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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5

김형윤의 <마산야화> - 70. 영미연초의 출현 70. 영미연초(英美煙草)의 출현 1907, 8년 경에 일본서 창설된 영미연초(英美煙草)와 동아연초주식회사는 한국으로 진출. 마산에서 맨 처음으로 선전 판매한 담배는 오본입(五本入) 병정표와 십본입(十本入) 새표, 파이레트(통칭 칼표)와 자전거표. 그 다음으로는 담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한 차림을 한 선전 부원들은 나팔과 북을 치며 가두 행진을 하면서 담배를 공짜로 마구 던지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기다란 연죽(煙竹)에 엽초(葉草)를 즐기는 때라 생활의 여유있는 사람들은 옥(玉)이나 호박 빨뿌리에다가 금박 장식을 한 은삼조동(銀三鳥銅) 담배통을 즐겼으며, 담배는 한때 이름났던 원산초(元山草)가 아니면 충청도산 엽초에다 소주와 꿀물을 뿜어가지고 이것이 습도나 건조의 중간쯤 해서 곱게 접어 그 위에 무게 있는.. 2016. 1. 25.
김형윤의 <마산야화> - 69. 도로의 변천 69. 도로의 변천 신마산 일대의 해군기지를 둘러싸고 일·로의 각축이 첨예화되어 가던 무렵 일본은 그들 거류민의 집단 거주지 지역에 대한 시가지 도로의 확충에 주력했다. 진해의 근대식 시가지 구획정리와 더불어 신마산 일인가(日人街) 도로 역시 미비하다고는 하나 그 당시로 봐서는 제법 제격을 갖춘 형태였다. 그러나 구마산 일대의 도로는 1913년까지 노폭이 겨우 3미터 정도(신마산에서 구마산으로 연결되는 길, 진주 방면으로 가는 길)를 가지고 소위 ‘신작로’로 불리었다. 그런데 1913년에 현재의 부림시장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는 도로와 제일은행 앞에서 남성동 쪽으로 동행(東行)하는 길이 확장됐으며, 1923년 10월경에는 중성동에서 시민극장 앞으로 내려가는 길과 현 조흥은행 앞길이 현재의 폭으로 확장되었다(.. 2016. 1.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도시계획에 따라 허물어지고 없어진 시내에 점재(點在)하던 이름난 건축물을 살펴본다. ● 동척(東拓)지점(와가 / 瓦家 - 목조단층) - 오동동 삼각상점에서 동으로 신작로가 남으로써 건물과 정원의 2/3 이상이 철훼(撤毁)되는 동시에 지점도 폐쇄되고 그 자리가 중화요정 봉래관(蓬萊館)이 되었다. ● 명태창고 - 이 건물은 1920년 여름 남한을 휩쓸던 호열자(虎列刺) 때 환자 수용소로 일시 이용한 때도 있었으나 역시 도로 확장에 따라 반 이상이 철훼(撤毁)되고 지금은 잔영만이 있을 뿐이다. ● 박간(迫間) 창고 - 이곳은 창고와 광장이 있어서 그때는 환등(幻燈)과 활동사진을 공개하였고, 창고는 농구상(農具商), 보덕상회(報德商會)와 서야도기(西野陶器) 창고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 2016. 1. 11.
김형윤의 <마산야화> - 66. 마금산 온천 67. 행려병자 수용소 66. 마금산 온천 창원군 북면은 멀리 문창군(文昌郡) 관할, 그 다음으로 회산군(檜山郡)으로 개칭하였다가 이조 말엽에 창원부에 속한 곳이다. 여기에 마산 근교의 유명한 온천이 있었는데 이조 초에는 약수온천이라 하여 환자의 왕래가 부절(不絶)함에 따라 여인(旅人)을 수용할 숙소가 없던 그 시절이라 부득이 무료 민박의 폐단이 심한 관계로 지방민들과 상의 끝에 온수구(溫水口)를 매몰하여 버렸다. 이것을 안 엿장수 한 사람이 극히 소규모의 수원(水源)을 발굴하고 엿을 사는 환자에 한하여 목욕과 음복수(飮服水)를 제공해 왔다. 여기에 착안한 마산부 선정(扇町, 현 반월동)에서 치과의 겸 총포화약상을 하던 일본인 여창(與倉) 모가 엿장수에게 대단히 헐값으로 권리를 인수하여 정식으로 수원을 착굴하여, 얼마 안가서 .. 2016. 1. 4.
새해인사 또 새로운 해가 찾아 왔습니다. 바뀌어야 할 것은 바뀌고 지켜야 할 것은 지켜지는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행복하십시오 ~~ 2016.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