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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윤의 <마산야화> - 82. 총각회 사건 82. 총각회 사건 시내 중성동에 자리 잡은 목조는 1921년 경에 진동읍내 김상범이란 청년지주가 장만한 주택건물이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수리 한 번 한 일이 없이 그대로의 모습이다. 오직 변한 것이 있다면 집 주인 뿐이다. 주택으로 병원으로 여관으로 변하였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외면으로는 평탄하게 지낸 듯 하지마는 처음 주인 김 씨 때 벌써 큰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전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소위 총각회 사건이다. 내용인 즉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중산계급이면 으레 소실을 두는 것이 공공연한 통례이니 여기에 김 씨가 빠질 수 없다. 시내 모 사립여학교를 중퇴한 묘령에다 미모인 조(曺)섭이란 처녀가 있었다. 여학교를 중퇴하였다 하면 그 가정 형편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나 18,9세의 묘령.. 2016. 3. 28.
김형윤의 <마산야화> - 80, 어속령의 참화, 81. 두 청년의 순정 80. 어속령(魚束嶺)의 참화 마산 시내에 자동차를 운영한 곳은 대정 2년(1913) 마산역전 상반여관(常盤旅館)인 것 같다. 마산에 소위 신작로가 생기고, 함안, 진주로 통하는 길은 1908년(지금 신마산 쪽에서 시청 앞 도로는 1914년 경인 듯)이다. 이의 증거로 마산 창신학교 앞 회원교에 융희 2년 건립이란 표석이 있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아 1908년인바 해방 후에 반가지(半可知)의 애국자들의 손으로 삭제되고 단기연호로 박혀버린 것이다. 각설 상반여관이 소유한 차량은 그때는 ‘포드’ 포장차(布裝車) 7인승이며 이것으로 매일 혹은 격일제로 진주까지 내왕하던 한산한 시절이었다. 1917년 가을경이다. 지방신문인 남선일보사 주최로 미기(美妓) 투표의 승자인 배학희 양은 애인의 본댁으로 가는 도중 군북을.. 2016. 3. 21.
마산 해양신도시 운명 결정할 안상수 시장님께 마산 해양신도시 운명 결정할 안상수 시장님께 오래 동안 지역을 떠나있었던 분이라 2년 전 취임 때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취임 후 보여준 모습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특히 도시철도문제의 간명한 해결과 주남저수지 보전에 대한 입장은 매우 신선하였습니다. 이 글은 그런 기대감으로 씁니다. 인공 섬 해양신도시가 처음 계획된 것은 어언 15여 년 전입니다. 당시 황철곤 마산시장은 저 섬에다 고층아파트를 지을 계획으로 시민들 동의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도시 사정을 잘 아는 다수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매립은 하되 아파트는 짓지 않겠노라 약속했던 겁니다. 이 약속은 통합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박완수 시장도 아파트와 상가가 아니라 공익을 위한 용지로 개발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습니다... 2016. 3.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78. 일경부의 피습, 79. 일기루의 화재 78. 일경부(日警部)의 피습 1905년(광무 9) 2월 모임 마산포 주재(일본 영사관 소속) 경부 경익태랑(境益太郞, 병합 후 마산초대서장)은 낙동강 하류 연안에 수렵갔던 귀로(歸路), 일몰로 해서 창원군 내서면 근주(近珠, 일명 살구징이) 한인객사에 투숙했다가 밤중에 괴한 십수명이 기습하여 그가 소지한 엽총, 탄환, 행이(行李) 등을 탈취한 후 흉기로 난자하여 경(境)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일본 영사 삼포(三浦)는 일헌(日憲)과 일경(日警), 한경(韓警)에 급히 연락하여 즉각 인군(隣郡)에 비상망을 펴고 범인 체포에 활동하였으나 수색 8개월이 되도록 단서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간단한 실마리로 함안읍에서 수괴 정원길을, 일미(一味) 등 8명은 창녕읍에서 타진, 마산경무청(현재 부림동 시장에 있었.. 2016. 3. 14.
김형윤의 <마산야화> -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77. 광산 약탈에 대한 항거 / 한자가 많아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옮긴이) 개항 이래 일본인들은 마산포 일대의 토지 소유권의 약탈과 아울러 광산권까지도 침탈해 가게 되었다. 마산에 이웃한 창원군 북면에 있는 구룡산 아래 고암동(古巖洞) 동광(銅礦)은 20년의 역사를 가진 유명한 것이었다. 이를 탐낸 일본인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이라는 자가 전 광무감리(礦務監理) 김위섭과 결탁하여 정부에도 알리지 않고 자기들 맘대로 1901년 6월부터 기계와 재력을 투입하여 약 5년 한(限)으로 채굴을 시작하였다. 이를 탐지한 내장원(內藏院)은 1902년 2월 철광(撤礦)을 명령하였다. 마목진차랑(馬木辰次郞)은 투자를 구실로 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이 감리보고를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접광.. 2016.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