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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9 00:00

한국 100명산이야기 21 : 비파와 거문고 형상의 비슬산

국가적으로 우환이 많았던 병신년을 마무리 하기 위해,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 있는 비슬산을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양덕동에서 모여 곰탕으로 유명한 현풍으로 향하였습니다. 현풍의 산업단지라 할 수 있는 '대구테크노폴리스'가 한창 조성중에 있었습니다. 단순한 공단이 아니라 '대구경북과학기술원'과 대규모 주거단지 및 대학 캠퍼스 이전계획까지 포함된 대규모 신도시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암튼 공단을 통과하여 우리는 산행출발지인 유가사로 향하였습니다. 

 

 瑜伽寺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827년(신라 흥덕왕 2) 도성()이 창건하였다. 889년(진성여왕 3) 원잠()이 중창하였으며, 1047년(고려 문종 1) 학변()이, 1452년(조선 문종 2) 일행()이 각각 중수하였다. 전성기에는 3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하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1682년(숙종 8) 도경()이 대웅전을 보수하였고, 1729년(영조 5) 취화()와 파봉(), 1760년 보월(), 1776년 밀암(), 1797년 낙암()이 각각 중수 또는 중창한 바 있다. 1976년부터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켜 오늘에 이른다. (출처 : 네이버 지식)

 

 

- 일주문의 위용 : 사찰의 대문에 해당되는 일주문을 통해 사찰의 위세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 사찰 마을 풍경 : 인근 민가는 대부분 식당이나 민박집 등이었습니다.

 

유가사에 출발 : 유가사에 도착시간은 10시경, 경내에 둘러보고 10시 30분에 산행을 시작하였습니다.

- 출발에 앞서 기념샷!

 

- 산행을 하면서, 비슬산의 유래에 대해 궁금해졌습니다. 산의 형세가 비파와 거문고와 같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행중에 그 모양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 산행코스는 가장 근거리 코스를 정하였습니다. 지도상 좌측 유가사에서 우측 능선삼거리를 거쳐서 정상으로 향하는 코스인데, 등산책에는 1시간 30분 소요시간을 예상하지만, 우리는 2시간 가까이 걸려 12시 반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비슬산 :  

산 정상의 바위모양이 신선거문고를 타는 모습을 닮았다 하여 ‘비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최고봉은 천왕봉(:1,084m)이다. 종래의 최고봉은 대견봉()이었으나, 2014년 10월 국가지명위원회에서 천왕봉으로 변경했다. 남쪽으로 조화봉(:1,058m)·관기봉(:990m)과 이어지며, 유가사() 쪽에서 올려다 보면 정상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바위 능선이 우뚝 솟아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

 

- 연리지(連理枝) : 뿌리가 다른 나무가지들이 서로 엉켜 한나무 처럼 자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죠, 근데 이녀석은 지면에서 독수리 오형제처럼 가지를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이 독특했습니다. 돌이 많은 산에 와송들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지질과 관계가 있는듯 합니다.

 

정상에서 : 12시 반쯤, 정상인 천왕봉에 도착해서,

- 오랫만에 펼쳐 본 100산 원정 현수막입니다.

 

 

- 최근 드론에 푹 빠진 김국장님!!!

 

-우리들의 보급대장. 학만님? 조난에 대비한 비상식량을 항상 조달함.

 

- 지역의 온갖 일에 관심이 지대한 대장님, 그리고 1인 원로회의 의장님~~~

 

- 죽기전에 100산을 다 가고픈 백산원정대장~~~

 

- 점심으로 충무김밥과 담아 온 위스키로 한기를 날려보냅니다.

 

- 식후에 바라본 주변 풍경 : 구름에 의한 성운층이 발 아래 보입니다. 해발이 천고지 정도이니~~

 

- 하산길은 급경사길을 선택했습니다. 경사가 엄청났습니다. 올라갈 때 이길은 도저히~~

정상에서 3.3키로미터 입니다. 하산시간은 1시간   반정도 걸렸습니다.

 

하산하면서: 100산 원정이 매월 원정하기에는 무리이고, 1년에 4번정도, 분기별로 한번씩 간다면 앞으로 남은 80개 산은 20년걸린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암튼 이렇게라도 하자는 제안에 모두들 동의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20년 뒤라는 말에 ~~

그 나이들어서 가게될런지 하는 심정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려면 갈 때 까지 가 보는 것이지요!

암튼 계절별로 한번씩 가게 되는 것 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 200년 가까이 된 국사당 건물 : 올라갈 때 못본 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딱 보기에도 제법 세월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는듯 보입니다.

局司堂/ 국사당은 사찰 경내를 수호하는 외호신장을 모신 곳이다.

서낭당, 장군당, 영신당 등의 신당보다 한 단계 높은 신당으로 ‘상당’이라고도 불렀다.

원시 신앙의 구심점인 천신 신앙에서 발생한 것으로 하늘과 가까운 높은 산정에 국사를 모셔 놓고 지역 수호신으로 섬겼다.

이러한 원시 신앙이 뒤에 들어온 불교, 유교와 타협하면서 발전하여 온 것으로 여겨진다.

사당 내부 천장에 "동치십일년(同治十一年)"이라 정확한 목소들이 남아 있는것을 보아 1827년에 재작된 건물로 추정 하고 있다. 

내부에는 소박한 제단이 있고 그 위에 위패가 하나 놓여 있다.

"봉청비슬산내국사지신위(奉請琵瑟山內局司之神位)"라고 쓰여있으며, "가람신(伽藍神)"을 모신 곳임을 알수 있었다. [출처] [대구 비슬산] 24-1 유가사와 여름철 계곡도 좋은 수성골 산행길....|작성자 순돌이

 

- 국사당의 위용 : 정면 1칸, 측면 1칸의 소규모 건물이지만 정면 초익공 장식과 측면에 외출목의 굴도리 장식이 집의 격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하벽 막돌 쌓기의 무심한 듯한 모양이 친금함을 더해줍니다.

 

학봉산악회 일년을 마루리 하며

- 산림청에서 정한 '한국 100명산'을 탐방하기 위하여 지난 2013년 5월에 '학봉 100명산 탐방대'가 발족하였습니다.

매월 한번씩 간다면 계산상 8년 4개월 소요됩니다. 하지만 혹한기와 혹서기를 빼고 1년에 10회 정도를 예상하고 10년 정도면 가능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딱 2번밖에 가지를 못하였습니다.

그 동안 느슨했던 몸과 마을을 다잡아서 1년에 철따라 4번씩만 간다면~

정유년 2017년부터 시작하면 2037년에 마무리 될 수 있습니다.

학봉대원님들!!!!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병신년 굿 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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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0. 신간회

 

130. 신간회(新幹會)

 

 

3·1운동이란 약소민족 해방의 봉화가 계림팔도에 팽배함에 이어, 일본 여러 곳 대, 소 전문학교의 유학생들은 어느덧 사회주의 사상에 침투되어 그 격랑은 드디어 극동 전역을 석권하는 판도가 되었다.

 

순순하고 열렬한 민족주의자의 단일 전선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제 공산당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지하 근거지로 발화시켜, 이 불꽃으로 민족 전선에서 속속 이탈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루스쿡크파 여운형의 고려 공산당 같은 것이며, 내지에서도 이들 수배(數倍)의 선풍이 농민운동, 노동조합 부녀동맹, 청년동맹 심지어 소년소녀동맹, 독서회 등 수십 개의 관계 단체에도 휘몰아쳤다.

 

때가 소비에트의 콤민테룬의 지령에 움직이고 있는 때라, 민족주의라는 보수적 고첩(孤疊)에 고민하고 있는 진영은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하고 있는 공산계에서는 민족진영에서 대동단결하자 비합법 통일정당이며 표현기관이다 하여 갖은 미소(媚笑)와 추태를 던져 오므로 이 기회를 놓칠세라 드디어는 1927(소화2) 신간회라는 기상천외의 기형아가 고고의 소리를 울렸다.

 

민족 전체-대동단결-정신 총집중 운동-이라는 거대한 권위체라는 것이 나타나자 대세를 판가름 못하는 눈 어둔 유상무상(有像無像)들은 너도나도 솔선하여 신간회로 질주했다. 혹자는 신간탕(新幹湯)이라고 야유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무엇보다도 항일 민족통일전선 연합정신에 기간을 두고 다음 5대 정책을 내세웠다. 조선인의 착취기관 철폐, 이민 정책 반대, 조선본위 교육실시, 조선어 교육실시, 과학사상 연구 자유 등인데,

 

마산에서는 당시 민족주의-우국 일변도로 숭앙을 받던 창산(蒼山) 이영재, 허당 명도석, 일파 김용환, 객원으로 김형철 등, 사회주의자로서 김형두, 김명규, 손문기, 이주만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인데 이 중에 손문기는 처음 이론(異論)도 하고 논쟁도 하였으나 결국 흡수되어 대체로 무난히 결성되었다.

 

여기에 시종 그들의 합작과 대동단결이란 것이 어부지리가 되고 말 것이라고 단언하고, 반대한 것은 새벽 하늘에 별과 같이 몇 사람 안 되는 무정부주의자들뿐이었는데, 처음부터 사회주의계의 잠식수단(蚕食手段)을 경계하지 못한 민족진영은 광주학생 사건을 전후하여 서울 조선극장 내 김무삼(金武森) 사건 배후를 예()히 검색한 결과 신간회 온상 깊숙히 ML당이란 가공할 비밀결사가 노출됨과 아울러 1931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것은 마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동일한 사회주의자들의 음모의 화신이란 것을 인식하지 못한 우매한 민족진영 전체가 어이없이 도괴된 동일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마산야화의 저자 김형윤 선생은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신간회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이지 못한 것 같아 보충자료를 올린다.- 옮긴 이

 

* 민족대백과사전에 소개된 신간회

<개설>

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이다.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2월부터 1931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초대 회장은 월남 이상재)

 

<의의와 평가>

신간회의 해소는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민족해방운동은 신간회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고 신간회는 거기에 무력함 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운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전위와 아래로부터의 반제통일전선 결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므로 신간회 해소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그 방법에 있었다.

 

 

<1927년 2월 14일 신간회 창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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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00:00

한국 100명산이야기 20 : 눈구경 하러 간 덕유산

때 늦은 산행일지한해를 보내기 아쉬워 현풍의 비슬산에 갔었다. 비슬산 일지를 쓰려다 보니 앞선 덕유산 일지가 빠트린 것을 늦게사 확인하고 이렇게 적게되었습니다.

덕유산 산행일지를 빠트리게 된 변명같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산행을 마치며 오면서 참여한 대원들이 몹시 피곤해 하였습니다. 하여 앞으로 산행하기 어렵겠다는게 의견이 모아져 "앞으로는 100산 원정이 힘들겠다."고 판단하고 이럴꺼면 써서 뭐하겠노! 하는 심정에  제껴 버린 것입니다. 늦게나마 정신이 돌아와서 산행에 참여한 대원들을 생각해서 때 늦은 일지를 쓰게 것입니다. 아울러 기억을 토대로 적은 일지이기에 약간의 착오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4월의 눈구경 : 작년초에 태백산에서 본 눈구경이 좋아서 눈구경을 설산을 보러 2월부터 가자고 했으나, 대원들이 고령화가 심화되어 눈산은 위험할 것이라는 이런 저런 핑계에 의해 늦춰지다가, 아진 잔설이 남아있다는 덕유산을 확인하고 4월 2일에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덕유산행이 결정된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가 리프카에 의해 정상을 코앞에 둔 9분 능선까지 수월하게 산행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학봉대원 4명과 비봉대원 2명이 더해진 6명의 대원들이 눈구경하러 덕유산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 곤돌라 승강장에서 출발기념 샷 : 신나 하는 모습들~~

* 곤돌라에서 : 폰 삼매경하는 큰 대장, 주변 살피는 여대장

 

* 곤돌라 하차장에서 : 9부 능선쯤 되는 곳입니다. 전망탑과 식당 및 편의점이 즐비한 곳으로 여기서 부터 30분 정도 산행하면 정상에 도착하게 됩니다.

당시 기억으로 눈이 제법 남아있었는데, 정작 설산 풍경은 사진에 담지 못했군요, 아쉽네요

 

 

* 정상에서 인증샷 : 정상의 봉우리는 향적봉입니다. 해발이 자그마치 1,614미터입니다.

오공환님, 김국장님, 신삼호님, 구경희님, 큰대장님, 학봉대장님 폼잡고 있습니다.

 

*원로원 겸 고문관 역할을 하는 허대장님

 

* 작업의 고수 김국장님~

*언제나 달달한 느낌의 오공환님

 

* 정상부 주변 풍경들

 

* 정상부에서 내려다 본 덕유산 주변 풍경들

 

 

마무리 하며 : 숙제를 미루지 말자

- 사진위주의 설명정도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절대 산행일지는 미루지 않기로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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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9. 애국 여성들

129. 애국 여성들

 

 

여기에 소개하는 애국 여성은 대한제국에 대하여 애국을 했다거나 대한민국에 대하여 충성을 한 여성을 말함이 아니다. 일정시대에 일본의 잔학한 군국주의자에게 충성을 다한 여성을 말함이다.

 

일정시대에 그자들에게 충성한 자가 하필 여성 뿐이리오마는, 여기에 뫼시는 세 사람 여성은 그들의 생리처럼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애국심을 발휘하는데 이름이 높았다.

 

지금 회고해 보면 그때 신문들이 하도 극성스럽게 그들의 애국심을 과시(?)해주었기 때문에 인상이 생생하다.

 

진주부내 모 권번(기생들의 대기소-편자 주 / 민족항일기의 기생조합-옮긴 이)에 입적한 강모라는 기생은 매월 8일 즉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진주만 공격의 날, 즉 일본 천황이 대미선전포고의 조칙詔勅을 내린 날-편자 주)이 되면 일금 오원야(五圓也) 혹은 10원야(圓也)를 꼭꼭 출전 황군(일본 천황의 군대-편자 주)을 위하여 헌금했다.

 

일본 신문들은 애국 기생이라고 명명하여 그 이름이 자못 높았다. 그러나 이 기생의 헌금은 자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 기자들의 권유와 짓궂은 기자들의 과찬한 보도에 얽매여 종전까지 억지 춘향을 한 것이었다.

 

웃지 못할 넌센스였으나 이 애국(?) 행동이 보도되자 마산의 두 여성이 진주의 한 천하고 미미한 기생에게 질세라 감연히 궐기(?)했다. 두 여성(가정부인)은 맹약이나 한 것처럼 매월 정기에 10원야(圓也)를 국방성금조로 꼬박꼬박 종전까지 헌납했다.

 

한 여인은 신마산 동경관 스타지오의 조재동 부인 김 씨요, 또 한 여인은 구마산 시계병원 조상록 부인 장 씨다.

 

특히 장 씨의 경우 금포상(錦布商)을 차리고 있었는데 그 당시 소위 애국부인들과는 교류가 각별한지라 그 점방에는 대일본 애국부인들이 단골 거래처가 되어 상당한 은진(殷賑)을 이루었다.

 

장 씨의 애국사상은 골돌하여 과연 남성 이상으로 멸사봉공의 정신이 투철했다. 1942(?) 727일 일본 해군 기념일에는 전월(6)의 장사 이익이 윤택했다면서 평소 정기 헌금액의 50배인 일금 5백원야(百圓也)를 기꺼이 헌금하여 병사계는 물론 부민들을 감동케 했다.(부산일보 728일 소재所載)

 

그런데 이 두 애국 여성 중 신마산 김 씨는 해방이 되자 대한민국 부인회에 돌아왔으나 구마산의 장 여사는 부처(夫妻) 공히 좌파(左派)로 일변하여 일본에 애국하던 마음이 자기들의 조국에는 끝끝내 충성을 하지 못하고 길가에서 방황하고 있더라는 소문이었는데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1930년대 엽서로 소개된 진주기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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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8, 신인회 탄생

 

128. 신인회(新人會) 탄생

 

 

한국에 사회주의사상이 들어온 것은 19193·1운동 후이다.

 

바다 건너 일본에는 반드시 사회주의라고는 할 수 없으나 명치 조기에 양행(洋行), 즉 구라파로 갔던 사람들 중에 서원사공중(西園寺公重)이나 복택유길(福澤諭吉)같은 사람은 루소의 민약론(民約論)에 크게 영향을 받아서 일본에 신사상의 선편(先鞭)을 친 사람들이다.

 

일로(日露) 전역(戰役) 때에는 유명하였던 만조보(萬朝報)라는 신문사에 사주 흑암누향(黑岩淚香), 신덕추수(辛德秋水), 내촌감삼(內村鑑三), 안부기웅(安部磯雄), 석천삼사랑(石川三四郞), 편산잠(片山潛), 계리언(堺利彦) 등등 당대에 쟁쟁한 논객들이 톨스토이의 비전론(非戰論)에 호응하여 반전론을 강조한 범사회주의 시대도 있었지마는,

 

러시아에 공산당이 집권한 뒤로 일본도 공산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조도전(早稻田) 대학 내에는 국수파의 우익단체와 사회주의파의 신인회(新人會)가 있었다.

 

신인회 회원은 동대(東大)출신이 대부분이며 이 중에 좌야학(佐野學)을 필두로 자유주의의 온상인 조대(早大)에 취직한 교수들이 신인회를 지도하고 있었는데,

 

평소부터 경원지간인 국수파 학생과 교내에 일대 난투극이 벌어진 선물로 좌야학(佐野學) 테이블에서 공산당 비밀서류가 경시청 특고(特高)에 의해서 발견되어 중요 간부 십수명이 재빨리 모스크바와 이루스쿡그로 탈출하고 그 나머지는 일망타진되고 만 것인데, 이것을 모방한 것이 마산 신인회라는 것이다.

 

지금 대광예식장 뒤편이었던 손문기(孫汶岐) 씨 주택 사랑방에서 손문기, 김형두, 이주만 3인이 회합하고 발기문과 취지문을 작성한 것이 1923년 봄인데,

 

이것이 이곳 마산 뿐이 아니고 사회주의 사상의 맹아로서 실로 전국에서 효시였던 것이나 그 후로 이렇다 할 활동이나 뚜렷한 소득도 없고 말았다.<<<

 

<글 중 대광예식장 자리에 들어서 있는 한국투자증권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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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5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7. 청년들의 방역운동

 

127. 청년들의 방역(防疫) 운동

 

 

1920 (원문에는 1929년으로 되어 있지만 본문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대정 9년인 1920년으로 추정되어 바로 잡음) 즉 일치(日治) 대정 98월경에 마산시내를 엄습한 콜레라로 인해서 아침에 만난 사람이 저녁이 되면 피병원(避病院, 격리병원)으로나 묘지로 가고 만다.

 

1918년에 전 세계를 휩쓴 이스파니아독감의 맹위에 굴복된 민중들은 환자가 발생하면 약보다 기도하는 것이 만배 이상의 효능이 있다는 미신이, 현대의 예방치료나 과학을 억누르고 집집마다 샤머니즘에 젖어서 밤이나 낮을 가리지 않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여기에 호역(虎疫)의 예방주사 같은 것도 일본인의 병원에는 편협한 민족 감정으로서 고의로 한인 환자에게는 차별을 하고, 심지어는 절명케 한다는 최극단의 유언(流言)이 횡행하여 일의(日醫)의 치료와 시료(施療), 격리 병사의 수용 등을 완강히 거부하던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이때에 마산민의소 간부를 중심한 중견 청년들로 결속된 마산구락부 청년회에서는 화급히 마산 호역방역대(虎疫防疫隊)를 편성하여 긴급 동원을 하였는데, 방역에 소요되는 일체의 비용은 한 푼도 당국(일본인 각 기관)의 지원을 받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 당시 청년들의 방역태세를 보면, 본부의 명령에 일사불란 신속 출동으로 적십자 완장의 가운(소독복)을 입고 환자가 발생한 상당 거리를 교통 차단과 동시 석회 소독을 하여 출입제한, 혹은 이 마을 사람이 이웃 마을로 갈 때라도 예방주사 필증을 정시(呈示)치 않으면 통행은 절대로 용인치 않았다.

 

수도 시설이 없던 시절이라 공동우물과 우물주변을 소독한 뒤에는 부녀자의 접근을 금하고 대원 자신들이 급수 공습하였으며, 각 가호호(家戶戶)의 음료수에 희염산(稀鹽酸)을 타서 먹게 하는 일방 출입문전에 가마니 위에다가 당시 유일한 소독약이었던 석탄 산수(酸水)를 뿌려 반드시 소독한 가마니를 밟고 출입토록 하는 등,

 

방역에 치중하던 이들의 애족심에는 감개무량할 뿐이며, 당시 활약하던 대원들 명단을 기억으로 더듬어 보자.

 

대장 ; 김무경(金武敬, 일명 태권)

대원 ; 이영재, 명도석, 나인한, 김용환, 김용선, 김태곤, 김치수, 김철두, 손문기, 김기호, 김계호, 오호봉, 명상수, 김지철, 이정찬, 김명규, 김형오, 전 석, 황태현, 이우문, 최대규, 김기성, 여병섭, 황장오(이상 전원 고인), 최철용(무순)

* ; 이상 명단 중에서 누락된 분이 있다면 양해 바람<<<

 

 

<마산민의소 회관이 있었던 옛 시민극장 / 지금은 다른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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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년 3월 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오늘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2. 영불의 함대 입항

142. 영·불(英·佛) 함대 입항 1920년 여름, 안남(安南, 월남)에 있는 불함(佛艦)이 마산 저도 좌편 안쪽에 투묘(投錨)했다가 삼일 후에 출항한 뒤를 이어, 상해에 주둔하고 있는 영함(英艦) 호오킨스호가 동도(同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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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마산포와 열강 1901년 노국은 북청(北淸)사건을 이용하여 만주에 군사적 관리권을 확립했다. 1902년에는 동청(東淸)철도도 개통되고 1903년에는 시베리아 철도의 본선도 완성되었다. 노국의 경제적 세력은 광산, 기타..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9. 노일전쟁과 율구미

139. 노·일(露·日) 전쟁과 율구미(栗九味) 노국의 조계지인 율구미는 1903년 1월 5일을 마지막으로 노국 수변 8명이 철수한 후에는 공지화되었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노국 영사 카자코브는 치지코브라는 자에게 그곳을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8. 신상회사와의 투쟁

138. 신상회사(紳商會社)와의 투쟁 신상회사(紳商會社) 혁파 투쟁은 국내 본건지배층에 대한 투쟁이지만 외세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고, 또 마산항민들의 저항심의 성장을 고찰하는데 의의를 가진 투쟁이기 때문에 여기 서론(叙論)코자..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노·일(露·日) 양국인의 마산포 경영에 대하여서는 일본 외교문서 제33권에 당시 마산 일본 영사 판전중차랑(坂田重次郞)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두 가지의 보고 즉 마산포에 있어서 노국간의 경..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6. 1900년대의 국제관계

136. 1900년대의 국제 관계 청일정쟁으로부터 노일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최고의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시대적 특징인 극동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의 심화와 그 확대로..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 국토의 약탈과 국민생활 제재(制裁) 일본은 노일전쟁 전에 거제도 일대(송진포松津浦 / 원문에는 송포진)를 근거로 어업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중 일본 대노국(對露國)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3. 노공관의 점유지

133. 노공관(露公館)의 점유지 1899년 노서아와 일본 정부가 마산에 해군 근거지를 두려고 각축전이 치열했는데 노서아는 서부 마산에 조차 조약을 체결한 뒤 지금의 일성 펌프공장 자리에 영사관을 두고 백조악기점 자리에는 관사..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2. 아라사 함대 입항

132. 아라사 함대 입항 아라사(노국의 별칭) 함대가 마산포에 투묘(投錨)한 것은 1899년(광무 3년, 명치 32년)이 처음이었다. 주한공사인 파브로프가 탑승한 군함 만츄리아 호가 인천에서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상해로 ..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1. 자복포의 매수 각축

131. 자복포(滋福浦)의 매수 각축 조선정부와 영·독(英·獨, 1883년 11월 26일 체결), 아국(俄國, 1884년 7월 / 원문에는 1885년 10월 24일 체결), 의국(義國, / 해방 후 미국을 의국이라 칭하기도 했..

새해인사
새해인사 2017.01.01

2017년, 모든 이들이 희망을 품고 사는 세상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애당초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노신>

한국 100명산이야기 21 : 비파와 거문고 형상의 비슬산

● 국가적으로 우환이 많았던 병신년을 마무리 하기 위해, 대구시 달성군 현풍에 있는 비슬산을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아침 9시에 양덕동에서 모여 곰탕으로 유명한 현풍으로 향하였습니다. 현풍의 산업단지라 할 수 있는 '대구테크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