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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6. 일간 신문지국

126. 일간 신문지국

 

 

일문 - 경성일보, 조선신문,상공일일신문(이상 서울), 인천매일신문, 중도일보(대전), 대구일보, 대구민보, 시사신문(부산), 부산일보, 마산신문(창간 직후 폐간), 남선일보, 대마산신문(下關-남선일보 대항 수일간 폐간), 대판조일신문, 대판매일신문, 복강일일신문(福岡日日新聞), 만조보(萬朝報, 동경 폐간), 그리고 운송해 온 일문일간지 평양매일신문, 압강일보(鴨江日報), 목포일보, 전주신문, 함흥일보, 원산매일신문 등이다.

 

국한문지 - 매일신보, 경남일보(창간 12년에 폐간),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중앙일보, 조선중앙일보(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사건으로 폐간), 국민신보(사주 민원식-동경철도호텔에서 핀일파로서 피살- 창간 직후 폐간) 등등인 바 경성일보, 매일신보가 총독부 어용지 그리고 부산일보를 위시 몇몇 도시 이외는 통제라는 명목으로 모조리 폐간 처분을 하는 동시 용지난으로 194571일부터 타브로이드로 8·15 직후까지 명맥을 계속하였다.

 

여기 특기할 것은 개천(芥川)이라는 사람이 부산일보를 창간하였는데 그때는 조석간 증()페이지를 하지를 않고 4페이지 신문 제4면은 조선인 독자를 얻기 위해서 1914년을 전후해서 언문(한글)난을 계속한 일이 있다.<<<

 

 

사회주의계열 항일운동가 이재유의 체포를 다룬 <경성일보> 1937년 4월 30일자 호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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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5. 벽신문

125. 벽신문

 

 

1924년 여름께 국내 처음으로 벽신문이란 것이 나왔다.

 

그때도 벽신문이란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상한 것이라 하여 화제가 되었으며 이것이 신문에 예보도(豫報道)되자 보도 기관이 희소한 관계로 그랬던가 몇몇 지방에서는 지국 설치 희망자로부터 규약과 보증금 액수 그리고 부수에 대한 할부 관계 무가지 매수를 문의하는 우편물이 쇄도하여 쓴웃음을 머금게 했다.

 

여기에 벽신문에 관한 취지와 유래를 약설(略說)해 보면 이것을 Sten gajeta~Stennya gazeta라 칭하며

 

멀리 제정 러시아 때부터 적색소비에트 또는 프랑스 등의 적위군(赤衛軍)의 대내(隊內)에서 유행하여 이것이 점차로 각 공장과 공청(公廳) 노동자 구락부, 농촌 독서실 그리고 학교 등에 보급된 신문 형식이었는데 주로 일반 신문에 게재되지 않는 소범위의 사회사상의 보도 기관이라는 것이다.(일본 중앙공론사 발행 문예대사전 참조)

 

전술한 바와 같이 이것은 반드시 적위대에서만의 벽신문이 아니고 각 공장에서도 노동자들만의 이해관계와 각종 물가 시세를 보도하는 곳도 상당수가 있었던 모양이었으나,

 

마산의 경우는 노동자의 현황뿐만 아니라 신문에 게재된 중에서 돌출한 사건도 보도한 것이다.

 

외국의 일은 잘 모르나 여기서는 백로지(白鷺紙) 전지 한 장에 수서(手書)하여 매주 2회 토, 일요일 양일 밤에 노동자 혹은 여성들 앞에서 즉독(卽讀)하고 설명을 한 다음에 질의 답변 등을 하여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 교대로 논설을 담당한 두 사람 중 계급투쟁과 생산 경쟁을 주장한 김명규와 유물사관을 극히 반대하며 상호부조론을 신봉한 김형윤과는 그 사상과 생리가 완전 대립된 상황 속에서도 이들의 감정과 성격은 어느 점에선가 일맥 통하는 점도 없지 않았으나 김명규 등은 공산당 사건에 대거 연좌됨으로써 사무실도 폐쇄되고 7호가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 ; 사무실은 현 중앙병원 자리의 조선일보 지국임. <<<

 

본 사진은 중앙일보 2016년 3월 8일자에 실린 것으로, 동일본 대지진 때 이시노마키일일신문의 취재부장이던 다케우치 히로유키 상무가 2016년 3월 4일 신문사의 박물관에 전시된 수기 벽신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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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4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3. 기자 피살사건, 124 - '비(秘)'를 알리는 경무국

123. 기자 피살사건

 

 

현역 신문지국 기자가 폭한에게 피살되었다.

 

피해자는 당시 조선총독부 어용지인 매일신보 마산지국 기자 박성화(朴性和)이며 가해자는 마산시 오동동 이성화의 자 이 모()로서

 

가해자 이()가 저지른 전날의 비행이 전기(前記) 신문에 보도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반드시 동 지국 기자 박성화의 취재 송고에 의한 것으로 그릇 판단한 가해자 이(), 항상 박에 대한 살의를 품고 오던 중 193510월 모 일 밤 11시경 시내 서성동 동사무소 옆에서 그를 만나자 근처 술집 식도를 들고 나와 다짜고짜로 하복부를 두세 번 찔러 병원에 옮겨 놓은 즉시 숨지게 한 것이다.

 

박 기자는 피살되던 다음날 동아일보 지국으로 옮기게 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는 평소에 형평운동(衡平運動)에 자진 투신하여 백정계급에 대한 일반의 차별 대우에 감연히 궐기하여 투쟁한 바 있었으며, 남들의 호의와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으나 가해자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하여 참혹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가해자의 살인 공판에서는 관여 검사로부터 5년 징역의 구형을 받았으나 판사들은 방청인들의 분위기를 참작하였음인지 불과 4, 5분간의 합의로써 7년 징역의 선고판결을 내렸었다.

 

현역 신문기자가 피살된 것은 마산으로서는 처음 생긴 사건이었다.

 

 

 

 

124. ‘()’를 알리는 경무국

 

 

총독부 당국은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에 관한 기사를 관제(管制)하는데 심혈을 경주하는 것은 천하가 주지하던 일이다.

 

중앙 각 신문은 사건 발생한 정보를 보도하므로 경무 당국은 기휘(忌諱)에 저촉이니 무어니 하여 해당 기사를 삭제하는 일방 행여나 하여 각지 주재소에 지급전화로 미삭제의 신문 단속에 약기(躍記)하던 그때는 경비 전화 시설이 없는 때문에 전화요금이 막대하다고 했다.

 

그런데 중앙지에 대해서는 삭제로서 안도하는 모양으로 지방지들은 중대사건을 전연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데 으레 경고하는 ()’가 프린트로서 전달된다.

 

1. 제등(齊藤) 총독이 압록강 유역을 시찰 중 대안(對岸)에서 부정선인(독립군) 김일성(金日星)이 총격을 가해 왔다.

 

2. 의열단의 김지섭(金祉燮)이 황송하옵게도 이중교(二重橋)를 습격, 황거(皇居)를 향해 돌진코자 하다 수비 경관에 피체(被逮) 운운.

 

예3. 신의주에서 김유정(친일) 변호사에 폭행을 가한 자의 가택 수색을 한 결과 임원근 일파의 비밀단체인 공산당 사건이 발로(發露)됐다.

 

4. 충북 충주에서 요로(要路) 인물 암살, 관공서 폭파 등을 음모한 무정부주의자 등 흑기(黑旗) 연맹이 관련자 일방 타진 운운하면서, 이상 경고함 등으로 지방에 앉아서 중대사건이 돌발한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 해방 후 경찰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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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2. 남선일보의 수난

 

122. 남선일보(南鮮日報)의 수난

 

 

일문(日文) 지방신문 남선일보가 경영난으로 세인의 동정이 쏟아졌다는 것은 별보(別報)와 같거니와 이 신문이 일반에 주는 성격상 인상은 하등의 정치적 재정적 배경도 그리고 국수사상이나 군벌 예찬 같은 그런 것은 아예 없고 말하자면 지방으로 전락한 자유주의자 몇 사람이 제작한 순수한 지방지라는 것이 적중할 것이다.

 

발행 부수와 보급 범위가 극히 좁고 경제적 기초가 없으니 사원의 보수와 신문사로서 항상 재고되어야할 용지마저 그날그날 허덕이는 판이니, 활자 개체(改替)같은 것은 일종의 몽상에 지나지 못한 형편으로 루비활자 전체가 폐자(廢字)가 되다시피 망가져서 교정원들은 비명을 울리고 있었다.

 

 

 

<1929년 9월 19일 자 남선일보 기사 / 남선일보는 일제 강점기 마산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의해 발행된 일본어 신문이다>

 

 

공교롭게도 시기가 마친 검열 당국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소화 천황의 즉위식-1928년 어대전(御大典)의 성전식(聖典式) 기사의 제목이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문선(文選)과 대교(對校)를 거쳐 편집국을 통과한 신문이 배달 도중 고등경찰에 전부 압수되고 편집국 책임자, 문선, 교정원들이 긴급 검속(檢束)되었다.

 

각 신문마다 황실에 대한 기사는 전 심혼을 기울이고 조심조심하는 것인데, 이날 천황의 즉위한 어대전(御大典)()’자가 불경스럽게도 ()’자로 오식되어 있었던 것. 그래서 걸리기 쉽고 싱겁기 짝이 없는 불경죄, 말 한 마디 실수하면 판에 박힌 2년 징역인데, 이것은 굵다란 활자로 자 대신 자가 박혀 충분한 증거로 등장하였으니 회사의 간부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불경한 일이 자기들 관할 내에서 생겼기 때문에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문선 교정 몇 사람에게는 뺨 몇 대, 검도봉(劍道棒) 몇 차례의 세례 정도로 마치고 신문은 근정(謹訂)’으로 낙착되었다.

 

그러나 즉위식 다음해 신년호가 또 검열경찰의 비위에 거슬렸다.

 

어대전(御大典) 사건 뒤 상부로부터 견책을 받은 그들 경찰은 신문사를 요시(要視)하던 중인데 원단(元旦)신문에 게재된 천황 내외의 사진이 매우 희미하여 노발대발한 나머지 회사의 간부와 기계공을 호출하는 일방 신문은 모조리 압수되어 회사로서는 더욱 궁지에 빠지고 말았다.

 

또한 경찰이 남선일보를 항상 색안경을 보고 밉게 본 진원(震源)될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캐보면 이런 일이 있었다.

 

보통 일인들은 연초에 먹을 음식 중에서도 떡은 이미 섣달 하순경부터 준비하는 것인데 소화 천황 선대인 대정(大正)이 지병으로 태자인 소화가 섭정하게 된 4년만인 19261225일 기세(棄世)하여 그들 국민들은 소위 양암(諒闇) 중이라 하여 애도에 잠기고 있었을 무렵, 남선일보 외근기자 한 사람이 그의 친지 입에서 떡방아 찧는 것을 보고

 

대정 천황은 굶주린 거지 귀신이다. 모처럼 우리들 국민이 정초 떡을 만들어 낙()을 삼고 있는 이때 하필이면 허기증이 들어 얻어먹기 위해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라고 이와 같은 불손불경한 말을 신명나게 지껄이고 있을 때 그 기자와 평소보터 감정이 틀린 일인 노파가 엿듣고 즉각 경찰에 밀고한 것이다.

 

기자와 그의 친지는 엄중한 문초를 받았는데 친지는 이 일을 확대하지 않고 발설치 않는 조건으로 석방하고, 문제의 기자는 일본의 그의 고향으로 가는데 관부연락선까지 미행의 감시를 붙여 강제 추방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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