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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9. 노일전쟁과 율구미

 

139. ·(·) 전쟁과 율구미(栗九味)

 

 

노국의 조계지인 율구미는 190315일을 마지막으로 노국 수변 8명이 철수한 후에는 공지화되었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노국 영사 카자코브는 치지코브라는 자에게 그곳을 관리 시켰다. 관리 조건은 마산포에 입항하는 노국 군함에 공급할 용수정(用水井) 하나를 마련할 것과 산에 감시인을 두기로 하고 매월 10원씩 주던 것을 무급으로 하되 한국인에게 소작을 시켜 수확된 절반을 취득케 하였다.

 

노일 전쟁이 일어나 18일 치지코프가 마산포를 철수할 때 그가 가졌던 상품을 일본인 강기(岡崎)라는 자에 매도한 것이 연고가 되어 율구미 조계지를 이 강기(岡崎)가 관리했다.

 

또 부산에 살던 일본이 강본(岡本)이라는 자가 로인(露人)과 친했기 때문에 치지코프로부터 호텔 관리를 의뢰받은 관계로 같이 그 관리에 관계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 뒤 1904518일 조선정부는 조로(朝露)조약을 폐기키로 선언했다(·로 조약폐기칙선언서·露 條約廢棄勅宣言書). 1조에 한·(·()) 양국 간에 체결한 조약과 협정은 폐파(廢罷)하고 실시(實施)할 사().

 

따라서 190064일 외부통상국장 정대유와 마산 노국부영사(露國副領事) 소코브가 이에 체결한 율구미호약(栗九味互約)도 폐기됨과 동시에 율구미 노국 조계지는 자동적으로 조선정부에 복귀된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조로(朝露) 조약의 폐기와 아울러 감리서에게 훈령하여 이를 정식으로 접수하고 주체적 입장에서 지방민을 위해 유효하게 활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하무인격으로 횡포를 자행하던 일인들이 율구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즉 길야문길(吉野文吉)이라는 자는 전쟁이 일어난 1904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율구미의 재목을 맘대로 벌채한 것이 오천 원어치나 되고 그 수는 부지기수였다. 그 후 전술한 로인(露人) 치지코프가 철수할 때 그의 상품을 샀다는 강기(岡崎)90여 만원어치나 벌목하여 울창했던 율구미는 황폐하고 말았던 것이다.

 

율구미가 무방위 상태에서 일인들의 남벌로 황폐해가는 것을 보고도, 중앙 정부로부터 지령이 없어 감리(군수)는 외부대신에게 그것을 관리함이 타당한지 여부를 질문했던 것이다. 일본 영사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은 이 기회를 틈타 율구미를 일본 세력권 내로 확보해두기 위해 일본 천엽현(千葉縣) 어업단을 이주시킬 계획을 추진시켰던 것이다.

 

그때 천엽현 어민들은 고기가 잡히지 않아 조선 남해 연안의 적지(敵地)에 그들 어민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천엽수산시험장장(千葉水産試驗場長) 이하 그 관하 어업 대표자가 시찰차 마산에 오게 되었다.

 

이들은 1904929일 마산 일본영사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를 찾아가 그에게 협조를 구했다. 삼포(三浦)는 이들 시찰원들을 데리고 이곳을 답사했는데 먼저 50, 200명을 이주시키겠으며 1호당 일백 원씩 모두 오천 원의 보조로 19054월에 이주 실행을 하겠다고 했다.

 

이 조계지 면적은 30여만 평인데 그 5분의 3은 산지와 경사지이며 거기서 받은 30만 평(원문에는 두락) 중 논은 2백여 두락이고 수전(水田)수확은 벼 150석이 된다.

 

벼 일석을 5원으로 치면 총액 750원이 되고 밭에서는 연 수입 백 원은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는 종래의 조선인 소작 14, 15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땅은 이주 어민의 경작지로 정하고 연 수입은 어민들의 적립금만 제외하고는 모두 그들이 찾아가도록 할 것이라 했다.

 

이 무렵 천엽현(千葉縣) 수산시험장장(水産試驗場長)에게 마산 일본영사가 어민 이주를 위해 사전조건을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1) 마산 일본영사의 독단으로 율구미의 사용을 묵허(黙許)하는 것이므로 전쟁 계속 중에는 아무 일이 없겠으나 영원한 것은 보증하기 어렵다.

(2) 이주 어민이 올 때는 감독인을 보낼 것.

(3) 이주 어민이 다른 곳으로 전업하여도 억제하지 않겠으나, 단 전업에 관한 제정(提定)을 요한다.

(4) 이주자 조난을 위해 그 적립금을 마산 일본영사에 납입한다.

(5) 어민은 군용어부의 명의로 율구미에 이주시키고 조선 해수산조합 이외에 둔다.(이때 해수산조합의 감독권은 부산 일본영사가 가지고 있었다.)

 

시찰원 일행이 전기(前記) 사항에 합의를 본 106일 귀국 도상에 올랐는데 마산 일본영사는 곧 이 사실을 일본 외무대신에게 품청(稟請)했다.

 

율구미는 노국 조계지였으나 그 조약이 폐기되어 조선 정부에 복귀된 것인데도 이같이 법적 원칙을 무시하고 마산 일본영사가 그들의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일본 어민을 이주시킬 계획을 서둘렀다. 이 얼마나 침략적이며 만행이냐. 이 한 가지 일로써 나머지 일을 상상해 보라.

 

마산 일본영사의 품청(稟請)에 대해 외무대신은 동년 1025일자로 회훈(回訓)을 통하여 재마산 노국 조차지가 소멸할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으나 일단 소멸한 이상은 조선 정부에 복귀해야 된다는 유권적 해석으로 훈령하였다.

 

그 후 천엽현(千葉縣) 지사와 마산 일본 영사는 거듭 어민 이주를 청허해 줄 것을 일본 외무대신에게 요청하였으나, 동년 1122일 부산 일본 영사에게 한 훈령 마산포의 노국 조차지에 관한 외무성 의견서가운데 광무 4330일의 조약 제3항에 의하면 만일 조차지 내에 조선인민의 토지·가옥 등이 있을 때는 조선 정부에서 이를 매상(買上)하여 노국에 인도한다. 운운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해() 민유지(民有地)는 조선 정부에서 매상(買上)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다시 노국(露國) 정부에 인도한 것으로 단순히 해() 지소(地所)를 조선으로부터 다시 조차한데 불과하고 노국 정부에서 직접 민유전(民有田)을 매수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로조(露朝)조약의 폐기 결과 해조차권(該租借權)은 당연히 소멸하였으니 율구미 조차지는 조선 정부에 귀속한다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아랑곳없이 19051월 일본 천엽(千葉) 어업자 20여 명의 총대표 길야문길(吉野文吉, 千葉縣 夷隅郡 수산조합 이사)은 다시금 율구미의 일부를 어업 가근거지로 사용케 해줄 것을 마산 일본 영사에게 출원(出願)하였다.

 

이때 마산 일본 영사는 일시 사용이라는 조건하에 통감정부의 허락을 받아 드디어 이를 허가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주체성이 상실되어 친일 매국노가 가득 차 있어 일본 영사들이 이러한 불법을 감행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산 일본 영사의 허가를 받은 일본 천엽촌 수산연합회는 현비(縣費) 보조 4천원을 얻어 먼저 20명의 어부를 선발하여 19052월 전 율구미 북서안에 불법 이주를 감행했다.

 

 

<일본 어업이민지였던 율구미 천엽촌 / 율구미는 국립마산병원과 창원기상대 일대의 산 전체를 말하며, 일본어민들이 정착했던 천엽촌의 위치는 창원기상대 인근에 보이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

 

 

이를 근거로 어획물 정리장을 건설하여 약권현망일통(鰯權現網一統), 조정승(鯛廷繩), 수조망(手操網) 등에 종사케 하고 19065월 중에는 다시 일본 당국에 80여 명의 이주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노국과의 전후 고말(姑末) 교섭이 완결되지 않아 허가하기 어렵다는 것을 동현지사(同縣知事)에게 통보하였다.

 

이 결과 50명만이 이주했는데 이 해 대실패를 하여 사망자와 귀향자가 생기고 잔류자는 30명에 불과하였다.

 

동년 12월 통감대신은 조선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재마산 구로국(舊露國) 조차지는 일본 어민의 근거지로 극히 적당하여 전년 이래 해목적(該目的) 이용 중에 있으므로 당분간 차용하겠다는 것을 조회하여 동년 1220일 조선 친일 매국 정부의 동의를 받아 천엽(千葉)어업단의 사용이 묵허(黙許)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로(日露) 전쟁이 일어난 뒤로부터 전쟁이 끝나고 로인(露人)이 다시 율구미로 돌아올 때까지 율구미 관리 상황은 그 조계지에 조선인 소작인이 14,5이나 되었다. 이들 작물은 사음(舍音) 하성겸(河聖兼)이 받아 매각하여 그 대금 약 270원을 전후(戰後) 치지코프가 돌아 왔을 때 이를 지불했던 것이다.

 

1906년에 이르러 부산 노국영사 티 아이 봐시리트가 마산 겸임 영사로 마산을 관리하게 된 뒤, 종전에 치지코프가 가진 것과 동일한 조건으로 노국에 귀화한 조선인 이봉형(러시아 명 키리코오프)에게 관리시켜 취득케 했다.

 

관리 로인(露人)이 마산으로 돌아오고 율구미의 황폐가 문제로 대두되자 마산 일본 영사는 일인의 도벌을 조선 측에 전가시키기 위해 그곳 토지와 산판송추(山坂松楸)의 관리를 감리서에 의뢰했다.

 

이에 감리측은 응낙하지 않았다. 19066월 초에 귀환했던 로인(露人)이 돌아와 율구미의 책임을 일본 측에 추궁하게 되자, 일본 측은 우리는 무관하며 감리서에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여 감리 측은 여러 번 추궁을 당하게 됐다.

 

천인공노할 일본의 간사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감리는 로() 영사가 래주(來駐) 이전에 이에 대한 조선 측의 대책을 외부대신에게 청훈(請訓)하였던 것이다.

 

한편 1907년에 율구미에 불법 이주한 천엽현 어업단은 다시 실패하여 동년 말에는 재류자 11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1908년에는 어획의 호조를 가져와 이주자 19명의 증가를 보게 되고 19096월 현재에는 52명으로 증가하였다.

 

1909년으로부터 3년간은 매년 5천원의 현비 보조를 받게 되어 있었다. 이들 자본과 현비 보조는 다음과 같다.(1909년까지)

 

율구미 천엽(千葉) 어업단의 자본 및 현비 보조액

자본 수입액, 현비 보조액 4,000원 합계 4,000(비고 ; 수산연합회 보조) / 원본에는 1906년으로 실려 있으나 그 이전의 것으로 보임

1906년 자본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8,000원 합계 12,500

1907년 자본금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7,500

1908년 자본금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7,500

1909년 자본금 수입액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5,000

 

그 뒤 율구미 노국 조계지는 일본 육군성이 노국에서 4만원에 이곳을 매수하여 일본 육군 군용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율구미에 불법 이주한 천엽 어업단도 1915년에는 보조의 길이 끊어져 어호(漁戶)의 태반은 귀향하고 그곳은 마산 중포병대의 군용지, 군용림이 되었다.

 

일제 치하는 마산 일본학교 조합이 그 관리를 위촉받아 그 수입을 교육비에 충당해 오고 있었다,

 

율구미는 1904518일 조로(朝露)조약이 폐기됨에 따라 이같이 일인들이 불법 점거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는 것은 마산 항민은 말할 것 없고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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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8. 신상회사와의 투쟁

 

138. 신상회사(紳商會社)와의 투쟁

 

 

신상회사(紳商會社) 혁파 투쟁은 국내 본건지배층에 대한 투쟁이지만 외세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고, 또 마산항민들의 저항심의 성장을 고찰하는데 의의를 가진 투쟁이기 때문에 여기 서론(叙論)코자 하는 바이다.

 

구마산은 그 입지적 조건이 영남의 인후(咽喉)의 역할을 한 요지로 특히 경남 일대에서는 고래로부터 물산의 집산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항 이전부터 상업자본이 상당히 축적되어 있는 곳으로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순조 33(1833) 마산포(구마산)의 객주 총계가 130호나 되었던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1902년 구마산의 시장권을 빼앗으려던 일인들과 투쟁하여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된 재정적 배경은 역시 구마산 상인들의 자본의 힘이다.

 

마산포가 개항된 후 구마산에 영세 일인들이 드나들게 되고 잡거해 가면서 오래 상품이 들어와 상업이 약간 활기를 띠게 되자 1901년 구마산 상인들이 자주적으로 창설한 객주회사를 고쳐 1903(2)에 경위원(警衛院, 1901년에 창설한 궁내부 소속 황실 호위기관)이 신상사(紳商社)라는 어용 중간 착취기관을 설립하여 지독한 착취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견디지 못하여 구마산 상인들은 신상사 혁파의 상소를 외부(外部)에 올리게 되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현재 본항(本港) 상민(商民) 김처원(金處元), 김준길(金俊吉), 박원숙(朴元淑) 이본항(以本港) 신상회사혁파사(紳商會社革罷事)로 외부(外部)에 상소(上訴)한 지령(指令)을 봉준(奉准)하온 즉 내각에 미수일문(微收日文)이 창재나시(剏在那時)며 기경해상등소(旣經該商等訴)하야 이론보경부지의(以論報京部之意)로 제발칙하조변(題發則何早辨)하야 치차내번(致此來煩)인지 소유전말(所有顚末)을 상사보명(詳査報明)할 사등인(事等因)이옵시고 해상민등(該商民等)의 상소내개(上訴內槩)에 본항(本港)은 즉각(卽各) 항중불성양지처(也港中不成樣之處也) 이거신축년분(而去辛丑年分)에 자경위원(自警衛院)으로 설신상회사(設紳商會社)하고 욕추외구(欲抽外口)타가 출입구(出入口)에 도무(都無) 가추지물(可抽之物)하야 내어포구선(乃於浦口船) 주인급차어상(主人及此漁商)과 행상무상(行商坐商)과 지주선인등처(地主船人等處)에 탁이구문(托以口文)하고 자무자매문물(自貿自賣文物)을 논기시가(論其時價)하야 십분지삼(十分之三)을 책봉(責奉)하오니 불과(不過) 1년에 각 상매자본(商賣資本)과 각 선인(船人) 영업(營業)이 몰입기중(沒入其中)하야 일항상민(一港商民)이 거양환산(擧懹渙散)하고 물가등용(物價騰湧)하야 민불요생(民不聊生)이오니 동촉(洞燭)하신 후에 본항신상회사(本港紳商會社) 각목(各目)을 영위혁파(永爲革罷)하심을 복망등정(伏望等情)이온바 차()를 준사(准査)하온즉 거신축년분(去辛丑年分)에 자경위원(自警衛院)으로 파유총무원(派遺總務員)하야 이기객주회사(以其客主會社)로 개작신상회사(改作紳商會社)하야 조정추세(條定抽稅)이온바 인사이상호원(因此而商呼冤)이 성극가민(誠極可悶)이오니 해사설시(該社設施)가 여시난혁(如侍難革)이온즉 양감미수(量減微收)가 자합방편(恣合方便)이오나 유비본서지소가천편고(有非本署之所可擅便故)로 준차상민등소(准此商民等訴)하와 이어본년사월(已於本年四月)에 거실보명우(擧實報明于) 경위원이고미승회지(警衛院而姑未承回指)이옵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

 

광무(光武) 8712

창원감리 이태정(李台珽)

 

외부대신 이하영(李夏榮) 각하(閣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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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1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7. 노·일(露·日) 마산포 경영

 

137. ·(·) 마산포 경영

 

 

·(·) 양국인의 마산포 경영에 대하여서는 일본 외교문서 제33권에 당시 마산 일본 영사 판전중차랑(坂田重次郞)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한두 가지의 보고 즉 마산포에 있어서 노국간의 경영 비교의 건(19001130일자)에 있다.

 

여기서는 이를 중심으로 기타를 참고하면서 노일 양국 간의 마산포 경영을 비교해 본다.

 

노국 측이 조선 측과 율구미호약(栗九味互約)’을 맺고 율구미 소유지 교환문제로 노일 외교가 무르익어가고 있을 때 노국 상인들의 마산포 진출과 아울러 그 상업 경영도 한창이었다.

 

190081일 현재 노인(露人) 또는 노국 세력을 배경으로 한 사람들과 기타 외국인이 마산포에 온 지주 또는 상인들로서 그 상업 자본가는 우라지밀 미센코, 도부잔산스키, 긴스불그 상회, 휴우고 아이 두우벤, 원빈(原彬), 마릭크스 베히틴, 리푸렌치프 및 멤스 기타 외국인 지주로는 렛스나(墺人. 오스트리아인) 1(), 보헤팅 하우스(獨人) 4, 영국상회 홈링가 2, 구레이(美人) 1구 등이 있었다.

 

<현 월포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마산 러시아 영사관>

 

 

이 같은 사람들의 마산포의 상업적 활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라지밀 미센코 ; 마산 각국 조계지에 있어서 대지주의 한 사람으로 처음은 12구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를 점차 노국(露國) 상인에게 전매하여(190081일 현재) 7구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밖에 월영동 배후 지대에다 조선인으로부터 3만 평방미터의 산지를 250원으로 구입했다. 이가 토지를 구입하는 목적은 자가 부지 외에는 오로지 전매를 목적으로 하는 투기적인 것이었다.

자가로는 각국 조계지에 아연 함석의 지붕으로 된 가옥 1동을 건축하여 처자와 함께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의 목적은 토지 전매와 아울러 노국 군함에 대한 용달(用達)과 승무사관(乘務士官), 수병들에 잡화와 음식물의 소매를 하였고, 그 외 조계지의 토목건축 공사 청부에도 야심을 갖고 있었다.

 

도부잔산스키 ; 월영동과 자복동과의 중간인 작진등(鵲津嶝) 언덕에 있는 노국의 매수지를 빌려 중국인 직공을 고용하여 벽돌 제조업을 시작했다. 이때 주택도 없이 천막 내에 기거하며 경영은 어려웠다. 전기(前記) 미센코로부터 조계 내 3지구를 매수하고는 집을 세울 양으로 있었다. 그는 중국인 직공의 증고(增雇)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 있었다.

 

긴스불그 상회 ; 이 상회의 본사는 일본 장기(長岐)에 있었는데 동청(東淸) 철도회사(부산) 아젠트 호버라는 자가 대리인으로 일을 보았다. 이 상회는 조계지에 있었으며 대지주였다.

 

휴우고 아이 두우벤 ; 오국인(墺國人)이나 동청철도(東淸鐵道) 회사(부산) 사람으로 그 계통은 노국(露國)에 속했다. 그는 마산포 각국조계지 지구의 총 중매인이라 일컬을 수 있어, 처음부터 사들인 지구는 무려 36가구에 달했다.

그 뒤 노국 또는 그 계통인에게 26구를 팔아넘기고 8구는 자기 명의로 남아 있었다. 그는 늘 부산에 머물고 있었으나, 수지가 맞는다고 느껴 쌀을 사들여 여순(旅順)이나 블라디보스토크에 보내고 생우(生牛)를 사서 판매도 하는 한편 노국 상인들에게 석탄도 판매했다.

그는 또 부산-마산 사이의 정기 항로를 계획하는 등 무척 돈벌이에 몰두했었다.

 

마릭크스 ; 불국인(佛國人)이나 노국 세력으로 장기(長岐) 신디게이트의 중견인이었다. 그도 조계지 내의 토지를 사들인 대지주였다.

 

라프렌치프 ; 동청철도(東淸鐵道, 원산)로 마산 각국 조계지 내에는 겨우 1구를 갖고 있었는데 일본인 소유구를 매수하려고 애썼으며 가옥 건축도 계획하고 있었다.

 

이상은 190081일 현재 노국을 비롯한 기타 서구 상인들의 마산포 경영 상황이다.

다음은 일본 상인의 마산포 진출과 경영 상황을 보련다.

 

일본 당국 매입한 지소(地所) 11구와 우편국 부지 6구를 제외하면 그 소유는 겨우 12구에 불과했다.(서구측 소유는 총 50)

이때 그들 손으로 조계지 내에 세운 건물은 두 집뿐이었다.

 

조계지의 토목공사청부인 팔두사직길(八頭司直吉)이란 자가 가진 20평짜리 단간 집과 또 한 집은 노국 군함에 용달상(用達商)을 하던 강본 용(岡本 勇)이라는 자가 가지고 있는 2층 집이다.

 

이 무렵 일본 거류민 중 십중팔구는 소자본으로 잡화의 소매인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과 어울려서 살려고 조계지에서 10리나 떨어진 구마산포에 있었다.

 

이 같은 노·일 양국 상인들의 마산포 경영 상황에서 일본 영사 판전중차랑(坂田重次郞)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하면서 자기 의견을 아래와 같이 구신(具申)한 것이다.

 

……의당 경제상으로 보면 무역으로는 아직 볼만한 것이 없고, 거기다가 세관(稅關)까지도 옮기지 않아 오늘의 마산포에서 조급한 계획으로 부질없이 거액의 자본을 들여 지소를 매입하며 가옥을 건축하여 물건을 진열한다 해도 도저히 수지가 맞을 리 없다.

그런데 지금 노인(露人) 거류지에서 하고 있는 바를 보면 언제 이용할 수 있을지도 예측하기 어려운 토지에 대해 대단한 돈을 뿌리는데 원가 백원인 토지에다 무려 1만원의 거액을 의심치 않고 투자하고 있다.

또 무인(無人)의 마산포에 속속 가옥을 건축하고 벽돌 제조업을 개시하는 등 그 행위는 의심할 바가 많다. 그들은 거액을 들여 얼마간의 이익을 볼 때까지 앞으로 얼마만한 자본을 어느 때까지 투입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1(一厘)도 수입을 못 보면서 단순히 지출뿐으로 수년을 계속하는데 앞으로 얼마를 지탱할지 보통의 정리(定理)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어떤 특수한 이유가 있을 것인즉 그들의 마산포 경영에 대하여는 자연히 두 가지의 추정을 하는 것은, 기일(其一)은 노국 정부의 보호이며 기이(其二)는 이들이 마산포에 상업상의 중요성을 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 모두(冒頭)에 기술한 본년(本年) 311일자 기밀 반공신(半公信) 및 동원 22일자 기밀본(機密本) 26호에 있어 진언한바 있거니와 노국은 마산포 또는 그 부근에다 군사적 대 계획을 완성할 것을 기하는 동시 이와 관련하여 마산포를 노국 이익선(利益線)의 기점으로 하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조선해협에 있어 부산이 가지는 역사와 상업은 도저히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마산 방면에다 조영물(造營物)의 수요품 매도를 시작하면서 조계지에 상업을 육성하고 한편으로는 무비(武備)를 강구하는 동시에 장차 여기를 근거지로 삼고 부산에 대항하고 그 이익선의 확장을 도모하려 한다.

그들은 제1회 공매 때에 조계지에 있어 적지 않은 토지를 매입한 것과 같은 것은 오로지 이런 의미에서의 준비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이 같은 사실은 노국 상인들이 정부 당국에서 직접 간접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군사적 성공을 빌면서 마산포의 미래의 상업적 번영을 마치 블라디보스토크이나 여순(旅順)과 같이 알고 있는 것이니 즉, 현재의 엄호(掩護)와 희망을 믿고 자본을 투입하는데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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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0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6. 1900년대의 국제관계

 

136. 1900년대의 국제 관계

 

 

청일정쟁으로부터 노일전쟁에 이르는 시기는,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최고의 단계인 제국주의 단계로 이행하던 시기로 이 시기의 시대적 특징인 극동에 있어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의 심화와 그 확대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시기는 나이 어린 제국주의 열강(일본, 독일, 미국)이 식민지 쟁탈전의 무대로 등장함으로써 국제 발전 관계에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열게 되었고, 불균등 발전 법칙에 의한 이 같은 자본주의 제국의 급속한 진보는 특히 침략적인 이러한 여러 나라의 정책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청일 전쟁 전 청국의 발전단계는 겨우 근대적 산업의 발생을 보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체기에 있는 봉건사회가 그 반식민지 상태에서 절대주의로 전형(轉形)을 보이는 것뿐으로 그 기본적인 생산양식은 역시 후진적인 봉건제에 불과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청국보다 뒤늦게 개방되었으나 1868년의 명치유신으로 극히 불완전하면서도 근대적 자본 형성으로의 길을 열어 반봉건적인 농업생산관계를 기초로 하여 소위 일본형의 자본주의가 성립하였다.

 

그러나 그 자본은 특수성으로 인한 국내시장의 협애(狹隘)로 중국 진출 및 조선 시장이 독점을 필수 조건으로 규정짓게 하였다.

 

, 일 두 나라 생산구조의 이 같은 기본적인 상위(相違)는 각각 그 외교 정책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청의 대()조선 정책은 조선 시장으로의 상업적 진출을 기초로 하는 청(), () 종속관계의 유지 확보로 그것은 처음부터 방어적인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외교정책은 군사적 산업자본 확립의 요구를 반영하여 매우 계획적이고 조직적이었다.

 

이 같은 정세 하에 일어난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가고 18943월 일본의 사주로 김옥균의 살해 및 조선 정부의 배일적 의사 표시는 청일개전(淸日開戰)의 공기를 일본 국내에 양성(釀成)케 하여 이를 이용한 일본 정부는 갑오동학 농민란을 계기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전쟁(1894~1895)은 중국 봉건제에 대한 일본 자본에의 승리로 끝났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명확하게 반식민지로 전락했고 이에 반해 일본은 급속히 자본주의적 성숙을 촉진하게 되었다.

 

 

<프랑스 삽화가 조르주 비고가 1887년에 그린 ‘낚시 놀이’. 일본 중학교 교과서들이 ‘한국(COREE)’을 낚싯감으로 묘사한 이 그림을 실어 일제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시각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한편 처음 유럽 열강의 청·일전쟁에 대한 태도는 제정 러시아와 같이 직접적으로 중국 영토에 대하여 이해관계를 가진 나라 이외에는 이 전쟁이 오히려 중국 영토적 침략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인식하에, 소위 일본의 요구가 전승(全勝)을 틈타 과대해지지 않도록 상호간에 일치하여 중국을 원조하지 않으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때 제정 러시아는 그 확대된 자본제 상품생산의 필연적 경제적 모순의 출구를 식민지에 구하려는 내적 요구에 따라, 당시 부동항 획득의 정책에 의해 점차 남하하여 만몽(滿蒙)에 그 세력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1895년 드디어 청·일전쟁이 끝나고 전승국 일본이 조선에 있어서 지배권을 독점하고 요동반도를 획득한 것은, 제정 러시아의 극동 정책에 커다란 장해가 되므로 제정 러시아는 독·(·)과 손을 잡고 3국 간섭으로 노국황제폐하(露國皇帝陛下)의 정부는 일본국으로부터 청국에 대하여 요구한 강화조약을 사열(査閱)컨대, 요동반도를 일본이 소유하는 것은 오로지 청국 정부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국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래 극동의 영구 평화에 대하여 지장을 주는 것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노국 정부는 일본 황제 폐하의 정부에 향하여, 거듭 그 성실한 우의를 표하기 위하여 여기에 일본정부에 권고하기를, 요동반도를 영유(領有)하는 것을 포기케 함으로써 한다.’ ‘청일강화조약 조인 후 423일 동경 주재 노··(··) 3공사에 의해서 일본 외무성에 제출한 권고 중 노국 공가의 각서라고 권고하였다.

 

당시 제정 러시아가 불국(佛國)과 결탁하게 된 유력한 요인은 1888년으로부터 1894년까지의 40억 프랑의 공채가 불국(佛國)에서 조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같이 공채는 주로 제정 러시아에 있어서의 철도, 광산 및 군수품 공업에, 또 불국(佛國)을부터 순수품을 구입하는데 사용하였다. 제정 러시아는 이 공채로 아시아에 있어서의 영토 확장의 대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불국(佛國) 측으로부터 이 공채는 금융자본 수출의 신무대로, 또 자국의 야금(冶金) 공업을 위한 새로운 시장을 연 것이었다.

 

청일전쟁 후 제정 러시아는 중국이 일본에 지불하기로 되어 있는 배상금의 반액 즉 4억 프랑을 사분이자(四分利子) 공채로 모집에 착수하게 되었다.

 

한편 독일이 3국 간섭에 착수한 것은 이로써 노·(·)동맹을 차단하고 노·(·)로 하여금 고립의 지위에 서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노·(·)은 발칸반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대립상태에 있었으므로 각각 노국(露國)을 자기편으로 끌어넣어 적수(敵手)에 대비하고 제국주의 패권을 쥐려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대립이 그들을 일치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가 이 3국 간섭을 단독으로 하지 않고 독·(·)을 끌어 놓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는 것, 여기에 성공하고 독·(·)도 용이하게 여기에 협력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제국주의의 동양에 있어서의 지위에 대한 3국의 일치 즉 영··(··)의 대립이었으니, 이는 1902년에 영·(··) 동맹의 성립을 가능케 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노·(·) 전쟁을 일으키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관계하에서 삼국간섭 후 조선 주() 노국공사(露國公使) 웨벨(Weber)은 청을 대신하여 배일파인 민비파 정권과 결탁한 후 대원군과의 암투대립의 모순 및 그 일본의 노골적인 내정간섭과 침략행위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을 이용하여 그 세력을 부식(扶植)하여 갔다.

 

이리하여 친로파의 우세를 가져오게 하고 친일정부를 위기에 빠뜨리게 하였다. 조선정부 내의 이 같은 급격한 정치적 선회에 놀란 일본은 강경책을 취하기 위해 새로이 육군 소장 삼포오루(三浦五樓)를 주조선공사(駐朝鮮公使)로 파견하였다.

이들 침략자들은 1895108(820) 드디어 민비를 학살하는 야수적인 만행을 감행하였던 것이니 이것이 유명한 기미 살해사건인 것이다.

 

이 같은 일본의 만행은 조선 민족의 분노를 가져와 반일 의병투쟁이 전개되어 갔고, 한편 조선 정계는 친일파, 친청파로 분열되어 자주성은 한층 더 상실되는 가벼운 동요와 혼란이 계속되어 갔다.

 

189622일 밤 박정석, 이범보 등 친로파는 웨벨과 결탁하여 고종을 노국(露國) 공사관으로 옮김으로써(아관파천俄館播遷) 노국세력의 조선 침투와 친로파 세력의 일시적인 강화를 보장하였다.

이리하여 중국 진출의 일환으로 나타난 제정 러시아의 조선 진출은 독자적 중요성을 지니고 일본과 심한 외교적 투쟁을 계속하면서 노일(露日)전쟁의 전초전을 양성(釀成)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한·(·滿)을 둘러싼 이 같은 노·(·)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전쟁만이 만능이라고 생각하여 청으로부터의 배상금을 토대로 방대한 군비계획안을 작성하여 대로(對露)전쟁에 대비해 갔던 것이다.

 

이에 의하면 단기간 내에 육군의 인원을 3배로, 해군의 함선 톤수를 4배로 확장하여 제정 러시아가 시베리아 간선철도를 완성하기 전에 대로(對露) 공격을 개시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은 전쟁준비가 완료될 때까지 일시 조선에 있어서의 노국 세력의 팽창을 허()하고 또 견제하는 한편 자기들의 기득권을 최대한으로 유지하기 위해 제정 러시아와 수차에 걸쳐 외교 담판을 거듭하였다.

1896514일 노·(·) 간에 웨벨, 소촌(小村) 협정(協定)’이 체결되어 일본은 아관파천 후의 친로파 내각을 승인하고 조선에 있어서의 노국세력의 우의를 확인하였다.

 

189669일에는 노일 양국 간에 로바노프 산현(山縣) 의정서(議定書)’ 1차 노·(·) 의정서가 체결되어 조선에 있어서의 양국의 동등의 지위를 상호 확인하고 일본의 특수권리가 부인되었다.

 

이 때 제정 러시아는 조선보다도 만주 침략에 더 힘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조선에 있어서의 지위 유지 강화에 필사적으로 광분하였다. 그 결과 1898425일에는 로센 서(西)의정서(2차 노일 의정서)가 체결되었다.

 

이 의정서에서 제정 러시아는 조선에서 이미 획득한 경제적 우월권과 조선의 자주권 및 완전 독립을 승인하고, 또 조선 내정에 직접 간섭하지 않으며 양국의 상호 동의 없이 조선에 어떠한 군사 및 재정고문도 파견하지 않는다는, 이 같은 협정으로 이때 조선에 있어서의 모순과 대립은 일부 완화된 것 같이 보였으나 실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어갔다.

 

즉 이때 일본은 상술한 협정과 외교 담판 배후에서 영·(·)의지지 하에 대로(對露)전쟁 준비를 급속히 추진하면서 조선에 있어서 경제적 이권 약탈과 장차 조선을 점령하기 위한 경제적 군사적 토대구축에 광분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은 벌써 조선에서 확고한 경제적 우위를 차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니, 1896년 현재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 총수 18,812명 가운데 일본인이 15,602명이나 되었고, 조선에서 활동한 외국 상사(商事) 총수 258개 중 일본 상사가 210개나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일본은 개항장(開港場)과 개시장(開市場)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무역액 중 일본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895년에는 72%였던 것이 1900년에는 75.3%로 증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세력은 여전히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독점정책을 강력히 견제하고 있었다.

18991월 노국정부는 외무대신 파브로프를 조선 주재 노국(露國)공사로 임명하여 대조선(對朝鮮) 정책을 적극화하면서 극동정책상의 요지 대련(大連) 여순(旅順)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중계지점인 마산포와 거제도를 노국의 해군 근거지로 착목(着目)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이에 앞서 1899년 초 노국(露國) 해군사관 중 동양 대세에 통효(通曉)하는 자들이 중심이 되어 노국(露國)의 국방상으로 보아 마산포와 거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건의서를 노국 정부에 제출한데 힘입은 바 큰 것이다.

 

이때 제정 러시아의 극동 정책은 만주를 중심으로 적극화되어 갔다.

이에 앞서 1896년 모스크바에서의 이홍장(李鴻章로바노프에 의한 소위 쿠시니 조약의 성립으로, 노국에 자국의 철도를 만주 지방을 횡단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통하게 하는 권리 및 합이빈(哈爾濱, 하얼빈)으로부터 남하하여 요동반도를 지나 대련에 이르는 지선을 부설하는 권리를 얻었다.

 

그 후 노국은 자국민의 재산 보호라는 명목 하에 드디어 만주에 군대를 파견하는 권리를 얻고 말았다. 노국은 귀중한 광산 채굴권 및 목재 벌채권을 얻는 동시에 수천의 군대를 그 지방에 보내어 그 확보에 노력하였다.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에 군대는 항상 따르는 법이다.

독일의 교주만조차(膠州灣租借 / 189835)에 자극 받은 노국은 2,3주일 후(327) 여순항의 25개년의 조차권을 획득하였다. 여순항은 실로 열강이 북경의 보전(保全)을 위협하는 것이라 하여 그 환부(還付)를 일본에 충고한 것이었다.

 

노국의 철도부지, () 지방으로의 군대 파송(派送), 여순의 방어설비는 영구적인 점령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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