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8.05.21 00:00

경남지역의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해방이후부터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전까지의 해방공간에서는 자신의 권리를 표출하려는 다수의 도시 빈민들 및 일본에서 돌아온 귀환 동포가 늘어나 주택수요에 비해 공급의 절대량이 부족했다.

이 같은 사정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敵産家屋)을 다투어 차지하려는 경쟁이 심화되었고, 19506월에 한국전쟁까지 발발해 그나마 있던 기존 주택마저 전란(戰亂)으로 파괴됨으로써 우리나라의 주거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해방 후 귀환 동포들과 전쟁 피난민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은 당시 한국전쟁 초기 임시 수도였던 부산이었지만 인접한 마산도 귀환 동포들과 전쟁 피난민들로 도시 인구가 급증했다.

갑자기 마산에 모여든 이들이 사용한 주거는 신포동과 월포동 및 중앙동 등에 있었던 일본군 창고와 노동자 숙소였다.

회원동에 있었던 일본군 말 사육장의 마구간도 주거지로 이용되었다. 이들은 보통 10-20 가구가 한 창고 안에서 칸막이도 없이 함께 살았다.

<가운데 음영이 짙은 직사각형 세 건물이 마산 회원동 일본군 말 사육장이다>

 

밑바닥엔 헌 가마니나 짚 혹은 판자조각 등을 깔았고, 비가 새는 지붕 밑에서 누더기 같은 이불이나 담요를 덮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판자를 주어다 칸을 막으니 마치 그 모양이 하모니카 같다하여 하모니카 촌이라 불렀다.

하모니카 촌의 집이 이 정도니 주방 설비는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나마 지혜를 발휘, 창고의 콘크리트 바닥 한 부분을 깨내고 그 밑 부분의 흙을 넓게 파낸 다음 솥을 걸고 불을 때어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해결하였다.

그리고 큰 깡통을 주워 모서리 부분을 잘라내고 편 것 여러 장으로 견고한 지붕을 만들고 시멘트부대나 비료부대 그리고 코르타르를 주워와 루핑을 만들어 창고 처마에 덧대어서 주거공간을 늘리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 외곽지역에 난립한 판자 집들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도시 미관은 물론 화재가 났다하면 대형 화재로 번졌고 소방 차량의 진입에도 지장을 초래하였다.

또한 판자집 밀집지역에는 오물 처리도 쉽지 않아 전염병을 쉽게 확신시킬 우려가 있었으며 도범(盜犯) 방지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진주지역은 6·25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도시가 거의 파괴되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인 19528월부터 기존의 주택을 보수하거나 신축하여 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도시 정비 사업이 시작되었다.

1972년까지 20여 년간 시행된 대안지구 토지구획사업이 그것으로, 수정남동·수정북동·평안동·대안동·동성동·계동·상봉서동일부·봉곡동일부·인사동일부·남성동일부·본성동일부·중안동일부·장대동일부·봉래동일부 등 총 14개 동에 걸쳐 25만여 평 규모의 대대적인 주거지 사업이었다.

전쟁 후 적극적인 주택정책을 세우고 있지 못하던 정부는 1957년 새로운 정책을 내놓았다.

외국자금에 의존해 긴급히 건설했던 임시 구호성 주택에서 항구적인 주택을 짓도록 유도하기 위해 민영 ICA주택(미국 국제협조처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의 자금을 융자해주어 지은 주택)체제를 도입한 것이다.

정부는 이 정책을 실현시키기 위해 여러 타입의 표준형 공동주택을 제시하였고 이는 곧 주택을 대량으로 공급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1958년 ICA주택 낙성식 후 주택을 둘러보는 참석자들>

 

이 정책은 시멘트 블록 벽에 외부는 시멘트 모르타르, 지붕은 슬레이트 기와를 이용한 현대적 감각의 주택들이 전국 곳곳에 들어서게 했다.

단독주택의 규모는 대지 40평에 건물 15평 정도였으며 연립주택은 4세대가 한 동에 입주하는 2층이었다.

실내에 욕실을 배치하는 등 신개념의 평면구성 때문에 문화주택이라 불리기도 했다. 오래전에 없어졌지만 마산의 교원동에도 이런 집합주택이 있었다.<<<

 

 

 

 

Trackback 0 Comment 0
2018.05.14 00:00

경남지역의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서 등장한 주택으로 대개 전통주택에 일식(日式) 혹은 서양식을 일부 채용한 형식이었다.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1920년대 초반까지 나타난 절충식 주택은 1925년 경 이후부터 점차 문화주택으로 대체되었다.

개량한옥은 1920년 전후 주택업자들이 지어 공급한 주거로, 당시에 요구된 주택 개량 안을 수용한 평면구성에 재래의 주택형식을 채용한 한옥이었다. 마루 앞에 유리문을 달아 마루를 거실로 바꾸고 대문채 혹은 살림채 내부에 화장실을 설치하는 등의 변화를 보였다.

문화주택은 1920년대 중반에 나타나 1930년대에 많이 건축되었는데, 한옥을 개선한 것이 아니라 외래적인 평면형식을 갖춘 집이었다. 식당과 욕실 및 화장실을 주택 내부에 두고 거실을 생활공간의 중심으로 이용하였고, 건축자재도 콘크리트와 유리 등 새로운 재료를 적극 사용했다.

<당시 전형적인 문화주택이었던 소설가 지하련의 마산 산호리 주택>

 

영단주택은 급속히 팽창한 도시지역의 주택난을 해소시키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1941년 설립한 <조선주택영단>이 공급한 집합주택으로, 주로 서울 지역에 집중 건설되었다.

이런 분류 외에 개항이후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주택으로, 전통한옥의 형식을 계승하면서 새로 유입된 재료와 기술을 적절히 구사해 공간구성·이용방식·입면 등에 변화를 보인 근대한옥이 있다. 주로 농업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했던 지방의 부농계층(또는 지주계층)이 지어 살았던 주택이었다.

2005년 이호열 교수(부산대 건축학부)는 경남의 밀양·창녕·의령·함안·고성·거창·산청·함양 등에 산재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축한 26개의 근대한옥을 조사 연구한 바가 있다.

이에 따르면 근대한옥 거주자는 실학의 영향을 받은 근대 지향적 사고를 바탕으로 유교적인 관습보다 실생활을 중시하였으며 개항 이후에는 경제력을 기반으로 외래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처럼 상류계층과 중인 계층의 주거를 중심으로 빠른 변화가 이루어지던 일제강점기에도 서민들의 주거는 큰 변화가 없었다.

한편 토막민(土幕民)이라 불린 도시 빈민들도 적지 않게 있었다.

토막(土幕)이란 땅을 파서 주거공간(움집)을 만든 뒤 짚이나 거적을 덮어 지붕과 출입구를 만든 집으로 가장 열악한 주거형태였다.

<일제강점기 빈민층이 거주했던 토막(土幕)>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토막(土幕) 및 불량주택 조사에 따르면 1942101일 현재 전국의 토막은 3,725호였고 불량주택은 29,408호였다.

이 조사에서 밝혀진 경남의 도시지역 사정을 보면 부산이 토막 34호에 거주자 128, 불량주택 1,984호에 거주자 8,984명이었고 마산이 토막 46호에 거주자 196, 불량주택 224호에 거주자 1,294명이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온 움집이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된 것이다.<<<

 

 

 

 

 

Trackback 0 Comment 0
2018.05.07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벽은 방바닥으로부터 색깔 있는 벽지에 이르기 까지 훌륭하게 치장되어 있다. 창문은 네모꼴이며 안이나 바깥쪽으로 살을 대었고 기름을 먹였거나 먹이지 않은 거친 종이를 바른다.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만든 발은 창의 장식을 매우 다양하게 꾸며주고 있다. 유리는 아직도 조선의 평민사회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장식품이다.

 

하지만 당시 문화를 주도했던 소수의 중·상류 계층의 주택을 제외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초가에서 소박하게 살고 있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시작된 개항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직접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과 서구의 건축문화도 들어오게 되었다.

개항 이후 항구를 중심으로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부산·서울·인천을 비롯해 경남에서는 마산에 일본식 주택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

소위 신마산이라 불리는 마산의 개항장은 일본식 주택이 많이 지어져 마치 일본의 소도시 같은 도시 경관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 해군기지와 함께 조성된 진해 신도시에도 나가야(長屋) 중심의 일본식 주택이 대거 건립되었다.

그런가 하면 1907년부터 통영시 도남동 일대에 조성하기 시작한 일본인 이주 어촌 오카야마무라(岡山村)는 나가야(長屋)를 중심으로 신사·학교·사당 등이 들어섬으로써 전형적인 일본 어촌 형태로 조성되기도 했다.

<창원시 진해구(구 진해시) 중원로터리 부근 일본인들이 살았던 목조 나가야(長屋) 전경>

 

<통영 도남동 오카야마무라(岡山村) 전경>

 

<오카야마무라 우편소(남포우편소, 1912년 건축)의 사택>

 

개항장에 건설된 일본인 주택들은 당연히 일본인의 자본에 의해 일본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이루어졌다. 그들 대부분이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주택과 점포를 겸한 단층 혹은 이층의 주상(住商) 복합건물이 주종을 이루었다.

이 같은 건축형식은 당시로서는 생소한 외래적인 주거형식이었다.

온난 다습한 풍토에서 발달한 일본식 주택은 한국의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아 점차 다다미를 덜어내고 온돌방을 들이는 일본인들도 많아졌다.<<<

 

 

 

 

 

Trackback 0 Comment 0
2018.04.30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라의 가사규제인 옥사조(屋舍條)와 가장 큰 차이는 택지 규모에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주택은 산악과 구릉이 많은 자연환경과 최대한 조화를 이루는 특징을 갖는데, 상류층의 주택은 기후가 구조에 영향을 적게 미쳤으나 서민주택의 경우 북쪽지방은 보온을 위한 겹집구조와 온돌이, 남쪽지방은 바람이 잘 통하는 홑집구조와 마루가 발달하였다.

<우리나라 전통가옥구조의 분포>

 

반가(班家)라 부르는 양반의 주택은 지역적 특성보다 지배계층으로서의 권위와 유학자로서의 성리학적 규범에 따른 생활방식 등이 중요 요소로 고려되었다. 때문에 가문의 전통, 신분과 성별,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채() 단위로 공간을 구분하여 사당채·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채·곳간채 등으로 건물을 분리 배치하였다.

특히 기와로 이은 지붕의 처마를 길게 돌출시켜 날아갈 듯한 지붕선을 만들어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묘사되었다.

2006년 김화봉 교수(경남과학기술대 건축학부)는 경남 하동지역에 산재해 있는 반가 8채를 조사 연구하였다. 이에 따르면, 건물의 배치 형태는 남부지방의 일반적 구성인 자형이었으며 내부공간은 부농층(富農層)에서는 근대적 특성이, 지배계층에서는 공간적 우위를 점유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좁은 지역 임에도 불구하고 경남지역 나름의 계층성과 다양한 주거 유형이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근대까지 지속되었다.

민가(民家)라 부르는 서민주택은 중·하류층이 살던 집으로, 경제적 이유는 물론 사회적으로 가사규제 때문에 그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권위적 혹은 유교적 표현보다는 농업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주택, 즉 지역의 자연환경에 경제적으로 대응하고 생산공간과 주거공간이 공존하는 주거형식으로 발달했다.

또한 대부분의 민가는 건축주 스스로 짓거나 지역의 장인(匠人)에 의해 지어졌고 사용된 자재는 주변의 자연재료인 자연목, , , 짚을 이용하였다. 초가지붕은 민가를 상징할 정도로 가장 널리 쓰인 민가의 지붕 형태였다.

 

경상도 지방의 민가는 홑집계열겹집계열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소득 수준이 낮은 소농계층은 부엌··방으로 배열된 마루 없는 3자형 홑집, 경제 사정이 약간 나은 계층은 부엌··마루·방으로 배열된 마루 있는 자형 홑집이나 겹집에서 살았다.

서민주택의 외부공간은 몸채와 울타리, 그리고 이들 사이에 놓인 마당으로 구성되는데, 마당은 동선과 작업의 공간이자 내부공간에서 부족한 주거 기능의 일부를 수용할 수 있는 매우 특징적인 외부공간이라 할 수 있다.

1986년 이상정 교수(경상대 건축학부)가 경남의 합천·산청·진양·사천지역 전통 농촌주택을 조사한 사례를 보면 안채·아랫채·부속채의 세 개 동으로 구성된 가옥이 많았으며, 건물의 평면형태는 자형 홑집으로 산간지역은 직교형 배치가, 해안지역은 병렬형 배치가 다수였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부엌++방의 유형이 경남 전 지역에 널리 분포했으며, 각 실의 출입문은 마당을 향해 나있었다. 각 채의 중심에 배치된 마당은 협소한 내부공간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Trackback 0 Comment 0
2018.04.23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지표로 해석된다.

구들은 추운 북쪽 지방에서 먼저 발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경남에서도 초기철기시대 의 구들유적이 출토되었다.

사천시의 늑도에서 발굴된 주거지에 보이는 구들유적이 그것이다. 이 구들유적은 온난한 한반도 남단의 경남 해안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삼한시대의 것으로 알려진 늑도의 구들유적은 타원형의 주거지 내부에 아궁이 시설을 만들고 외벽을 따라 외줄의 구들 고래를 시설한 것으로, 구들 고래의 끝에서 집 밖으로 연기가 배출되도록 만든 것이다.

한편 초기철기시대 경남지역에는 고상주거(高床住居)가 널리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고상주거지로는 옛 가야지역인 김해 부원동 주거지를 들 수 있으며, 그밖에 삼천포 늑도, 김해 봉황대, 창원 가음정동에서도 고상주거지가 발굴되었다. 이밖에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고상형 가형토기(家形土器)도 고상식 주거 또는 고상식 창고가 존재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김해 봉황대 고상식 주거유적 복원지>

 

한반도의 고대국가는 기원 전후로 시작되었다. 북방에서는 고구려가 기원전 1세기경에, 남방에서는 기원 후 2~3세기경에 백제와 신라가 국가체계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주거 형식도 원시단계에서 벗어나 목조 형식을 기반으로 새롭게 발달하게 된다.

삼국시대 초기에도 서민들의 집은 대체로 움집이었으나 점차 초옥(草屋) 토실(土室)의 초가집으로 발전하였다.

그런가하면 새로운 지붕제인 기와가 도입되면서 왕궁이나 관청, 사찰 등의 공공건물은 기와집으로 건축되었다. 이는 기와지붕의 하중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지반조성기술과 함께 기둥이 받는 하중을 분산시킬 수 있는 정교한 건축기술이 도입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는 실내에 쪽구들을 설치하여 난방과 취사를 하였으며, 상류층은 구들과 함께 철제 화로와 같은 별도의 난방시설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 벽화 속 아궁이>

 

백제나 가야는 구들보다는 습기를 피하기 용이하고 통풍이 잘 되는 고상식 주거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T자 형태의 쪽구들이 사용되긴 했으나 상류층은 집의 내부 바닥에 마루를 설치하고 고구려처럼 화로와 같은 별도의 난방시설을 사용했다. 신라는 옥사조(屋舍條)를 제정하고 백성에서부터 진골에 이르기까지 각 계급별로 주택의 규모와 치장, 사용재료 등을 제한하였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귀족 계층은 침상과 평상을 이용하는 기와집을 짓고 살았지만 서민들은 토탑(土榻 : 흙 침상)’이라는 부분 온돌이 설치된 초가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생활이 일반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 중기 이후 주택의 가장 큰 특징은 오늘날의 온돌과 같은 전면온돌과 마루가 동시에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부분온돌과 전면온돌의 차이는 불을 때는 아궁이가 실내에 있느냐 실외에 있느냐의 차이다.

온돌과 마루의 공존은 이후 우리나라 주거 문화의 고유한 특성으로서 남쪽에서 발달된 마루와 북쪽에서 발달된 온돌이 결합되어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Trackback 0 Comment 0
2018.04.16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경남은 서북쪽은 소백산맥, 동남쪽은 바다에 면합니.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기후라고 볼 수 있지만 바다와 가까운 지역은 해양의 영향도 많이 받습니. 기온은 동남 해안에서 서북 내륙으로 가면서 낮아지며 연 평균 강수량도 이와 비슷합니.

경남 주거문화의 형성과 발전은 이와 같은 자연적 특성의 산물이며 그 궤적은 경남지역의 역사 및 문화 발전과 같이 해왔습니.

글은 시기에 따라 다섯 항목으로 나누었습니다.

1)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3) 해방이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5) 1980년대 이후

--------------------------------------------------------------------------------------------

 

1)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 1

주거의 원초적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었다. 이를 위해 초기 한반도에 정착한 인류는 큰 나무그늘이나 바위그늘, 동굴 등 자연적인 은신처를 찾아 거처로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발굴된 최초의 집자리 유적은 공주 석장리 등의 구석기유적에서 나타나는데, 지표면에 천막처럼 지었기 때문에 평지 천막형 주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 유적들은 일상적인 생활 근거지로서의 주거라기보다는 임시 순환 거처에 가까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집자리 유적은 기원전 5,000~6,000년경의 것으로 확인된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 집터이다. 형식상 구석기시대 집자리와 유사하지만 보다 정연한 평면과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도구의 발달과 함께 건축술이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양양 오산리의 집자리를 제외한 신석기 집자리의 대부분은 움집 형태이다. 수직으로 50~100깊이로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덮는 구조였다. 평면 형태는 원형 또는 원형에 가까운 말각 방형이 많았으며, 신석기 후기에는 간혹 장방형도 사용되었다.

움집은 형태와 구조상 추위를 견디기 유리했고, 집 높이가 낮아 풍압 등 외력의 영향도 적게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움집의 규모는 지름 6m 정도의 면적 30내외가 많았으며, 대략 대여섯 명의 가족이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내부에 기둥과 보를 엮어 기본 뼈대를 세우고, 거기에 지붕을 형성하는 서까래 모양의 부재를 경사지게 땅에 박아 만든 제법 튼튼한 구조였다. 견고한 구조체가 필요했다는 것은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점차 변화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석기 후기(B.C 2,000~1,000년경)에는 작은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주거 공간 내에 성별 또는 용도에 따른 공간분화가 있었으며 경험과 기술의 축적과 도구의 발달로 다양한 형태의 움집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나타난 경남의 유적은 합천 봉계리(1987~88)와 거창 임불리 유적(1988)이다.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원시적 농경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농경과 정착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농경의 시작은 주거문화에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농사가 잘 되는 토지를 찾아 거처를 마련했고, 파종부터 수확 때까지 기다리는 정착생활이 유도되었다. 생산 증대를 위한 협업의 이점 때문에 취락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마을단위의 영역계획이 이루어졌고, 장기간의 정착 생활을 위해 내구적인 주거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주거 유적만으로 당시의 마을계획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경남지역인 울산 검단리 유적에서 발견된 환호(環濠)를 통해 마을 단위의 주거계획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도 움집의 형태가 지속되었으나 규모나 평면·구조 등에서 신석기시대와 큰 차이를 보여준다.

청동기시대 움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초기에는 평면적이 40㎡ 이상으로 확대되지만 후기에는 오히려 20㎡ 내외로 소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주거형태가 세대공동주거에서 사적공간이 보장되는 개별주거형태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움의 깊이는 30정도로 얕아지고 수직 벽체가 생기며 지붕 서까래가 지면에서 떨어지는 등 지상주거로 발전하는 과도기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를 반움집이라 한다.

이런 변화는 집을 짓는 도구의 발전, 즉 청동기로 만든 도끼··대패의 발명과도 관계가 깊다.

이처럼 수직의 기둥과 수평의 보가 직각으로 연결되는 구조형식은 벽과 지붕이 따로 구분되는 집의 외형을 낳게 하였다. 벽과 지붕이 구분되는 집의 출현은 원시건축의 발전에서 가장 큰 성과였다.

경남지역의 청동기 주거지는 진양 대평리 유적(1976, 1980), 울주 양동 유적(1984), 거창 대야리 유적(1986, 1988)과 무릉리 유적(1986, 1988), 울주 검단리 유적 등에서 발굴되었다.

특히 진주 대평리는 대규모의 밭과 주거지, 환호, 야외노지(爐址), 토기 가마, 구덩이, 무덤 등이 발굴되어 선사시대의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번창했던 곳이었다.

<진주 청동기문화 박물관 경내에 복원된 청동기시대 주거지 / 아래는 위치>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서도 대부분의 주거형태는 움집 또는 반움집에 머물러 있었으나 일부 지배층의 가옥들은 지상주거로 발전했다. 지상주거는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이에 대응할만한 견고한 구조체를 만들 수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초기철기시대에는 철기를 이용한 건축도구의 발달로 목재 가공 능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비록 지배계층의 주거로 추정되는 소수의 사례이지만 지상주거가 출현했다.<<<

 

 

 

 

Trackback 0 Comment 0
2018.04.0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장내마이크에서 지금 밖이 시끄러우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들려왔다.

관객들이 욕설 섞어 돈(입장료)내놔라고 고함친 것은 당연한데,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극장 전체에 불이 나가버렸다.

그때서야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관객들이 아우성을 치고 밟고 밟히며 밖으로 나왔는데, 손을 꼭 잡고 나온 우리 둘이, 극장 문 앞에서 주로 아래쪽으로 밀려가는 사람들 따라 가다가, 남성동파출소 쪽의 상황을 보고는 대강이나마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파출소를 에워싸고 투석을 하고 있던 군중들이 극장에서 나온 무리들과 합세하자 힘을 받은 듯 더 격한 고함들을 쏟아 뱉으며 돌질을 하기 시작했다.

<3.15의거 시위 중인 마산 시민들>

 

남성동은 중심지라 당시에도 그 도로들엔 포장이 되어있어 많은 돌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우리가 서서 구경했던 이학골목(그 골목 한 곳에 이학이란, 당시로선 고급 일식집이 있었다.)과 맞은편 세신양복점 골목의 상황을 보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골목을 다니면서 주운 돌을 치마에 싸서 날라다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다투어 앙칼지게 부르짖었던 소리도 지금까지 귀에 쟁쟁한데,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가 야 이 도둑늠들아 내 포 내나라였다. 그날은 그들의 실체를 잘 몰랐는데,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주로 민주당 여성당원이었다.

‘내 표 내어 놓으라는 말은, 당시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유당원들과 공무원들의 주도 아래 3인조 또는 5인조로 조직되어, 조장의 인솔아래 투표소로 들어가서 종장의 감시 아래 공개투표를 하게 했는데, 이들은 거기에 편입시킬 수 없으니까, 투표통지표를 이들에겐 아예 보내지 않은 데 대한 항의라는 것도 알았다.

돌팔매질은 점점 잦아가고 정문 접근자도 많아져 가던 상황이 한참 진행될 즈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놀라 골목 안쪽으로 몸을 피하면서도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파출소 옥상에서 화약 불빛이 보였다.

그러자 군중들은 이리 뛰고 저리 흩어지며 일부는 더 흥분되어 날뛰는 모습이 보였는데, 총소리가 난 지 채 일분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세신양복점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나는 총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쪽으로 왈칵 밀려들었고 이어 파출소 문 쪽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총소리는 곧 그쳤다. 친구와 나는 어떤 적극적 행동도 없이 우물거리며 사람들 쪽으로 쓸려 다녔으니 사람이 죽었는 지 어쨌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

가서 보니 그곳에도 이미 투석전이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쪽엔 남성동에서와는 좀 다른 양상이 있었다. 구마산역 쪽에서 보니 파출소가 높은 곳에 있어, 그리고 주위에 집들이 적어 접근이 쉽지 않아 돌 던지기가 어려웠던지, 좀 색다른 방법을 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구마산역 입구에서 파출소쪽으로 꺾어져 십여 미터 가는 곳에 돌공장이 있었는데(목재소도 있었는지?) 거기서는 그런 와중에서도 밤일을 하고 있었고, 아직도 추워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몇 명 청년들이 어디서 깡통을 주워와 밤일 현장에 땔감으로 쌓아둔 톱밥과 대패밥 등을 담아서 불을 붙인 뒤, 그 깡통을 새끼줄에 매어 원을 그리며 휘둘러서는 파출소로 향하여 던지는 장면들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개는 파출소 벽 밑에 떨어지거나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을 안에서 되던지는 장면도 보였다. ......

이튿날 어머님의 만류로 시내에 나가보진 못했으나 대강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열 명 이상 죽었고, 특히 북마산파출소가 불타면서 안에 있던 경찰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총을 난사하며 나오는 통에 그 앞에서 제일 많이 죽었다고 했다.

<3월15일 밤 경찰이 쏜 총에 생명을 잃은 김주열. 사진은 4월11일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열사의 시신>

 

나는 파출소 화재가 어제보았던 그 깡통불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이상 『상식의 서식처』>

추기 : 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따르는 신념이고, 그 신념을 정치로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뜻을 직접 물어보는 제도가 선거다. 그런데, 이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뜻에 반해 나라를 침략자 일제에게 갖다바친 친일파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소위 사이비 보수집단이 민의를 따를 리 없고, 따라서 정상적 선거로선 집권할 수 없으니, 그들은 대를 이어 부정선거를 관습으로 삼아왔었다. 3,5인조선거는 박정희에 의해 릴레이선거로 발전해 왔는데, 그건, 앞사람의 기표지를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가지고 나와 검표자에게 보이고, 다음 사람은 그것을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또 그렇게 가지고 나오고......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소문이 나 시끄러워지니 박정희 전두환은 아예 체육관에 꼭두각시들 모아놓고 하는 소위 체육관선거로 권력을 찬탈했다. 노태우는 전국 유세장을 투석장으로 만들어 민의를 왜곡하고, 이명박 박근혜는 댓글부대를 만들어 민의를 조작하고......

그래서 역대 소위 보수당 집권자 7명 중 2명은 쫓겨났고, 한명은 심복한테 살해되었고, 한명은 사형 또 한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두 명은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보수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참보수(김구, 장준하 등)를 살해하고 보수를 참칭해온 결과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작년 10월 16일부터 매주 게재해온 창원미래연구소 박호철 이사장님의 글 「기억을 찾아가다」 25편은 오늘로 끝냅니다.

마산 봉암동에서 보낸 어린시절에서 부터 자유당의 암울했던 혼란기에 보낸 중,고 시절 이야기까지 1950년대 마산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었습.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입니다.

한 회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송고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Trackback 0 Comment 0
2018.04.02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길었고, 나머지 대부분도 자유당 각료들과 국회의원들 이야기였으며, 조병옥, 장면 등 야당정치인 몇명의 이름도 본 것 같다.

거기에 이용범도 올라있는 걸 기억하는 건 당시 그의 이름이 마산 창원을 통털어 가장 많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데 많이 쓰는 신사정치인정도 내용이었을 것이다.

지금이라면 여당에 오히려 누가 될 희작이 되었겠지만, 그때 나의 머리엔 그런 인식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거기엔 여당성향의 우리집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 1,2년 때 영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을 단체관람하면서 느꼈던 감동의 일단도 기억에 남아있어 약간의 부끄러움을 환기시켜준다. 담임선생님이 여늬때와는 달리 반강제적이라 할 만큼 적극 권유했던 영화였다.

 

이승만역으로 김진규가 나왔고, 김승호, 최무룡, 최남현, 허장강, 주선태 등등,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이름깨나 있다는 배우는 다 동원되었던 영화였다.

일제에 저항하다 모진 고문을 받고, 그러면서도 조금도 좌절함이 없이 애국지사들을 영도하여 투쟁의 길에 매진하는 독립투사의 근엄하면서도 처절한 모습, 김진규의 생김새와 연기가 그 역에 잘 어울려 그런 분위기를 더 느끼게 했던 것 같다.

특히, 양팔과 양발목에 쇠사슬을 차고 해떠오르는 동해가로 한발 두발 걸어가며 민족의 미래를 다짐하던 끝장면은 그 후 한참동안 나의 뇌리에 남아 감동을 재현시켜주곤 했었다.

자유당이 적극적 친일행위자들을 중심으로 이룩된 당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자도, 심지어 반대당이 뿌린 유인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오히려 내 고3때 전개되었던 정부통령 선거운동 기간 내내 전국의 담벼락들에 도배되다시피했던, 민주당의 부통령후보 장면에 대한 비방 벽보(구국철혈동지회란 명칭 밑에 일본 고위관료나 작위수여자가 입었던 금빛 제복 차림의 장면이 의자에 앉아있는 사진)가 더 나의 눈길을 끌었었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조병옥은 선거기간 중에 위암으로 사망했으니 부통령 자리만 쟁점이 되었던 시기였다.

 

나는 친구들이 이승만이나 이기붕을 비난하면, 애국지사 이승만은 물론 스마트한 양복차림의 이기붕까지 근거도 없는 외교력을 내세워 옹호했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던 민주당구호보다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자유당구호의 합리성을 더 강조하기도 했었다.

이승만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은 그해 전교생을 의무적으로 참여시킨, ‘이대통령 탄신 00주년 기념 글짓기대회에서 효력을 발휘했다.

평소 한번도 문재를 인정받아 본 경험이 없었었는데, 이때 시조형식을 빌어 그 감동을 표현했더니 분외의 평가가 따라와서 놀랐다. 학교에서 뽑히고 시(市)에서 뽑혀 도(道)에까지 올라갔던 것이다.

전국 예심을 통과하진 못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나는 가슴 벅찬 감동을 느꼈으며, 심지어 나에게 뛰어난 문재가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도 했다.

그것이 종당엔 이과 출신인 내가 문과인 국문과 지망을 하게한 단초가 되기도 했었다. 참 어처구니가 없는 사고였지만, 그러나 그것이 내 일생의 삶을 지배했으니 참 우습기도하다.

이승만 관련 행사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노인잔치다.

매년 이승만의 생일날 전국의 지자체별로 노인들을 모아놓고 술밥간에 대접하며 축하잔치를 벌였었다. 주로 무학초등학교에서 많이 벌였다고 들었는데, 푸짐한 상차림과 술추렴에 대해 다녀온 노인들끼리 이야기 나누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그 자리에선 주로 공무원들의 주도로 이승만에 대한 찬사와 후계자 이기붕에 대한 칭찬이 머리에 박힐 정도였다고 했다. 그리고 찬사경쟁을 하는 사람들을 보다못해 입바른소리를 하다가 멱살 잡혀 끌려나간 노인 이야기도 들은 일이 있다.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해 손톱이 다 뽑혔다느니, 지금의 일본정권은 이승만만 보면 두려움에 떤다느니 하는 말들이 끊임없이 들려왔고, 학교 아침조례 때 항시 있은 교장훈시’에서도 그런 내용으로 삼사십분에 걸쳐 침을 튀기던 여러 교장들을 보았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Trackback 0 Comment 0
2018.03.2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한평 없어 어차피 얻은 구장집 머슴자리 지켜 새경 모은 것으로 동네 가난한 처자와 눈맞추어 토백이처럼 산 김씨 같은 사람도 있었다.

, 부두노동으로 돈 모아 논밭 사둔 것이 나중에 개발되어 알부자 소리를 들은 천씨 같은 사람도 있고, 개울가 움막 같은 초가에 살았던 박씨처럼 어설픈 재인 노릇하다 결국 좀도둑으로 전락하여 비참한 삶을 마감했던 사람도 있었다.

<허기를 때우고 있는 피난민들>

 

그런데 이런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가며 난민생활을 하는 일은 1960년대 초반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집과 백여 미터 떨어진 싸구려 객사엔 여러가지 색깔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머물러 우리들 이야기감에서 떠날 날이 없었고, 동네 구장집에 있었던 머슴방엔 거의 매일 밤 머슴자리 찾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들었다.

그리고 바냇들 북동쪽에 있은 벽돌공장 북동쪽엔 난민촌이 형성되기도 했었다.

해방 후 귀국한 귀환동포들이 주로 거주한 신포동과 해운동, 회원동 등 난민들 거주지는 변두리 동네들 거의 모두에 형성되었었다.

그리고 여러곳에서 불거졌던 소소한 절도사건들이 화제에 오를 땐 그 지역들이 도마에 오르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복어 내장을 끓여 먹고 중독사한 비극적 얘기도 그 마을들 얘기로 종종 들려왔다.

우리동네 사람들 대부분은 가난한 농부들이었음에도 뜨네기 좀도둑들에 많이 시달렸었다.

광을 따로 두지 않은 대부분의 집들에선 방이나 마루 한녘에 곡식자루를 두기 일쑤였는데, 들에 일하러 간 녘에 이것을 털리고나면 부잣집에서 거금 털린 것보다 더 큰 타격을 입는 것이, 그들은 당장 굶주림에 직면하기 때문이었다.

고된 농사일로 곯아떨어졌다가 새벽에 일어나보니 툇마루에 둔 곡식자루가 없어졌더라는 이야기나 일 나간 대낮에 감쪽같이 없어졌더라는 이야기, 심지어 낼모래 벨 벼나 보리를 세워둔 채 낱알을 훑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엿판 실은 리어카 아래쪽에 곡식자루가 있더라는 말도 들었고, 방물장수 함지도 의심하는 소리를 들었다. 솥을 떼어갔다는 말도 들렸고, 낡은 옷도 없어졌다 했다.

어쨋든 지금 들으면 귀를 의심할 만도 한, 실소를 머금을 정도의 소소한 사건, 그러나 당자들에겐 상당한 타격이 되는 이런 사건들이 10년여에 걸쳐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런 사고들을 막기 위해 동네 청년들이 모여 자율방범대를 만든 일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좀 효과를 보는 듯했으나 곧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구장집, 술도가, 방앗간에서 얼마씩 내고 여러집에서 곡식되씩 내어 교대로 번을 서는 청년들 야식비나 난방비를 감당했지만, 그것도 한두번 넘어가면 꺼려했고, 청년들은 그들대로 고된 농사일에 시달리고 밤에도 잠을 설치게 되니 지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변두리 어려운 사람들의 삶은 고달픈 수밖에 없었다. 부패한 공권력은 제 살찌우기에 바쁘니 도회지 부자들 돌보기에도 바빴던 셈이다.

한편, 마산부두엔 며칠에 한번씩 구호곡을 실은 배가 들어왔는데, 우리동네 몇몇 형들은 그 하역작업에 적극적으로 자원했었다.

품삯도 당시로선 쏠쏠했거니와 그에 못잖은 부수입도 있었기 때문이다.

조그만 대꼬챙이를 다듬어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작업때 곡식부대에 찔러 흘러나오는 곡식을 위 내복 안에 담고 있다가 가지고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 말이 새어 몸 수색이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 형들로부터 아구찜 먹는 걸 배웠을 것이다. 그 전엔 못 먹는 생선이라고 거들떠보지도 않았었는데, 부두 근처에 있는 아구찜집에서 막걸리안주로 먹어보고서 집에서 해 먹기 시작했고, 그걸 보고 여러 사람들이 따라 먹었던 것 같다.

뒤에 들으니 그때 오동동 바닷가 아구찜집 중에 내 초등학교 동기 집도 있었는데 그가 지금 오동동 할매아구찜이다.

그 외, 양덕 미군부대 군용식품 절취해내는 속칭 도꾸다이이야기도 들었고, 청수들 저수지 으슥한 바닷가에 일본에서 오는 밀수배가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여러번 들었으나 직접 본 일은 없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0) 2018.04.09
기억을 찾아가다 - 24  (0) 2018.04.02
기억을 찾아가다 - 23  (0) 2018.03.26
기억을 찾아가다 - 22  (0) 2018.03.19
기억을 찾아가다 - 21  (0) 2018.03.12
기억을 찾아가다 - 20  (0) 2018.03.05
Trackback 0 Comment 0
2018.03.1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기합이라하여 상급생이 하급생들에게 거의 합법적으로 가하는 폭력, 그래서 항상 긴장해야하는 학내외 생활, 동급생끼리나 동네친구 나아가 또래급끼리의 쟁투를 위한 몸과 주먹 단련, 학교끼리의 패싸움으로 인한 모표, 교복 살피기 등등이 일상생활의 상당부분을 지배했던 것이다.

군사교육 강화로 인한 계급의식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정적 인간관계의 매마름이나 자유당정권의 깡패문화 등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며, 반자립적인 사대문화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어쨋든, 딱히 잡히는 원인은 모르는 채 이런 인습들의 소용돌이에서 온전한 정신을 못 차린 채 3년을 생활해 온 게 사실인 것 같다.

입학 두어 달 뒤에 받은 소위 단체기합이란 것은 큰 충격이었다.

1년생 전부를 운동장에 불러내어 엎드려뻗혀시켜놓고, 몽둥이로 치고 발로 밟고, 무릎 구부린 흔적(바지 무릎 부분에 묻은 흙)이 있다고 때리고, 선배 존경하는 자세가 안 되어 있다는 트집 내세워 그렇게 체형을 가하는 일을 처음 당해보니, 정말 상급생에 대한 공포감이 실감으로 왔다.

며칠 후엔 2년생들이 그렇게 당하는 걸 보았고, 얼마후엔 2년생들에게 우리가 당했다.

3년 될 때까지 5,6차례 그런 곤욕을 치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이런 만행들이 선생님들의 묵인하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에도 인습의 무서움을 느끼게 한다.

<2017년 11월 1일 충남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단체기합이 있었다 - 오마이뉴스 보도 사진>

 

점심시간에 선배가 교실에 들어와 누구를 끌고가서는 집단폭행하여 보내고, 길거리에서 경례 잘 안 부쳤다고 오소리 개뺨치듯 하고...... 심지어 난 거수경례를 하고도 얻어맞았다. ‘상급생을 왜 노려보았느냐는 것이었다.

모르는 선배를 노려볼 이유가 전혀 없었으나, 그런 변명은 매만 더 벌 것이기에 그냥 맞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니 저만치 같은 모표가 보이면, 목 칼라에 붙인 학년뱃지부터 살피고는, 상급생이면 경례붙이는 엄숙한 자세부터 짓는, 긴장은 항시 갖추고 다녀야했다. 시력이 나쁘다든지, 딴데를 보고 있었다든지 등의 말은 아예 안 하는 것이 나았다.

동급생끼리의 싸움질도 이틀이 멀다하고 일어났었다.

교실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주먹 자존을 위해 친구들 입회하에 용마산에서 붙는 일도 흔했다.

마산고의 누구누구, 마산상고의 아무아무개, 창신농고의 대표주먹, 마산공고의 펀치왕 들의 이름은 시내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익히 알려져있었다.

학교간의 집단패싸움도 참 잦았다.

개인적 충돌이 친구들까지 동원된 집단 자존심까움으로 번지기도 했고, 어디 야외에서 있은 충돌로 하여 수십명이 동원된 집단난투극으로 번지기도했다. 운동경기 응원중에 튀어나온 말에 흥분하여 으르릉거리기도 했고, 축구경기땐 종종 나오는 거친 플레이로하여 집단난투극으로 간 사례도 많았다.

특히, 마산고, 마산상고와 진주고, 진주농고간의 정기 축구경기는 거의 빠짐없이 후유증을 낳았다.

진주고 진주농고 응원단들이 마산에 오면 갈 땐 북마산역에서 터지고 가고, 두 학교가 진주에 가서 지면 덜하지만, 이기기라도 할라치면 응원꾼들은 진주역에서 기차를 못 타고 근처에 숨어있다가 밤기차를 타고 오기도 했었다.

낯선 동네에 가서 왈짜들에게 시달리는 일도 많았고, 외지로 갈 땐 아예 교모를 쓰지 않았다.

이런 풍토 때문에 내 고등학교시절 두 가지는 보통학생들에게 거의 필수가 되어있었다. 클럽 가입과 주먹단련이었다.

폭력써클까진 아니더라도 위세를 위한 모음이 태평양, ‘파도’, ‘다이야등등의 이름으로 많이 조직되어있어, 농촌학생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가입했을 정도였다. 조직내 선후배간의 유대는 잘 되어 보호받기도 좋았을 것이다.

몸 과시엔 가슴 근육과 주먹 굳은살이 주로 화제가 되었는데, 그걸 위해 평행봉과 샌드백이 유행했다.

그래서 우리집에도 소나무를 베어 와서 땅에 박아 평행봉대를 세웠고, 집 뒤곁엔 군용백에 모래를 채운 샌드백을 달았다.

평행봉틀에 올라갔다 내려오면 가슴을 마져보았고, 샌드백을 친 후 주먹 굳은살(속칭 다마’) 만져보는 일이 습관적이 되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을 찾아가다 - 24  (0) 2018.04.02
기억을 찾아가다 - 23  (0) 2018.03.26
기억을 찾아가다 - 22  (0) 2018.03.19
기억을 찾아가다 - 21  (0) 2018.03.12
기억을 찾아가다 - 20  (0) 2018.03.05
기억을 찾아가다 - 19  (0) 2018.02.26
Trackback 0 Comment 0
경남지역의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의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