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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2 09:34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다. 우선은 대표적 사례 중 하나인 미술관, 테이트 모던 (Tate Modern) 의 이미지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Tate Modern seen from the River Thames : 출처 - www.geograph.org.uk


 직접 가 보진 못했을 지라도 이름은 한번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테이트 모던 은 연간 4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영국 런던의 명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곳은 미술관 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화력발전소 건물 겸 수련 기계공 및 전기공 양성기관 이었습니다. 


Bankside B Power Station, London, England, around 1985 : 출처 - en.wikipedia.org


 1년도 안되는 기간에 석유 가격이 3배 수준으로 폭등했던 1970년대의 석유 파동 등을 이유로 뱅크사이드 발전소는 1981년 가동을 중단하게 되며, 20년 가까이 런던의 흉물로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철거 밑 재개발을 노리는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과 Tate Gallery 의 결단으로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 하였습니다.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테이트 모던의 모습을 보면 화력발전소 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거대한 기둥을 포함하여, 많은 부분에서 기존 외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뱅크사이드 발전소가 계속 방치되었다면 여전히 흉물로 남았을 것이고, 철거 후 새로운 건물이 세워졌다면, 예전의 발전소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보아왔던 풍경은 그들의 기억속에만 남게 되어 결국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기능을 가지되 기존 건물의 형태적, 공간적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여 과거의 시간을 품은 채로 현재와 공존하게 하는 것이 재생 건축으로서, 새로 지어지는 건축물과도 다르고 고건축과도 차별되는 독창적 공간을 탄생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재생 건축' 과 유사한 의미도 있지만 같지는 않은 용어들이 있고, 다른 의미지만 언뜻 듣기에는 유사한 의미처럼 들리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아래 단어들은 영어권 국가에서도 의미가 모호한 부분들이 있고,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에서도 혼용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야기해 보려는 주제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언급하고 넘어가는 것이 나을 것이라 판단되어 적어봅니다.


 - 재건축 :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30년 이상 지난 아파트 단지를 완전 철거한 후 신축 하는 행위를 의미하며, 안전상의 문제 해결과 경제적 이득 발생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러나 단순 번역인 reconstruction 은 일부 혹은 완전히 파괴된 건물을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는 행위를 뜻하는 경우가 많으며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일 수 있습니다), 복원 이라는 단일 의미를 가지는 rebuild 라는 단어 또한 사용됩니다.

 - 리모델링 :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15년 이상 지난 아파트 단지를 골조를 유지한 채로 수직 또는 수평으로 증축하는 행위를 뜻하며, 목적은 재건축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리모델링 이라는 단어는 사회 전반적으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으며, 건축 분야에서는 건물의 규모와 상관없이 내,외관 변화 혹은 용도의 변화를 주는 경우 관습적으로 사용됩니다. 영어 표현인 remodelling 또한 건축의 내,외관이나 구조의 변경 등을 행할 때 사용되며, 아래의 리노베이션 (renovation) 과 비교됩니다.

 - 리노베이션 : (보통은 오래되어 낡은) 기존 건축물을 헐지 않고 개보수하여 사용한다 는 뜻이며, 영어 표현인 renovation (낡은 것을 좋은 상태로 수리하는 것) 과 거의 같다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리노베이션을 리모델링 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리모델링' 이라고 하는 표현은 주로 '경제 논리' 가 힘을 발휘하는 작업이며, 투자 대비 수익을 계산하여 실행하게 됩니다 (개인 주택의 리모델링 같은 경우는 예외입니다). '재생 건축' 은 테이트 모던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외형적으로는 리모델링 에 가까운 작업이라 볼 수 있지만, 방향성과 목적에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버려지게 되었지만 유,무형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품고 있는 많은 건물과 장소가 있으며, 재생 건축은 그러한 것들을 현재에, 그리고 미래까지 이어주고자 하는 생각이 담겨 있는 작업입니다. 또한 환경보호와  지속가능성 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 일 이기도 합니다. 

 뱅크사이드 화력발전소의 리모델링 비용은 1995년도 당시에 약 1.4억 파운드, 한화로 2,000억원에 이릅니다. 경제논리에 의하면 철거 되었어야 했을 화력발전소는 테이트 모던 이라는 '재생 건축' 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결국에는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이득을 지역사회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다음 주 부터는 여러 규모의 '재생 건축' 사례들을 소개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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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9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57일이었다) 3년 동안엔 거의 매일 바냇들 길로 다녔었다. 등교 땐 공군병원 스리쿼터를 많이 탔지만 하교 땐 거의 빠짐없이 그 길로 다녔다.

당시엔 모든 학교가 오후 세시경이면 파했기 때문에 부림시장, 철로, 바냇들에서 구경하고 장난칠 여유가 좀 많았었다.

바냇들은 용마산과 문둥산(반월산을 두고 그 땐 그렇게 불렀다. 거기에 한센일들 집단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 꽤 넓은 들을 말하는데 동쪽 끝은 국도2호선, 서쪽 끝은 회원동 창신농업고등학교(현 회원동 한효아파트)까지를 대강 그렇게 불렀었다.

동쪽 끝에는 신흥방직주식회사(일제 때부터 있어온, 짐작에 만여 평이 넘었던 듯한 공장. 지금 신세계백화점 남쪽)가 있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존속했던 큰 회사였다.

1956년쯤 시내쪽으로 인접해 신한가공이라는 회사가 설립되고 그 바로 옆으로 새 길이 남으로써 산호동에서 회원동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벌판길이 형성되었다.

들 동북쪽, 지금의 종합운동장 위치 정도에 벽돌공장이 있었고, 그 남쪽 칠팔십 미터 쯤에 네댓 채의 집과 두세 채의 집이 각각 있었을 뿐 주로 논뿐인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런데 그 들판에 대한 기억으로 배배꼬인 벼 잎이나 갈라진 논바닥이 거의 전부이고, 누렇게 물든 풍요로운 들판의 기억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들판 규모에 비해 수로가 너무 빈약하여 가뭄을 많이 탔던 것 같다. 수원(水源)은 무학산 밖에 없겠는데 수로가 몇 안 되고 작아 벌판 남북을 횡단해 나 있었던 철로(3·15대로) 아래쪽으로는 물이 얼마 안 흘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1950년대 바냇들 지도와 현재>

 

우리 동네에서 선배 세 명, 동기 네 명, 후배 한 명이 함께 다녔으므로 으레 등하교 때 두세 명이나 네댓 명이 함께 다니기 마련이었다.

학교 파하면 몽고정에서 두레박 물을 얻어 마셔가면서 철로변(3·15기념탑 옆 도도록한 지역이 구마산 역이었던 현 육호광장에서 신마산 역이었던 월포동 벽산블루밍아파트로 가는 철도 부지)를 따라 부림시장을 지났다. 시간에 쫓길 땐 철로 따라 바로 갔지만 대부분의 경우 볼거리가 많은 시장 길로 다녔던 것이다.

전쟁 중에도 그랬지만 정전 후에는 더 많은 군용물자들이 흘러나와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았다. 거기에다 온갖 약장수, 마술사 등이 재주와 속임수를 부려 사람들을 모았다.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기웃거렸고 때론 넋을 잃기도 하면서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걸 배워 흉내 내는 재미도 꽤 괜찮았다.

생각나는 하나가 있다.

사오십 센티 정도의 철로 조각 위에 돌을 올려놓고 수도(手刀)로 내려쳐 깨는 위력에 감탄하며 한참 보다가 집으로 향했는데, 구마산 역을 넘어 철로타고 오다가(철로 위로 걷기를 즐겼었다) 한 친구가 그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처음엔 우리도 어리둥절했었는데 설명을 듣고 해보니 의외로 쉬웠다. 왼손바닥 오른쪽 끝으로 돌 끝을 잡고, 왼손 등을 철로에 붙이고, 돌이 철로에서 일 센티 정도 떨어지게 하고는 오른손 수도로 돌을 내려치면 순간적으로 돌이 쇠에 부딪치면서 깨어진다. 사실상 속임수였는데 우린 그걸 또 후배들한테 써먹으면서 우쭐대기도 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이었지만 부림시장에서 구마산 역으로 가다 들렀던 환상적인 맛집도 생각난다.

지금 백제삼계탕 앞 주차장에 있었던 중앙중학교 담벼락에 붙여 지은 판잣집 가게였는데, 젠자이(단팥죽의 일본말)에 국화빵을 찢어 넣어 먹는 맛은 그때의 우리들에겐 그야말로 꿀보다 더한 맛이었다.

<합천 5일장에 가면 지금도 국화빵 넣은 단팥죽을 사먹을 수 있다>

 

구마산 역에서 삼사백 미터 가다가 용마산 끝자락쯤에서 벌판길로 들어서는데(지금 운동장 방향의 길) 거기에서 왼쪽 길로 가면 한센인들 집단촌을 거쳐 율림동, 합성동(그때는 창원군)으로 가고, 오른쪽 길로 곧장 가면 신한가공 쪽이었다. 이 길로 가다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어린교로 통했는데(현 백화점 북쪽 옆길 쯤) 이 길 외에도 군데군데 논두렁길 길들이 많았다.

들 가운데쯤에 삼사기 정도의 묘역이 있었는데, 지금 추상으로 이백여 평은 족히 되었음직한 넓이였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온갖 장난질을 다하며 놀았다.

무릎치기, 말놀이 등을 많이 했고, 긴 풀잎끼리 맺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소위 결초놀이도 했다. 감정을 못 푼 친구끼리 혹은 타교생끼리 한판 겨루는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동중이나 창신중에 다니는 동네친구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부모님 속여 모은 돈으로 부림시장에서 깡통(미군용 휴대식품 통조림) 몇 개 사서 파티 장소로도 거기가 안성맞춤이었다.

한편 한센인들과 애기들을 연관시킨 무서운 소문들이 떠돌았던 때라 어둑살이 지면 그쪽으로 두려움의 눈길이 가기도 했고, 용마산 북쪽비탈에 자리 잡은 공동묘지도 비 오고 컴컴해질 땐 공포감을 주기에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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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2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이 흉내 내는 데 따라 짚 뭉치 잡고 던지고 뺏으면서 듣기만 한 럭비를 한답시고 빈 밭고랑과 둑을 쓸던 기억도, 푸석푸석한 밭이라 살이 아프지 않아 좋았던 느낌도 어렴풋이 남아있다.

고무로 된 공을 본 건 전쟁 중 반쪽 운동장에서 처음이었던 것 같고, 가죽으로 된 공을 만져본 건 정전 전후였던 것 같다. 군용물자들이 대거 민간에 불하되어 시중에 나오면서 고무제품이나 가죽제품들이 가공되어 우리들에게 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다.

까만 고무주머니에 바람만 넣은 공이었지만 보통 아이들이 가지기엔 아직 귀한 것이었기에 운동장에 한두 개만 튀어 다녀도 백여 명의 아이들이 공 따라 뛰어 다니던 일이 일상이었다.

그러니 공 가진 아이들의 위세는 대단했다. 방과 후에 벌어지는 축구시합에 선발되려면 그 아이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이 필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경기 때도 그 친구는 주장 노릇을 했고 모든 멤버들이 그 아이에게 패스해 주는 걸 잊지 않았다.

합포초등학교라 잘못 세게 차면 종종 공이 바다에 빠지기도 했었는데(지금 학교 동쪽 길 건너 라이온스 회관부터 바다였다) 그때도 다투어 바지를 걷거나 벗고 들어가 공을 건져왔다. 심지어 겨울에도 그랬다.

<공을 잘못하면 바다에 빠졌다는 당시 합포초등학교와 현재 상황 비교>

 

가죽공이 눈에 익은 건 정전 이듬해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한 8·15체육대회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경기 전부터 방과 후에 하는 선수들의 연습 때도 많이 보았거니와 중학교 진학 후엔 체육시간에도 농구공이나 배구공 등은 만져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별 실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었던 축구공차기는 마산중학교가 가졌던 운동장 여건 때문에 3년 내내 한 번도 가질 수 없었다.

마산고등학교도 운동장 반쯤에 판자 가교사를 지어 교실로 쓰고, 나머지에 농구장, 배구장, 철봉시설 등을 하였으니 축구는 엄두도 못 낼 여건이었기 때문이다. 야구 연습도 공 던지고 받기 정도만 하는 걸 보았고 배팅연습이나 실전훈련은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을 빌어 하는 걸 보았다. 체육시간에 배구공도 멋모르고 세게 쳐서 공 찾아 완월초등학교 운동장을 헤매는 일도 종종 일어났었다.

그런데 전후에 활기를 띈 운동 중에서도 특히 축구가 중고교 팀들과 군인 팀들에서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계기를 준 것은 당시 마산에 와있었던 헌병사령부 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팀에 국가대표 유명선수들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는 선수로는 골키퍼 함흥철과 센터포드 최정민이다.

함흥철은 50년대 한국축구계에선 보기 드문 국제수준의 골키퍼로 평가 받은 선수였다.

 <함흥철 (1930 ~ 2000) / 한국축구1세대 수문장이자 국가대표팀 감독 역임>

 

우리는 마산상고 운동장에서 골문을 지키는 그의 유니폼 꿰맨 부분과 방귀소리(그가 옆으로 날면서 내는 방귀소리는 당시 우리들의 화제로 돌아다녔다.)에 낄낄거리기도 했지만 몸을 수평으로 날리면서 강슛을 쳐내는, 그때로선 상상도 못한 묘기를 실제로 보면서는 경이감을 금치 못하기도 했었다. 그때 그의 유니폼은 긴 바지 긴 소매였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잔디구장이 없었던 여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최정민에 대한 기억은 선명하지 않은데, 아시아 최고의 공격수였다는 평가만 머리 속에 있다. 그 외에도 우상권 등 국가대표급 선수가 두세 명 더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생각나지 않는다.

 

<1950년대 아시아의 황금 다리로 불리며 한국 축구를 대표했던 최정민 전 축구대표팀 감독(1930~1983)>

 

그들이 연습상대가 없어 진해 해군사관학교 축구팀이나 통제부 팀, 아니면 마산고, 마산상고 팀들과 어울렸던 것 같은데 그 팀들로선 과분한 상대 덕에 전력도 향상시키고 학생들의 관심도 더 받았던 것 같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우리 초등시절에 신화처럼 화제에 올라있던 마산 출신 대표선수, 이름은 안종수였다.

올림픽 경기에서 그가 쏜 슛이 상대 골키퍼를 기절시켜 상대국 응원자가 권총을 빼들어 쏘았는데 그가 총알을 피했다느니 하는, 지금이라면 유치원생이라도 믿지 않을 소리들을 그때 우리들은 다투어 떠들곤 했다.

내가 성인이 된 언젠가 일간지에서 읽은 한국축구사에서 그의 이름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가 마산 출신임은 확인되었으나 그의 실력은 교체 멤버 정도의 위치였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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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 우리들의 선망대상으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뛰어난 기량을 보였거나 남다른 재능이나 인기 끌 요소까지 겸비한 선수는 우리들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우리들 의식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기도 했다.

매년 815일이 되면 방학 중인데도 모든 학생들은 등교하여 기념식에 참석해야 했다. 식이 끝나면 바로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마산 인구는 전쟁 피난민이 보태져 10만 명이 조금 넘었을 정도였는데도 도로가의 시민들 참여도도 높고 하여 지금 세태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장관을 연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산시내만 사오천 명 되던 중고생들이 학교 위치에 따라 두 시간 정도 행진을 벌였는데, 맨 앞엔 당시 거의 모든 남자고교에 두고 있었던 밴드부가 서고 그 뒤를 학생들이 중대·소대별로 행진했다.

초등학생들은 행진 대열의 앞과 옆을 오가며 잔치 분위기를 돋우었고 구경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어서 그랬겠지만 시민들도 연도에 몰려나와 성황을 이루었다. 변두리 지역을 제외하곤 시내 전체가 축제분위기에 젖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맨 앞줄에 선 악장들의 지휘봉을 이용한 재주피우기와 멋 내기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또 여고로선 유일하게 있었던 제일여고 고적대의 인기도 상당했다. 날씬한 몸매의 고적대가 드럼을 치면서 행진해 갈 때 수많은 조무래기들이 주위를 따르면서 발을 맞추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른다.

<여고 고적대 퍼레이드는 당시 큰 인기였다>

 

행진이 끝나면 오후부터 이틀 반 동안의 체육대회로 들어갔다.

마산시내 모든 중고교들이 그 학교에 두고 있는 체육종목에 참여함은 물론 통제부 팀, 81항공창 팀(공군) 등의 군부대 팀과 초등교사 팀, 신흥방직 팀 같은 직장 팀 등도 종목에 따라 참여해 그야말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진 체육축제였다.

그러니 경기 장소도 모든 학교운동장들이 동원되었다. 그 중 인기 있는 종목 경기가 많이 열렸던 마산상업고등학교(용마고 전신), 무학초등학교의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국수, 국밥, 비빔밥 등과 막걸리를 파는 천막식당들이 들어차 축제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마라톤 경기(1962) / 마산시내 수성동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때도 우리 동네 친구들은 대부분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몇몇 친구들은 국수와 아이스케키 값 정도를 어떻게든 마련하여 아침 먹고 만나 경기장으로 갔다.

이 학교 저 학교 관심 가는 데를 골라 다니며 하루 종일 배고픔도 잊고 돌아다니다 해거름 쯤 집으로 돌아오면서 게임이야기와 선수들 잘잘못 이야기로 신났던 기억은 지금도 즐거운 상념을 불러온다.

그때 우리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대스타가 잊혀 지지 않는다.

정재문이라는 2년 선배였는데 그는 내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동네 형들로부터 이름을 여러 번 들었을 정도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입학식 날 대대장으로서 구령을 붙이던 때였는데, 그때 본 모습은 소문대로 참 훤칠했다. 키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도 준수했다. 대대장으로서의 통솔력도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런 그가 당시 마산시내 중학교 최고의 투수에다 공부도 상대가 없을 정도로 우수했으니 명성이 자자했던 건 당연했다.

특히 8·15경축기념체육대회에 대비하느라 합숙훈련을 하면서도 휴식시간엔 가교사로 된 합숙소 앞 그늘에 책걸상을 내어놓고 공부하던 모습과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마산동중과의 야구경기에서 강속구를 뿌려 열 몇 개의 삼진을 잡아 우리를 열광시키던 모습은 워낙 인상이 깊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그는 그 후 선생님들의 권유로 전국의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경기고등학교에 응시하여 3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선생님들이 자랑삼아 얘기하여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도 투수로 활약하면서도 2학년 올라갈 때는 수석 했다는 소식도 같은 경로로 들었다.

그 후 40년도 더 지난 뒤 듣게 된 후일담.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갔고 장성 계급장을 달지 못했다고 했다.<<<

(편집자 주 ; 196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정재문 씨는 월남전에 참전(1969~1970)하였고 1985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그후 쌍용그룹에 입사하여 쌍용건설 전무이사를 지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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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5

15. 정전 후의 체험들 - 공군 요양소

 

우리 동네 대여섯 채의 적산가옥(일본인들이 살던 집)들은 다 불하되어, 동네 사람들이 들어갔지만, '봉선각'은 그 얼안이 커서(500평은 되었을 듯) 동네 사람들은 엄두를 못 내었던 듯 한동안 비어 있었다.

<봉선각 / 1930년대 촬영>

 

그러다 시내의 누군가가 임대하여 영업을 했던지 한때 장구소리를 듣기도 했었는데, 시국이 시끄러워지고 팔룡산 꼭대기에 봉홧불이 오르고, 곧이어 전쟁이 나고 하면서 봉선각은 폐가로 되어갔고, 우리들도 거기 가길 꺼려했었다.

그래선지 내 어렸을 때 거기에 얼킨 이상한 얘기들 밤 되면 말 달리는 소리도 들리고, 여자 울음소리도 들린다는 투의 괴담들 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곳이 부활한 건 공군 병원이 들어오면서다. 정전 직후부터 오륙년 동안 주둔했었는데, 주로 결핵환자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공군 요양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의무병을 비롯해 사병들이 이삼십 명 있었던 것 같고, 장교는 군의관 외엔 준위 한 사람만 보았다.

부대 규모는 그래도 농촌 작은마을이라 그런지 이들의 존재감은 꽤있었다.

장기 복무자 대여섯 명은 동네 집들에 세 들어 살면서 병원 약들과 간단한 주사 등을 동네 아픈 사람들에게 주었고, 여러 친분을 통하여 다른 군용품들도 흘러 나왔다.

당시로선 참 귀했던 소화제나 다이아진, 소독용 알콜 등도 얻을 수 있었고, 디디티나 쥐약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침을 많이 했는데(백일해 후유증이라고 들었다) 우리 집이 공군 병원 바로 아래 있었기에 기침이 심할 때는 병원에 올라가 마이신 주사를 엉덩이에 맞고 오는 혜택도 입었었다.

맞을 때의 아픔과 주무르면서 내려올 때 엉덩이가 뻐근했던 기억이 난다.

의무병 박 하사는 동네 할머니에게 갈 때도 별 필요도 없는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녀 똥가방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고, 수송부 김석규 하사는 아무나 요청하면 잘 챙겨주어 나이도 좀 들었는데도 우리들까지도 안 듣게는 석규’ ‘석규하기도 했었다.

수송부에는 매일 아침 신마산으로 가는 중형차 한 대가 있었다. 차종 이름을 스리쿼터라 불렀는데, 거의 매일 같이 신마산으로 가서 부대 부식을 실어 온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차가 얼마나 고물이었던지 발동이 제대로 걸리는 날이 거의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군인들이 밀어서 발동을 걸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부터는 우리가 밀게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후로는 거의 우리가 자임했다.

부대 앞에 예닐곱 명이 서 있다가 석규 씨가 차에 오르면 우리는 익숙한 협력으로 땀을 흘리며 스리쿼터를 밀어 아리랑 고개 위에 올려놓고는 모두 탄다.

차가 내려가 가속도가 붙으면 내리막이 다하는 지점쯤에서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발동이 걸리는데, 그때부턴 전혀 고물 티가 없이 힘차게 달렸다.

석규 아저씨는 예의 그 청춘고백을 신나게 불러가며 자갈길을 널뛰듯이 달렸고, 떨어질세라 찻전을 꽉 붙잡으면서도 우리도 신이 나서 흥얼거렸다.

합포초등학교는 너무 가까워 아쉬웠고 마산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승차 재미에 더 빠졌었다. 그래서 하교 시에도 석규 스리쿼터가 지나가지 않는지를 살피러 종종 뒤를 돌아봐가면서 걷는 습관들도 생겼다.

어쩌다 타이밍이 맞아 몇 번 탄 일도 있긴 했었다. 언젠가는 수송부 텐트에서 석규 아저씨와 두세 명의 군인들을 모셔 놓고 연말 파티를 연 기억도 있다.

공군 부대에 대한 또 하나의 뚜렷한 기억이 있다. 천 상사 이야기다.

2 미터 가까이 됨직한 키에 쫙 벌어진 어깨와 가슴, 반쯤 걷어 올린 소매 밑으로 드러난 절굿대 같은 팔에 돌판 같은 손, 거기에 약간 거무스레한 빛이 도는 얼굴에(잘 생긴 편이었다) 반 곱슬머리였으니 그 모습만으로도 보는 사람들 누구나 위압감을 느낄 만 했다. 거기다 당시론 드문 태권도 고단자라 했으니 더 그럴 만 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간혹 나가는 외출 때는 여러 사병들이 그를 앞세우고 창동 남성동 거리를 활보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럴 땐 주차장 깡패들도 슬슬 피했고, 진해 뿐 아니라 마산 시내까지 휘젓고 다니던 막사 해병들도 감히 시비 걸 엄두도 못 내었다는 이야기들이 우리들 사이에서 신나게 회자되었다.

그러나 그 천 상사(천규덕)가 몇 년 후 한국 최고의 프로 레슬러까지 될 줄은 차마 몰랐다. 레슬링이라는 용어도 몰랐으니까.

그는 배우 천호진의 아버지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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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5 00:16

건축의 외형 - ‘(조개)껍질’ (Shell)

난주의 새둥지에 이어 또다른 자연물의 형태인 '조개껍질' 형태의 건축물 들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건축에서 shell 이라고 하면, 셸구조(shell ) 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겠습니다만, '건축의 외형' 이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가고 있으므로 외부 형태를 표현하는 단어로 지칭하여 보겠습니다.


 - 다롄 조개 박물관 (Dalian Shell Museum, 중국, 2009)

출처 - www.archdaily.com


 전 세계에서 5,000종 이상의 조개껍질들을 전시하고 있는 중국 다롄 의 조개박물관 은 말 그대로 '조개껍질' 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지상 4층 지하 1층 규모로 18,000 제곱미터 (약 5,500평) 정도의 전시공간을 품고 있는 이 박물관은 조개의 '입' 부분의 커다란 창을 통해 내부 라운지에서 아름다운 외부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출처 - www.archdaily.com

 추가적인 사진과 도면 등이 포함된 archdaily의 포스팅을 링크합니다.

 - https://www.archdaily.com/55139/dalian-shell-museum-the-design-institute-of-civil-engineering-architecture-of-dut


 - 브레멘 과학 박물관 (Universum Bremen, 독일, 2000)

출처 - en.wikipedia.org

 

 동 지역 출신 건축가인 토마스 클룸프(Thomas Klumpp, http://www.klumpp.us/) 가 설계한 브레멘 과학 박물관 입니다. 보기에 따라 고래 같아 보이기도 하고, 입벌린 바지락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출처 - http://www.bild.de/


 본 건물은 대략 4,000 제곱미터 (약 1,200평) 크기의 전시장 규모로서, 4만장의 스테인리스 스틸 비늘로 외피를 덮고 있습니다. 

 인류, 지구 혹은 우주와 관련된 다양한 전시와 과학 현상 체험을 할 수 있는 이 곳은 그 독톡한 외형으로 연 40만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부를 방문한 후기가 올라와 있는 블로그를 링크해 봅니다.

 - https://blog.naver.com/jd1000/70148271185


 - 테시마 예술 박물관 (teshima art museum, 일본, 2010)

출처 - setouchiexplorer.com

 

 이 사진만 보아서는, 해변에 널려 있는 구멍난 조개껍데기 같아 보입니다. 일본의 건축가 세지마 카즈요(Sejima Kazuyo) 와 함께 건축설계 스튜디오 SANAA 를 운영하고 있는 니시자와 류에(Nishizawa Ryue)가 단독으로 설계한 작품입니다 - 두 건축가는 서로 각자의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국제 공모전이나 해외 프로젝트 혹은 대규모 프로젝트인 경우 공동의 사무실인 SANAA에서 진행합니다. SANAA는 2010년 일본의 네번째 프리츠커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들을 조금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 www.archdaily.com

 

 일본 나오시마섬을 포함한, 12개 섬과 다카마츠 항 그리고 우노 항 주변 전체를 아우르는 세토우치 국제예술축제 (http://setouchi-artfest.jp/en/)의 일환으로 지어진 이 박물관은 사진으로 보아서는 무엇이 작품인 지 가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닥에서 솟아나와 하얀 바닥을 적시고 흐르는 물방울들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많은 사진들과 도면들, 실제 방문기가 담긴 블로그, 그리고 아마도 드론으로 촬영한 듯한 외관 영상을 링크합니다.


 - https://www.designboom.com/architecture/ryue-nishizawa-teshima-art-museum/

 - https://blog.naver.com/kimejsun/220997048672

 - https://www.youtube.com/watch?v=FCTy-_e0-54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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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2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4

14. 정전 후의 체험들 - 마부 버스, 화물차

 

군용차 아닌 것들을 그때 우리들은 개인차라 불렀는데, 개인 승용차는 당시로선 하루에 한두 대 보기도 어려웠고, 거의 모두가 화물차와 버스였다.

거의 모두 일제가 두고 간 것이나 군에서 불하한 것들이었는데, 차종에 관계없이 크기가 좀 작고 연하게 생긴 것은 일제(일본제품), 크고 견고해 보이는 것은 미제(미국제품), 개조한 차들은 선제(조선제=국산)라 불렀다.

차에 호기심들이 많았던지라 지나가는 차들을 그렇게 분류하기를 즐겼고, 종종 분류를 다투기도 했다. 이 용어들은 한참동안 옷, 화장품, 학용품 등에서도 쓰였다.

60년대 서성동 버스 종합터미널이 생기기 전까지 회사 별로 여기저기 버스터미널이 있었다.

주로 오동동, 창동, 남성동에 있었는데, 회사가 마산에 있은 것은 별로 없었고, 부산 회사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한금속, 신한여객 등이 생각나는데, 후에 천일, 신흥 등이 나타난 것 같다.

버스 엔진은 군에서 수명이 다한 것을 재생시킨 것이라, 소리도 요란하고 정지 후 출발 때는 으레 시동이 잘 걸리지 않아 쇠창 같은 기구로 돌려서 발동을 일으키기 일쑤였다.

몸통과 내부 시설들도 철판 등을 붙인 듯 달릴 땐 삐그적거리고 너덜거렸다. 그래도 자갈 튀기며 달릴 땐 아주 빨랐다.

<미군용 폐차 재생 버스>

 

마산 오동동에서 부산 대신동까지 세 시간 반 남짓 걸렸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마부 국도의 거리가 지금보다 길었고, 시내 진입 전의 전 도로가 비포장이었으며 군데군데 패이거나 가장자리가 허물어진 곳도 있었는데다가, 장시간 정차하는 곳도 여러 곳이고, 아무데서나 손만 들면 태워주는 운행방식이라 그렇게 걸렸던 것 같다.

창원(동정동 사거리 위치), 진영(진영역 정문 근처), 김해(위치도 모르겠다), 구포다리 부산 쪽 입구, 범일동 등에서 10여 분씩 지체했었다.

그동안에 장사치들이 올라와 여러 가지 물품을 팔았는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구포 배와 진영 단감이다. 장사 중엔 강매꾼들도 제법 있었는데, 대부분 상이군인들과 그 지역에 상주하는 건달들이었다.

버스들끼리 경쟁도 심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차체가 요란하게 흔들릴 정도로 달렸는데, 언젠가 부산 누나 집에 갈 땐 머리가 천정에 부딪쳤던 기억도 있다.

양덕 삼거리(수출자유지역 후문 앞 파출소 근처)에서 탔기 때문에 맨 뒷자리에 앉게 되어서 더 심했던 것 같다.

속도감도 지금 사람들과는 달라 빠르게 느꼈겠지만, 그런 덜컹거림 때문에 더 빨리 달리는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쯤 해서 야남면(상남면, 웅남면) 다니는 버스도 나오고, 마진(마산 진해) 버스도 나와 봉암 사람들도 더러 버스 승차감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장에 채소함지 이고 나가는 아낙네들이나, 많은 품팔이들은 승차 엄두도 못 내었다. 일마치고 돌아오는 말 구루마(말 수레), 소 구루마 운 좋게 만나 타면 호강으로 여겼다.

당시엔 트럭도 사람들 운송수단으로 많이 쓰였다. 관광버스가 생긴 시기는 6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되는데, 그 이전까지는 사람들 동원이나 야유회 등에는 트럭이 주로 사용되었다. 국가 행사나 시 행사 땐 시에서 트럭을 내주었고, 근처 유원지로 놀러갈 때도 트럭을 불렀다.

봄이나 가을엔 트럭들이 짐칸에 시멘트 부대 같은 걸 깔아놓고 요금 받고 태워주기도 했다.

전쟁 직후 아버님 친구 십여 명이 가족들 데리고 북면 온천장으로 놀러갈 때 고개를 삘삘거리며 겨우 넘었던 기억이나, 중학교 때 바로 위 형과 외사촌 형과 더불어 진해 벚꽃장 갈 때 양덕 삼거리에서 세워놓고 호객하는 화물차 타고 갔던 추억이 지금도 남아있다.

, 전후 얼마 후부터 소위 하이어(택시)라고 불리던, 8인승 정도의 차도 나왔는데 그것도 군용 지프를 불하 받아 개조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건 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이 술집이나 유원지로 대절하여 다녔는데, 봉암 다리 근처에 번창했던 꼬시락 횟집 때문에 많이 보았다.

그 동네 대부분의 집들이 인근 바다에서 꼬시락을 잡거나 그걸 재료로 횟집들을 운영했었는데, 50년대 후반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진해 별장가는 길에 거기에 들렀다는 소문까지 퍼져 꽤 번창하기도 했었다.

그 작은 어촌 마을에 해상 캬바레까지 있었으니까.<<<

<봉암교와 인근 해상 꼬시락 횟집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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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00:00

건축의 외형 - ‘새둥지’ (Bird's Nest)

 굴에서의 삶을 시작으로 인간의 주거는 자연을 모방하는 단계를 거쳐 현재는 완전히 인공적인 삶의 공간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형태들은 완전한 인공물인 건축의 형태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의도되었든 아니든 간에 완성된 형태가 자연과 닮아있는 경우들도 생겨났습니다

 오늘은새둥지’ (Bird’s Nest) 라는 주제를 가지고 보았습니다.



 - The Reading Nest (미국, 2013)


출처 - www.markreigelman.com


 

 건축에 조금은 가까운 설치미술가 혹은 예술가 라고 해야 할까요? 홈페이지의 소개란 에서부터 작업들 까지 유쾌한 (누군가는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Mark Reigelman (http://www.markreigelman.com/)의 장소 특정적 설치(site-specific installation) 더 리딩 네스트 입니다.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 공공도서관 앞에 설치된 이 새둥지모양 설치미술은 클리브랜드 인근 산업현장과 제조현장에서 수집한 만개의 재생합판 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공식 홈페이지의 작품 소개 페이지를 링크합니다.

 - http://www.markreigelman.com/new-page/




 - The Bird’s nest (스웨덴, 2010)


출처 - www.dezeen.com


 말 그대로 새둥지 라고 할 수 밖에 없네요. 독특한 컨셉의 호텔인 스웨덴의 트리호텔(http://www.treehotel.se/en/) 여러 객실 중 하나인, The Bird’s nest 입니다.

 스웨덴 건축회사 Inrednings Gruppen 의 설계이며, 이 회사의 수장인 베르틸 하르스트럼(Bertil Harström) 의 인터뷰를 링크합니다.

 - http://www.ligastudios.com/interviews-blog/bertil-harstroem-architect-swedish-treehote



 베이징올림픽 경기장 (Beijing National Stadium, 중국, 2008)

출처 - en.wikipedia.org

출처 - http://jrrny.com/

출처 - http://www.bestourism.com/

 2000년 중반부터 건축계의 화두 중 하나였던 베이징올림픽 주 경기장 입니다.

 2002년 중국 정부가 이 경기장의 국제공모를 실시하였고, 프리츠커 상 수상 경력이 있는 건축회사 헤르초크 &  뫼롱 + 에이럽스포트 + 차이나 아키텍처 디자인 & 리서치 그룹 3사 연합이 당선되었습니다.

 Structure = façade = roof = space 라는 개념으로 설계된 이 경기장의 수용인원은 8만명 수준이며, 건설에는 4만5천톤 의 강철이 쓰였다고 합니다. 설계 원안에는 지붕 부분이 있었으나, 건설 비용의 문제로 실제 건설시에는 빠지게 되었습니다. 지붕을 제외하고도 3억5천만 위안 (대략 600억원) 의 건설비용이 투입되었다고 추정됩니다.

 2007년 영국 일간지 더타임즈 가 선정한  '세계 10 건축 프로젝트' 중에서도 최고의 프로젝트로 선정 되었습니다. (세계 10대 건축 프로젝트 :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중국 중앙텔레비전 신청사, 중국 서우두국제공항 3터미널, 아랍에미레이트 버즈두바이, 이집트 박물관, 로마 국립예술박물관, 예루살렘 시몬 위젠탈 관용박물관, 뉴욕 세계무역센터, 런던 비숍스게이트타워, 런던 테이트모던미술관)

 헤르초크 & 뫼롱(herzog and de meuron)의 이름을 따서 herzog and de meuron bird's nest 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새둥지(중국어鳥巢 냐오차오[*], 병음: niǎo cháo) 비슷해서 냐오차오 라고도 불립니다. 2022년 동계올림픽의 개회식과 폐막식 장소로 사용될 예정입니다.

 내부의 야경을 볼 수 있는 페이지를 링크합니다.

 - https://www.archdaily.com/6059/inside-herzog-de-meuron-beijing-birds-nest

 조만간 2018 평창동계올림픽 이 시작됩니다. 훌륭한 세계인의 축제로 무사히 마무리 되기를 바랍니다.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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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3

13. 정전 후의 체험들 - ‘이용범 다리

 

용베미 다리란 말을 언제 쯤 부터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용범(아래 사진 / 1905~1968)이란 인물의 이름이 널리 퍼진 계기로 미루어보면, 1954년 총선 이후였다고 생각된다.

참고 ; 자유당 전성기 건설업계는 이용범의 대동공업, 황의성의 조흥토건, 김용산의 극동건설, 이재준의 대림산업, 정주영의 현대건설, 조정구의 삼부토건 다섯 회사가 지배했다.

 

고장이 나면 불편이 컸던 양덕교(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정문 앞의 다리,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로 인식되지 않는다)를 두고 불평과 비난의 말들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에도 공사자나 회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거나 들었던 기억은 없다. 지금처럼 시공사의 이름을 써놓은 입간판 같은 건 그땐 구경한 일도 없다.

거기서 이백 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도 길을 가로지르는 어린내(어린천, 현 삼호천, 마산종합운동장 옆을끼고 내려오는 하천)’가 있어 다리가 놓였으나, 그건 양덕교보다 훨씬 뒤였고, 규모도 적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 합포초등학교 1학년 때 간 팔룡산 소풍 길에서 어린천 징검다리를 선생님 도움 받아가며 건너던 영상이 어렴풋이 남아있기도 하다.

후에 놓인 다리의 모습도 내의 양쪽을 간단하게 이어놓은 형태라 할까. 그래서 다리가 파손 되었을 때에도 차도 사람도 별 어려움 없이 길옆을 무너뜨려 만든 길로 냇바닥으로 다녔다.

큰 물 흐르는 날도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그래서 위 아래쪽의 제방들이 큰 공사한 흔적 없이 야트막한 언덕처럼 되어있었다.

<70년대 어린교(위 사진 ; 70년대 초, 아래 사진 ; 70년대 말) / 사진 왼편에서 어린교로 뻗어나오는 도로는 현 마산고속버스터미널(75년 건립) 앞 도로>

 

그런 여건 때문에 어린교 이삼십 미터 아래쪽부터 바다 초입에 걸쳐(지금 삼각지 남단일대) ‘갈치막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갈치막이란 당시 산호동 봉암동 일대 사람들이 만든 조어로서, 갈치 배를 갈라 내장과 아가미는 젓갈로 만들고, 갈라진 몸통은 말려 건어물로 상품화시키는 작업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몇 집이 모여 했으니 전후의 난민들이 많이 모여들어 오십 년대 후반에는 조그만 마을을 이룰 정도가 되어, 장마철에는 덜마른 생선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가 주위로 풍기곤 했었다.

<부산 감천마을에 있는 갈치건조장(갈치막)>

 

양덕교는 어린교 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다리였다.

지금의 양덕 오거리까지 매축지라고 앞에서 얘기했거니와, 그러니까 거기서부터 만든 물길이 바다에 닿도록 돌로 쌓은 방죽이 있었는데, 동쪽 것은 청수들 둑으로 연결되고, 서쪽 것은 갈치막까지 나있었다.

그리고 다리는 지금과 같은 위치에 놓였다. 그래서 밀물 때는 바닷물과 냇물이 합수되는지라 바다에 가까워질수록 하천 폭을 넓혔기에 다리 길이가 긴 것은 이해되거니와, 높이가 왜 그렇게 높았던지는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제방보다 사오 미터 높아 보였으니 지금 다리보다 이삼 미터 혹은 삼사 미터 높게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거기 고개도 당시엔 꽤 높게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다리에 파손이 생긴 일이 거의 한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 바닥에 구멍이 생겨 거기로 아래 냇물을 신기한 느낌으로 본 것도 여러 번이요, 여기저기 금간 자국 때문에 아예 다리 아래로 가교를 놓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시공사를 욕했지만, 막연한 투덜거림일 뿐 회사명과 대표 이름 따위는 몰랐던 것 같았는데, 이용범이 창원에서 국회의원이 된 후부터 그에 대한 소문이 급격히 퍼졌던 것 같다.

대동공업사가 전쟁으로 떼돈을 벌었으며, 자유당의 제2인자 이기붕의 자금줄이라는 소문이 파다해지면서는 다리 고장 때 마다용벰이 다리가 그렇지 뭐’ ‘시멘트는 다 빼돌리고 밀가루로 발랐으니등의 비아냥이 사람마다의 입에서 예사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심지어오늘 인부들 시켜 다리 들고 있게 하고는 공사비 타내고, 내일 놓아버려도 또 공사비 다 타내니하는 등등의 우스갯말도 많이 오갔었다.

그런 야유의 절반 이상은 진실을 담고 있었음을 후에 알게 되었다. 자유당 몰락 후 몇 년에 걸쳐 나왔던 기록물들을 통하여 확인했던 것이다.

창원 동면 출신으로 일본에서 돈 벌어 와서 대동공업사를 세워 미국 막사 지어주고 잘 보여 전시 토건공사로 떼돈을 모아 집권 자유당 실권자 이기붕의 돈줄을 자임함으로써, 창원에서 돈 봉투와 고무신, 막걸리로 2선을 하고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까지 하다가 결국 혁혁한 코미디를 남겼다.

일자무식이었던 그는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위한 삼선개헌 투표에서 의 구분을 못해 반대로 찍음으로써 2/3 득표를 못한 자유당이 사사오입이라는 불법을 저지르게 함으로써 한국 정치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치부를 남겨 놓은 것이다.

양덕교나 어린교 공사를 대동공업사가 한 것인지 확인된 바는 없었겠지만, 저간의 이런 저질적 정치행위로 하여, 부실공사에는 의례 용벰이다리딱지가 따라 다녔으리라.<<<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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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1 00:00

건축의 외형 - ‘원통’ (cylinder)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도형들 중에, 언제나 주변에 있어서 오히려 존재감이 낮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상에서의 '원통' 이 그런 것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원통형 물체와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주변의 수많은 원통형태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건축의 형태 라고 생각하면, 의외로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모두가 아는 건축일 터인 피사의 사탑으로 오늘의 주제인 '원통' 을 시작해 봅니다.


 - 피사의 사탑 (Leaning Tower of Pisa, 이탈리아, 1173~)

출처 - pixabay.com


 유명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유명한, 이탈리아 피사 시의 피사의 사탑 입니다. 

 약 58의 8층 종탑으로, 1173년 착공 이후 발생한 지반 토질 불균형 등으로 꾸준히 기울어짐이 발생하여, 매우 신중하게 건설하느라 완공에 199년의 시간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완공 이후에도 탑은 꾸준히 기울었고, 1990년 이탈리아 정부의 약 10년간의 보수공사를 통해 현재 5.5˚의 기울기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실제 계획은 현재의 완공작 보다 더 높게 쌓으려고 했으나, 더이상 올릴 수가 없어서 현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며, 고층 건물을 건설할 때 지반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세상에 일깨워준 건설계의 반면교사 라 할수 있겠습니다 - 피사의 사탑을 쌓으면서 파내려간 지반은 고작 3m 수준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삼성미술관 리움 (Leeum, 대한민국 서울, 2004)

출처 - leeum.samsungfoundation.org


 삼성그룹 설립자의 성 과 -um 을 합하여 이름이 지어진 리움 은 여러가지로 건축계의 화젯거리 였습니다. 3동으로 나뉘어진 건축 각 동의 설계를 맡게 된 건축가들의 명망 때문이었지요. 

 강남 교보타워 설계자로도 유명한 마리오 보타(Mario Botta) 의 museum 1(위 사진), museum 2 장 누벨(Jean Nouvel), museum 3 렘 쿨하스(Rem Koolhaas) 설계로, 이름만 검색해도 끝없이 기사와 정보가 나오는 세계적인 건축가들 입니다. 설계 이후로 시공 단계에까지 현장에서 직접 관여를 한 건축가는 마리오 보타 단 한 사람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각 건물간의 조화가 부족하다는 평도 있습니다.

 Museum 1을 디자인한 건축가 마리오 보타 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설계가 한국의 도자기 형태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자기박물관 을 염두에 두고 설계하였다는 museum 1의 내부는 아래와 같죠.

출처 - leeum.samsungfoundation.org

출처 - www.botta.ch


 건축가의 인터뷰가 포함된, 리움 공식 홈페이지의 museum 1 소개 페이지를 링크합니다.

 - http://leeum.samsungfoundation.org/html/introduction/structure01.asp




 - BMW Museum (독일, 2008)

출처 - archidialog.com


 아뜰리에 브뤼크너 (atelier brückner, http://www.atelier-brueckner.de/ko) 설계의, BMW 박물관 입니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museum bowl (칼 슈반처(Karl Schwanzer) 설계, 1973년) 을 포함한 리모델링 및 확장 프로젝트에서 BMW museum은 기존 전시공간규모의 4배 수준인 4,000 제곱미터의 공간을 추가적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출처 - www.bimmerfest.com

출처 - www.luxuo.com

출처 - www.tamschick.com

 

 항공기 엔진으로 시작하여 모터사이클, 자동차에 걸친 광범위한 분야에서 활동중인 BMW의 역사를 실물로 체험할 수 있는 BMW museum 은 2008년 완공 후 2011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19개 상을 수상하며 바로 옆에 있는 BMW 벨트 (BMW welt) 와 함께 연 20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뮌헨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드로잉과 도면, 더 많은 사진들을 확인할 수 있는 아뜰리에 브뤼크너 홈페이지의 프로젝트 소개영상을 링크합니다

 - http://www.atelier-brueckner.com/en/projects/bmw-museum

<이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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