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16/08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8.첫 맥주 양조장 109.비어홀 110. 일주박래 108. 첫 맥주 양조장 시내 수성동 소재 김동조 이비인후과의원 건물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사설로 유명한 숭양산인(嵩陽山人) 위암 장지연 선생 우거처이며, 그 전에는 박우길의 소유였으나 또 그 앞에는 맥주 양조장이기도 했다. 규모는 미미하여 얼마만한 양의 양조를 하였는가는 알 수 없으나 밀을 대량으로 매입하여 맥주 양조를 하는 일방 경성에서 선전 ‘포스터’를 인쇄하여 출입하는 대문과 도로변에도 붙여 선전에 노력도 했으나 자금과 기술 관계인지는 모르나 설치된 미구(未久)에 해산되고 말았다. 109. 비어홀 전 제(諸) 내과의원 천변 건너편에 있는 댄스홀은 대정 초기 경 일본 본전(本田)이란 사람이 최초로 맥주홀을 개점하였다. 입구는 지금 그곳인데 문 앞 간판에는 서양인 선부(船夫) 비슷한 비.. 2016. 8. 29.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7. 최초의 야학교 107. 최초의 야학교 1911년 창원군 외서면 고산포(高山浦, 구마산)에는 한국 최초로 야학교(남자)가 탄생하였다. 발기인과 간부들은 지금은 전부 타계한 분들이지만 명부에 나타난 인물은 설립자 유천(柳川), 구성전, 교장 남전(藍田) 옥기환, 교감 창산(蒼山) 이형재, 경리 소원(小園) 김철연, 외 허당(虛堂) 명도석, 일파(一波) 김용환, 나인한(호 망각) 등 그때에도 쟁쟁한 청년 선각자들이다. 장소는 현재 시가지 구역확장으로 통로가 되었지만 당시 도면을 보면 남성동 69번지 조그마한 창고를 수리하여 시작하였다. 여기 수학생 중에는 초기 보통학교와는 달리 변발한 총각, 상투 있는 기혼자들로서 생도 전부가 선창에서 어물상의 고용인 또는 삭발 아동 등 혼성부대들이었다. 연혁은 기록이 소멸된 관계로 초대 .. 2016. 8. 22.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6. 사립 일어학교 106. 사립 일어학교 마산에 최초로 학교의 명칭이 붙은 것은 신마산 일인 거류지에 있던 심상소학교요, 다음은 구마산 아래학교 정문 건너편에 사립 일어학교이다. 이 학교는 일종의 일어 강습소에 불과하였지만 그 당시 부산에서 개진(開進)학교를 경영하던 일인 시원치랑(柿原治郞)과 그 부인 학길(鶴吉) 부처가 교장직과 주임으로 분담하여 1906년 경에 전기(前記) 학교를 설치하였다. 과목은 일어와 산술이었고, 수업시간은 1년 내지 1년 반이었는데 생도의 본의는 산술보다는 일어습득에 중점을 두었으며, 초기 입학생은 십 수 명에 지나지 않았다. 통영에서는 일인 도변직필(渡邊直弼)이란 자가 일어학교를 설립하고자 부산에서 건축자재를 반입하였다가 조선인들의 반대에 부딪쳐서 초지(初志)가 좌절되었으며 도변(渡邊)은 그 .. 2016. 8. 15.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923년 1월 당시 동경서 유학한 몇몇 청년 김형두(明大 법과 재학 중, 변호사 시험 합격)를 필두로 손문기, 이주만 등이 연휴(連携)하여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그 해 여름에는 ‘노농동우회(勞農同友會)’라는 것을 조직 발족하였다. 명칭은 ‘노농’으로 있으나 그 대상은 공장 노동자가 아니고 부두에서 일하는 하루살이 자유노동자들로서 그 숫자는 극히 적었다. 최초에는 오월절이란 이름 아래 프랑스를 위시하여 세계 남녀 노동자들은 하루의 행락을 마음껏 즐기는 극히 평화로운 날이었다. 호주 멜본 시에서는 시위 행렬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시장은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였지마는 그 반대로 미주 시카고에서는 헤이 마켓에 이르는 평화시위 군중과 경찰이 충돌함으로써 발포.. 2016. 8. 8.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4. 의례준칙과 헌수 폐지운동 104. 의례준칙과 헌수(獻酬) 폐지운동 1935년(소화 10)에 관혼상재의 간소화와 비용 절양을 권장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 내무국에서 의례준칙령을 공포한 일이 있다. 헌데 이 영(令)이 공포된 뒤에 부내 만정(萬町, 동성동 / 원본에는 중성동)에 있던 학산의원(鶴山醫院)의 이순필 원장이 영애의 결혼식을 의례준칙대로 거행할 터이니 부 당국에서 와 보라고 하여 그대로 실행해 본 외에는 아무도 실행한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안다. 주석(酒席)에서 교배(交杯)하는 풍속은 아마 조선인과 일본인 뿐일 것이다. 친한 벗들과 권커니 잣거니 하여 거나하게 되면 논담풍발(論談風發)로 그날 그날의 삶의 시름을 잠시 털어버리는 것이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네 교우상의 멋이었다. 그러나 주석에서 교배(交杯)의 도가 넘쳐 상대방의 주.. 2016.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