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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3 3.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Ⅰ- 좌익과 피난 내 초등학교 일이학년 때 팔룡산 상사바위 근처나 불암사 근처 산먼뎅이들에 봉홧불이 올라 있는 광경을 종종 보았다. 그리고 새벽에 한길에서 붉고 푸른 삐라들도 주워보았다. 주로 어미니, 형, 누나들과 같이 보았는데, 나는 잘 몰랐지만 다들 걱정 섞인 말들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동네 누구누구도 저기에 있을 것이란 말들도 들은 것 같다. 또 수원지 들머리 계곡들에서 좌익수 처형이 몇 번 있었고 계곡 물이 벌겋게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는 어른들의 수군거림도 형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수원지길쪽과 봉덕동쪽을 가르는 산등성이 일대에 백여 기 가까운 무덤들이 있었는데(그래서 우린 공동묘지라 부르기도 했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과 연고 있는 무덤은 없었기네.. 2017. 10. 30.
기억을 찾아가다 - 2 2. 봉암동 형성 Ⅱ 팔용산에 수원지가 건설된 것은 1930년이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일인 1일 급수량 170리터 기준으로 인구 16,000명을 예상하고 만들었다가 증축을 하기도 했다. 광역상수도 확장사업이 완료된 1984년 말까지 마산시민의 식수원이었다. 수원지 물은 송수관을 타고 추산동 산중턱에 있었던 정수장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50년대 후반에 민원을 받아 송수관 중간에 지관시설을 하여 정수장으로 가기 전의 원수를 봉암동 주민들에게 주기도 했었다. 수원지 길 들머리에서 백여 미터 올라가면 왼쪽 계곡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여럿 늘려있고, 오른쪽 석벽엔 아직도 홈을 새긴 것 같은 길쭉한 다이너마이트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어, 당시 난공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산악타기 초보자들의 암벽등반.. 2017. 10. 23.
기억을 찾아가다 - 1 오늘부터 연재하는 포스팅은 마산 봉암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던 박호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 이야깁니다.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치 판단은 후대의 몫이고 기록은 당대의 몫이라 생각하며 소박하게 쓴 글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떠나시면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진다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1941년생이라 일제강점기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60년대 중반까지의 마산 도시를 직접 보았던 분입니다. 갇혀져 있던 기억들을 얼마만큼 끄집어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이신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 2017. 10. 16.
핵발전소 이대로 좋은가? - 9. 신고리 5,6호기 시민참여단에게 드리는 글 원자력발전의 경제성을 이야기하면 사용후핵연료 처리비용 과소계상, 원전 해체비용과 환경 복구 비용 과소 계상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사고 보험 문제입니다. 자동차를 운행하면 반드시 보험을 들어야하는 것처럼 원자력발전소도 사고 보험을 들어야 하지만 보험회사는 보험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 피해금액이 너무 커 여러 보험회사가 공동으로 운영해도 단 한 번의 사고로 보험회사를 파산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수원은 조건부 보험을 가입하고 있습니다. 보상금액 한도 5,000억원, 사고 후 10년이 지난 손해와 환경 관련사고는 정부가 보상하고 그 이외의 사고는 10개 보험회사가 공동으로 보상하는 조건입니다. 한수원은 한국전력이 100% 출자한 공기업입니다. .. 2017. 10. 12.
일제 강점기 신마산 혼마치(本町)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아래 것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현재 사진이다. 위 사진을 현재와 비교하기 위한 사진이다.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 월남동 1가(현 3.15대로) 사진이다. 당시에는 혼마치(本町)라 불렀던 중심거리였다. 현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앞 쯤에서 월영광장 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지난 100년간 얼마나 도시가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옛 사진의 길 왼편이 바다인데, 지금의 해바라기 아파트가 앉아있는 블럭이다. 나중에는 일본인들이 저 해안가에 버드나무를 심기도 했다. 저 바다는 1926년 매립되어 사라진다. 오른쪽 도로변의 일본식 건물들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대부분 목조였고 3층건물도 있다.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길 양쪽을 줄지어 선 .. 2017. 10. 9.
마산해양신도시, 대통령 말씀대로 계륵 꼴이 된 가포신항이 구체화된 것은 2001년이었다. ‘마산항 제2차 무역항기본계획’에서 20년 후 마산항 물동량이 54만 TEU가 될 것으로 예측해 성사된 사업이었다. 환경문제를 걱정하며 매립을 반대했던 시민들에게는 ‘일반부두와 달리 컨테이너 전용부두는 수익성도 좋고 환경적으로도 낫다’고 설득시켰다. 장밋빛 환상 속에 컨테이너 부두 기공식을 가진 것은 2005년 말이었다. 민자 외에 수천억의 국민세금이 투입되었다. 부두가 완공이 되어 개장식을 가진 것은 2015년이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입항되는 컨테이너 물동량이 애당초 정부 예측과 터무니없이 달랐다. 겨우 예측물량의 3% 밖에 채우지 못했다. 정부가 주도하고 국책연구기관이 예측했는데 겨우 3%라니, 충격과 함께 고개를 가로젓는.. 2017.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