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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5

김형윤의 <마산야화> - 94. 야까이 일인 도가 어조 94. 야까이 도가(都家) 일인 어조(漁組) 신마산에는 일본인들의 조차한 곳이라 해서 대개 한인들은 신마산을 거류지 아니면 조계(租界)라고 하는데, 이곳이 일인들의 생활 중추지점이다. 모든 생활필수품은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신마산 일인들끼리의 상거래로서 자족한 것이며, 지금 외교구락부라는 다실 근처에 ‘아케트(염매시장 廉賣市場)’를 설치하여 그들끼리의 편리를 꾀하였으며, 신마산 발전소 근방 일대를 매립하기 전까지는 일인들의 생선 도매상이 있었다. 이 일본인 생선 도매상 즉 수산조합에는 부득이한 사정이 아니면 한인 어민들을 ‘세리’에 가지 않고 대부분 구마산 어판장 위탁으로 하고, 이 때문에 일본 어상(漁商)들은 어로 현장에서 직접 매매 계약을 하는 식 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가장 근거리의 밤꾸미(栗九味).. 2016. 5. 3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3. 어시장 93. 어시장(魚市場) 마산의 한인 경제의 동맥이라고 일컫는 구마산 어시장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약 2백 수십 년 전부터라는 고로(古老)들의 추측으로서 생선과 일용품 시장은 6,70년 전까지는 구강(舊江, 현 산호동)이라는 취락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업조합으로 약진하여 부산에 버금되는 조합건물이 윤환(輪奐)의 위세를 뽐내고 있지마는, 조합 이전의 어시장에는 객주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영세 어민에게는 조업자금을 대여함으로써 어로고(漁撈高)의 몇 분의 얼마를 이자조로 공제하여 객주와 어민간의 상호 유대를 견지해 왔던 것이다. 합포사라는 객주들의 협의기관을 조직하여 외래자금의 침투를 공고하게 방어하여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하였다. 한 예를 들면 외래자금이라는 것은 특히 일인들을 지칭하는 것인바, 그 .. 2016. 5. 23.
김형윤의 <마산야화> - 92. 묘락좌의 화재사건 92. 묘락좌(妙樂座) 화재 사건 1931년 3월 10일은 일로(日露) 전쟁에 승전한 육군기념일로 진해 군항에서는 아침부터 축제 기분에 들떠 있었다. 읍내에 있는 목조 2층 건물인 영화관 묘락좌(妙樂座)에서는 무료 영화를 공개하는데 조선인을 제외한 일인, 읍민, 군인, 소학생만으로 소위 ‘대입(大入)’ 만원을 이루었다. 영화가 한창 상영되어가고 있을 때, 2층 영사실에서 돌연 화재가 일어났다. 그 당시의 필름은 가연성 물질이어서 가끔 인화의 화를 입게 되었으므로 필름을 취급하는 자는 각별히 주의를 했어야 했다. 그날 묘락좌(妙樂座)의 경우를 보면 무료 입장이라 장내는 발디딜 틈이 없었고, 영사 도중 혼란을 막기 위해서 비상구는 물론 출입문까지 꼭 잠가버린 뒤에 “불이야” 소리가 났으니 장내의 소란은 그야.. 2016. 5. 16.
김형윤의 <마산야화> - 91. 제등만의 참사 91. 제등만(齊藤灣)의 참사 진해 해군통제부 앞 부두 있는 곳을 일인들은 제등만(齊藤灣)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경성에 죽첨(竹添) 일본공사가 있던 곳을 죽첨정(竹添町), 장곡천정(長谷川町), 마산의 까치나루(작진, 鵲津 - 지금 발전소 있는 곳 / 현 남부터미널)를 일본 귀족원의장 근위(近衛)가 상유(賞遊)한 곳이므로 일인들은 하마(近衛濱)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원조선총독(元朝鮮總督) 제등 실(齊藤 實)이 과거 진해 요항부(要港部) 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을 인연해서 제등만(齊藤灣)이라 명명한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 후로 일반 민간선박은 일체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나 그 당시에는 통제부 앞 솔섬 사이와 날부리(비봉, 飛鳳) 현동으로 작은 배들은 관통하였다. 1928년 창원-진해선 철도(일본 千葉공병대 병사들.. 2016. 5. 9.
김형윤의 <마산야화> - 90. 국농소의 소작권 쟁의 90. 국농소(國農沼)의 소작권 쟁의 밀양군 하남면 수산리 소재 국농소(國農沼) 전답 수백 두락을 둘러싸고 한일 반동분자와 소작인 간에 불씨가 튀는 쟁의가 벌어진 일이 있었다. 국농소(國農沼, 옮긴 이 / 송산서원 카페에서 인용) 수산(守山)의 국농소(國農所)는 조선시대 초기의 수산국둔전(守山國屯田)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조 후기에는 수산지(守山池) 또는 국농호(國農湖)라 불렀으며 그 제언(堤堰=물을 가두어놓기 위한 둑)을 수산제 혹은 대제(大堤)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지형이 모두 바뀌고 비옥한 수전 경작지로 화하여 당초의 경역(境域)을 분간하기 곤란하나 하남읍 수산리와 초동면 김포리(金浦里) 사이의 광활한 들판을 아직도 국농호 또는 ‘궁노수’라 부르고 있으며 댓섬(竹島), 자라목(鼈山) 등의 유적도 남.. 2016. 5.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