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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19 08:35

영화 '암살'의 배태지 밀양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천삼백만 국민을 사로잡은 영화 암살에서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이 처음 만난 백범 김구에게 던진 말이다.

밀양사람 약산 김원봉,,, 가을비가 축축이 내리던 어느 날 우리는 선생과 선생 동지들의 숨결을 느껴보기 위해 밀양을 찾았다.

밀양독립운동사연구소 최필숙 선생의 안내로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을 비롯해 영남루에 있는 친일매국자 박춘금의 행적,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형장에서 절명한 스무네 살 청춘 최수봉 의사, 조국독립을 위해 서른한 살 젊은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던 초산 김상윤 선생의 유적들을 찾았다.

가는 곳곳마다 밀양의 선열들은 우리를 고개 숙이게 했고 밀려오는 경외심만큼 부끄러움도 컸다.

 

 

밀양여행의 절정은 약산의 생가 터가 있는 한 작은 동네였다.

항일비밀결사였던 조선의열단 창단을 비롯해 조국독립을 위해 생을 바친 선열들이 소년시절을 함께 보낸 곳, 밀양시 내이동 901번지 일대의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전홍표, 황상규, 김원봉, 윤세주,,, 이름의 무게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민족독립운동의 표상들이 이 작은 동네에서 함께 자랐다는 사실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한 동네에서 11명의 독립공훈유공자가 탄생하다니? 과문한 탓이겠지만 어떤 역사에서도 이런 기적을 듣지 못했다.

자신들을 지켜주지도 못한 조국을 위해 생을 바친 선열들의 소년시절이 궁금했다. 오목조목 앉았을 크고 작은 집들과 어린 선열들이 뛰어다녔던 좁은 길들이 궁금했다. 질문과 설명이 오갔고, 설명을 들을수록 우리의 동공은 커져만 갔다.

 

<석정 윤세주 선생이 대륙으로 떠나기 전날 이곳에서 세살 난 아들의 몸을 씻겨주었다>

 

밀양읍성의 해자였다는 마을 앞 좁은 하천에도 가을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소년 김원봉이 동무들과 미역을 감고 놀았다는 곳. 석정 윤세주가 조국독립을 위해 대륙으로 떠나기 전날, 마지막으로 세 살 난 아들의 몸을 씻겨주었던 곳이다.

태항산 전투에서 전사한 밀양사람 석정의 유해는 중국 땅 열사능원에 안치되어있다.

어린 아들과 젊은 아내를 남겨두고 떠났던 서른한 살 선생의 비장함을 생각하니 목구멍 저 밑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었다. 눈시울을 붉히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 찬란한 역사의 현장은 이야기에 머물 뿐 아직 초라했고, 약산 생가 터에 들어선 작은 상가건물에는 임차인을 찾는 현수막이 빗속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역사 배인 장소는 도시의 보석

 

도시의 가치가 변하고 있다. 깨끗하고 높은 새 건물에 만족하던 시대에서 낡고 보잘 것 없더라도 뭔가를 기억해서 회상하게 해주는 건물이 각광 받는 시대로 변했다. 도시와 건축의 가치가 양적인 것에서 질적인 것으로 달라졌다는 의미다.

이 가치는 역사의 무게가 전하는 이야기의 힘(storytelling)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지난 시간이 남긴 기억을 문화자산으로 승화시킨 인간만의 진보이기도 하다. 아우슈비츠와 서대문형무소 같은 역사의 현장이나 문경새재처럼 한 시대의 표상적인 장소를 기념한 것이 그 사례다.

이런 노력으로 되살아난 장소는 도시재생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하고 관광자원이 되기도 하며 지역의 문화중심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내이동 이 작은 동네는 역사도시 밀양에게 보석과도 같은 곳이다.

문화자원보존지구로 지정해 재탄생시키도록 밀양 시에 권한다.

아직 큰 건물이 들어서지 않아 경제적 부담도 적은 편이다. 식민시대 선열들의 삶과 기개를 보여주기에 이만한 장소는 없다. 수준 높은 역사학습장으로서도, 밀양의 도시재생과 문화관광지로서도 충분한 공간이다. 과거의 이야기가 현재화될 때 가치가 크기마련인데 영화의 소재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조건도 좋다.(최근 영화배우 송강호가 촬영 중이라고 밝힌 영화 '밀정'도 이곳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건물과 장소는 시간과 삶의 변화에 따라 바뀐다. 과거의 것은 대부분 사라져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있었던 그 시간과 이야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만 않을 뿐 지나간 시간 속에 사라진 공간 속에 감추어져 있다.

장소가 알고 있는 그 시간과 이야기는 인간의 탐구심과 감성으로 살려낼 수 있다.

사라진 것들을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려낼 것인가? 그것은 현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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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30 00:00

진해 충의동 유곽이야기

진해 충의동 유곽이야기

- 진해에 유곽이 있었다는 사실은 문헌을 통해 익히 들었지만, 실제 건물의 존재유무에 대해서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터라 언제가는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했읍니다.

- 얼마전 진해 근대건축 현황조사를 하던중에 충의동에 있는 한 건물이 조사하던 중, 유곽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건물을 발견하였읍니다. 마침 할머니가 계셔서 집의 내력을 알아본 결과, 일제시대에 청루라는 유곽이었는데, 해방후 불하를 받아서 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읍니다.

- 현재 1층은 주택으로 사용하고, 2층은 애들이 크면 사용할 계획으로, 지금은 비워둔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읍니다. 2층을 꼭 보고 싶었는데 할머니가 공개를 꺼려해 외관 모습만 담아서 소개를 하고자 합니다.

진해유곽의 역사

- 진해 유곽의 역사는 시가계획에 따라 연작정, 현재의 충의동에 획정되었다고 합니다. 연작정은 진해와 창원을 있는 기차역인 진해역에서 동남쪽으로 10정 정도 떨어진 곳으로 12곳의 유곽이 있었다고 합니다.

- 접대부는 70명 정도였으며, 이 중 50여 명이 일본 구마모토현과 나가사키현의 여성들이었고, 20명은 조선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 이들은 모두 기생과 접대부를 동시에 겸하는 이매감찰로 1시간에 2원, 1박에는 7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요리집의 하루 매상이 6원에서 10원 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 이용대상자는 당시 신시가지 공사와 마천수원지 공사장의 노동자가 2천여명 이상이 됨에 따라 매춘부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유곽을 하나의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1930년 '일본유람사'는 아예<전국유곽안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유곽을 관광상품화 하였다고 합니다. 즉 철도역이 있는 곳과 일본인 거류지가 있는 곳이 유곽여행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 당시 진해에 있던 유곽의 이름은 녹도루, 취월루, 금시루, 옥천루, 청천루, 진해루 등이 있었으며, 이러한 유곽은 현재는 모두 개축되어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진해지역 일본인 생활상/ 창원대 김선희 석사논문 에서 발췌

외관모습1 :  4채의 집이 나란히 붙어있는 전형적인 일본식 나가야 형태를 띠고 있다.

외관모습2 :  각 주호당 1개의 현관을 가지고 있으며, 현관의 개별 수리에 의해 각양각색이지만 2층 판벽에 의한 외벽마감과 창호는 훼손되지 않고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외벽모습 :  2층 지붕과 1층 처마지붕기와는 최근에 보수되어있다.

- 좌측의 집은 1층 외벽마감이 적벽돌로 보수공사를 하여 인접가구와 다른 모습이다.

- 2창호의 덧문이 각각 다른모습이다. 판재, 철판을 오려 붙인 모양이 이채롭다. 2층 상단의 목재가구와 회벽칠(지금은 페인트 마감) 부분은 원형 그대로 이다.

- 2층 외벽은 비늘 목재판벽 마감이 잘 살려져 있으나, 1층 부분은 제각각 적벽돌, 시멘트 모르터, 페인트 마감등으로 되어 있지만, 본래의 원형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 특히 우측에 면한 가구는 2층 목제 창호와 난간살 등이 원형 그대로 인 듯 하다.

왜 근대건축인가?

- 근대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근대의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가장 유효한 것이 근대건축물이다.

- 유곽건물 하나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과 주거상황, 건축기술 등을 가늠할 수 있는 수 많은 실타래들이 낡은 건물에 숨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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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모 2015.09.19 01: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ㅠㅠㅠㅠㅠㅠ 우리집 위쪽으로 가면 있는 집인데 ㅋㅋㅋㅋㅋㅋㅋㅋ 허...지금 살고있는집도 일본집이엿다던데 유곽이엇다니 ㅠㅠ 잘보고갑니더

2012.05.02 00:00

1930년 3월 10일 진해 대화재와 덕환관음사 이야기

얼마전 진해소사마을 '김씨박물관' 김현철관장님이 책을 한권 건네 주었다.  자기는 일본말도 잘 모르고, 신선생이 진해에 관심이 많으니 보라고 준 일본책의 제목은 <ぁる日韓歷史の旅>이였다. 책의 출판연도는 1993년이며, 출판사는 朝日選書에서 문고집판으로 622번에 해당되는 책이었다. 작가는 竹中友康이라는 사람으로, 군항도시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서 직접 진해에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여 일제강점시기의 진해역사를 정리한 책이었다.          나 역시 일본어를 잘 모르지만 대충 보면서 눈에 띄는 건물이 하나있어서 소개를 하고자 한다. 현재에 진해 천리교 교당으로 사용되고 있는 德丸觀音(덕환관음)본당과 '진해 대화재'에 관한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화재의 발단은 지금으로부터 82년전인 1930년 3월 10일 오후2시였다. 이 날은 일본육군기념일로 조선진해요항부단공장(鎭海要港部段工場)에서 진해요항사령부가 주관하는 육군기념축화회를 개최하면서, 군사영화를 관내 학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상영하던 중 일어난 화재였다. 당시 진해공립심상고등보통학교 소학년생 54명과 보호자 3명, 그리고 유아47명이 참사로 사망하고, 중경상자가 백여명 발생한 대화재였다. 당시에 250여명이 관람한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대화재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에 기사화 될 정도 엄청난 사건이었다.

덕환관음은 당시 화재로 인한 희생자 107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百七靈供養之塔>을 <陸軍大將伯爵東鄕平八郞書>육군대장의 이름으로 추모비를 덕환관음에 세웠다고 한다. 이 비석은 현재 덕환관음사 경내에 있다고 훼손이 심해서 옮겨져 있다고 한다.

 

(전면부와 좌측면의 증축부분만 철거하면 원형을 살릴 수 있는 상태이다.)

덕환관음사의 건축적 가치는 복원하고 관리하기에 따라서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있다는 일본식 사찰은 군산에 있는 동국사이다. 일제강제합병(1910년) 이후 일제치하(36년)에서 전국에 일본식 사찰이 500여 개가 만들어졌으나, 모두 없어지고 유일하게 남은 것이 군산의 동국사(주지: 종명스님)라고 한다. 그런데 진해에 근대기에 역사적 사건의 애환을 오롯히 안고 있는 덕환관음사가 있다. 건축적인 특징을 보자면 일본식 사찰 특유의 공포(처마의 목구조장식)의 디테일이 원형그대로 잘 남아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개보수로 인해 본래의 원형이 훼손된 상태이긴 하지만, 잘 복원만 한다면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일본식사찰 2호로서의 가치를 부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군산의 동국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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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5 00:00

진해

‘진해’ 지명에 대한 글입니다.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통합 이전 창원시(옛 의창군)와 옛 마산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원’을 ‘진해군’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1908년 행정구역변경 때 진해군이 현재의 진해지역이 포함된 웅천군과 함께 창원부로 통합되면서 ‘진해’라는 지명은 사라졌습니다.

2년 뒤인 1910년, 창원부가 마산부로 바뀌면서 이 일대도 마산부에 속했다가 1912년 지금의 진해군항과 배후도시였던 신도시 지역을 ‘마산부 진해면’으로 결정합니다.
4년 동안 이름이 없어졌던 진해는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행정구역명칭으로 되살아난 것입니다.
진동 쪽의 지명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져 되살아 난 것입니다.

이렇게 다시 지명으로 역사에 나타난 '진해'는 1914년 3월에 '창원군 진해면'으로 바뀌었고, 1931년 4월 1일 진해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진해가 독립 시로 승격된 것은 해방 10년 후인 1955년 9월 1일이며, 그때부터 진해는 한국 최고의 군항도시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하지만 2010년 7월 1일 마산 창원과 통합되면서 창원시 진해구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지난 100여 년 간 ‘진해’라는 명칭이 겪은 부침이 참 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정구역명칭의 변화와 달리, 일본군부에서는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시기부터 거제군과 웅천군 및 고성군까지를 포함한 넓은 해역 전체를 ‘진해만’이라고 불렀습니다.

빠르게는 1898년 육군대신 가쓰라의 문서와 1903년 해군작전계획서에서도 이 해역을 ‘진해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진해현’ ‘진해군’으로 사용되고 있었던 명칭이기도 했지만, 이 해역이 러시아 함대를 격멸시킬 수 있는 해군근거지라는 뜻에서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의 ‘진해(鎭海)’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조선시대 사용했던 진동지역의 진해는 우리 선조들이 만든 명칭이었지만, 지금 사용하는 ‘진해’는 일본군부가 지은 것이어서 대한민국에 어울리는 지명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일본인 죽국우강(竹國友康)의 저서 『ある日韓歷史の旅』에서 “일본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라, 해방 후에 실은 진해라는 이름은 바꾸어야 되는 것이었으나.......”라며 진해라는 지명 사용에 아쉬움을 나타내었습니다.

유명한 도시사학자 손정목 교수도 황정덕 회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라 진해라는 지명은 해방 후 바뀌었어야 했다’ 고 합니다.

일견 수긍되는 측면도 있지만, '진해'라는 지명이 지금의 진해와 멀지 않은 진동지역에서 조선시대부터 사용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최근에 “진해시민으로 살고 싶다”면서 통합창원시에서 진해가 분리되기를 원하는 주장도 나왔는데, 생명체처럼 변하는 것이 도시니 미래에 진해는 다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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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복산 2012.01.25 10:3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와 “일본이 제멋대로 붙인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진해현이 부활된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진해를 창원시에서 분리하자는 이야기는 이름에 기인하기보다는 진정한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치단위를 작게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규모의 효율성도 중요할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주민들이 참여하고 스스로 자기가 사는 지역을 가꾸어 가는 자치제도의 정착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진해사는 사람도 잘 모르던 진해이야기를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 허정도 2012.01.25 11: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설령 일본의 뜻대로 진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도 조선시대부터 사용했던 진동지역의 진해에서 따온 것은 분명합니다.

  3. 노상완 2012.01.25 13:0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진동면사무소 옆에는 조선시대의 진해현청이 아직 남아있는것을 보았습니다.
    바다를 다스린다는 의미의 진해... 욕심낼만한 이름이군요......

    • 허정도 2012.01.25 17:12 신고 address edit & del

      해군기지가 있는 도시 명칭으로는 최고의 이름이 진해입니다. '바다를 진압하다' 대단한 이름 아닙니까?

  4. 실비단안개 2012.01.25 21: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진해시민 -

    • 허정도 2012.01.25 22:28 신고 address edit & del

      진해시민 '실비단안개'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올 한해 좋은 글 많이 쓰시고 몸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11.12.28 00:00

강탈당한 진해와 두 지도자


지난 11월 23일 올린 글에서처럼,      <2011/11/23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100여년 전 진해의 중평벌판 그 평화로웠던 마을에
일본의 군대가
청천벽력처럼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부랑자 신세가 된 당시 진해사람들의 정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전후해 민족의 최고지도층이 보여준 극단적인 두 사례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민들의 아픔에 동참한 사례로 매천 황현에 대한 이야깁니다.

당시 진해지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을 두고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倭人勒奪慶南之鎭海灣………定期軍港………熊川距鎭海數百里而亦捲入港域吏民漁散如逢亂離  ; 웅천에서 수백리의 항역이 군항으로 포함되어 이속도 농민도 고기잡이도 모두 흩어져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웅천에서 수백리’라고 표현한 것은 웅천에서 거제도 끝까지에 이르는 진해만 군항지역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을사조약 1년 후인 1906년에 쓴 글입니다.
이등박문의 강압적인 통감정치가 횡횡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매천의 애국심과 기개가 더욱 잘 드러납니다.



둘째는 정반대의 경우입니다.

일본군부가 진해 11개 마을주민들을 내쫓기 직전의 일로, 왕족이자 내부대신이었던 향운 이지용이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진해지역 토지강제수용에 대한 안건이 고종황제에게 상주(上奏)되기 이틀 전에 경상남도관찰사서리 진주군수 민병성에게 훈령을 내렸습니다.
 
「진해만을 우리나라 군항으로 예정하는 사항은 이미 정부의 협의를 거쳤으니 조속히 해당지역의 각 군수로 하여금 該 지방민에게 주지케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고종황제가 최종 결정도 하기 전에 훈령을 내린 것은 힘없는 황제를 능멸하고 일본을 향한 자신의 적극적인 충성심을 과시한 사악한 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황제의 재가가 내린 다음날인 8월 22일에는 경상남도관찰사서리에게,
「………본 훈령이 도달되면 조속히 당해 만(灣) 부근 각 군수에게 별칙(別飭)하여 적선 내 토지의 매매·교환·양여·전당·대차를 일절 엄금하라. 만약에 사호(絲毫)라도 소우(疏虞)함이 있을 때는 해당 각 군수는 중경(重警)에 처해질 것이고 귀관 또한 그 책임을 면치 못할 것이니 충분한 주의를 가하라」는 훈령을 내렸습니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싶었는지, 이틀 후인 8월 24일에는 진해군수·거제군수·웅천군수에게도 같은 취지의 훈령까지 내렸습니다.

일제에 대한 자발적이고도 적극적인 충성으로, 일본군부가 추진하는 진해군항 건설에 진력을 다했습니다.

이지용은 1904년 2월 23일 러일전쟁 와중에서 굴욕적으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를 작성 서명하였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을사오적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세월이 흐른 후,,,,
매천 황현은 한일병합 사실을 전해 듣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로써 망국의 한을 풀었고,
이지용은 훈1등 백작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영화를 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매천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민족의 사표가 되었고,
이지용은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정하였고 그가 남긴 재산은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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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 [감춰진 도시이야기] -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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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00:00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일찍이 제포 왜관 설치 후 삼포왜란이 발발하였고 그로부터 100년도 못돼 임진왜란을 겪은 진해지역이 다시 300여 년 만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 군항도시가 되었습니다.
넓지 않은 한 지역이 일본이라는 인접한 나라와 이처럼 모진 악연을 이어오다가, 해방 후부터는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이 되어 지금에 이른 도시가 진해입니다.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삼은 것은 1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청일(1894-5년) 러일(1904-5년) 두 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의 좌세보(佐世保, 사세보)와 북쪽의 진해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진해가 군항이 되자 일본의 한 민간단체는 「일본의 한국경영 가운데 이보다 중한 것이 없다. 한일의정서나 보호조약도 이보다는 못하고 통감설치나 철도점유도 이보다는 못하며 두 군항(진해만·영흥만)의 획득이 최대 환영이다」라고 극도의 만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정부가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것은 1904년 2월 10일이었지만 일본이 실질적인 전투행위에 들어간 것은 2월 5일이었습니다.

이 날 일본의 군사본부였던 대본영은 「연합함대는 황해방면의 러시아함대를 격멸하고 육군의 선유부대(先遺部隊)를 호송할 것. 제3함대는 진해만을 점령하고 조선해협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일본해군 제3함대가 진해만을 점령한 것은 2월 6일부터 7일 아침까지였고 이때부터 창원·웅천·거제 각 군은 사실상 일본해군의 세력권에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2월 23일자로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4조 「일본의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거제도와 진해만뿐만 아니라 이 나라 해안을 온통 일본해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강제가 아닌 한일 두 나라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진해만을 점령한 일본해군이 가근거지(假根據地)로 마련한 곳은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였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진해만’은 다음 그림에서 나타낸 지역으로 웅천·창원·칠원·진해·고성 등 각 군의 일부와 거제도 전역에 걸친 해역일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미 그때부터 송진포항의 규모가 작아 영구적인 군항으로 부적합함을 알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였습니다.
때는 미국이 한반도를 사실상 일본에게 넘기기로 약속한 소위 가쓰라-테프트 밀약(7월 29일)과 치욕적인 을사조약(11월 17일)이 체결되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진해만 내해에 위치한 현 진해지역의 막대한 땅을 수용하겠다는 일본 측 요청이 한국정부에 전달된 것은 다음해인 1906년 7월이었습니다. 원산 영흥만과 함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통감 이등박문은 마치 진해군항을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였습니다.
그는 의정부참정대신 박제순에서 보낸 공문에서
「………귀국정부는 진해만과 영흥만을 군항으로 예정하고………」
라며 한국정부에서 진해군항을 추진하는 양 표기하면서
「………군사시설은 일본에서 하는데 한국의 군비수준이 높아질 때 까지 사용할 것」
이라고 위장하였습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군항과 신도시에 대한 민심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때 ‘군항’으로 예정된 지역의 면적은 4,388.8정보(43.52㎢, 1,300여만 평)였습니다.
범역은 1973년 7월에 창원군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되기 이전의 진해시 전역이었으며 그 중에서 시가지면적은 약 12만평이었습니다. 거제도의 장목면과 하청면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군항과 신도시 건설 때문에 철거대상이 되었던 마을은 서부지역의 현동(縣洞)․도만(道滿)리․도천(道泉)리․여명(余明)리․중평(中平)리․좌천(佐川)리․신좌천(新佐川)리․안곡(安谷)리․속천(束川)리 등 9개 마을과 동부지역의 하구․중동 등 2개 마을, 모두 11개 마을이었습니다.
11개 마을의 가구 수는 390호, 쫓겨나야 했던 사람은 2천여 명이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에는 일본육군연병장을 둘 예정이었으나 나중에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의 위치에 대해서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하구는 자은동, 중동은 석동과 하구마을 사이라고 했습니다)

군항으로 예정된 1,300여만 평의 땅은 한국정부에 의해 매수와 철거 조치를 끝낸 후 곧장 일본해군의 관할 아래 들어갔고, 이때부터 진해는 해군기지와 군항도시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지금부터 104년 전인 1907년, 진해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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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6 00:00

아! 경화동,,,


100여년 전, 일본군부에 의해 강제로 조성된 진해신도시는 식민지 시대 여느 도시처럼 기존 시가지에 일본인이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름다운 해안·비옥한 농토와 함께 평화롭게 살던 마을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만든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의 뒤에는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한국인들의 신도시 ‘경화동’이라는 음지가 있었습니다.

진해 현지조사단이 해군대신 재등실(齋藤實) 앞으로 보낸 ‘진해군항시설지 실지답사보고서’라는 서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진수부·공창·수뢰단·화약고·대포발사장·병원·연병장·관사·시가·정차장·묘지·학교 등 제반시설의 위치와 규모를 결정하고 그 이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보고서 끝에 「실지조사를 바탕으로 각 조사원의 소견이 일치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라며 6개 항을 붙여 놓았는데 그 4번째에 ‘한국인 처리’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내용은 「한국인을 일본인과 함께 살게 하는 것은 위생 등의 문제로 불가하다, 격리하는 것이 맞다, 격리시킬 위치는 신시가지 동쪽에 있는 덕산방면이 좋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덕산방면’은 최종결정 때 신도시와 덕산 사이의 중간지점(속칭 한일거리)으로 바뀌었습니다.
시가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지점에 조선인 거주지를 만들면 신도시조성과정에 필요한 노동력공급이 불편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정책에 의해 일제는 1907년 3월 강제적 수단을 동원하여 마을을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값싼 지대에 불만을 품은 한국인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 땅값지불은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 속에 진행되었습니다.

진해에 일본군이 들어오는 과정에서 진해주민들의 저항이 많았습니다.
도만이 개(도만포) 부근에서 측량하던 일본해군을 쫓아내기도 하고(1905. 5), 토지보상비를 거부하기도 하고(1906. 10), 한국인 소유의 산림을 집어 먹으려는 마산부윤 아들의 횡포를 돌리(석동)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막아내기도 했습니다(1910).
하지만 힘 없는 주민들이 일본군부의 강제력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11개 마을의 390여 호 2천여 명의 한국인들은 조상 대대로 일구고 살았던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일본군들이 이미 준비해둔 신도시 동쪽 약 2.5키로 지점의 ‘한일거리’라고 불렀던 벌판에 강제로 집단이주 당했고, 이들에게는 가구당 45평 정도로 구획된 택지를 받았습니다.
격리당한 한국인들의 땅 한일거리는 이후에 ‘경화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한국인들의 집단거주지역이 되었습니다.

경화동에는 약 4m내외의 좁은 도로가 격자형으로 배치되었고, 아래 그림처럼 길 중간 중간에 소방 목적의 7개 공터가 주어졌습니다.

이 공터는 후에 일본의 군사시설(비행장) 때문에 열지 못하게 된 풍호동 ‘풍덕개장’이 옮겨와 매 3일과 8일에 열리는 5일장 장터로도 사용되었습니다.
7개의 공터는 각각 장터로서의 기능이 달랐는데 ①은 나무전, ② 8일 싸전, ③ 3일 일용잡화, ④ 8일 일용잡화, ⑤ 3일 고기전, ⑥ 3일 싸전, ⑦ 8일 고기전이 열렸습니다.
이런 전통으로 경화동에는 지금도 5일장이 열리며 상설재래시장도 열리고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1945년에 경화동을 찍은 항공사진과 현재 위성사진입니다.

식민지 도시에서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생활공간이 격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진해의 경우처럼 기존마을 주민들을 내쫓아 격리시킨 후 그곳에 지배자만의 도시를 건설한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경화동’은 비극적인 공간입니다.

격리명분이 위생문제였다고 하지만 사실은 치안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교육에 있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차별화하는 일본의「내선별학(內鮮別學)」통치원리로부터 온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거기다가 군사기밀이 필요한 군항도시라는 점도 고려되었을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강제력으로 건설한 진해신도시는 ‘빼앗은 자의 도시’였습니다.
경화동은 쫓겨나간 한국인들의 격리구역, 즉 ‘빼앗긴 자의 도시’였습니다.
마치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한 뒤 원주민들을 격리시킨 ‘인디언보호구역’과 같았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일제가 경화동의 위치를 신도시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즉 ‘자신들을 위해 일하러 오기에 적절한 거리’에 둠으로써 지배자로서의 도시공간배치를 시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비극의 땅, 진해 경화동.
국운이 꺼져가던 이 나라의 처참한 역사가 고스란히 녹아든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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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나리봇짐 2011.10.26 01:1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희 고모가 경화동에 지금도 살고 계시죠.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런 내막이 있었군요. 슬픈 동네 경화동..

2011.09.28 00:00

누가 이 나무를 모르시나요?

<진해 중원로터리 팽나무>

일제에 의해 계획된 진해 신도시의 한복판 중원로터리에는 늙은 팽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나무입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해군은 이 나무 아래서 행사도 많이 했습니다.(1930년대 사진)


1950년대 중반에 제 수명을 다해 고사(枯死)했는데 당시 수령이 1,200여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팽나무는 신라, 고려, 조선 세 왕조를 지켜본 진해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만합니다.

이 늙은 노거수(老巨樹)는 어디에서나 불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1899년 일본해군에서 제작한 「마산포 및 부근」이라는 지도에 의하면 당시 웅천군 웅중·웅서 양면이 자리 잡은 진해신도시지역은 넓은 평야였습니다.
북쪽은 장복산이 막아주고 남쪽으로는 야트막한 산과 오목조목한 해안을 낀 살기 좋고 아름다운 지역으로 ‘중평’이라는 이름을 가진 들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9개 마을이 들판을 사이에 두고 오손도손 살고 있었는데, 이들 2천 여명을 벼락같이 내쫓고 만든 것이 진해신도시입니다.
하지만 이 늙은 팽나무는 쫓겨난 마을주민들과 달리, 진해 신도시의 중심에 살아 남아 신도시의 랜드 마크 역할까지 했습니다.

중평마을에서의 팽나무 위상을 확인해보기 위해 팽나무의 위치와 일본인들에 의해 사라진 9개 마을의 위치를 추정해보았습니다.

해방 2년 후인 1947년 7월에 일본식 동리명칭을 우리 식으로 다시 고치는 작업이 있었고, 1955년 8월 진해읍이 ‘진해시’로 격상될 때 다시 동명조정이 있었습니다.
이때 위 9개 마을의 명칭이 대부분 되살아났습니다.
현동·도만·도천·중평(이상 중앙동)·안곡·속천(이상 태평동)이 법정동으로 되었고, 여명리(余明里)의 ‘余’자와 통자되는 ‘餘’를 취하고 좌천리(左川里)의 ‘左’와 자음이 같은 ‘佐’를 취해서 여좌동(餘佐洞)이 되었습니다.

이 동(洞)들의 명칭을 정할 때 옛 마을 위치에 맞추어 결정했는지의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를 살펴보았더니, 창원대 민긍기 교수는 옛위치가 그대로 적용된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하지만 진해·웅천향토연구회 황정덕 회장의 견해는 달랐습니다.
군사지역 때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현재 동의 위치는 옛날 리(里)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2011년 8월 8일, 황정덕 회장에게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황정덕 회장이 쓴 『우리고장문화유적길잡이』에 실린 ‘옛 중평마을 일대 추상도’에도 도만리·도천리·여명리는 현재 도만동·도천동·여좌동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옛 이름을 가진 현재의 동과 팽나무를 함께 앉혀본 도면입니다.
황정덕 회장의 견해가 맞다고 볼 때, 당산나무였던 팽나무를 중평들판 중앙에 두고 각 마을들이 둘러 앉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거당한 마을주민들은 물론,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중평들판에 있어서 팽나무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만든 진해라는 일본인도시 한복판에 오랜 세월동안 9개마을주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팽나무가 있었던 겁니다.

뿐만아니라 이 나무 주변에 일본제국을 과시하는 시설들도 들어섰습니다.
러일전쟁기념탑과 진해신사를 비롯하여 진해역·진해우체국·진해면사무소 등이 그것들입니다.

신도시가 완성되고 정착된 1920년경의 도시전경인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도시중심에 앉은 중원광장 팽나무(화살표 방향)는 크기가 대략 폭 30m 높이15m 정도로 짐작되는 도시의 강력한 상징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엽서 4장을 연결해 만든 겁니다.
대정10년(1921년) 9월 3일자로 소인된 엽서라 1920년경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보시죠.

 


일본해군은 이 팽나무를 중원로터리 중심에 두면서 방사상(放射狀) 신도시 디자인의 기점으로 삼았습니다.
추정해 보면,
진해신도시를 설계하기 위한 사전현장조사과정에서 팽나무의 크기·모양·위치·앉은 높이를 비롯하여 나무에 얽힌 역사와 주민들과의 관계까지 충분히 조사 분석하였을 겁니다. 
그런 후, 팽나무가 앉은 위치에 맞추어 중원로터리를 배치한 후 북원광장, 남원광장과 크고 작은 도로들은 그에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설계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해신도시계획의 전체 틀은 바로 이 팽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 오래된 팽나무를 신도시계획의 모티브로 삼았을까요?

강제로 철거당한 마을의 당산나무였던 팽나무를 신도시의 중심기점으로 삼은 것은 작은 의미가 아닙니다.

당산나무단순히 나무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어 신목(神木)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산수를 베거나 해를 입히면 큰 재앙을 입게 되며 천재지변으로 나무가 죽거나 쓰러져도 마을 전체가 큰 화를 입는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당산나무는 마을주민들의 대소사를 치렀던 행사장으로, 때로는 지친 심신을 품어주는 휴식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마을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이런 나무를 남겨 도시설계의 모티브로 삼은 것을 두고 생태와 경관을 고려했다고도 볼 수 있고, 벌목에 대한 미신이 작용했다는 등 다양한 추측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급하게 토지를 수용했던 당시의 정황을 보면, 이런 이유보다는 군항건설과정에서 저지른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민심을 우려하여 선택한 수습책 아니었나 싶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내쫓긴 9개마을 주민들의 '고향의 상징' 당산나무마저 베어냈을 때 생길 후환을 고려했다는 뜻입니다.

이 추정은 물리적인 도시구조에 대한 결과론적 담론보다는 식민도시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억압과 수탈의 과정에 대한 담론으로 진해신도시를 조명해보자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늙은 팽나무의 위치가 신도시의 상징공간이었던 중원광장 한복판이라는 점은 ‘비록 마을은 없어졌지만 그 역사와 전통은 존중한다’ 고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의 강제토지수탈을 ‘부득이한 조치’ 로 위장하기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오래된 나무는 신도시건설 이전의 한국전통마을과 신도시건설 이후의 일본인 전용도시를 아우르는 상징이었습니다.

수령 1,200여년을 채워 천수를 다한 나무를 대신해
현재 중원로터리에는 작은 나무들과 조형물이 들어서있습니다.
어차피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니,
역사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이것들 대신, 잘 생긴 팽나무 한 그루를 다시 심는 것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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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1.09.28 15: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대단한 글입니다.
    어제저녁 포커스경남 시청 잘 했습니다^^

  2. 대자연어머니 2016.04.04 18: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얼마전 진해를 방문하여 나무의 존재를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글 마음에 남기고 마지막 말씀 저도 같은 생각이라 말하고싶습니다.

2011.08.31 00:00

욱일승천기를 모방했다는 진해 중원광장

제국주의 일본 군부가 강압적으로 건설한 계획도시진해(구 진해시청 부근, 서부지역)가 탄생한지 100여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인 도시계획기법이 적용된 도시이지만 설계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군부가 외부전문가에게 의뢰했지 않았겠느냐' 라고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당시 설계된 진해시가지 계획도입니다. 

보는 것처럼 진해는 방사형가로구조를 가진 도시입니다. 북원(北苑)·중원(中苑)·남원(南苑)광장을 두고하는 말입니다.
강점기에는 이 세 광장을 북십(
北辻) 中辻(중십) 南辻(남십)이라 했습니다. 십(辻, 쯔지)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인데 '네거리, 큰길'이라는 뜻입니다.

방사형가로구조로 설계된 도시가 또 있습니다.
진해와 비슷한 시기인 1907년 시작된
함경북도 나남시입니다.
아직 원형광장이 남아 있을까 싶어서 위성사진에서 확인해 보았더니 나남시에는 방사형가로구조의 원형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따라서 비록 일제에 의한 도시계획이었지만 진해는 근대기 초에 디자인된 방사형가로구조를 가진 한반도 유일의 도시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도시사적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이 20세기초에 일제가 계획한 나남시의 도시계획도면(재 작도)과 며칠 전 제가 확인해본 '같은지역의 위성사진'입니다. 광장의 흔적은 조금 남아 있습니다. 


진해 도시설계의 특징을 두고 다양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은 중원광장에 모이는 8개의 도로, 즉 방사동심원형광장(放射同心圓形廣場)이 일본군의 깃발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모방했다는 해석입니다.

일제시기에 건설된 진해도시계획을 설명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며,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알고 있고 그냥 그렇게 전하고 있는 이야깁니다.

최근에 진해도시를 주제로 논문을 한편 쓰다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제 나름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글은 ‘진해중원광장의 욱일승천기 모방설’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너무 심한 비약’입니다.

아래 사진은 현 진해 탑산 정상에 일본해군이 세운 러일전쟁 승전기념탑입니다. 해방될 때까지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워했던 욱일승천기가 탑꼭대기에서 펄럭이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혐오스럽기까지한 깃발입니다만 제가 생각하는대로 의견을 개진해 보겠습니다.

중원광장과 같은 방사동심원형광장은 도시가로망계획에서 흔히 나타나는 기법으로 유럽의 도시가 근세에 들어와서 많이 채택한 형식입니다.

대표적 도시로서는 파리를 들 수 있으며 유럽전원도시에서 이 형식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동방에 건설한 중국의 대련과 심양에도 이런 원형광장이 나타나며, 계획도시 뉴델리와 캔버라에도 방사동심원형이 나타납니다.
멀리는 로마시대에서도 이 형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방사동심원형광장의 디자인은 욱일승천기와 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형광장을 중심으로 도로를 뚫으면 이 모양 외에 어떤 그림이 나오겠습니까?

굳이 따져보면 욱일승천기는 깃발 중심에서 뻗어나가는 선이 16개라 도로가 8개 밖에 안 되는 중원광장과는 차이도 많습니다.
오히려 개선문이 자리잡고 있는 파리의 드골광장이 욱일승천기와 더 가깝습니다.

각 도시의 원형광장과 욱일승천기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순서는
욱일승천기  / 진해중원광장
파리 드골광장 /  로마의 광장
뉴델리의 광장 / 워싱턴 뒤폰트 광장 입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군부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는 태양을 중심에 두고 그 빛이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 즉 태양의 한복판 지점에 일본인들이 진해에 군항을 건설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당산목 팽나무가 강점기 내내 심겨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위 진해시가지도에 나타나는 중원광장에도 자세히 보면 이 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다음 사진이 중원광장에 심겨져있던 팽나무입니다. 1920년 경 찍은 사진 같습니다.

 

 
중원로터리 디자인이 욱일승천기를 모방했다면, 
한국사람들이 조상대대로 신목(神木)이라고까지 부르며 제를 올리기도 했던 당산목 팽나무를 왜 그 한복판에 두었을까요?
설명이 참 어렵습니다.

중원광장이 욱일승천기와 비슷한 건 사실입니다만 그렇게 된 이유는, 단순히 도시디자인을 방사동심원형광장형식으로 선택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일제의 악의를 포장해주고 싶어서 쓰는 글이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 그 진실여부를 밝힐 수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건이든 사물이든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감정개입 없이 사실(fact)에만 근거해 설명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올리는 글입니다.
역사에 감정이 개입되면 ‘아팠던 역사’조차 극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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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재종 2011.08.31 20: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도 좀 찜찜했는데 읽고보니 정리가 되었습니다.

    • 허정도 2011.08.31 23:45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올려보았습니다.

  2. 2011.09.14 11:50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3. 타논 2015.03.27 14:5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당산나무를 그대로 둔 이유가.. 혹 없앨 경우 조선인들의 예상되는 반발, 일본이 그래도 조선의 마지막 정신을 배려한다는 위장술의 일종이거나, 또 자신들 스스로를 위한 종교상의 호신책 등으로 일정 시간 그냥 놔둔 것은 아닐까요? 아무 생각없이 당산나무를 그냥 놔두었다고는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치밀한 것으로는 일본인을 못 따라가니 말이죠.

    • 허정도 2015.03.30 10:27 신고 address edit & del

      당연한 말씀입니다.
      말슴하신대로 '예상되는 반발' 때문이었을 겁니다.

  4. 홍이표 2016.05.25 15: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홍이표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블로그 내용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웁니다. 이 글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조금 적을까 합니다. 물론 서양의 도시 계획 모델이 비슷한 게 많으니, 그것들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규정돼 있지 않던 천황의 상징인 국화의 잎 수를 1868년 경, 메이지 유신 직후 '16엽'으로 공식 제정합니다. 욱일승천기가 총 16개 빛줄기로 뻗어나가게 설계된 것도, 천황의 상징인 국화 잎 숫자와 관련돼 있습니다. 그렇다고 16개의 방사형을 도시계획에서 구현하기는 쉽지 않지요... 그 상징을 보완하는 개념이 바로 '핫코우이치우'(八紘一宇) 이념입니다. 천황의 세계가 동서남북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하나의 집,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일본제국의 무한팽창 이념입니다. 여기서는 '팔'(八)이 명확히 강조되어 있지요... 진해의 해양기지로서의 상징성은, 도시계획 때에도, '4', '8', '16'으로 이어지는 일본인들의 팽창 욕구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운데 당산나무를 가운데에 살려 둔 것은, 그들이 절대자로 모신 '천황'이란 존재도 신도의 오야붕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시신도가 근세에 이르러 '복고신도', '근대에 이르러 '국가신도'(근대천황제)로 변화돼 왔지만, 그 뿌리는 결국, 자연물(동식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과 정령숭배의 '에니미즘' 등을 기반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지역에서 오랜 세월 숭배되어 온 자연물에 대한 경외는 '신도'라는 종교 체계 안에서는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건 '조선민족', 혹은 '대한제국의 국가상징'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순간, 곧바로 '국가신도'의 하나의 자산으로서의 '영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 의견이 참고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근현대의 다양한 종교상징과 국가상징, 민족상징의 상호 역학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https://www.facebook.com/yipyo.hong.5

    • 허정도 2016.05.27 06:4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홍 선생님의 글을 읽고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이 글을 쓴 까닭은 극일을 위해서는 역사를 과대포장해서도 안되고 과대해석을 해도 안된다는 소박한 생각 때문입니다.
      진해중원광장에 여덟 길이 만들어진 까닭을 지금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겠죠?

  5. 숧봉-진용옥 2017.06.08 00: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동아시아 유학의 중심사상인 태극론은 음양오행과 4상과 8괘의개념이 있습니다 중국의 4해 동포나 천원지방처럼 네거리에 중앙을 두는 오행 개념이 기봉이며 대체로 4거리 로타리를 두든개념과 유사 합니다 태극기는 8괘에서 4괘만 이용하고 그보다 3태극을 선호했습니다 상세보다 포괄성을 중시하나는 성향으로 보입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상세 분석을 선호하여 일장기에 8괘를 구현한 것이 욱일 승천기이고 8굉 일우도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6. 숧봉 진용옥 2017.06.08 00: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도시의 발생은 환웅 한를에서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여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에서는 아라고[광장]가 원형으로 보입니다 마차와 자동차가 다니면서 도로가 나타나고 교차로가 나타나며 로나리가 생기는 으로 볼수 있고요. 서양에서 먼저 로타리 구조가 생긴다 해서 일본을 모방했다가보다는 인류의 보편적인 도로 진화과정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며 다만 선호하는 성향에 따라 4괘 로타리 또는 5행 로타리를 구성되며 8괘 로타리로 세분화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진해 한들[중평] 노타리는 지형 구조로 보아 자연스레 8괘 로타리로 조성되고 이는 일본인의 의식 구조와 한국인의 의식구조에도 별도 거부감이 없는 로나리 구조였다고 보여 집니다
    제나가 도천초등하교에 다닐때 충무로가 욱일승천기의 깃대이며 북원로타리[이순진장군 동상] 는 깃대의 봉으루라 했습니다 그럴싸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음모론적 시각이 강한 것 같으며 욱일 승천기를 가상하여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는 근거를 찾기가 힘든다고 생각합니다 허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좁 다른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2010.09.29 00:00

도시 한복판에 동굴이?


도시 한 복판에 동굴이 있다면 믿어집니까?
최근 마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마산 창포동이었습니다.
공사를 하던 중 땅바닥이 아래로 꺼지면서 발견되었습니다.

지하 1.5m 지점에 폭 3m, 높이 2m, 길이 20m 정도되는 반원형 동굴이었습니다.
벽이나 기둥, 지붕 등 동굴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인력으로 흙만 파내 뚫은 것이었습니다.
마사토와 황토가 섞인 토질이었는데 매우 견고해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동굴의 위치는 1899년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신마산이라는 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각국공동조계지의 해관(현, 세관)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조계지를 조성 때 최초로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당시에는 바다와 인접한 부지였습니다.
사정(査定)토지대장의 기록에, 일제강점기 내내 이 터의 소유주가 국가(일본, 조선총독부)였던 걸로 보아 해방될 때까지 계속 공공시설로 사용된 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래 위치입니다.



연세 높은 이웃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판 동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 어렸을 적 이 동굴 안에서 놀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지금은 땅 속에 묻혀있지만 원래는 동굴 양쪽으로 입구가 트여있었다고 합니다.
1950-60년대까지 사람들이 이 동굴을 지나 다니기도 하고 무언가를 저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 눈에는 일본인들이 방공호로 팠던 굴 같았습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반도에도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한반도 근해, 즉 부산과 제주도 남방에 미군비행기가 날아다닌 것은 1944년 7월 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심심찮게 내습하다가 1945년 들어서는 빈도가 잦아져 45년 5월 경 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인천 황해도 대전 광주 원산 청진 나남 나진 등에까지 내습하여 항해중인 선박과 운행 중인 열차 및 육상 해상 시설에 총격과 폭격을 가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45년 4월 4일자로 '소개(疏開)실시요강'을 공포하였고 이어서 4월 7일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경성 5개, 부산1개, 평양1개소를 고시했습니다. 
그러다 6월 14일에는 전국의 중소도시 20 곳에 소개공지(
疏開空地)를 고시했는데 신의주 함흥 여수 대구 원산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때 마산에도  소개공지 1개소가 고시되었습니다.

소개관련 공지는 지역에 따라 규모와 형태가 달랐습니다.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는 중요시설 주변 30m∼50m내에 있는 기존건축물을 철거·소개하여 공지를 확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 때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겁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일제기의 '소개공지대'와 '소개공지'에 대해,
'도시계획의 눈으로 보면 소개공지대는 방공법에 의한 새로운 계획가로의 설정이었고 소개공지는 새로운 계획광장의 설정이었다' 견해를 밝힌바 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동굴이 '소개공지'와 직접 상관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방직전의 급박했던 전황을 생각해보면 이 동굴은 바로 그 시기, 한반도에 미공군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던 그 때 팠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시무시한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땅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고,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등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쟁흔적이니까 말입니다.

시청 관련부서에서 신속히 조치를 취해 위험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만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폐쇄하지 말고 식민지시대 유적으로 보존할 수도 있다 싶었지만 주변상황이 워낙 위험해 권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사진을 한 번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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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한 복판에서 갑자기 땅이 아래로 꺼졌습니다.


지하 1.5m 지점이었습니다.


입구 폭은 2.4m 정도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3m 정도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높이는 2m가 조금 넘어 행동하기에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꽤 넓어 보이지 않습니까?


안전하게 동굴을 막기 위해 준비공사를 시작합니다.
아래 큰 놈은 콘크리트 주입구이고, 위 작은 놈들은 공극을 없애기 위한 조치입니다.


밀도를 높이기 위해 모래와 시멘트만 섞은 모르타르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공사가 끝났습니다.
동굴 위에 2층 건물이 두 채나 있던데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했습니다.



도시 한복판 땅 속에서 긴 세월 잠자고 있었던 이 동굴을 보며 지난 세기 이 도시 마산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조용했던 포구에 일본인들이 밀고 들어와 땅을 차지하고, 신작로를 뚫고, 이 도시를 제 멋대로 삼켰습니다.
해방이 되자 미군과 귀환동포에 도시가 북적였습니다.
전쟁이 나자 피난민들로 이 도시가 다시 들끓었습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지만 이 도시에 사연을 남기고 간 그 많았던 사람들,,,,,
그들의 음성이 귓전에 돌고, 그들이 흘린 땀냄새가 코 끝을 스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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