는 마산의 공공업무지역+지역금융통상업무 중심지구로 개발해 마창진의 금융통상허브로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때도, 그 전에도 마창진 통합 논의가 있었지만, 지리적으로도 그 중심지로는 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선생님의 다른 포스팅 '통합시의 성패는 우리 손에...'에서 통합시의 행정구역도를 보고 그것이 다시 생각 났습니다. 그 구역도로 보면 그야말로 딱인 중심지다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더 깊은 탄식이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돌이킬 수가 없으니...

    한일합섬이 야금야금 집장사로 팔아 먹은 것도 그렇지만, 이후 본공장 터를 마산시가 집장사치들에게 팔아 치운 것은 겨우 숨줄만 붙어 있는 사람의 숨통을 짓눌러 버리는 것과 같은 폭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역의 역사에 씼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도시 살리기가 아니라 도시 죽이기 였습니다. 그게 무슨 영화를 볼 일이라고 그랬을까 싶습니다. 대규모아파트가 들어서면 인구가 늘어날 것 이라는 무지막지한 사기를 쳤던 자들의 뇌구조를 파헤쳐 보고 싶은 지경이었습니다.

  10. 말뫼 2010/01/08 13:22 address edit & del reply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 마산이 진짜 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탄식만하고 앉아서는 막연한 바라기나 하고, 행정당국은 땅장사나 하고서는 그게 무슨 대단한 치적인 양 도취하고, 힘께나 쓸 듯 폼 잡는 지역국회의원들은 생색내기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사람들로만 살펴 봐도 두루두루 퇴락하고 망할 조건들만 갖추고 있었지요. 거기에 올바른 전문가들의 역할이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 합니다. 도시전문가들이 제 역할을 할 기회나 주어졌던가요? 도시재생위원회가 기능을 하긴 했던가요?
    마산의 꼴은 '장'자리 차지했다고 거들먹거리기나하고, 방귀개나 낀다는 무식방창한 무리들이 제 세상인 양 마구 휘젓는 깡촌구석동네 분위기, 딱 그 수준 입니다. 제대로 뭘 하자는 사람들은 아무 역할 못하고...

    십여년 전인 듯 한데, 마산의 도시계획에 대한 대대적인 논의가 있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허선생님도 전문가로서 그 가운데 계셨었는데, 그 때 논의 됐던 것들 중 기본적인 것들만이라도 실행 되었더라면 마산이 이토록 죽을 지경으로 나자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도시.지역문제에 정획한 문제인식과 진심으로 살리려는 노력이 없는 한 마산은 마창진통합에서도 뿌시래기나 빌어묵는 변두리 찌끼미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마창진 모두 지차체장 부터가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껏 그들의 같쟎은 자기도취적 치적 만들기는 이제 '신물징'이 납니다. 매립땅장사, 알짜배기 도시 중심중심지 팔아 치우기, 같쟎기 짝이 없는 생태도시, 복마전 같은 변두리 소도시... 그들이 만든것은 그런 것들 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도시도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신주의가 상식적 태도 처럼 만연한 대한민국, 사람과 자원의 반이 몰려있고 국가권력도 좌지우지한다는 서울공화국,수도권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지방'도시의 문제는 '지방'스스로의 혁명적 각성과 노력 없이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역공동체의 본떼있는 '실력'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한 지방도시의 환경은 변화조차 무망 하다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다면, 돈만 많으면, 부자동네만 되면.... 그 딴 생각으로는 절대로 서울공회국,수도권공화국의 지배를 벗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인구.면적규모로 최대지방도시? 그 따위로 어디에 견줄 생각을 한다는 것 부터가 '촌 것들'이라고 멸시 당하기를 자청하는 생각 일 것입니다.
    그게 이 나라 '지방도시'의 처절한 현실이며 지방도시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선생님과 같이 진정성을 지니신 전문가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때 입니다. 장차 지역도시문제에 큰 역할 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 허정도 2010/01/08 13:59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합니다.
      저 역시 도시를 바라보는 눈은 말뫼님과 비슷합니다.
      도시가 나아가야할 길은 처음도 삶의 질이요, 마지막도 시민들 삶의 질 상승입니다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주저 앉아 있을 수도 없는 것이 또한 도시문제입니다.
      우리가 몸이 담겨 있는 그릇이니까.
      함께 걱정하고 함께 노력하면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11. 조원문 2010/01/09 10:14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고 갑니다

    • 허정도 2010/01/10 17:32 address edit & del

      방문해주어 고맙소

  12. 강인수 2010/01/10 15:45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잘보고 잘읽어보고 나갑니다.

    • 허정도 2010/01/10 17:33 address edit & del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13. 윤종호 2010/01/11 23:26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우리마산이 않고있는 현실의 문제점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 마산의 그림을 잘 그려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마산이 되었으면 하는 마산시민 한사람의 소망입니다.
    회장님께서 변화의 물고를 터 주시기 바랍니다.

    • 허정도 2010/01/12 10:42 address edit & del

      반갑소.
      도시의 발전은 그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생활의 그릇인 도시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집시다.
      그러면 도시도 좋아질겁니다. ^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4. 옛한일인 2010/06/24 17:50 address edit & del reply

    80년대후반 한일인으로 일하며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렇게 변한줄 몰랐네요. 팔도잔디를 밟으며 미래를 꿈꾸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 허정도 2010/06/25 07:04 address edit & del

      예,,, 한일합섬의 영광은 한 때의 신기루가 되어 우리 곁에서 사라졌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15. 남재광 2010/11/04 07:26 address edit & del reply

    제 아버지가 창립멤버였어요 충신의 말은 안듣고 간신만 키우니 당연하죠

    • 허정도 2010/11/04 10:03 address edit & del

      그러신가요,,,,
      다시 생각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2010/01/04 00:00

통합시의 성패는 우리 손에 달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

올 7월이면 마산 창원 진해 세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변합니다. 그 때는 나도 100만 도시의 시민이 됩니다.

외국에 나가서는 ‘Korea, 대한민국’이 내 정체성을 가장 잘 설명해 주듯이, 나라 안에서는 ‘마산’ 이 그렇습니다.
'허정도는 마산사람이다' 만으로 상대방은 나의 많은 것들을 이해해 버립니다.

도시는 그런 것입니다.
그 도시가 자신이 태어난 곳일 때는 정도가 더 심합니다.

그래서 나는 ‘마산’이라는 도시가 서서히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마냥 기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통합은 현실이 되고있습니다.



통합이 되면 마창진 세 도시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될 것입니다.
규모에 걸 맞는 도시 인프라와 도시 경쟁력이 생길 수도 있고, 보다 나은 생활환경도 기대됩니다.

하지만 세 도시가 합쳐지면서 잃는 것도 생길 겁니다. 본래 기회와 위기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니까요.
해서, 통합을 두고 옳다 그르다 식의 단순 평가는 의미가 없습니다.
잃을 것은 줄이고 얻을 것은 늘려나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시기일 뿐입니다.

통합이 옳은지 그른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입니다.
행정을 책임진 사람과 그를 선택한 사람들이 말 그대로 멸사봉공하면 옳은 통합이될 것이고, 이기심과 아집만 내세우다보면 그 반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통합시의 성패는 우리 손에 달린 셈입니다.

통합을 통해 늘어나는 '지역총생산규모, 인구, 면적, 정부지원금' 등에 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나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규모의 경제'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통합시의 미래를 끌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도시의 규모를 나타내는 숫자에 불과합니다.

규모로 말하자면 지구상에 우리 통합시보다 큰 도시는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그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규모 때문에 행복감이 높아졌다는 말을 저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통합을 일러 세계적 추세 운운하기도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최근 도시변천사를 폭넓게 이해 못해서 하는 말입니다.

규모에 대한 막연한 기대는 현실의 눈을 가릴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행정실패를 도시규모 탓으로 돌려버리는 면죄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도시경쟁력에서 규모가 중요한 건 사실이지만, 세계 어디에도 인구 4-50만 도시가 규모가 작아 문제된 적은 없었거든요.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싶습니다.
통합만되면 세 도시가 발전될 것이고, 그로인해 우리 삶의 수준도 높아지리라는 막연한 환상과 기대는 버려야 합니다.

문제는 내용의 변화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이 통합시는 새 패러다임으로 열어야 합니다.
낡은 수단으로는 결코 새 도시의 밝은 미래를 열지 못합니다.
통합이 세 도시를 위한 특단의 조치라면, 통합시의 비전도 시대정신에 맞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발에 의한 외형확장'이 곧 도시발전이라 믿었습니다.
그 결과,
도시행정을 담당했던 공직자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도,
도시는 그저 ‘뚫고 짓고 넓히고 세우기' 만 하면 좋아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지금은 양적인 성장보다는 질적인 성장을 추구해야할 때입니다.
산업이 도시를 끌어갔던 시대에서 도시가 산업을 끌어가는 시대, 즉 도시의 수준이 도시의 발전을 끄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시절에는 밥공기의 크기를 보지만 배가 불러지면 쌀밥 보리밥을 따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오두막에서 맑은 물만 바라보고 살자는 말이 아니라 맑은 물이 돈이 되는 시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선진국가 선진도시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도시를 확장하기보다는 삶의 질을 높이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도시 속에서 시민들이 누려야할 수준 높은 가치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처럼 도시의 이상적인 가치와 그 가치를 상승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통합된 100만 도시도 곧 퇴보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는 변해야 합니다.
시대정신과 시대수준에 따라 우리의 통합시도 변해야 합니다.

이상적인 도시라면,
교육 문화 직업 의료 놀이 휴식 건강 등 인간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자족되어 생활만족도가 높아야 합니다.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여 지속가능한 미래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런 변화의 체험이 공감되어야 지금의 통합이 옳았다고 평가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통합시의 새로운 비전은 도시발전방향을 정확하게 수립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한 도시의 발전방향은 그 도시의 사회적 자연적 조건에서 비롯됩니다.

마창진 세 도시 각각 가진 것은 무엇이며 부족한 건 무엇인가?
버릴 것은 무엇이며 키울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내세워야 다른 도시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고 난 뒤 '이 도시는 어디로 가야될지' 길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약
거북이라면,
'토끼와의 경주는 산이 아니라 바다에서 해야 이길 수 있다'는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길 수 있는 것을 키우는 것'
이것이
도시정책의 핵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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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림 2010/01/04 09:19 address edit & del reply

    막연히 도시가 커지면 더 좋지않나하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잘되었다 했는데.
    속을 들여다보면 참 어렵네요..
    통합시의 갈 길을 잘 잡아가야 할텐데
    기대만큼... 시민들의 노력과 참여도 필요하지 않나 싶네요

    괜히 저 혼자 기대한 것처럼 부끄러워집니더..ㅎ

    • 허정도 2010/01/04 10:11 address edit & del

      규모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규모자체가 도시의 질을 높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많은 사람들이 마치 합쳐만 놓으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처럼 말하고 있어서 경각심을 울리는 차원에서 써보았습니다.
      새해 복 계속 많이 받으세요.

    • 유림 2010/01/04 20:02 address edit & del

      맞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길을 잘 닦아서 가야될 사람들이 어깨가 무척 무거워보입니다..

      선배님도 계속 복 받기 고고싱 입니다^^
      사모님이 주신 팥시루떡 잘 먹었습니다 ㅎㅎ

  2. 이인안 2010/01/04 12:52 address edit & del reply

    글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허정도 2010/01/04 13:30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
      새로 태어날 아이까지 포함해 네 가족 올해 행복하기 바랍니다.

  3. 임마 2010/01/04 13:42 address edit & del reply

    새해백두 잘읽고 갑니다.
    공감되는 글이군요^^*

    • 허정도 2010/01/04 13:59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올해 좋은 일 많이 있기 바랍니다.

  4. 말뫼 2010/01/08 14:44 address edit & del reply

    장차 공식기구에서 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그에 앞선 민간전문가들의 논의가 먼저 필요하다고 봅니다. 통합시의 각권역으로서의 세 도시의 현실을 살피는 것과 통합결정 전 각각 별개의 도시로서 그 현실 문제를 살피는 것은 분명 크게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예를들면, 통합차원으로 논의 하다 보면 다른 두 도시 보다는 마산의 도시문제가 그 이전 보다 더 심각하게 부각 될 것이며, 현실적으로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되고, 가장 큰 난제가 될 공산이 크다고 봅니다.

    통합시의 각 권역으로서 각 도시의 현실문제 부터 제대로 풀어 헤쳐 보고, 장차 물리적 공간환경적 도시통합의 기본방향에 대한 논의로 확대해 나가는 전문가들의 논의로 시민들의 도시통합 기본방향에 대한 인식을 집중시키는 일이 우선 필요하다고 봅니다.

    • 허정도 2010/01/08 15:25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깊은 식견입니다.
      저도 마산문제가 복잡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견해에 공감합니다.
      또한 세 도시가 한 도시로 변한다지만 하나의 도시라는 시각을 너무 강하게 가지면 안 된다고 봅니다.
      세 도시이면서도 한 도시, 한 도시이면서도 세 도시라는 특수한 잣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5. 미경 2010/01/08 21:23 address edit & del reply

    블로그의 여러 글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남의 일처럼 무관심 했던 일들이 조금씩 나의 문제, 우리아이들의 문제로 다가옵니다. 자주 오겠습니다~^^

    • 허정도 2010/01/09 09:20 address edit & del

      좋게 봐주어 고맙습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만 깊은 고민을 계속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6. woodam 2010/02/20 06:52 address edit & del reply

    우선 한숨부터 나옵나다.
    한 가정이 그렇듯이 모든 가족이모여 자주 회의를 하는 가정은 행복합니다.
    하물며 한 도시뿐만 아니라 국가의 일도 국민들의 소리에 귀를 귀 울여야한다고보는데
    내고장 내고향의일에 더욱 관심을 갖지못한 제자신 을 돌이켜봅니다.
    살기바쁘다고 현실에 매달려 숨가쁘게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보게합니다.
    이렇게 오랜세월을 내고향 마산을 지키며 살아오신 회장님께 응원 을보냅니다.
    인생의 길목에서 우리모두 잠시쉬어가며 고향 과 마산 을 다시한번 새겨봅시다.
    회장님! 옛날 부르던 그대로 회장님이라 부를께요.
    항상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많은 고향소식 전해주세요.
    NY 에서 이렇게 고향소식 들으며 많이 안타깝네요.

    • 허정도 2010/02/20 07:55 address edit & del

      반갑긴 합니다만, 누구신지 몰라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블로그 왼쪽 상단의 profile에 보면 제 이메일 주소가 있습니다.
      이메일로 연락 한번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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