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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3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침묵의 이유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 의문과 관련해 사회적 요인을 바탕으로 개인적 요인들에 천착함으로써 개인에게 체화된 사회적 정의감을 확인했다.

두 번째 의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보복 공포증과 빨갱이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구체적인 사례를 볼 수 있었다.

<1985년 회갑연 때 가족과 함께 / 맨 왼쪽이 글쓴 이>

 

하상칠의 증언은 315의거 당일 시청과 무학국교 앞에서 벌어졌던 야간시위의 전개과정을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향후 4월혁명 공로자 신청이 추가 시행된다면 하상칠과 같은 선의의 피해자가 구제되고, 나아가 2020315의거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예정된 315의거사개정판을 낼 때 그의 증언이 반영되어 좀 더 생생하고 구체적인 역사 서술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우리의 연구가 315의거의 다른 참여자들에 대한 미시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기대감과는 반대로 이 글을 준비하는 내내 왜 당사자가 살아있던 동안에 이러한 논문을 쓸 생각을 하지 못 했던가라는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사망 후에야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증빙자료는 고사하고 85세의 노인이 50년 전 사건에 관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 증언밖에 없는데다가 그를 아는 소수의 사람에게서 그것도 극히 한정되고 단편적인 정보밖에 얻을 수 없다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구술사 분야에 종사하거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너무 늦기 전에 가급적 많은 사람의 구술부터 받아두는 것 자체가 무척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개별 연구자 차원에 맡겨두어서는 안 되며 공공의 관심과 지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방법론적으로 이 글은 여전히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미시사 방법론의 원용만으로는 증거의 단편성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아마 주관성과 객관성 간의 거리는 완전히 소멸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미시사 방법론이 가진 영원한 한계일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조사자나 연구자의 더 많은 노력에 의해서만 다소간에 해소될 수 있다.

둘째, 미시사 방법론을 원용해 하상칠이라는 개인의 삶과 활동을 천착했지만 관련 자료와 참조인의 부족으로 좀 더 생생한 스토리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개인과 사회 간의 상호작용을 엄밀하고도 구체적으로 추적하기 어려웠고, 하상칠이라는 개인의 생애와 사회적 활동을 그가 참여한 역사적 사건을 들여다보는 하나의 창()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자신하기도 힘들다.

이는 315의거와 관련된 개인들에 대한 구술 자료가 늘어나고 개인별 사례 탐구가 누적되어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후속연구와 관련해 우리는 하상칠의 증언이 참임을 믿지만 국가보훈처에서는 객관적 증빙서류의 미비를 이유로 유공자 선정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하상칠 같은 선의의 피해자를 구제하고 역사적 사건의 리얼리티를 더 잘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행의 객관적 증거주의가 가진 장단점을 명시하고 유공자 선정 방법의 개선책을 제시하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끝)

서익진 /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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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5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6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언을 하고 공로자 심사 신청을 하기로 맘먹게 되었는가라는 것이다.

먼저 철저한 비밀 유지의 이유를 살펴본 후 증언 결심의 동기를 알아보자.

 

<젊은 시절의 하상칠 선생>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하상칠이 315의거 당일 시위에 참가한 이후 무려 50년 동안 침묵해왔다는 사실을 설명해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기는 공포라는 감정과 빨갱이트라우마라 할 수 있다.

이것들은 개인의 성격보다는 객관적이고 사회적인 요인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하상칠의 사례는 이것들이 개인의 의식에 어떻게 각인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우선, 권력의 보복에 대한 공포증이다.

315의거 당시 부정선거라는 권력의 부당한 행위에 저항권을 행사한 시민들에게 공권력이 가한 폭력과 보복은 상상을 초월했다.

증언록(2010a)을 보면 기자는 물론 구경꾼이나 시위에 참가한 가족을 찾아 나선 사람 등 시위와 전혀 무관한 사람까지 무차별로 연행해갔고, 그들 중 다수가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거나 악랄한 고문을 받아 그 후유증으로 반병신이 되거나 평생 동안 지병으로 고생한 사람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난사하거나 심지어는 도망치는 시위자들을 뒤쫓으며 뒤에서 총격을 가했고(무학초등학교 담벼락에 남아 있는 사람 키 높이의 총탄 흔적들이 그 생생한 증거다), 315의거 당일 밤과 그 직후 며칠 동안 마산 시내 분위기는 무차별 검문검색, 가가호호 가택수색, 보복적인 검거 선풍으로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 당시 경찰은 물론 정부도 315의거가 빨갱이 소행이거나 적어도 북한 오열(간첩)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저지른 일로 간주했다.

빨갱이나 간첩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불온문서를 시체의 호주머니에 집어넣으려고 했던 작태나 피검자들 중에는 사주 받았다는 자백을 하라며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는 증언이 부지기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상칠은 나는 특히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6.25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탈출 해나온 포로였었기 때문에...”(증언록, 478)라고 진술하듯이 자신이 검거되면 반공포로 경험이 빨갱이 조작 빌미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그날부터 며칠 동안 가위에 눌렸다고 증언할 정도다.

이러한 빨갱이 트라우마는 단지 하상칠의 경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 그리고 반공독재 치하를 겪은 한국인 모두에게 많건 적건 각인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형식적 민주화가 시작된 1987년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빨갱이 트라우마에 시달려왔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80년 경 마산시내에서 가족과 함께 / 가운데가 신을순 여사. 하상칠 선생의 팔장을 낀 이가 둘째 딸 하효선 시네아트 리좀 대표>

 

이러한 빨갱이 트라우마는 하상칠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행동이나 조치를 취하게 만들었다.

우선, 그는 그 오랜 세월 동안 315의거 참가는 물론 반공포로 경력에 대해서도 가족에게조차 거의 완벽하게 비밀로 유지해왔다.

다음, 혹시 있을 수 있는 의심을 사전에 차단할 목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경력을 세탁하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필자에게 상당한 후원금을 내고 경우회 자문위원이 된 것은 의거 참가자나 빨갱이로 의심받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음을 고백한 적이 있다.

경우회 회원이라면 시위 가담자로 의심받거나 혹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사상까지는 의심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얼음상인조합 결성을 주도하거나 경남인조빙판매조합장 등을 역임한 것도 이러한 경력 세탁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1960315일 이후 그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단체에는 일체 가입하지 않았다. 오로지 돈벌이에 신경 쓰고, 직업 관련 이익단체에만 관여하고, 자식 교육 시키고, 집안 세우는 일에만 몰두했다.

정치적으로 주목받을만한 행동은 일절 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극우 보수주의자로 처세했는데, 이 역시 자기 위장의 한 술책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처럼 사회와 역사가 하상칠이라는 개인에게 각인시킨 공포와 트라우마는 반세기나 지속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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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9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가 위험한 시위에 가담하지는 않는다.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한 대답이 주어진 적이 없는 까닭은 참가자 개개인에 관한 탐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최초로 왜 하상칠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하상칠의 경우 가장 궁금한 것은 315의거 당시 세 명의 자식을 가진 35세의 가장이었고 잘 나가는 얼음 판매업자였던 그가 왜 그토록 위험한, 잘못하면 목숨을 잃거나 잡혀서 거의 병신이 되거나 아니면 빨갱이로 몰려 사회적으로 매장될 수도 있는 상황 속으로 스스로 뛰어들었는가라는 의문이다.

당시 경남도경 수사과장 김경술의 국회조사단 증언(증언록, 674)에 의거해 경찰에서 취급한 사건 관련자를 직업별로 구분해보면 232명 중 중고학생이 58, 무위도식하는 무직자가 50, 나머지 절반이 넘는 사람은 직공이거나 소규모 상인이었다.

요컨대 참가자의 다수는 창녀, 거지, 소 가게 직원 등과 같은 사회 하층민들이었다. 이러한 참여자들의 사회적 구성에 비추어볼 때 학생도 정치인도 실업자도 하층민도 아닌 사람이 시위에 적극 참여한 것은 희귀한 일일 뿐만 아니라 믿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가 부자 소리를 듣는 등 경제적으로 윤택한 중산층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는 증언에서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배운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하상칠, 2010, 478)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상칠의 이처럼 높은 사회의식(정의감)과 참여의식(실천)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에 답하려면 그의 삶 속에서 다양한 실마리를 찾아보는 방법밖에 없다. 예컨대 성격, 가족 구조, 가정 형편, 교육, 친구 관계, 직업, 사회활동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 오른쪽이 하상칠 선생>

 

하상칠은 초등학교조차 다닌 적이 없고 서당 교육의 유무도 확인할 수 없어 학교 교육의 영향은 논외다.

역으로 그는 많은 한국인들이 그러하듯이 자식 교육만큼은 최대한으로 시켰고 수많은 조카들까지 자기 집에서 먹이고 재우면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는 그가 가문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교육을 통한 개인의 신분 상승과 이로써 가문의 영광을 구현한다는 유교적 관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어쨌든 그는 관직만이 출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그는 자식이 정치와 행정이 아니라 학계나 예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도 높이 평가하기는커녕 거의 무관심했음을 필자는 기억한다.

이는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체험한 권력의 무서움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작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한국인의 권력에 대한 양면성을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그가 받은 가정교육이나 소년기와 청년기에 대해 뭔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생존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미 프로필에서 본 바와 같이 그는 어릴 때 지지리도 못 사는 속에서도 진양 하씨 가문이 간직한 선비 정신의 분위기 하에서 자랐다.

이것이 나중에 선비 가문의 전통을 자랑스러워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났고, 특히 오촌 당숙인 백촌 선생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그는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고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받은 교육의 효과를 추정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해도 그가 자식들에게 제공한 가정교육을 통해 역으로 유추해볼 수는 있다.

자식들은 그가 불의를 보고 그대로 넘어가지 못하는 대쪽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조모(조부는 그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다)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자식 중 하나가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삐딱한 행동을 해도 자식들 전부가 단체로 야단을 맞거나 벌을 받았다.

꾸중을 할 때는 반드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모순을 예로 들었다. 그래선지 자식들도 사회적 불의에 대해 공동 책임감을 느끼고 잘못된 것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 입바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셋째 딸은 198020세 때 창동의 모 상인의 횡포를 알리는 플랫카드를 들고 단독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서에 잡혀갔고 부친이 와서 풀려난 적이 있는데, 큰 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승산 없는 싸움하느라 고생했다며 칭찬을 들었다며 그때 아버지가 엄청 존경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친구 면에서 그의 성격이나 행동거지를 아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315의거 이전의 친구 관계는 전혀 알 도리가 없고, 92세로 장수해서 사건 이후에 사귄 친구도 이젠 찾기 어렵다.

사회 활동으로 얼음 판매업계 회장, 종친회 회장, 노인당 회장 등 성격이 전혀 다른 여러 조직의 장을 맡았다는 경력이 그가 무학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리더십과 불편부당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가족들이 아는 한 그는 정당이나 사회단체 등 정치적 색채를 띤 활동을 한 적이 없다. 315의거 참가 이후 그는 자신의 활동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모든 정치 관련 활동에서 의식적으로 멀리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 경우회 자문위원 위촉은 의거 참가 이후의 일인데다 이 또한 의거 참가나 사상을 의심받지 않기 위한 보신책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이는 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용의주도하게 대처하는 성격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가족들은 그가 평소 전형적인 보수주의자의 언행을 일관되게 해왔으며 특히 전라도에 대한 강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고 한다.

그의 반 전라도 감정은 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절에 친하게 지내면서 잘 대해주었던 전라도 출신의 한 동료 포로에게 배신당한(자신의 돈까지 들고 튐) 경험과 나중에 마산에서 사업을 하면서 전라도 출신자들과의 접촉에서 겪은 경험의 소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국가관이나 공동체 의식(의무감)과 관련해서는 약 3년간의 포로수용소 경험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반공포로 경력도 완벽한 비밀로 유지해왔기 때문에 거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들려줄 사람이 아예 없다.

그러나 당시 포로들의 생활과 거기서 벌어진 유혈 사태들은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쨌든 포로수용소는 훌륭한 정치 및 이데올로기 학습의 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친공과 반공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사상 투쟁을 보면서 국가와 민족, 정치와 이데올로기, 공동체와 사회적 정의, 옳고 그름의 분별, 이데올로기의 실천 등에 관한 나름의 의견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형성했을 것이다.

단지 처 신을순은 그가 다른 포로들에게도 반공포로로 분류되도록 설득했다는 사실을 들은 적이 있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강한 반공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가 박정희 개발독재에 친화성을 보였지만 박근혜 국정 논단 사건에 대해서는 가혹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음을 기억한다.

반공, (개발)독재 등 한국 보수주의의 핵심가치를 지지하면서도 그것이 사회적 정의(법치와 법의 준수, 절차적 민주주의의 존중 등)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는 사고는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이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반한 부정선거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고, 선거 무효를 위한 개표 저지 활동은 선비 정신의 구현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뿌리와 가문을 중시하고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선호했던 보수주의자이면서 불의를 용인하지 못하는 하상칠의 성격은 정의 실현과 원칙 준수가 보수와 진보를 넘어 한 사회를 유지케 하는 공통의 기본가치임을 잘 보여준다.

당시 그는 마산의 도심 유흥가 업소들을 주 고객으로 얼음 소매업을 적어도 5년 이상 해왔다. 지방 도시의 도심 유흥가는 정재계를 비롯한 각계의 지역 유지들 사이에 정보 교환과 정치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장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들도 그의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수많은 부정부패의 현장을 보거나 관련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이에 대한 반감과 저항심을 키웠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유력한 상인이 되려면 편의주의(편법 활용), 보신주의(신상 안전)와 기회주의(이익 우선)를 키웠을 법한데 그는 달랐다.

상당한 부를 쌓았음에도 부동산 재테크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고 나중에 이를 후회하는 말을 한 적도 거의 없다는 사실은 그가 땀 흘리지 않고 얻은 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이는 그의 남다른 정의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는 공로자 심사에서 탈락한 후 줄기차게 재심을 요구하면서 사망하기 얼마 전에도 진정서를 보냈으며, 면담은 못했지만 직접 보훈처장을 만나기 위해 본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노인의 아집이라기보다는 목적 달성을 위한 집요함과 공적에 대한 강열한 인정 욕구를 보여준다. 이는 달리 보면 그의 증언의 진실성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 해석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삶의 편린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그의 시위 참가가 개인에게 체화된 강렬한 정의감에 기인하는 것임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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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2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항적 행동으로 표출되도록 만든 사회적 요인이 무엇이었던가를 규명하는 데 치중해왔다. 따라서 315의거의 경우 왜 하필 마산인가라는 의문을 해명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런데 특정 개인의 항쟁 참가, 예컨대 왜 하상칠인가라는 의문에 답하려면 이러한 사회적 요인보다 개인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

사회적 요인이 모든 참가자에게 해당되는 공통 요인이라면, 개인적 요인은 특정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개별적인 특수 요인이다. 양자를 동시에 살펴보는 것은 315의거를 좀 더 복합적이고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특정 사건에 대한 기존의 거시 사회사적 분석에 미시 문화사적 분석을 부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기도 하다.

 

<신을순과의 결혼식 사진 / 1953년 가을>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마산 315의거를 다룬 문헌들에서 왜 마산인가라는 질문은 가장 빈번히 제기되거나 다루어져왔다. 315의거 학술논문총서에 실린 많은 글들도 이 질문을 예외 없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당시 한국의 모든 도시가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폭압, 원조경제의 위기에 따른 경제적 곤란, 자유당의 노골적인 부정선거 획책 등 대동소이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더라도 그 표출 강도는 지역이나 도시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산 지역에서 이러한 객관적인 사회적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작용해 유혈시위가 발생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논자에 따라 구조적 요인과 상황적 요인으로 또는 지역적 요인과 역사적 요인으로 구별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정치, 경제, 사회 및 역사적 요인으로 나누어본다. 요컨대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요인은 이 모든 요인을 포괄하며 이 글의 목적상 사회사보다는 미시사에 관심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주요 요인들을 간략하게 요약함으로써 뒤이은 개인적요인의 검토를 위한 배경으로 삼고자 한다.

 

첫째, 역사적으로 마산 지역은 조선 말기 개항장이자 구미 열강의 조차지로서 근대 문물에 상대적으로 일찍 눈을 떴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무정부운동 등 사회운동의 주요 중심지의 하나였다.

일본인들과 상권을 둘러싼 충돌도 첨예했기에 일반인도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상당히 높았다. 강만길(1999)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마산인의 진취성과 저항성을 키워왔음을 강조한다.

둘째, 사회적 측면에서 해방 직후의 귀환동포와 6.25전쟁 기간의 피난민 중 상당수가 마산에 정착해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난민촌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날품팔이, 고아, 부랑아 등 최하층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인구의 사회적 구성상의 특징에 주목한 이은진(1998)은 정치적 억압, 경제적 곤란, 새로운 사회공동체의 형성이 지역사회의 유동성과 급진성을 촉진한다고 분석했다.

셋째, 경제면에서 마산은 1950년대의 수입대체 기반 경공업화 과정에서 상공업도시로 빠르게 발전했던 만큼 동 연대 말 미국 원조의 감소에 따른 경제 불황(서익진, 2000)의 여파가 상대적으로 더 컸을 것이다.

높은 실업률 등 시민의 경제적 불만도 상대적으로 더 강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넷째, 정치적으로 민주당 허윤수 국회의원의 변절(자유당 입당)이 미친 다면적인 영향이다.

이 사건은 허윤수와 자유당에 대한 시민의 반감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자유당에게는 충성경쟁으로 부정선거 획책을 위해 공무원뿐만 아니라 경찰과 반공청년단까지 대거 동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민주당에게는 상대적으로 선명성이 강한 신파 세력이 선거운동을 주도하게 만들어 의거의 발단이 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선거포기 선언을 하고 가두시위를 조직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이은진, 1998).

 

이러한 요인들을 배경으로 315 선거일 직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가히 폭풍전야의 상태였다고 평가된다(홍중조, 1992: 108).

지역의 정보나 소문이 집결되는 도심(번화가이자 유흥가)에서 장사를 하던 중년의 하상칠은 이러한 시내 분위기나 민심 동향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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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5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72114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발간한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것을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3 15의거 증언록』(474~478)에 실린 원본>

 

부정선거 개표를 막기 위해 시청 앞에서 싸워

하상칠(당시 35, 녹취/2010107)

 

나는 1960315일 자유당이 장기집권을 꾀하기 위해 부정선거를 자행하자이에 항의하기 위해 오수 6시경 부정선거 개표가 진행되고 있는 마산시청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가 가는 길에 오동동빠가 있었고, 조금 앞서 거기에서 당시 도의원이며 민주당 마산시당 위원장인 정남규 씨를 경찰이 체포해 가는 광경을 보았다.

상황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다. 그것을 본 후 이번 선거는 무효라는 것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마산시청으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 35세로 얼음소매상을 하며 마산시 산호동에 살고 있었다. 나는 그때 투표권이 있었으며, 내가 어느 당을 찍고 어느 입후보를 좋아하고 안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마산시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선거는 국민들이 원하는 사람을 찍는 것인데 왜 선거에 개입해서 이렇게 찍어라 저렇게 찍어라 관여를 하고 위협을 하느냐에 대한 불만이 컸고, 그래서 이 선거를 무효화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투표함이 집결되는 시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와중에 경찰이 정남규를 잡아가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것을 본 후 내 머리에는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하고 이번 선거는 무효라고 선언한 민주당원들을 경찰이 잡아가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며, 이에 대한 분노가 더해 갔다.

나는 부림시장을 지나 시청을 향하여 빠른 걸음으로 큰길로 나섰다.

630분경 마산시청에 도착하니, 이미 경찰들은 완전무장을 한 채 지프와 소방차 등을 배치, 방어진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때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사람들이 시청 쪽으로 몰려들었.

우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부정선거 개표가 시작되고 있는 마산시청을 점령하기위해 수차례 전진 후퇴를 계속했다. 경찰은 우리를 막기 위해 공포탄을 쏘아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단 그곳을 피했지만,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지 않으려고 근처 길가 무릎높이의 하수구에 숨었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경찰 쪽으로 계속 돌을 집어 던졌다. 그 시간은 해질녘이어서 멀리에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때였다.

사람들은 밝은 곳에서는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했다. 당시 얼굴이 노출되어 데모주모자로 잡히면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기에 소극적으로 행동하던 시민들은 이제 어둠이 짙어질수록 점점 더 강렬하게 투석전으로 경찰과 대치했다.

나는 데모 군중들과 함께 시청 쪽으로 가서 투석을 하다가 경찰이 총격을 가해오면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총소리를 피해 도립마산병원(현 마산의료원) 뒤 법원 골목 어딘가에 있을 때였는데 내가 있는 쪽으로 17세쯤 되어 보이는 학생 하나가 어깨를 한손으로 잡고 달려오면서 "저 총 맞았어요. 총알이 제 팔을 관통한 것 같아요" 했다.

살펴보니 다행히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실제로 총을 맞은 학생을 보고는 갑자기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 이제 정말 전쟁이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산시청 앞에서 투석전과 흩어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그 총소리가 시민들을 물러나게 하는 공포사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우리들 심장을 겨누었다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또 사격을 가해오는 경찰들의 만행에 억누를 수 없는 적개심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총상을 당한 학생을 살펴본 후 치료를 권유하며 가까이에 도립마산병원이 있음을 알려주고, 나는 다시 골목을 빠져나와 투석전을 계속하며 자산동 쪽으로 이동해 나왔다.

이때 많은 시민들이 중과부족으로 점점 자산동 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는데, 그때 소방차 한 대가 데모 군중을 해산시키려는 목적인지 마산시청에서 자산동 쪽으로 달려왔다.

자산동 무학국민학교를 조금 지나 지금 경남데파트가 있는 곳 쯤 도착했을 때 갑자기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것이 벼락 치는 소리나 대포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이제는 총이 아니라 아예 시민들을 향해 대포를 쏜 것일까 생각하니 전쟁이 다시 생각났다.

그러던 중 갑자기 불빛이 확 하고 번지며 온 천지를 밝혔다. 공포와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곧이어 사람들이 설명하는 걸 들으니 북마산파출소에 불이 나 불 끄려고 가던 소방차가 데모대의 돌 세례를 맞아 그만 전봇대를 들이박아 버렸다는 것이다. 연이어 아름드리 전봇대가 넘어지면서 전선이 합선되어 불꽃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때 시간이 8시를 조금 지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정말인가 확인하기 위해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달려가 그 현장을 보았다.

정말 세 동강이가 난 전봇대가 큰길에 드러누워 있었다. 그리고 무학국민학교에서는 여학생들이 돌을 치마에 담아 나르고 사람들은 투석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나는 주변의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넘어진 전봇대를 옮겨 일단 길을 막도록 했다. 우선 사람들은 다닐 수 있지만 차는 다닐 수 없도록 길을 가로지르는 바리케이드를 치기 위하여 전봇대를 옮겼다.

당시 나는 크고 무거운 얼음 판매를 하고 있어 사람들로부터 힘이 장사라는 말을 자주 들었고, 실제로 힘이 꽤 좋았다. 따라서 전봇대는 내가 안고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끌고 당기며 옮길 수 있었다.

이제 동강난 전봇대를 무학초등학교 앞길에 가로놓게 함으로써 길을 차단해 경찰의 접근을 막고 또 데모대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역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돌을 땅에서 줍지 말고 철길에 있는 자갈을 사용하자고 말하면서, 일부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로 올라갔다. 학생들에게 돌은 함부로 쓰지 말고 일단 차들이 철길 밑을 지나갈 때 뒤를 보고 퍼붓자고 시켜놓았다.

당시 학생들은 자기들보다 나이가 많고 힘이 센 아저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예상한 것처럼 조금 있으니 선거함을 실은 차가 북마산 지역에서 성호초등학교 앞을 지나 시청 쪽으로 가기 위하여 우리 가까이 다가 왔다. 그 차 안에는 모자를 눌러 쓴 4~5명의 경찰이 타고 있었고, 선거함을 지키고 보호하는 듯 했다.

그 시간으로 봐서 아마 마산에서 좀 떨어진 지역에서 개표를 위해 마산시청 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함을 실은 차는 시청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차가 철길 밑을 통과하자 철길 위에서 우리가 퍼붓는 돌 세례에 다급히 차를 되돌려 도망쳤다.

우리들이 던진 돌 세례를 피하기 위해 선거함 뒤로 숨거나 선거함을 뒤집어쓰고는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10여 분 후 9시경이 되었을까, 또 지프 한 대가 다가왔다. 형상으로 보아 좀 높은 사람들이 타고 또 선거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차를 향해서도 돌 세례를 퍼부었으나 덮개가 천으로 되어 있어 투석의 효과는 별로 없었다. 그들은 이내 바리케이드 앞에 다가와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곧 차를 돌려 도망쳤다.

다시 조금 지나서 차가 한 대 현장에 도착했다. 세히 보니 총으로 무장한 군인들 같았다.

이 차도 바리케이드로 인해 더 이상 가지못하고 다른 차들과는 달리 그곳에서 머물러 있어 무슨 일인가 하고 철둑에서 내려와 보니 젊은이들이 달려들어서 벌써 총을 모두 뺏은 상태였다.

그때 나는 이 상황이 유혈 사태로 갈 우려가 있음을 직감하고, 지금 우리가 대치하는 원인과 목적을 상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어린 군인들이 무조건 명령에 움직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적으로 간주하여 가해하는 것은 정의로운 시민정신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이 서자 먼저 총을 탈취한 학생들에게 "학생,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데모는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하는 무리들의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이지, 군인들이나 경찰들을 없애거나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총을 서로 겨누고 또 쏜다면 이건 우리의 목적과는 다르. 여기 군인들은 옷이 다를 뿐 우리들의 형제이고 같은 심정일 수도 있다. 단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왔을 뿐이다. 따라서 총을 뺏어 서로 겨누는 짓은 하지 말아야한다." 고 말하며 총을 모두 회수했다.

그리고 군인들에게는 "너희들이 보다시피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이렇게 항거하는 것은 부정선거를 막기 위함인데, 너희들이 만약 총으로 우리를 위협하거나, 명령이라면서 총을 쏜다면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는 일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유혈사태를 막아야 한다. 젊은 너희들은 오히려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도와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너희들을 상대로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님으로 여기 있지 말고 돌아가거라. 그리고 너희들은 저렇게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경찰들을 도와서는 안 된다. 너희들이 총을 잃고 가면 그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니 총은 돌려주겠다. 여기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은 정의로운 너희 부모와 형제들이다. 록 군복을 입었어도 정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라." 며 빼앗았던 총을 돌려주었다.

군인들은 "고맙습니다" 며 여러 번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났다.

그렇게 군인들을 돌아가게 했을 때, 시청 쪽의 총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고, 드디어 우리 가까이서 총을 쏘아대는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들 심장이나 머리를 겨누고 있었다.

무학초등학교 담장에 숨어 대항해보려 했으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어쩔 수없이 어둠 속에서 무학초등학교 담을 넘어 철길을 따라 겨우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순간에도 경찰들은 데모대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체포하기 위해 날뛰고 있어, 그들의 눈을 피해 겨우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하니 옷이 물에 빠진 듯 젖어 있고 온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누가 나를 기억할까 너무도 두려웠다.

식간에 발생한 일이고, 또 그 상황에서 내가 생각하고 자라면서 배운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제일 선두에 서서 사태를 주동한 것이 알려지면 그들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고 위해를 가해올 것이라는 사실이 가장 두려웠다.

나는 그때 셋째 딸을 갓 출산했었고, 그리고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계속 눈에 걸렸다.

그렇게 건장했던 몸이 사흘 동안 어깨와 팔 그리고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팠다. 그리고 잠을 자면 온 몸이 가위에 눌리었고, 정말 누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 경찰에 알리지나 않았을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되었다.

당시 실제로 시위에 가담한 사람들은 붙잡히면 혹독한 벌을 받았으며, 공산당으로 몰려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것이 연일 이어졌다.

나는 특히 공산당으로 몰리는 것이 두려웠다. 왜냐하면 나는 6·25 때 거제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포로였었기 때문에 공산당으로 간주하여 처벌받는다는 것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날 밤 일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간혹 세상이 달라지는 듯해서 이야기를 하고는 싶었지만, 음속에 담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날 밤 나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 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날 일어난 일을 제대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3·15의거가 우리나라 현대 민주주의 투쟁사의 시발점이고 모태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됨으로써 그날로부터 50년 만에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어 그 정신이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은!

그리고 늦게나마 우리 자녀와 후손들에게 민권수호를 위해 피 흘리며 싸웠던 마산시민과 학생들의 용맹성을 들려줌으로써 정의로운 나라사랑이 진정 무엇인가를 교훈으로 남겨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날 밤 조국을 위해 꽃다운 나이에 산화해 가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3·15의거를 진압하기 위해 무장한 경찰들>

 

 

3. 증언 내용의 분석과 평가

하상칠이 참가했다고 증언한 3 15의거 당일 시청 앞 야간 시위는 3 15의거의 백미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여기서는 그의 증언 중 이미 확인된 사항들과 어긋나는 부분을 지적하고, 그의 증언으로 새로이 밝혀진 부분이 무엇인지를 명시해두고자 한다.

그는 오후 6시 경 집을 나와 시청으로 가던 중 오동동빠 근처에서 정남규가 경찰에 연행되어 가는 것을 (증언록, 474) 보고 선거무효를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시각에 정남규는 민주당원이 주도한 가두시위 중 오후 3시 반경에 경찰서로 연행된 후 계속 구금상태에 있었음은 명백히 밝혀진 사실이므로 다른 사람을 착각했음이 확실하다.

게다가 이 시각에 오동동빠 근처에서 누군가 연행되었다는 증언은 우리가 알기에 다른 어디에도 언급된 바 없기에 사실이라면 최초의 언급이므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부분은 그의 증언 중 유일하게 사람이나 시간 또는 장소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사항인데 사건 후 50년이 지났고 85세 노인의 기억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오후 8시쯤 지나 소방차가 전봇대를 들이받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세 동강이 났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소방차가 북마산파출소 화재 진압 차 출동했다는 소문은 잘못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다수 자료와 증언에 따르면 북마산파출소 화재는 930분경으로 알려져 있고, 시청 앞 도로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중 경찰 쪽에서 헤드라이트를 비추며 살수를 하던 여러 소방차 중 하나가 갑자기 데모군중 쪽으로 돌진해왔다는 것이고, 이 돌진의 이유가 운전수의 돌발 행동인지 지휘자의 지시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어쨌든 『3 15의거사』 300쪽에 살수를 하면서 돌진했다는 게 사실이라면 어디로 이동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킬 목적으로 돌진했던 것으로 보는 게 사리에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언 중 하이라이트는 첫째 동강난 전신주를 직접 옮겨 도로를 가로지르는 바리케이트를 친 것, 둘째 학생들을 데리고 철길 위로 올라가 이 길을 통과하려던 두 대의 차량에 투석해 되돌아가게 만든 것, 셋째 마지막으로 세 번째 차량을 타고 온 군인들에게서 시위대가 총을 빼앗은 것을 알고는 이들을 설득해 총을 되돌려주게 하고 군인들에게는 시위대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설득해 유혈사태 없이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요지의 진술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은 거의 전모가 밝혀져 있지 않다. 소문만 무성했을 뿐 어느 누구도 이 세 가지 사건에 대해 자신이 직접 참가했거나 옆에서 보았다는 증언이 아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 개의 사건 중 두 개가 국회조사단 앞에서 도경수사과장 김경술의 증언 속기록에서 단편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권종림은 ... 9시 경 무학초등학교 앞 노상에 쓰러져 있는 전주로서 국도를 차단하고 동시에 박주복은 구한오를 지휘, 구마산 방면으로 통과하는 쓰리코타 운전수인 육군502 장거리 통신대 마산 파견대 소속 상사 이재중을 구타하여 동 인이 가지고 있던 칼빈 총 일정을 탈취하고 실탄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본인에게 반환하고..., 구한오는... 오후 9시경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군 쓰리코터에 대한 투석사건에 가담하였고 군인 이재중의 총기를 박주복, 정상숙과 같이 탈취했다가 반환한 제정수(시당 감찰위원)... (315의거 증언록, 676)'이라고 말했다.

김경술의 증언은 경찰의 수사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당시 경찰은 빨갱이의 소행이거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조작하기에 여념이 없었음을 감안하면 여기서 지목된 각 사건의 행위자를 실제의 행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의 존재 자체를 지어내어야 할 이유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해당 사건들의 실재를 확인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하상칠의 증언은 이들 사건에 대해 시위 참가자 측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증언으로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막대하다고 볼 수 있다.

세한 전말을 확정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는 수사기록과 모든 증언을망라한 면밀한 조사연구를 통해 진실에 가까운 스토리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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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8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등에게서 탐문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쓰였음을 밝혀둔다. 정식으로 준비된 인터뷰가 아니어서 각 탐문이 있었던 시간과 장소를 적시하지 못한 것은 필자의 잘못이다.)

 

1) 성장 과정

하상칠은 192652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덕산리(지리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서 부친 하원수와 모친 김령 김씨 사이에서 9남매(81) 7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조선의 대다수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극빈의 가정형편에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고, 등학교도 다니지 못했다.

언제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어린 시절에 진양군(현 진주) 수곡면 대천리로 이사했고, 일가친척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인접 마을 사곡리에 자주 놀러 다녔다.

근처에 있는 낙수암(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542, 송정 하수일(1553~1612) 사적비, 유림의 강학소, 정사가 있다)과 대각서원(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344)에 자주 놀러 다녔다(이 과정에서 글도 배웠는지는 알 수 없다. 안타깝게도 그의 청소년 시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데다가 지금은 이에 대해 얘기해줄 사람이 한 명도 살아있지 않다).

1950(25) 여름 남원에 살던 양모(養母, 모친 친구라고 함)의 집안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인근 야산에서 나무하던 중 인민군에게 강제 징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포로로 잡혔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거의 3년을 보낸 후 19536월 중순 반공포로 석방 조치에 따라 수용소에서 풀려나왔고 고향에서 은신했다.

<하상칠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수용자 기록>

* 필자 주: 주소에서 PYNYANG(핑양)DECHEL(데철)은 각각 JINYANG(진양)DECHEON(대천)의 오기로 판단된다.

 

2) 마산 이주

같은 해 몇 달 후 신을순과 결혼했고, 진해 소재 해병대 문관으로 취업되어 인접한 마산으로 이주했다. 마산에는 이미 몇 명의 일가가 살고 있었고, 진해로 통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해병대에 약 4년 간 근무한 후 자영업을 하기 위해 퇴직했다. 처음엔 이것저것 하다가 1957년부터 '대동얼음'이라는 상호로 얼음 소매업을 시작했고 운이 좋았는지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처 신을순의 증언).

35세의 중년 가장이었던 1960년 셋째 딸이 태어난 지 며칠 후에 3 15의거가 일어났다.

이날 그는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시위에 참가했지만 이 사실을 가족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처 신을순도 산 지 며칠 되지 않은 빨간 구두가 다 헤진 것을 보고 시위하다 엄청 쫓겨다녔나보다 짐작만 했을 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한다.

 

3) 의거 참가 이후

3·15의거 참가 이후로도 얼음 판매업은 번창했고, 오동동의 한 요지(불종네거리 현 경남은행 지점 자리)에서 잡화점까지 운영해 상당한 돈을 모았고, 집도 더 좋은 곳으로 몇 차례 옮기는 등 부자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처 신을순은 우인의 채무 보증을 섰다가 당시 논 10마지기에 해당하는 막대한 빚을 대신 갚느라 상당한 재산을 날리기도하는 등 어려운 우인들에게 돈을 빌려주었다가 받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 후로도 돈벌이는 잘 되었지만 주택이나 상가 등 부동산 투자는 하지 않았다.

1961년에 사단법인 경찰동우회(이하 경우회)에 자문위원으로 가입해 1981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969년에 마산얼음상인조합 설립을 주도했고, 경남 인조빙 판매조합장을 맡아 1974년에 얼음 판매업을 완전히 그만둘 때까지 계속했다(참고로 이 무렵 냉장고와 제빙기의 보급으로 얼음 판매업은 사양산업이 되었다).

1972년부터는 마산 도심(구 한국은행 길 건너편)의 작은 땅을 임차해 제일주차장 을 운영했다.

1973~1975년 진양 하씨 종친회 마창지구 회장, 2006~2009년 양녕공 공신문화제 회장을 역임하는 등 가문을 유지하고 빛내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시골에 사는 수많은 조카들을 마산 도시로 불러들여 학교 다니게 했고, 남자 형제 중 일곱째이면서도 편모를 돌아가실 때까지 불평 하나 없이 모셨고, 명절이 아니더라도 집안은 친척들의 수시 방문으로 법석대었다.

80세가 되던 2004년에 오래 동안 생업이었던 주차장 영업이 힘에 부치자 생업을 중단했다.

그 후로는 주로 노인당에서 회장도 하면서 소일하거나 거의 매주 전국 각지를 여행하며 여생을 보냈다.

2010393·15의거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자 고민 끝에 증언을 결심하고 자식들에게 털어놓았다. 동년 7213·15의거기념사회 를 찾아가 증언을 녹취했다.

90세가 넘어서도 건강을 자랑하던 그는 어느 날 복통으로 병원에서 위암 4기 판정을 받았고 그 후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식사를 거부하는 등 스스로 생명 단축을 재촉해 2017726일 경남도립마산의료원에서 향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별세 넉달 전인 2017년 3월 15일 제57회 3·15의거 기념식에 참석한 선생의 마지막 모습>

-마산3·15아트센터 대강당-

 

그는 슬하에 15녀를 두었다. 평소 그는 자식이든 조카든 후손 중 누구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임명직이나 선출직으로 관직에 진출하기를 바랐지만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해 항상 안타까워했음을 필자는 기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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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00:00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언 등 이른바 비 사료들을 활용해 가능성의 역사를 최대한 기술하고자 하는 미시사 방법론을 원용했다. 또한 연구 대상자의 프로필과 증언을 제시한 후 증언에 내포된 역사적 가치를 평가했다.

논문의 대상이 된 이(하상칠)의 증언은 당일 시청 앞 야간시위의 주요 사건들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고 결과적으로 도시사적 가치도 크다.

이 논문은 인문논총46(2018. 6)에 게재되었다.

 

<목 차>

. 머리말

.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2. 녹취와 증언록

    3. 증언 내용의 분석과 평가

.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가

. 맺음말

 

 

. 머리말

 

먼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매우 개인적인 것임을 밝혀두고 싶다. 2010년 초 어느날 85세의 어르신 한 분에게서 3 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는데 늦게나마 이 사실을 밝히고 3 15의거 유공자로 인정받고 싶다는 고백을 들었다.

필자는 이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 왜냐하면 그는 다름 아닌 필자의 장인으로서 필자가 아는 한 그런 중대한 사회적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당장 3 15의거기념사업회를 찾아가 공식적인 증언을 하도록 주선했고, 이 녹취록은 그 해 2010년 말에 발간될 예정이던 『3 15의거 증언록: 1960, 우리는 이렇게 싸웠다』(이하 『증언록』)에 수록되었다.

그의 증언 내용은 그동안 3 15의거 당일 밤에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 중에서도 누가 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던 소방차에 부딪쳐 세 동강난 전봇대를 옮겨 바리케이트를 친 일이나 경찰의 증언 속에만 나타난 총기 탈취 사건 등 중요한 사건과 관련된 것이어서 그의 증언이 갖는 역사적 가치는 매우 큰 것으로 보였다.

녹취 때 증언을 직접 들었던 3 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당시 회장은 소문으로만 듣던 일의 장본인을 만났다 는 감회를 숨기지 않았고, 경찰과 시민이 총격전을 벌이는 내전 같은 상황을 사전에 방지했다 며 치하해마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역사적으로 중요한 증언이라도 객관성이나 진실성을 증명하기 어려운 특정 개인의 증언이 주장하는 활동이 논문의 소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방법을 모색하던 중 역사학에 개인의 생생한 삶의 탐구를 통해 역사적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미시사 방법론과 구술사 방법론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글의 목적이 방법론을 다루는 데 있는 것은 아니기에 여기서는 이 방법론들의 특징을 간략하나마 언급함으로써 우리가 채택한 연구 방법론의 타당성을 확인해두고자 한다.

먼저, 역사학 분야의 미시사(micro-history). 곽차섭(2017a, 미시사 방법론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역량은 물론 본고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곽차섭(2017a)을 참조할 수 있다)이 편집한 책에 실린 여러 미시사 연구자들의 논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방법론적 특징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개인이나 소규모 공동체를 대상으로 특이한 행동을 촘촘히 기술함으로써 역사적 리얼리티를 추구함과 동시에 일반적 해석의 길로 나아간다.

둘째, 관찬자료만이 아니라 미약한 증거력 때문에 전통적으로 사료로 인정되지 않던 일기, 수기, 증언 등 사적인 자료도 사용하고, 계량적 방법보다는 질적 방법을 사용한다.

셋째, 구체적인 개인의 실명을 사용하며 실명들 간의 관계를 추적해 기존의 사회사가 포착하지 못한 틈새를 포착한다. 사회사가 역사를 주체 없는 과정으로 만든다면 미시사는 실명의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추적해 주체가 살아 있는 생생한 사건이나 역사를 기술한다.

넷째, 이러한 이유로 이야기체(story)로 가능성(possibility)의 역사를 서술한다(‘가능성의 역사’란 증거의 단편성이 문제될 때 증거와 증거를 잇는 최선의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긴즈부르그-2017a 2017b-의 추론적 패러다임 이나 실마리 찾기 방법이 대표적이다. 그랜디의 이례적 정상 이라는 개념도 같은 맥락으로서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비정상으로 보이고 사료의 양적 측면에서는 이례적으로 보이는 하층 종속 계급의 목소리가 행위자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정상이라는 입장이다-곽차섭, 2017b, 31).

끝으로 다섯째, 단순한 작은 이야기라는 비판에 대해 미시사적 스토리를 거시사회 현상을 바라보는 창(window)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미시사 방법론은 3 15의거와 같은 중대한 사회 현상을 다루는 사건사(생활사, 지역사 등과 함께 미시사가 적용되는 주요 분야 중 하나)에 더욱 잘 적용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나아가 우리의 연구는 특히 개인의 증언이라는 구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미시사의 일환을 이루는 구술사(oral history) 방법론에 대해서도 간략하나마 언급해둘 필요가 있다.

구술사 방법론은 양적이 아니라 질적 방법론으로서 문자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유용한 접근방법론이지만 주민과 지역, 여성, 장애인, 노인, 빈민, 월남인 등의 연구에도 널리 쓰일 수 있고, 그 약점은 양적 분석이나 문헌 분석으로 보완될 수 있다(김귀옥, 2000; 윤택림 외, 2006). 그리고 문서가 아닌 증언 등을 바탕으로 한 구전사나 구술사가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 일제의 위안부 사례에서 보듯이 그들의 증언 없이 생생한 역사를 복원할 길은 없다(곽차섭, 2017b: 35).

이 글은 이러한 미시사와 구술사의 방법론을 사용해 하상칠이라는 한 개인의 3 15의거 참가 증언과 그의 생애를 살펴봄으로써 3 15의거라는 거대한 사회적 사건을 특정 개인의 활동이라는 창(window)을 통해 재조명해봄과 동시에 역으로 사회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굴절시키고 왜곡시켰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장에서 연구 대상자의 프로필을 제시하고 그의 증언 녹취물을 『3 15의거증언록』에 수록된 그대로 전재한 후 증언의 내용에 대해 나름의 역사적 평가를 내린다. 장에서는 그의 증언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두 가지 의문을 다룬다.

첫 번째 의문은 그는 왜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적극 참가했던가 라는 것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 사회적 요인뿐만 아니라 개인에 고유한 요인도 최대한 살펴본다.

이어서 그는 왜 무려 50여 년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뒤늦게 증언을 하겠다고 나섰던 것일까라는 두 번째 의문을 다루는데 이를 통해 사회적 맥락이 개인의 삶과 생각에 미친 영향을 추적한다.

끝으로 장에서는 우리의 논지를 요약하고, 이 글의 한계를 지적한 후 향후 과제를 제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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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9 08:35

영화 '암살'의 배태지 밀양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천삼백만 국민을 사로잡은 영화 암살에서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이 처음 만난 백범 김구에게 던진 말이다.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 가을비가 축축이 내리던 어느 날 우리는 선생과 선생 동지들의 숨결을 느껴보기 위해 밀양을 찾았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최필숙 선생의 안내로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비롯해 영남루에 있는 친일매국자 박춘금의 행적,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형장에서 절명한 스무네 살 청춘 최수봉 의사, 조국독립을 위해 서른한 살 젊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초산 김상윤 선생의 유적들을 찾았다.

가는 곳곳마다 밀양의 선열들은 우리를 고개 숙이게 했고 밀려오는 경외심만큼 부끄러움도 컸다.

 

 

밀양여행의 절정은 약산의 생가 터가 있는 한 작은 동네였다.

항일비밀결사였던 조선의열단 창단을 비롯해 조국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선열들이 소년시절을 함께 보낸 곳,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 일대의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전홍표, 황상규, 김원봉, 윤세주,,, 이름의 무게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민족독립운동의 표상들이 이 작은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는 사실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한 동네에서 11명의 독립공훈유공자가 탄생하다니? 과문한 탓이겠지만 어떤 역사에서도 이런 기적을 듣지 못했다.

자신들을 지켜주지도 못한 조국을 위해 생을 바친 선열들의 소년시절이 궁금했다. 오목조목 앉았을 크고 작은 집들과 어린 선열들이 뛰어다녔던 좁은 길들이 궁금했다. 질문과 설명이 오갔고, 설명을 들을수록 우리의 동공은 커져만 갔다.

 

<석정 윤세주 선생이 대륙으로 떠나기 전날 이곳에서 세살 난 아들의 몸을 씻겨주었다>

 

밀양읍성의 해자였다는 마을 앞 좁은 하천에도 가을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소년 김원봉이 동무들과 미역을 감고 놀았다는 곳. 석정 윤세주가 조국독립을 위해 대륙으로 떠나기 전날, 마지막으로 세 살 난 아들의 몸을 씻겨주었던 곳이다.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한 밀양사람 석정의 유해는 중국 땅 열사능원에 안치되어있다.

어린 아들과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떠났던 서른한 살 선생의 비장함을 생각하니 목구멍 저 밑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눈시울을 붉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 찬란한 역사의 현장은 이야기에 머물 뿐 아직 초라했고, 약산 생가 터에 들어선 작은 상가건물에는 임차인을 찾는 현수막이 빗속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역사 배인 장소는 도시의 보석

 

도시의 가치가 변하고 있다. 깨끗하고 높은 새 건물에 만족하던 시대에서 낡고 보잘 것 없더라도 뭔가를 기억해서 회상하게 해주는 건물이 각광 받는 시대로 변했다. 도시와 건축의 가치가 양적인 것에서 질적인 것으로 달라졌다는 의미다.

이 가치는 역사의 무게가 전하는 이야기의 힘(storytelling)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지난 시간이 남긴 기억을 문화자산으로 승화시킨 인간만의 진보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와 서대문형무소 같은 역사의 현장이나 문경새재처럼 한 시대의 표상적인 장소를 기념한 것이 그 사례다.

이런 노력으로 되살아난 장소는 도시재생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하고 관광자원이 되기도 하며 지역의 문화중심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내이동 이 작은 동네는 역사도시 밀양에게 보석과도 같은 곳이다.

문화자원보존지구로 지정해 재탄생시키도록 밀양 시에 권한다.

아직 큰 건물이 들어서지 않아 경제적 부담도 적은 편이다. 식민시대 선열들의 삶과 기개를 보여주기에 이만한 장소는 없다. 수준 높은 역사학습장으로서도, 밀양의 도시재생과 문화관광지로서도 충분한 공간이다.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화될 때 가치가 크기마련인데 영화의 소재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조건도 좋다.(최근 영화배우 송강호가 촬영 중이라고 밝힌 영화 '밀정'도 이곳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건물과 장소는 시간과 삶의 변화에 따라 바뀐다. 과거의 것은 대부분 사라져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있었던 그 시간과 이야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지나간 시간 속에 사라진 공간 속에 감추어져 있다.

장소가 알고 있는 그 시간과 이야기는 인간의 탐구심과 감성으로 살려낼 수 있다.

사라진 것들을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려낼 것인가? 그것은 현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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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00:00

진해 충의동 유곽이야기

진해 충의동 유곽이야기

- 진해에 유곽이 있었다는 사실은 문헌을 통해 익히 들었지만, 실제 건물의 존재유무에 대해서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터라 언제가는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했읍니다.

- 얼마전 진해 근대건축 현황조사를 하던중에 충의동에 있는 한 건물이 조사하던 중, 유곽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물을 발견하였읍니다. 마침 할머니가 계셔서 집의 내력을 알아본 결과, 일제시대에 청루라는 유곽이었는데, 해방후 불하를 받아서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읍니다.

- 현재 1층은 주택으로 사용하고, 2층은 애들이 크면 사용할 계획으로, 지금은 비워둔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읍니다. 2층을 꼭 보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공개를 꺼려해 외관 모습만 담아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진해유곽의 역사

- 진해 유곽의 역사는 시가계획에 따라 연작정, 현재의 충의동에 획정되었다고 합니다. 연작정은 진해와 창원을 있는 기차역인 진해역에서 동남쪽으로 10정 정도 떨어진 곳으로 12곳의 유곽이 있었다고 합니다.

- 접대부는 70명 정도였으며, 이 중 50여 명이 일본 구마모토현과 나가사키현의 여성들이었고, 20명은 조선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 이들은 모두 기생과 접대부를 동시에 겸하는 이매감찰로 1시간에 2원, 1박에는 7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요리집의 하루 매상이 6원에서 10원 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 이용대상자는 당시 신시가지 공사와 마천수원지 공사장의 노동자가 2천여명 이상이 됨에 따라 매춘부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유곽을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1930년 '일본유람사'는 아예<전국유곽안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유곽을 관광상품화 하였다고 합니다. 즉 철도역이 있는 곳과 일본인 거류지가 있는 곳이 유곽여행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 당시 진해에 있던 유곽의 이름은 녹도루, 취월루, 금시루, 옥천루, 청천루, 진해루 등이 있었으며, 이러한 유곽은 현재는 모두 개축되어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진해지역 일본인 생활상/ 창원대 김선희 석사논문 에서 발췌

외관모습1 :  4채의 집이 나란히 붙어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나가야 형태를 띠고 있다.

외관모습2 :  각 주호당 1개의 현관을 가지고 있으며, 현관의 개별 수리에 의해 각양각색이지만 2층 판벽에 의한 외벽마감과 창호는 훼손되지 않고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외벽모습 :  2층 지붕과 1층 처마지붕기와는 최근에 보수되어있다.

- 좌측의 집은 1층 외벽마감이 적벽돌로 보수공사를 하여 인접가구와 다른 모습이다.

- 2창호의 덧문이 각각 다른모습이다. 판재, 철판을 오려 붙인 모양이 이채롭다. 2층 상단의 목재가구와 회벽칠(지금은 페인트 마감) 부분은 원형 그대로 이다.

- 2층 외벽은 비늘 목재판벽 마감이 잘 살려져 있으나, 1층 부분은 제각각 적벽돌, 시멘트 모르터, 페인트 마감등으로 되어 있지만, 본래의 원형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 특히 우측에 면한 가구는 2층 목제 창호와 난간살 등이 원형 그대로 인 듯 하다.

왜 근대건축인가?

- 근대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근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유효한 것이 근대건축물이다.

- 유곽건물 하나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주거상황, 건축기술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수 많은 실타래들이 낡은 건물에 숨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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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모 2015.09.19 01: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ㅠㅠㅠㅠㅠㅠ 우리집 위쪽으로 가면 있는 집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 허...지금 살고있는집도 일본집이엿다던데 유곽이엇다니 ㅠㅠ 잘보고갑니더

2012.05.02 00:00

1930년 3월 10일 진해 대화재와 덕환관음사 이야기

얼마전 진해소사마을 '김씨박물관' 김현철관장님이 책을 한권 건네 주었다.  자기는 일본말도 잘 모르고, 신선생이 진해에 관심이 많으니 보라고 준 일본책의 제목은 <ぁる日韓歷史の旅>이였다. 책의 출판연도는 1993년이며, 출판사는 朝日選書에서 문고집판으로 622번에 해당되는 책이었다. 작가는 竹中友康이라는 사람으로, 군항도시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서 직접 진해에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여 일제강점시기의 진해역사를 정리한 책이었다.          나 역시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대충 보면서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있어서 소개를 하고자 한다. 현재에 진해 천리교 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德丸觀音(덕환관음)본당과 '진해 대화재'에 관한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화재의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82년전인 1930년 3월 10일 오후2시였다. 이 날은 일본육군기념일로 조선진해요항부단공장(鎭海要港部段工場)에서 진해요항사령부가 주관하는 육군기념축화회를 개최하면서, 군사영화를 관내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상영하던 중 일어난 화재였다. 당시 진해공립심상고등보통학교 소학년생 54명과 보호자 3명, 그리고 유아47명이 참사로 사망하고, 중경상자가 백여명 발생한 대화재였다. 당시에 250여명이 관람한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화재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에 기사화 될 정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덕환관음은 당시 화재로 인한 희생자 107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百七靈供養之塔>을 <陸軍大將伯爵東鄕平八郞書>육군대장의 이름으로 추모비를 덕환관음에 세웠다고 한다. 이 비석은 현재 덕환관음사 경내에 있다고 훼손이 심해서 옮겨져 있다고 한다.

 

(전면부와 좌측면의 증축부분만 철거하면 원형을 살릴 수 있는 상태이다.)

덕환관음사의 건축적 가치는 복원하고 관리하기에 따라서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일본식 사찰은 군산에 있는 동국사이다. 일제강제합병(1910년) 이후 일제치하(36년)에서 전국에 일본식 사찰이 500여 개가 만들어졌으나, 모두 없어지고 유일하게 남은 것이 군산의 동국사(주지: 종명스님)라고 한다. 그런데 진해에 근대기에 역사적 사건의 애환을 오롯히 안고 있는 덕환관음사가 있다. 건축적인 특징을 보자면 일본식 사찰 특유의 공포(처마의 목구조장식)의 디테일이 원형그대로 잘 남아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개보수로 인해 본래의 원형이 훼손된 상태이긴 하지만, 잘 복원만 한다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일본식사찰 2호로서의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군산의 동국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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