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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한평 없어 어차피 얻은 구장집 머슴자리 지켜 새경 모은 것으로 동네 가난한 처자와 눈맞추어 토백이처럼 산 김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 부두노동으로 돈 모아 논밭 사둔 것이 나중에 개발되어 알부자 소리를 들은 천씨 같은 사람도 있고, 개울가 움막 같은 초가에 살았던 박씨처럼 어설픈 재인 노릇하다 결국 좀도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마감했던 사람도 있었다.

<허기를 때우고 있는 피난민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며 난민생활을 하는 일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집과 백여 미터 떨어진 싸구려 객사엔 여러가지 색깔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머물러 우리들 이야기감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동네 구장집에 있었던 머슴방엔 거의 매일 밤 머슴자리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들었다.

그리고 바냇들 북동쪽에 있은 벽돌공장 북동쪽엔 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해방 후 귀국한 귀환동포들이 주로 거주한 신포동과 해운동, 회원동 등 난민들 거주지는 변두리 동네들 거의 모두에 형성되었었다.

그리고 여러곳에서 불거졌던 소소한 절도사건들이 화제에 오를 땐 그 지역들이 도마에 오르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복어 내장을 끓여 먹고 중독사한 비극적 얘기도 그 마을들 얘기로 종종 들려왔다.

우리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부들이었음에도 뜨네기 좀도둑들에 많이 시달렸었다.

광을 따로 두지 않은 대부분의 집들에선 방이나 마루 한녘에 곡식자루를 두기 일쑤였는데, 들에 일하러 간 녘에 이것을 털리고나면 부잣집에서 거금 털린 것보다 더 큰 타격을 입는 것이, 그들은 당장 굶주림에 직면하기 때문이었다.

고된 농사일로 곯아떨어졌다가 새벽에 일어나보니 툇마루에 둔 곡식자루가 없어졌더라는 이야기나 일 나간 대낮에 감쪽같이 없어졌더라는 이야기, 심지어 낼모래 벨 벼나 보리를 세워둔 채 낱알을 훑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엿판 실은 리어카 아래쪽에 곡식자루가 있더라는 말도 들었고, 방물장수 함지도 의심하는 소리를 들었다. 솥을 떼어갔다는 말도 들렸고, 낡은 옷도 없어졌다 했다.

어쨋든 지금 들으면 귀를 의심할 만도 한, 실소를 머금을 정도의 소소한 사건, 그러나 당자들에겐 상당한 타격이 되는 이런 사건들이 10년여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런 사고들을 막기 위해 동네 청년들이 모여 자율방범대를 만든 일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좀 효과를 보는 듯했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구장집, 술도가, 방앗간에서 얼마씩 내고 여러집에서 곡식되씩 내어 교대로 번을 서는 청년들 야식비나 난방비를 감당했지만, 그것도 한두번 넘어가면 꺼려했고, 청년들은 그들대로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고 밤에도 잠을 설치게 되니 지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변두리 어려운 사람들의 삶은 고달픈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공권력은 제 살찌우기에 바쁘니 도회지 부자들 돌보기에도 바빴던 셈이다.

한편, 마산부두엔 며칠에 한번씩 구호곡을 실은 배가 들어왔는데, 우리동네 몇몇 형들은 그 하역작업에 적극적으로 자원했었다.

품삯도 당시로선 쏠쏠했거니와 그에 못잖은 부수입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대꼬챙이를 다듬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작업때 곡식부대에 찔러 흘러나오는 곡식을 위 내복 안에 담고 있다가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 말이 새어 몸 수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형들로부터 아구찜 먹는 걸 배웠을 것이다. 그 전엔 못 먹는 생선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부두 근처에 있는 아구찜집에서 막걸리안주로 먹어보고서 집에서 해 먹기 시작했고, 그걸 보고 여러 사람들이 따라 먹었던 것 같다.

뒤에 들으니 그때 오동동 바닷가 아구찜집 중에 내 초등학교 동기 집도 있었는데 그가 지금 오동동 할매아구찜이다.

그 외, 양덕 미군부대 군용식품 절취해내는 속칭 도꾸다이이야기도 들었고, 청수들 저수지 으슥한 바닷가에 일본에서 오는 밀수배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여러번 들었으나 직접 본 일은 없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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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기합이라하여 상급생이 하급생들에게 거의 합법적으로 가하는 폭력, 그래서 항상 긴장해야하는 학내외 생활, 동급생끼리나 동네친구 나아가 또래급끼리의 쟁투를 위한 몸과 주먹 단련, 학교끼리의 패싸움으로 인한 모표, 교복 살피기 등등이 일상생활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것이다.

군사교육 강화로 인한 계급의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정적 인간관계의 매마름이나 자유당정권의 깡패문화 등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며, 반자립적인 사대문화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어쨋든, 딱히 잡히는 원인은 모르는 채 이런 인습들의 소용돌이에서 온전한 정신을 못 차린 채 3년을 생활해 온 게 사실인 것 같다.

입학 두어 달 뒤에 받은 소위 단체기합이란 것은 큰 충격이었다.

1년생 전부를 운동장에 불러내어 엎드려뻗혀시켜놓고, 몽둥이로 치고 발로 밟고, 무릎 구부린 흔적(바지 무릎 부분에 묻은 흙)이 있다고 때리고, 선배 존경하는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트집 내세워 그렇게 체형을 가하는 일을 처음 당해보니, 정말 상급생에 대한 공포감이 실감으로 왔다.

며칠 후엔 2년생들이 그렇게 당하는 걸 보았고, 얼마후엔 2년생들에게 우리가 당했다.

3년 될 때까지 5,6차례 그런 곤욕을 치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런 만행들이 선생님들의 묵인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에도 인습의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2017년 11월 1일 충남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단체기합이 있었다 - 오마이뉴스 보도 사진>

 

점심시간에 선배가 교실에 들어와 누구를 끌고가서는 집단폭행하여 보내고, 길거리에서 경례 잘 안 부쳤다고 오소리 개뺨치듯 하고...... 심지어 난 거수경례를 하고도 얻어맞았다. ‘상급생을 왜 노려보았느냐는 것이었다.

모르는 선배를 노려볼 이유가 전혀 없었으나, 그런 변명은 매만 더 벌 것이기에 그냥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저만치 같은 모표가 보이면, 목 칼라에 붙인 학년뱃지부터 살피고는, 상급생이면 경례붙이는 엄숙한 자세부터 짓는, 긴장은 항시 갖추고 다녀야했다. 시력이 나쁘다든지, 딴데를 보고 있었다든지 등의 말은 아예 안 하는 것이 나았다.

동급생끼리의 싸움질도 이틀이 멀다하고 일어났었다.

교실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주먹 자존을 위해 친구들 입회하에 용마산에서 붙는 일도 흔했다.

마산고의 누구누구, 마산상고의 아무아무개, 창신농고의 대표주먹, 마산공고의 펀치왕 들의 이름은 시내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익히 알려져있었다.

학교간의 집단패싸움도 참 잦았다.

개인적 충돌이 친구들까지 동원된 집단 자존심까움으로 번지기도 했고, 어디 야외에서 있은 충돌로 하여 수십명이 동원된 집단난투극으로 번지기도했다. 운동경기 응원중에 튀어나온 말에 흥분하여 으르릉거리기도 했고, 축구경기땐 종종 나오는 거친 플레이로하여 집단난투극으로 간 사례도 많았다.

특히, 마산고, 마산상고와 진주고, 진주농고간의 정기 축구경기는 거의 빠짐없이 후유증을 낳았다.

진주고 진주농고 응원단들이 마산에 오면 갈 땐 북마산역에서 터지고 가고, 두 학교가 진주에 가서 지면 덜하지만, 이기기라도 할라치면 응원꾼들은 진주역에서 기차를 못 타고 근처에 숨어있다가 밤기차를 타고 오기도 했었다.

낯선 동네에 가서 왈짜들에게 시달리는 일도 많았고, 외지로 갈 땐 아예 교모를 쓰지 않았다.

이런 풍토 때문에 내 고등학교시절 두 가지는 보통학생들에게 거의 필수가 되어있었다. 클럽 가입과 주먹단련이었다.

폭력써클까진 아니더라도 위세를 위한 모음이 태평양, ‘파도’, ‘다이야등등의 이름으로 많이 조직되어있어, 농촌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가입했을 정도였다. 조직내 선후배간의 유대는 잘 되어 보호받기도 좋았을 것이다.

몸 과시엔 가슴 근육과 주먹 굳은살이 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걸 위해 평행봉과 샌드백이 유행했다.

그래서 우리집에도 소나무를 베어 와서 땅에 박아 평행봉대를 세웠고, 집 뒤곁엔 군용백에 모래를 채운 샌드백을 달았다.

평행봉틀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가슴을 마져보았고, 샌드백을 친 후 주먹 굳은살(속칭 다마’) 만져보는 일이 습관적이 되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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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5 02:32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설명에 의하면휴식과 사색의 공간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처음에 지어질 때는 아래와 같았습니다.

출처 - 건축도시연구정보센터 (http://www.auric.or.kr/)


 현재의 곳은 사람을 피해 사진을 찍는 것이 상당히 까다로운, 또다른 의미의 멋진 정원이 되어 있습니다. '휴식과 사색 포용하는 넓은 기능의 공간이 되어간다는느낌이며, 이러한 느낌은 녹색 지붕의 정원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자연스레 생겨납니다.



 

 - 수생 식물원


녹색 기둥의 정원을 돌아나와 도달하는 , 수생 식물원 입니다. 여과지 였던 곳을 재활용한 곳이지요.

 ‘낮은 수반에 자리잡은 다양한 수생식물들의 모습과 생장 과정을 가까이서 관찰할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직은 추운 날씨 탓에 군데군데 비어있긴 하지만, 저런 모습도 계절에 맞는 자연스러운 식물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앉고, 올라가고, 쉬고... 기존 시설의 잔재 위에 데크 깔은 것이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였나 봅니다.


 - 시간의 정원


수생 식물원과 시간의 정원은 공간의 분할이 명확하면서도 발걸음따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약품침전지를 재활용한 곳은 선유도 공원 내에서, 남겨진 기존 시설을 공간적 다양성 측면에서는 가장 풀어낸 곳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래 사진은 건설 당시 기존 구조물의 모습 입니다.

 공간적 풍부함을 가지는 많은 건축들과 공간들은 사진으로는 현장의 느낌을 설명해 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 곳 또한 그런 경우라고 생각이 듭니다.


 지층부와 상층부의 공간이 마치 씨줄 날줄처럼 다른 높이에서 얽혀 흐릅니다.

 상층부의 구조물을 어떤 부분은 데크로, 어떤 부분은 식생으로 채워, 너무 많은 가능한 동선에서 오는 혼란을 줄이고 다양한 식생들을 자연스레 경험하도록 의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방향원, 덩굴원, 이끼원, 고사리원 작은 주제정원들을 감상할 있다고 하니 다른 계절 또한 기대됩니다.

 기존 구조물을 그대로 살린, 상층부의 작은 쉼터들 하나입니다. 



- 개의 원형 공간


 선유도 공원을 양화 한강공원 쪽에서 왔다면 첫번째,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양화대교 북단에서 진입하였다면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곳입니다. 

 - 개의 원형 공간 하나인 환경 교실. 방문 시에는 운영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원래 원형의 조정조 2개소와 농축조 2개소 였던 곳으로서 (정수후 불순물과 물을 분리 처리하던 ), 일상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기존 건물의 원통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환경 교실, 환경 놀이마당, 원형극장, 화장실 각각 구성된 곳은 선유도 공원 전체중에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인 싶었습니다.

 원형극장이라던지, 지상에서 있는 고리 형태의 화단이라던지 하는 것들은 기존 구조물의 형태를 유지하지 않았다면 나타나기 힘든 공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카페테리아 나루 


 정작 방문했을 때는 몰랐습니다카페테리아 또한 기존 시설이었던 취수펌프장을 재활용한 곳이었다는것을. 내부를 모두 새로 단장한 탓이었을까요 - 아무래도 직접적인 상업 시설이다 보니 공원의 다른 부분들과 동일한 접근방식을 취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봅니다



 100 뒤에도 지금처럼 살아 숨쉬고 있을 선유도 공원을 기원하며 포스팅의 마무리는 선유도 이야기관의 일부를 발췌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어볼까 합니다.


<이태림>



낡은 것은 낡은 채로, 비어 있는 것은 채로


 자연과 어울리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찾아볼 있는 공원에서는, 남아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던져주는 암시를 통해 이곳만의 특별한 의미를 찾아볼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문명, 산업 폐기물, 자연의 훼손과 같은 일을 경계하라고 조용히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선유도 공원은 환경의 의미를 재인식해 보는 장이기도 합니다. 산업 문명의 공간을 철거하는 대신 자연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재활용한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선유도 공원에서는 있는 장소에 따라 느낌도 천변만화 합니다. 막힘과 트임 그리고 솟음과 꺼짐의 입체적인 조형성은, 공원이라는 안에 담은 정수장과 선유봉의 기억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솟아 있는 위에서는 막힌 길이 없어 어디로든 있습니다. 미루나무가 불러들이는 바람 소리에 취해도 보고, 건너 트인 전망을 즐기며 사색의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습니다. 


 바람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대쯤 지하 공간으로 내려오면 놀라울 정도로 고즈넉한 정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정수장 건물들의 흔적들, 남아 있는 기둥과 , 그리고 물을 담아두었던 사각 공간 안에 자라는 식물들은 평온한 사색의 시간을 안겨줍니다.



…….


 1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난 , 선유도 공원은 어떤 모습일까요. 과연 그때쯤에도 공원의 흔적이 남아 오늘날을 기억할 있을까요


어쩌면 완강한 옹벽은 허물어지고, 산책길은 무성한 풀밭이 되고, 정원을 구분했던 벽들은 스러져 더욱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아름다운 자연입니다. 


 자연의 생명력은 순리에 따라 이곳을 아름답게 보전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자연은 가장 훌륭한 관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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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2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마치는 행사였으며, 선수 수는 30, 경기 시간은 30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술한 바처럼, 청수(淸水)들판 오른쪽 동네(봉덕동, 봉암2)와 봉암다리쪽 동네(봉암동, 봉암1)를 시에서 떼었다 붙였다 하는 통에, 한 팀이 되었다 분리되었다 했지만, 성적은 분리되었을 때의 성적이 훨씬 좋았다.

여러 번 우승한 것도 그때였다. 그때 우리 동네는 비록 떨어졌어도 한동네라는 의식이 강했기에 함께 모여 응원도 하고 밥과 술도 같이했다.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 군데군데에 각 동의 선수와 응원꾼들이 자리들을 잡았었는데, 중심지 동네 사람들과 변두리 동네 사람들의 입성과 모습, 준비물들엔 차이가 많았다.

특히 우리 동네보다 더 가난하고 외진 봉암1동 사람들은 첫눈에 드러날 정도로 그랬다.

선수들의 덩치도 별로 없는데다가 얼굴들은 대체로 새까맣고 깡마르고, 밥함지와 반찬통 이고 들고 온 부녀자들도 깡마른 몸에 검누른 얼굴, 입고 있는 저고리와 몸빼(もんぺ , 일본여성들이 일할 때 입는 헐렁한 바지), 몽당치마들에선 땟국이 묻어날 것 같았다.

그런 잔칫날인데도 함지 밥은 거무스럼했고, 반찬은 풋고추와 생된장, 열무김치가 주를 이루었다. 사이다 한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쪽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엔 활력이 넘쳤었다.

백여호 남짓밖에 안 되는 동네에서 칠팔십명도 넘어 뵈는 사람들이 왔다는 것부터가 그랬고, 평소엔 시내 중심가에 들어설 때부터 쭈뼛거리던 사람들(특히 아낙네들)의 모습과는 대조될 정도로 그 장소에서만은 생기들이 있었다.

비쩍 마른 아지매들도 이쪽 남정네들이 건네는 막걸리잔 스스럼없이 받아 단숨에 들이키고는 우승을 확신하는 큰소리를 주위에서 들으란 듯이 외쳤다.

그도 그럴 만했다. 마산시에서 가장 작고 가난하고 외진 그 동네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의외라고 화제로 삼을 정도로 우승을 독식하다시피 해왔던 것이다.

아마 선수들의 몸무게 평균을 내어봤다면 80:60 정도거나 그 이상의 차이가 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하여 그 동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때 눈여겨 본 장면들을 떠올려보면서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줄다리기는 고대부터 있었던 인간이 만든 게임이었다>

 

그들은 모두 어부들이었다. 작은 어촌에 큰 배는 없었기에 모두 노젓고 그물 끌며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특히 대다수가 꼬시락잡이를 주업으로 했기 때문에 꼬시락 몰이용 줄(‘방줄이라 불렀다.) 끄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줄을 몸에 붙일 줄도 알았고, 줄에 힘을 싣는 요령도 몸에 배어있었다.

준비 신호를 듣자 모두 줄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나중에 보니 모두 적삼 겨드랑이에 두꺼운 천을 대었다.

새 짚신 신은 두 발은 오륙십센티 정도의 폭으로 좌우 수평을 잡았다. 몸은 약간 뒤로 기대듯이 하는 듯하더니 땅!하는 신호와 동시에 전신을 45도 정도로 뒤로 일제히 눕히면서 버텼다. 다리에서 어깨까지 거의 일직선에 가까왔다.

상대방처럼 영차! 소리도 내지 않았다. 모두 그런 자세로 버티니, 상대가 영차!할 땐 이쪽 선수들의 등줄기만 약간 구부러졌다가 다음 순간 재빨리 한치나 두치 정도 발바닥을 뒤로 옮겨 자세를 잡고, 그 다음 순간 또 그렇게 하고...... 한 치도 끌려가는 일 없이, 한 명도 옆으로 쓰러지는 일 없이, 특별나게 끌어들이려는 모습도 없이, 전신이 하나되어 끌었다.

흙투성이 선수들의 손에 우승기와 상금이 들려지는 순간 우리동네 사람들도 모두 하나로 어울렸다.

그때쯤이면 응원꾼들 대부분이 얼큰한지라, 자연스레 춤들이 나왔다. 곧 폐회가 되면 장구와 꽹과리가 나오고 막걸리통을 실은 수레가 나오면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평소에는 주눅이 들어 지나다니기를 꺼려하는 남성동 오동동 대로를 거쳐 동네까지 이십리길을 그렇게 마시고 춤추며 가는 것이었다. 상당수의 아이들도 막걸리나 떡을 얻어먹으며 따라가고......

어느해인가 나도 그 광경을 보며 따르다가, 그러나 삼백 미터도 못 가 슬그머니 빠져버리고 말았다. 후줄근한 차림의 촌사람들 따라가기가 챙피하게 느껴졌으리라.

그랬다. 나는 남성동이 가까워지면서 중학교나 초등학교 친구들이 볼 것 같은 느낌에 따를 수가 없었던 것이 확실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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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8 00:00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생태공원으로 개관한 것은 2002년 4월 26일, 햇수로 16년째 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엔 어땠을까요?

겸재 정선, 선유봉, 1742, 비단에 채색. 출처 - blog.naver.com/pfloyd56/90008180704

 

선유도는 원래 '선유봉' 이라는, 40m 높이의 아담한 바위산 이었습니다. 신선이 노닐던 봉우리 라고 이름이 붙여질 만큼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는 명소 중의 하나였던 선유봉은 1925년 큰 홍수 이후 한강의 제방을 쌓는 암석채취에 이용되면서 훼손되기 시작했고 1965년에 양화대교가 이곳을 통과하여 건설되었으며, 1978년에 선유 정수장이 세워지면서 안타깝게도 아름답던 옛 모습을 잃게 되었습니다.

선유 수원지 통수식' 1978년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이 참석. 출처 - http://www.fnnews.com/news/

 

선유 정수장은 낡고 오래되기도 하였고, 남양주시에 큰 규모의 강북정수장이 들어서면서 그 기능과 역할이 통폐합되어 2000년에 문을 닫게 됩니다.

 

이에 따라 서울시에서는 ‘새 서울, 우리 한강’ 사업 계획의 하나로 ‘기존의 정수장 시설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쾌적한 문화와 휴식, 관광의 명소로 제공하고, 한강의 역사와 생태를 배울 수 있는 환경 친화적 공원으로 조성한다' 는 지침 아래 ‘선유도공원화사업현상설계’  를 공모하게 되었습니다.


 이 공모전에서 서안 컨소시움(조경설계서안+조성룡도시건축+다산컨설턴트)의 설계안이 당선되었고(1999.12) 그후 8개월간의설계(2000. 8)와 공사(2000. 12 착공)를 거쳐2002년 4월26일 선유도 공원으로 개원하였습니다.



 - 선유도 공원

 

한강 남쪽 양화한강공원 방향, 선유교 아래에서 바라본 선유도 전경


 선유도공원은 폐기된 공장 시설을 재활용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서 환경 재생 생태 공원이자 ‘물의 공원’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유도는 직접 주차는 할 수 없고 (장애인인 경우에 주차가 가능합니다), 남쪽의 한강 공원 주차장 중 한곳에 주차를 하고 선유교를 통해 걸어서 건너가게 됩니다.

 

서울에서 이정도 규모의 탁 트인 시야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불편하다고 생각될 수 있으나 선유교를 걷는 순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곳은 걷는 것이 어울리는 곳이라는 것을요.

선유교에서 바라본 선유도 전경




 선유도공원이 선유정수장 이었던 때와 비교할 수 있도록 비교 평면과 선유정수장 당시 사진을 올려봅니다. 


 

선유 정수장의 모습. 출처 : 선유도 내 선유도이야기관


 

선유정수장과 선유도 공원 비교평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양화대교를 통해서도 접근할 수 있습니다. 선유도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과는 다른 느낌의 첫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양화대교에서 접근했을 때의 선유도 공원의 모습



 선유교를 통해 접근해서 들어오면, 몇군데서 볼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약품저장탱크 였던 시설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관수기계실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은 나뭇가지들이 추운 계절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인데 그래서 오히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장탱크와 넝쿨이 어우러져 볼만한 풍경을 만들어냅니다.




 - 선유도공원 관리사무소


 아래 사진들은 급속여과지 (수조에 모래와 자갈 등을 담아 물속의 불순물을 걸러내는 여과지 8개소와, 지상 1개층 규모의 시설) 였던 곳을 일부 남기고 수선하여 만들어진 선유도공원 관리사무소의 모습 입니다. 

 





건물 입구에서부터 살펴보면 예전의 모습들, 세월의 흔적들이 지워지지 않고 드러나는 부분들이 보입니다.



 

기존 시설의 콘크리트 상판을 뜯어낸 후 골조를 살려 아래와 같은 주차공간과 기계실로 활용하게 되었습니다.




 


 - 수질정화 정원


 

 아래는 약품침전지를 재활용한 수질정화 정원입니다. 격자로 세워졌던 기존 구조물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걷고 쉬고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는 정원이 만들어졌습니다. 끊임없이 사람들이 걷고 쉬고 대화하며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새로 짓는 공원이었다면 데크 아랫부분과 같은 형태의 구조물이 존재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대칭이라 하기에도 디자인이라 하기에도 고개가 갸우뚱 해지는 형태를 생각해 내기에도, 설득해 내기에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존재하던 것을 그대로 살려냄으로써 발생하는 소소한 재미가 아닐까요?



 녹슨 배관도 운치있게 느껴지는 것이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다른 계절일 때의 모습이 궁금해지는, 넓게 보면 아래와 같은 모습의 수질정화원 입니다. 






 - 선유도이야기관


 아래는 송수펌프실 이었던 선유도이야기관 입니다. 첫번째 사진은 펌프실 이었던때의 모습입니다.

 





 

 이곳에서도 역시 옛 구조물이나 낡은 모습, 쓰임이 끝난 장비 들이 남아있는 곳이 많습니다.








 아래와 같이 옛 모습을 ‘전시’ 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호기심과 시선을 많이 받는 쪽은 이러한 방식인 듯 싶었습니다.




 

 선유도 이야기관을 나서면 녹색 기둥의 정원을 만나게 됩니다.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고 기둥만을 남겨서 자연과 함께하도록 한 이 정원은 선유도의 대표 얼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카메라 속에 담겼고, 담기고 있었습니다.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로 이어집니다.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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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같은 데에 담아 팔았고 대팻날 같은 데에 얼음덩이를 올려 즉석에서 갈아 팥, 향료, 설탕 등을 얹어 주던 빙수는 접시나 사발에 담아 팔았었다.

거기에 비해 아이스케키는 공장을 두어 제조했고, 보온 질통에 넣어 거리에 다니면서 파는 아이들이 마산에만도 이백 명이 넘을 정도로 판매규모가 방대했었다.

한편으론 어려운 집들의 청소년들이 학업도 포기해가면서 다투어 나섰기 때문에 더 붐이 일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당시 도심 거리에 나가면 여기서 아이스케키! 저기서 께에끼! 그러다 한 사람이 께끼하고 부르면 여기저기서 두세 명이 달려오고, 반 미터 정도 늦어 돌아서야 하는 소년들의 이마와 목덜미는 땟국 섞인 땀이 더 번들거려 보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악용하여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하는 왈자들도 간혹 보였다. 창동 네거리 같은 데 나타나 께에끼하고 크게 외쳐 네댓 명이 죽어라 달려오면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장사 잘 되냐?’ 따위 말로 느물거리는 것이었다.

가까이 오다가 알아보고는 돌아서는 아이, 앞에 와서는 혀를 차는 아이들이 그러지 말라고 투덜거려도 매일 같이 그런 패들이 나타난다고 들었다.

그런 행태에 전염되었을까, 초등생쯤으로 보이는 몇몇 아이들은 께에끼하고 불러놓고는 아이들이 달려오면 골목길로 도망쳐버리는 일도 종종 목격되었다.

주로 빈농의 자녀들이거나 피난민, 귀환동포들의 자녀들인 그들은 그렇게 해 가면서도 운 없는 날엔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정도 들었다. 아니, 몇 개 못 팔고 아이스케키만 녹여버렸을 땐 빚만 남는 날도 있었다는 얘기를 우리 동네 움막에 살던 친구로부터 들었었다.

당시 마산엔 십여 개 이상의 아이스케키 제조공장(소규모 가내공장이 대부분)이 있었는데 이름난 메이커로는 구마산의 밀림 아이스케키와 신마산의 맘보 아이스케키가 유명했었다. 둘은 모양, 빛깔, 맛 등에서 아주 대조를 보였었는데 그래서 둘이 더 유명했었던 것 같다.

밀림은 지금 코아양과점 북쪽 맞은 편 경남은행 아래쪽에 있었는데, 팥을 넣었기에 초콜릿색이었고 단팥 맛이 아주 진하게 느껴져 입안이 달라붙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서너 개 이상 먹으면(창동, 오동동, 남성동 등지의 부잣집 아이들에게만 해당) 단맛으로 인한 역한 현상까지 느껴진다고들 했다.

정비석의 세태풍자소설 자유부인에 나오는 바람난 춤꾼들의 상징 맘보춤에서 따온 듯한 맘보 아이스케키는 그 이름이 풍기듯 맛도 아주 시원하고 향긋했다. 색깔도 연분홍과 연초록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밀림이 앞지름 2.5, 뒷지름 4, 길이 20정도의 동그란 막대형이었다면, 맘보는 두께 1,5, 앞폭 4, 뒷폭 6, 길이 15정도의 두꺼운 판자막대형이었다.

둘은 가격도 비쌌고, 봉암동 같은 농촌은 물론 변두리나 빈민들이 많은 동네에선 잘 볼 수도 없었다. 지금도 창동 황금당 옆에 있는 고급 빵집 고려당에서는 밀림과 맘보 두 아이스케키만 취급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소의 싸구려 아이스케키들은(지금 돈으로 500원 정도였을 것이다) 변두리 동네나 농촌 등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봉암동 서어나무 밑이나 봉선각 입구 등에서 매일같이 외치던 장사치들 중에서 밀림이나 맘보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동네에 오는 장사들은 주로 짐자전거에 싣고 다녔는데 리어카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고 간혹 지게에 통을 지고 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가까운데 있는 공장에서 받아 왔을 것이었다. 돈이 귀한 농촌이라 주로 곡식과 바꿔 갔는데 대부분 그걸 선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가지로 대충 퍼 주었기에 주로 장사들 쪽으로 후하게 가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다닌 장사들 대부분이 장정들이나 청년들이었는데 곡식 무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진동이나 구산면 등지엔 그런 값싼 아이스케키도 없었기에 벌어진 해프닝도 화젯거리에 오르곤 했다.

우리 육촌형수가 구산면에서 시집왔었는데, 집에서 함께 산 아이스케키를 받아 논매러 간 남편이 돌아오면 주려고 등판(시렁의 사투리)에 얹어 두었다가 녹여 버리고는 훔쳐 먹은 사람 찾느라고 눈을 부릅떴던 일이 후일 내내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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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1 09:34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바닥을 보았다. 그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민얼굴이기도 했다. 내내 참담했고 암울했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시개발로 버림받는 가난한 사람들의 한과 눈물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은 성남시가 된 광주대단지 철거민의 실상(1971)이 가장 먼저 터진 사건이었다.

압권은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6)’이었다. 영희의 다섯 가족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개발독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소설이었다. ‘난쏘공이라 부르며 숨어서 읽었던 불온서적(?)이기도 했다.

9년 전에 일어난 용산철거민진압은 잔인한 사건이었다. 개발에 눈먼 권력의 폭력에 무고한 생명들이 죽고 다쳤다.

다시 세월이 흘렀고 국민소득도 높아졌다. 하지만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난쏘공 영희의 다섯 가족은 아직 도처에 그대로 있다. 아니, 오히려 좀 더 교묘해진 수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내치고 있다.

정부가 공공임대주택건설에 주거복지의 방점을 찍긴 했지만 가난한 이들이 체감하기에는 길이 너무 멀다.

 

거가 시작된 회원동 재개발구역은 아수라장이었다. 이미 떠난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직 남아있는 이들도 많았다. 남은 이들은 조여 오는 철거장비의 굉음을 들으며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보상금이 6~7천만 원으로 정해진 가구가 대부분이었고 심지어 3천만 원이 채 안 되는 집도 있었다.

재개발 후 들어 설 아파트의 분양가는 대략 3억쯤이다. 이들이 새 아파트에 입주하려면 2억 넘는 돈이 필요하다. 그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돈 없으면 재 입주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현실이고 법이다.

골목 한 쪽에서 말쑥한 차림의 청년과 한 아주머니가 마주서서 승강이를 하고 있었다. 보상금을 받아가지 않으면 강제철거 당합니다. 그게 법입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하소연하는 여인을 향한 청년의 목소리가 당당했다.

방송사 카메라를 본 주민 몇 사람이 다가왔다. 칠십이 넘어 보이는 한 여성이 울먹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그 돈으로 어디로 가야됩니까?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기나 합니까?”  말이 좋아 이주지 사실상 법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을 쫓아내고 있었다.

법치국가, 민주국가, 국민소득 3만 불을 말하는 나라에서 오늘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쫓겨나는 이들이 투표해서 뽑은 공직자 누구 한사람도 이들의 아우성에 귀기우리지 않는다. 진즉 해결할 수도 있었던 일이지만 처음부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개발 후 조감도뿐이었다.

 

<조감도>

 

을 파멸시키는 야만적인 재개발은 이제 끝내야 한다. 건설 패들이 벌이는 폭력적인 개발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도시는 우리 삶의 그릇이다. 돈만 탐하는 건설시장에 도시를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공공이 나서야 한다.

안상수 시장께 바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철거민의 눈물진 목소리를 듣고 문제해결에 나서시라. 그리고 두 번 다시 이런 야만적인 재개발이 없도록 하시라. 그것이 시민이 뽑은 시장의 진정한 소명이다.<<<

 

<이 글은 지난 2월 26일 경남도민일보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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