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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간 도시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0/02/03 나도향, 김지하 그리고 '산장의 여인' (10)
  2. 2010/01/24 ‘구(舊) 마산형무소 터’ 의 추억 (4)
  3. 2010/01/07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 (28)
  4. 2009/12/13 내서읍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14)
  5. 2009/11/30 마산시 회원동 500번지 (12)
  6. 2009/11/25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4)
  7. 2009/11/16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6)
  8. 2009/10/26 마지막황제 순종의 행차길
2010/02/03 07:00

나도향, 김지하 그리고 '산장의 여인'


'마산도시탐방대' 여덟 번째 길이다.
1월 30일 오후 1시 반, 걷기 좋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였다.
우리는 가포로 가기 위해 비움고개를 넘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는 한 많은 땅이다.
110년 전,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다.
잊혀져가는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겨울 오후 바닷가를 4시간 쯤 걸었다.



나라 뺏긴 설움만 있는 곳이 아니다.
가포에는 마지막 꺼져가는 심지처럼 생명이 사그라진 가슴 아픈 현장도 있다. 바로 국립마산결핵병원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세운 결핵전문병원이었지만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다.

우리는 병원 건너편 숲 속에 있는 ‘산장병동’ 터를 찾아 들어갔다.
이곳은 노래
‘산장의 여인’의 애절한 주인공이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그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겨울 낙엽 밑 어딘가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기대를 안고 숲으로 들어갔다.



 <국립마산결핵병원입구(위)과 건너편 '산장병동'이 있던 숲으로 들어가는 길>

울창한 숲 속에는 산장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작은 건물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카테이지(cottage)라 불렀던 2인용 병사(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의 흔적이었다. 일제 때 세웠지만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남은 잔해였다.
썩을 것들은 이미 썩어 없어지고 수십 년 세월에 이긴 것들만 남아 있었다. 건물의 구조와 규모는 잔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였다.
사방에 콘크리트 기초가 둘러 진 것으로 보아 입원실이었음직한 자리에 한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 서있었다.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외로이 살았던 여인이 떠난 뒤 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었다.


                             <병사(病舍)와 부속건물의 잔해>

      <한국결핵협회 발간『한국결핵사, 1998년』에 실린 2인병동 카테이지>

지금은 OECD가입국까지 되었지만, 한 때 대한민국은 ‘결핵왕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다. 대부분 폐결핵이었다.
결핵은 가난에 의한 비위생적인 생활관습이 주요 원인으로 선후진국을 구별 짓는 사회상징 중 하나였다.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약이었다.
하여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전국최고였던 마산과 인근에 결핵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6·25전쟁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도립마산병원, 국립마산요양소, 마산교통요양원 외에 마산상고 교사(校舍)를 징발해 급히 세운 국립신생결핵요양원, 결핵전문 제36육군병원, 공군결핵요양소, 진해해군병원결핵병동 등이 그것이며 결핵을 전문으로 보는 개인병원도 많았다. 바야흐로 마산은 결핵치료의 메카였다.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고 불릴 만큼 문인들 사이에 만연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마산결핵병원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거쳤고 글자취도 남겼다. 마산문학관 학예사 한정호박사가 정리한 바 있다.

결핵을 앓다 죽은 대표적 문인들로는 최승구, 나도향, 이상, 이광수, 김유정, 임화, 권환, 이용악, 오장환, 현진건, 채만식, 권태웅 등이고,
한 때 결핵을 앓았던 문인들로는 백석, 구상, 박철석, 남윤철, 고은, 이형기, 김지하, 김혜순, 천양희, 박정만, 성찬경 등이다.

일제기에 요양 차 이곳 마산에 왔던 문인은 나도향, 임화, 지하련이었고 광복 후에는 권환, 이영도, 김상옥, 구상, 김지하 등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밖에도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 등 유명 문인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오갔다.
「이름모를 소녀」로 70년대를 풍미하다 요절한 가수 김정호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도향은 가난과 방랑으로 떠돌다 1925년 요양 차 마산에 와서 3개월 동안 노산 이은상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하며 염상섭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단편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을 남겼다. 그 해는 그의 대표작「물레방아」「뽕」「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한 나도향 소설의 절정기였다.
다음 해 그는 스무 넷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엄혹했던 시절,
김지하는 폐결핵으로 서울시립 서대문요양원과 인천 적십자병원을 거친후 장편 시 비어(蜚語)을 발표, 체포되었는데 폐결핵 때문에 기소되지 않고 마산결핵병원에 강제 연금 당했다.
그 시절 발표한 글이다.

벗들
병든 나를 찾지 마라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머물려거든
매화 봉우리
아조아조 향그럽게 머물고
피우려거든
더욱더 새빨갛게 꽃피워라
동백이여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따뜻한 춘삼월에 만나자 벗들
눈겨울 외로움 속에
맑은 향기로 머물었다
매운 꽃으로 들에 홀로 피어났다
춘삼월 그 흔한 바람 속에 흐드러져
수월히 만나자 벗들
어렵게 수소문하여
나를 찾지 마라
병든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김지하, 「편지」 전문-


마리아가 내게 은단을 보내왔다. 마치 사약을 내리듯이, 독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해야 할 일, 그것은 쓰는 일이다. 연필 한 자루와 한 뭉치의 종이, 그것이면 족하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 그리고 저기에 가득하다.  
                                           
-김지하, 「가포일기」중-


사랑도 친구도 가족도 결핵 때문에 잃어야 했던 그 시절,
가수 권혜경이 부른 ‘산장의 여인’은 전 국민의 심경을 녹아내리게했다.
애절한 노랫말을 쓴 이는 마산사람 반야월이었다. 그는 진방남이란 이름으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그가 가수 진방남으로 불렀던 곡은 ‘불효자는 웁니다’이고,
작사자 반야월로 쓴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처녀’ 등이다.

6·25 직후 반야월은 고향 마산에서 위문단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번은 그가 마산결핵병원 환자위문공연에서 자신의 대표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한 곡 뽑았는데, 객석 맨 뒤편에서 하얀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공연 후 사연을 물었더니, 그녀는 병원 건너편 숲속 ‘산장병동’에서 요양 중인 폐결핵환자였다.

꺼져가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쓸쓸히 살아가는 미모의 젊은 여인에 끌려 작사자 반야월은 가사 한편을 남긴다.
이 글을 뒷날 마산결핵병원에서 요양하기도 했고 결국 한쪽 폐를 잘라내기까지 했던 「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의 작곡가 이재호에게 넘겼다.
「산장의 여인」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


나이가 들어 울창하게 숲을 이룬 키 큰 나무들,
가포만에서 불어드는 청량한 바람,
뚜렷이 남아 있는 병사(病舍)들의 잔해,
외롭게 살아갔던 여인이 남긴 애절하고 낭만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산장의 여인'·······.

이만한 볼거리가 없다 싶었다.
애처로이 밤 새워 울었던 풀벌레와 행운의 별을 보며 속삭였던 그날 밤의 추억까지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숲이었다.

마산을 찾는 사람에게,
아니 마산을 찾고 싶도록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근대낭만유산이었다.

               <공용 화장실의 변기 / 건물 구조로 보니 여성용이었다>

                                    <현관 턱으로 보이는 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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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2/03 09:03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 입니다

    • 허정도 2010/02/03 23:13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적절히 참여하겠습니다.

  2. 삼식 2010/02/03 18:07 address edit & del reply

    나도향이 1920년대에 이병사에 있었다면,
    과연 결핵 병원의 최초 건립역사는 언제쯤인지요?

    • 허정도 2010/02/03 23:15 address edit & del

      감사.
      나도향은 약 3개월 동안 노산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 나눈 자료에 있더군요.

  3. 김영철 2010/02/04 17:14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이 고향인 저로서도 처음 접하는 이야기들이네예.
    가포 결핵병원에 그렇게 슬픈 사연이 많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마산의 숨은 이야기 계속 부탁 드리겠습니다.

    • 허정도 2010/02/04 17:23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혹시 숨은 이야기 중 알고 계신 것 있으면 연락 좀 주십시오.

  4. 유림 2010/02/05 13:09 address edit & del reply

    매번 참석을 하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이 참 큽니다.
    가포 탐방도 참 좋았습니다
    비록 신발이 엉망이 되고 온 바지에 도둑놈(?)이 붙어서 귀찮았지만..

    스잔했던 그 숲이 떠오릅니다

    • 허정도 2010/02/05 14:06 address edit & de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튼 도시탐방대 참 좋은 시됴죠?

  5. 조원문 2010/02/05 18:21 address edit & del reply

    가끔 지나는 길인데,,이렇게 알고 보니 정말 새로운 기운이 남닙다,
    회장님 정말로 마산을 많이 배우고 싶읍니다,,

    함께 많은 시간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열심히 노력 하겠읍니다,,,수고 많이 하셨읍니다.

    • 허정도 2010/02/06 10:45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
      내가 늘 신세를 많이집니다

2010/01/24 14:30

‘구(舊) 마산형무소 터’ 의 추억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일곱 번째 길에 나섰다.
1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 반, 코아 양과점 앞, 30여명이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짙게 흐렸고 기온이 낮았다.
코스는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 시작하여→구 마산형무소 터→오동동 일대→오동동 아케이드→용마고등학교→지하련 거주지→산호동 효자각→용마산→구강포구까지였다.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는 특별손님으로 3.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님이 직접 나와 의거에 대해 설명해주어 의미가 더했다.
한때 화려했던 오동동의 밤 문화에 대한 설명은 이승기 선생님께서 맡았는데 두 분은 마산상고 동기생이시다.

가는 곳곳마다 새로운 걸 느꼈고 배웠지만, 여기서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구(舊) 마산형무소 터’에 관한 글을 올린다.

                                    <일곱번째 탐방 코스>

     <3.15의거 발원지 표시동판과 의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백한기 회장님>


8년 전 2002년 벽두,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시민운동을 벌였다.
마산YMCA를 주축으로 ‘한국은행터 공원만들기 마산시민행동’을 조직하고 상임대표를 맡아 운동의 중심에 섰다.
달포 만에 무려 10만 여명의 서명을 받았고, 그것을 마산시의회에 제출 청원하였다.
하지만 부결되었다.

우리들이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려했던 까닭은 ‘도시환경’이라는 측면과 ‘터의 역사성’ 때문이었다.

             <공원만들기 운동의 발대식과 거리서명 캠페인 장면, 2002년>

돌이켜 보자.
마산은 1899년 개항이후 일제 강점기의 무차별한 개발과 매립, 해방 후 귀환동포 정착, 6.25 피난민 정착, 60년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에 의한 산업화 등 다른 도시가 경험하지 못한 격랑의 세월을 겪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언제 한 번도 도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천혜의 자연이 있었지만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기응변으로만 해결했다.

도시의 질이 급격히 낮아졌고, 시민들도 도시환경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구(舊) 마산형무소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고 나선 것이다.
공원으로 하기에 충분한 땅은 아니었지만, 도심에 나온 시민들에게 짧은 여유라도 즐기게 해주고 싶었던 하나의 작은 몸짓이었다.

이야기를 먼 곳으로 돌려보자.
건강한 사회는 시민 스스로 생활의 제반 문제를 대응한데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런던의 하이드파크는 원래 왕이 사냥을 즐기던 숲이었다. 하지만 도심공원이 없었던 런던시민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세계최고의 공원이 되었다.
협상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런던시민들이 울타리를 헐어버렸던 것이다.
이른바 오픈스페이스운동, 하이드파크는 이런 격동의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운동’도 바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자연적 문화적 유산을 시민 스스로 보존하기 위한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영국 전 국토의 1.5%, 해안의 17% 가량을 소유하여 공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런던 하이드 파크>

이야기 하나가 더 있다.
사람살기 가장 좋다는 밴쿠버 이야기이다.

1886년 5월 12일 오후 7시 30분, 밴쿠버 최초의 시의회가 열렸다.
당시 밴쿠버 시민은 2,600명이었다.
이  첫 회의에서 의원들은 영국해군기지였던 땅 120만 평을 공원부지로 결정하였다. 민간에 매각되어 주택지나 산업단지로 개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공원이 밴쿠버가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스탠리파크’다.
124년 전, 인구 2,600명 도시에 120만 평의 공원을 만든 밴쿠버의 결정.
이 결정과 이 비전이 오늘날 밴쿠버를 세계최고의 도시로 만든 주춧돌이었다.

                                         <밴쿠버 스탠리 파크>

밴쿠버 시의회 최초의 결정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깊고도 넓다.
몇년 전, 인구 42만 도시의 마산시장은 1,500평 한국은행 터에 1/3은 건물을 짓고 나머지 천 평만 공원으로 하자는 계획을 발표한바있다.
40만 인구에 1,500평과 2천6백명 인구에 1,200,000평.
왜 마산은 날로 쇠락해가고 밴쿠버는 왜 오늘날 세계최고의 도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리자.
마산형무소 터의 지난 세월은 질곡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일제통감정치시절이었던 1909년에 부산감옥소 마산분감으로 사용된 후 무려 60여 년 간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자리다.
일제 때는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후에는 좌우이념갈등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갇혔던 곳이다.
3.1운동 때에는 유명한 삼진의거를 비롯하여 마산, 함안, 창원, 웅동 등 인근지역에서 만세를 불렀던 모든 선조들이 이곳에 갇혔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여성 정치인 박순천도 갇혔던 곳이다.


           <일제기 마산 형무소>            <'마산형무소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정부가 수립되었던 1948년,
마산의 시인 월초 정진업은 이 형무소에 갇힌 친구를 생각하며 갇히지 않았던 시인의 아픔을 토했다. 「골목길」이라는 시(詩)다.

가치운 몸은 달라도
창살 틈으로 보내는 눈초리는
오직 한마음이라                     

네 손발의 사슬이 풀렸기로
오히려 억압은
첩으로 쌓이는데
아직도 무릎 꿇고
무료히 앉아 있을
벗의 닫혀진 억울한 세월을
너는 어이 잠시라도
잊어보는 것이냐?

고문에 항시 못 이겨        
이를 갈던
공포와 저주는
그래도 잊혀지지 않아                         


총을 멘 보초들 서있는
돌문 앞을 지날 때마다
죄 없이 조라드는
겁 많은 마음이

나무 가지 사이로
철창을 노리고
이룩할 민주의 나라                        
이리 더딤을 한탄하면서                              
밖에서 내 다만 참답게
일 하겠노라
인욕(忍辱)의 벗에게
머리 숙이며 가는
밤마다 정이 드는
나의 골목길이 있다.

식민지시대의 감옥은 단지 신체를 속박시킨다는 의미 외에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다. 공원은 근대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시의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터가 공원으로 변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 「근대시민의 자유공간」으로 바뀐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제시했던 자료 / 왼쪽은 당시 현장상황, 오른쪽은 공원조감도>

이제 세 도시가 통합되면 도시의 큰 그림은 다시 그려질 것이다.
따라서 이 터를 공원으로 하는 문제를 두고 ‘옳다 혹은 그르다’ 식의 논의는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터를 보니 마산의 도심공원 문제가 다시 떠올라 몇 자 적는다.

공원문제가 이 도시의 쟁점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터 외에도 신포동 매립지를 아파트만 지을 게 아니라 일부를 공원으로 하자는 운동도 있었다.
모두 실패하였다. 마산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지정된 마산시의 공원의 면적은 자그마치 240여만 평이다. 이 면적은 마산 인구 일인당 약 6평 가까이 되는 규모다.
도쿄와 오사카의 공원 면적이 1인당 고작 1평 내외, 세계적인 도시 파리가 3평 반, 몬트리올이 4평, 뉴욕이 5평반인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 큰 규모다.
1인당 9평이나 되는 런던보다는 작지만 어쨌든 통계상으로 마산은 공원의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건 말 그대로 통계일 뿐, 현실은 전혀 아니다.
이미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던 산과 계곡을 공원이라 이름 붙여 통계로 잡은 것이다.

이 도시에는 시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제대로 없다.
해변공원은 아예 없고 만날재 공원은 주로 행사용으로 쓰인다. 양덕동 삼각공원은 접근성이 나쁘다.
서항매립이다, 구항매립이다 하면서 20여 만 평의 해면을 매립하고서도 그럴듯한 도심공원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민들과 바다를 단절시켰고 수변공간계획은커녕 해안 전부를 자동차가 씽씽 다니는 길과 수입 원목들이 차지해 버렸다.

지금 계획되고 있는 ‘마산비전 2020’에 중앙공원, 산호공원, 추산공원 개발을 비롯하여 돝섬유원지개발, 구산해양관광단지개발, 팔용유원지개발 등 공원개발 계획이 다양하게 세워져 있지만 어디 한군데 도심공원은 없다.
엄청난 시설비를 요하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산을 공원화하는 것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토록 철저하게 도심공원이 없는 도시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생활 속에서 이용할 수 있는 공원계획이 시급하다.
화려한 언어로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도심 속에서 생활 속에서 쉬기도 하고 걷기도 할 수 있는 공원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시민 1인당 공원 6평이라는 허구를 현실화시켜야 한다.

해안도시라면,
적어도 바닷가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30분 정도는 편안히 걸을 수 있는 공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키 큰 나무 아래 잔디 깔린 바닷가에, 사람들이 걷고 자전거가 달리고 벤치에서 연인의 속삭임이 들려야 해안도시 아닌가?

도심공원이 전무한 도시,
바다가 있지만 바다와 차단된 도시,
역사의 가치에 관심 없는 도시,
그리하여 성장 동력조차 상실한 채 인근도시와의 통합 외에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게 된 도시......

이 도시의 '희망찾기'는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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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림 2010/01/25 11:40 address edit & del reply

    선배님 저도 찬성입니다.
    그 곳이 공원이 되면 아마도 오동동 창동 거리도 조금 북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창동에서의 추억이 많은 세대로서 늘 아쉬운 부분이지요
    어차피 구 상권일바에야 추억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만드는 것도
    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황량한 그 곳의 모습은 지날때만다 늘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통합 새도시에선 ...잘~ 되길 바랍니다.

    가포탐방때 뵐께요 ^^

    • 허정도 2010/01/25 16:38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도심공원이 없는 게 마산의 걱정인데 딱히 이곳이 아니더라도 도심에 좋은 공원하나 들어서면 참 좋겠습니다.

  2. 조원문 2010/01/27 11:11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 회장님 정말좋은 마산의 역사를 배우고갑니다
    저도 마산 토박이인데,,,,죄송 합니다,,너무 모르고 있었읍니다,

    지속적인 마산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많은 자료보도록 하겠읍니다.
    정말 수고 많이 했읍니다...

    • 허정도 2010/01/27 16:11 address edit & del

      반갑소.
      마산과 관련해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2010/01/07 07:00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여섯 번째 길에 나섰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바람이 없었고 맑아서 걸을 만 했다.
회원도서관에서 만났는데 추운 날씨에도 참석자가 20여명이나 되었다.
봉화산과 이산미산 그리고 지금의 석전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근주 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탐방을 시작하였다.
마산방직→한일합섬→한일전산여고→양덕성당→가톨릭여성회관→합포성지→하이트맥주→국립3·15민주묘지로 이르는 코스였다.

가는 곳곳마다 이야기할 것도 공부할 것도 많았지만 나는 한일합섬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몰락의 과정에 눈길이 많이 갔다.
거대기업 한일합섬의 흔적이 양덕동 일대 온갖 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 교수의 도시탐방대 작은 제목이 「걸어서 만나는 마산이야기」인데 이 글은 「걸어서 만나는 한일합섬이야기」인 셈이다.



<1970-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1964년 자본금 1,500만원으로 일본기술과 제휴하여 아크릴 섬유를 생산하면서 시작된 한일합섬은 1967년 1월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석하여 기공식을 했다.
이른바 섬유왕국의 시작이었고, 마산이 산업도시가 되는 신호탄이었다.

1986년에 펴낸 『한일합섬20년사』에는 ‘양덕동 허허벌판에 기공의 삽을 힘차게 꽂은 지 만 1년, 마침내 준공 테이프를 끊게 된 아크릴 섬유공장은 ․․․․․․’ 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곳은 허허벌판이 아니라 양덕동 석전동 산호동 일대에 살던 마산시민들의 곡창이었고 삼호천과 산호천 사이의 기름진 논밭이었다.

아크릴 섬유로 시작한 한일합섬은 후에 종합섬유회사로 발전하였다.
1967년에 방추(紡錘)가 22,400개였던 것이 1979년에는 무려 344,000 추로 세계 최대 규모까지 성장했다.

고용효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1967년에 4,300명으로 시작했던 사원 수가 1976년경에는 27,000명까지 늘었다. 사원 수가 이랬으니 이 거대기업을 둘러싼 2차고용 3차고용 효과까지 계산하면 그 수가 얼마였겠는가.

‘수출입국’을 지향하던 정부시책에 맞춰 국가경제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67년 68만 불이던 수출액이 71년에 2,286만 불까지 급성장을 이루었고, 1973년 드디어 국내 최초로 수출 1억불을 달성했다.
창립 후 불과 5-6년 만에 수출액 15,000% 성장이라는 기적의 기록을 가진, 그 시절 최고최대의 기업이었다.
소위 '전국 7대도시 마산'도 이의 결과다.

한일전산여고에 얽힌 일화도 많다.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큰 공이었지만 그 유명한 ‘팔도잔디’는 전 국민의 심정을 녹아내리게 했다.
1974년에 설립한 한일전산여고는 첫 해에는 28학급 1,680명 규모였는데 1980년에는 120학급 7,200명까지 되었다. 학급 수가 120, 한 학년에 40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규모다.

이른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였다.

나는 탐방대원들과 함께 양덕동 찬바람을 맞으며 한일합섬의 옛 영화를 되새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 한 쪽에 솟아오르는 물음이 있었다.

국내 최고 최고최대의 화학섬유회사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몰락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잘나가는 SK나 CJ나 코오롱도 비슷한 업종이었는데 왜 한일합섬만 이렇게 몰락하였을까?

답을 찾지 못한채 길을 걷던 중, 눈 앞에 한가닥 실마리가 보였다.
어쩌면 나의 물음에 작은 답이 될수도 있는 '사라진 한일합섬'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

                          <한일합섬이 들어서기 전의 양덕들판>

                                           <건설 초기 모습>

                                           <확장 또 확장>

                   <고향에서 가져운 팔도잔디를 가꾸는 한일여고생들>


         <최고 전성기 때의 한일합섬, 오른쪽 운동장이 한일여고 팔도잔디>


………그것은 아파트였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수는 없겠지만, 한일합섬이 몰락하게된 원인 중 한조각은 짐작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일합섬은 본 공장 외에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소규모 혹은 짜투리 땅들을 대부분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를 지어 분양 처분했다.
규모가 작은 땅들이라 한 채 혹은 두어 채 정도였고 저층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도 양덕동 여기저기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은 건물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모두 ‘한일’이나 ‘한효’가 들어간 이름이었다.
'한일'이야 회사명이지만, ‘한효(翰曉)’는 한일합섬의 설립자인 김한수 회장의 호다.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

집을 짓기만 하면 재미를 보았던 시절이었다.
이 거대기업도 집 장사로 그 시절 재미를 좀 보았고, 사주(社主)는 쉽게 돈버는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

자신을 있게 한 기존의 섬유산업은 수명이 다해, 저 멀리 퇴조의 징후가 보였지만 미래를 위한 진지한 모색도 과감한 투자도 하지 않았다.
연구와 개발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업의 탈출구를 찾는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 장사의 단 맛에 빠져 본격적으로 공장규모를 줄이며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건설규모도 크게 늘려 그 때까지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다.

제품창고 헐고 아파트 지어  ‘1차’
기숙사 헐고 아파트 지어  ‘2차’
모노마 탱크 헐고 아파트 지어  ‘3차’
서쪽 편 공장 헐고 아파트 지어 드디어  ‘4차’까지.



아파트 단지의
차수가 늘어날수록 '한일합섬'은 왜소해졌고, 차수가 늘어날수록 사원들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비례해서 마산경제도 점점 쇠락해 갔다.

사람들은 이 아파트 단지들을 통칭 ‘한일 1차’ ‘한일 4차’ 등으로 부른다.
만약 '한일합섬'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면 최근 태영과 한림에서 지은 대규모 아파트단지 '메트로시티'는 ‘한일 5차’, 바로 그 옆에 마지막 남은 터는 ‘한일 6차’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4차 만에 ‘한일’은 이름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 긴 시간을 한눈에 보면,
논밭이던 땅에 공장이 들어섰고 다시 그 모든 땅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양덕동 일대 주민들 땀이 밴 기름진 양덕 들이 30여 년 만에 아파트 터로 변한 셈이다.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거대기업의 몰락,
섬유왕국 한일합섬의 몰락을 떠올리니 새로운 물음이 생겼다.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의 참혹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온갖 곳 보이는 땅마다 ‘아파트와 아파트’로 채우고 있는 이 도시 마산이 한일합섬 몰락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일까?
새로 탄생하는 통합시는 이 사라져버린 거대기업에서 얻어야할 교훈은 없는 것일까?

석양의 역광에 검게 물든 한일아파트의 수십층 높은 벽이 마치 몰락한 '섬유왕국 한일합섬'의 잔영처럼 보였다.




 

Trackback 0 Comment 28
  1. 이진규 2010/01/07 11:00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을 대표하던 한일합섭의 시작과 끝을 잘 알게되었습니다. 한일합섬 터 위에 제가 살고 있었네요^^

    • 허정도 2010/01/07 21:52 address edit & del

      후배가 신접살림 차린 곳이 한일2차죠?
      옛날 한일합섬 여사원들 기숙사가 있던 자리.

  2. 옥가실 2010/01/07 13:35 address edit & del reply

    찬바람 맞으며, 도시탐방을 한 값을 많이 찾을 수 있군요^^
    저렇듯이 아파트를 지어대고 있었다는 건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로 마산시민들이 한일의 몰락에서 교훈을 많이 얻었으면 합니다.

    수고했습니다.

    • 허정도 2010/01/07 21:53 address edit & del

      이런 경험할 수 있었던 것도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토요일 또 나가야죠?

    • 옥가실 2010/01/08 16:41 address edit & del

      그러문요!
      지금 그거 준비하느라 등골이 휘청^^

  3. 미경 2010/01/07 17:29 address edit & del reply

    저는 신마산에 살고 있습니다.
    마산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아름다운 바다를 막아서 계속 늘어나는 아파트들을 볼때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 허정도 2010/01/07 21:55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사실, 한 도시를 디자인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실태파악입니다.
      마산에 과연 그렇게도 많은 아파트가 필요한지 어떤지를 정확히 알고 계획을 해야 되는데 아쉬운 게 참 많습니다.

  4. 유림 2010/01/07 18:11 address edit & del reply

    양덕동 일대를 잠시 누비고 다녔던 몇년전 기억이 새롭네요

    조금 더 멀리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더라면...좋았을텐데..

    • 허정도 2010/01/07 21:57 address edit & del

      글쎄 말입니다.
      아무튼, 마산의 자랑이었던 한일합섬이 지금은 마산의 상처로 남았습니다.

  5. 삼식 2010/01/07 22:43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에서 몰락한 기업들의 리스트를 만들면 어떻런지요? 유원산업, 경남건설 등등 많을것 같읍니다. 물론 몰락의 이유를 잘 분석해야겠지요!
    실패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수 있지 않을까요

    • 허정도 2010/01/08 09:46 address edit & del

      글쎄요, 너무 방대한 작업이라서.
      가능한 일이라면 유익한 자료가 되겠네요.

  6. 최정건 2010/01/08 01:43 address edit & del reply

    제가 지금까지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대학가지 나오고 직장을 다니는지라
    관심이 많습니다. 유장근 교수님, 김주완 기자님 블로그도 자주 갑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삭막해진 것 같습니다, 신마산 댓거리도 그렇고,예전에
    고등학교를 창원까지 다녔는데 지금의 밤거리는 사뭇 다른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아쉬운 것은 강남극장, 중앙극장은 몰라도 연흥극장이 아깝습니다.
    지금도 쓸만한 건물인데 마산시에서 적극적으로 매입하여 시민들을 위한
    소규모 공연장으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예전에는 세림상가에 극단마산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보기가 힘듭니다.
    지금의 롯데시네마와 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이전의 극장체계보다 영화가 다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일합섬이 아쉽습니다. 제가 한일유치원을 나오지라 저 팔도잔디에서도
    많이 놀았는데 최소한 양덕동 로타리 쪽으로 공장 한 동이라도 남겨두어 예를들어
    마산 근현대박물관이라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저는 마산이 한국근현대사의 산업화시대의 긍정적인 면 보다 슬픔, 아픔, 모순이 내재된
    도시라고 생각됩니다.

    • 허정도 2010/01/08 09:50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마산에 대한 애정이 많으시군요.
      저 역시 고향이라 그런지 마산에 대한 애정이 많습니다.
      창원진해와 합쳐질 것인데 이것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위기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마산의 미래가 걱정입니다

  7. 최정건 2010/01/08 01:48 address edit & del reply

    지금 신마산매립지 아파트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 수출자유지역을

    리모델링이 필요합니다. 공원에 있는 듯한 산업단지.......

    • 허정도 2010/01/08 09:53 address edit & del

      생각해볼만한 말씀입니다.
      실제로 선진도시에서는 공원과 산업단지를 복합적으로 구성하기도 합니다.
      자유지역이 좁아서 가능할지는 몰라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의지만 있다면.

  8. 개구신 2010/01/08 11:34 address edit & del reply

    많은 교훈을 주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토목*건설로 단기수익만 바라보다가는 근간이 무너진다는걸 현 정부도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자꾸 어디를 파낸다, 어디를 매운다 이런소리만 하고 있으니 걱정됩니다.

    • 허정도 2010/01/08 11:43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국가의 전 산업 중 건설산업 포션을 줄여나가는 것이 선진국대세인데 우리는 계속이렇게 갈건지,,, 걱정입니다.

  9. 말뫼 2010/01/08 13:27 address edit & del reply

    죽은 애 고추 만지기이지만,
    오래 전 한일합섬 철거.이전이 논의 될 때, 그 터는 마산의 공공업무지역+지역금융통상업무 중심지구로 개발해 마창진의 금융통상허브로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때도, 그 전에도 마창진 통합 논의가 있었지만, 지리적으로도 그 중심지로는 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선생님의 다른 포스팅 '통합시의 성패는 우리 손에...'에서 통합시의 행정구역도를 보고 그것이 다시 생각 났습니다. 그 구역도로 보면 그야말로 딱인 중심지다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더 깊은 탄식이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돌이킬 수가 없으니...

    한일합섬이 야금야금 집장사로 팔아 먹은 것도 그렇지만, 이후 본공장 터를 마산시가 집장사치들에게 팔아 치운 것은 겨우 숨줄만 붙어 있는 사람의 숨통을 짓눌러 버리는 것과 같은 폭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역의 역사에 씼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도시 살리기가 아니라 도시 죽이기 였습니다. 그게 무슨 영화를 볼 일이라고 그랬을까 싶습니다. 대규모아파트가 들어서면 인구가 늘어날 것 이라는 무지막지한 사기를 쳤던 자들의 뇌구조를 파헤쳐 보고 싶은 지경이었습니다.

  10. 말뫼 2010/01/08 13:22 address edit & del reply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 마산이 진짜 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탄식만하고 앉아서는 막연한 바라기나 하고, 행정당국은 땅장사나 하고서는 그게 무슨 대단한 치적인 양 도취하고, 힘께나 쓸 듯 폼 잡는 지역국회의원들은 생색내기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사람들로만 살펴 봐도 두루두루 퇴락하고 망할 조건들만 갖추고 있었지요. 거기에 올바른 전문가들의 역할이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 합니다. 도시전문가들이 제 역할을 할 기회나 주어졌던가요? 도시재생위원회가 기능을 하긴 했던가요?
    마산의 꼴은 '장'자리 차지했다고 거들먹거리기나하고, 방귀개나 낀다는 무식방창한 무리들이 제 세상인 양 마구 휘젓는 깡촌구석동네 분위기, 딱 그 수준 입니다. 제대로 뭘 하자는 사람들은 아무 역할 못하고...

    십여년 전인 듯 한데, 마산의 도시계획에 대한 대대적인 논의가 있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허선생님도 전문가로서 그 가운데 계셨었는데, 그 때 논의 됐던 것들 중 기본적인 것들만이라도 실행 되었더라면 마산이 이토록 죽을 지경으로 나자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도시.지역문제에 정획한 문제인식과 진심으로 살리려는 노력이 없는 한 마산은 마창진통합에서도 뿌시래기나 빌어묵는 변두리 찌끼미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마창진 모두 지차체장 부터가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껏 그들의 같쟎은 자기도취적 치적 만들기는 이제 '신물징'이 납니다. 매립땅장사, 알짜배기 도시 중심중심지 팔아 치우기, 같쟎기 짝이 없는 생태도시, 복마전 같은 변두리 소도시... 그들이 만든것은 그런 것들 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도시도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신주의가 상식적 태도 처럼 만연한 대한민국, 사람과 자원의 반이 몰려있고 국가권력도 좌지우지한다는 서울공화국,수도권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지방'도시의 문제는 '지방'스스로의 혁명적 각성과 노력 없이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역공동체의 본떼있는 '실력'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한 지방도시의 환경은 변화조차 무망 하다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다면, 돈만 많으면, 부자동네만 되면.... 그 딴 생각으로는 절대로 서울공회국,수도권공화국의 지배를 벗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인구.면적규모로 최대지방도시? 그 따위로 어디에 견줄 생각을 한다는 것 부터가 '촌 것들'이라고 멸시 당하기를 자청하는 생각 일 것입니다.
    그게 이 나라 '지방도시'의 처절한 현실이며 지방도시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선생님과 같이 진정성을 지니신 전문가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때 입니다. 장차 지역도시문제에 큰 역할 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 허정도 2010/01/08 13:59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합니다.
      저 역시 도시를 바라보는 눈은 말뫼님과 비슷합니다.
      도시가 나아가야할 길은 처음도 삶의 질이요, 마지막도 시민들 삶의 질 상승입니다만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주저 앉아 있을 수도 없는 것이 또한 도시문제입니다.
      우리가 몸이 담겨 있는 그릇이니까.
      함께 걱정하고 함께 노력하면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11. 조원문 2010/01/09 10:14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고 갑니다

    • 허정도 2010/01/10 17:32 address edit & del

      방문해주어 고맙소

  12. 강인수 2010/01/10 15:45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잘보고 잘읽어보고 나갑니다.

    • 허정도 2010/01/10 17:33 address edit & del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13. 윤종호 2010/01/11 23:26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우리마산이 않고있는 현실의 문제점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 마산의 그림을 잘 그려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마산이 되었으면 하는 마산시민 한사람의 소망입니다.
    회장님께서 변화의 물고를 터 주시기 바랍니다.

    • 허정도 2010/01/12 10:42 address edit & del

      반갑소.
      도시의 발전은 그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에서 출발합니다.
      우리 생활의 그릇인 도시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집시다.
      그러면 도시도 좋아질겁니다. ^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4. 옛한일인 2010/06/24 17:50 address edit & del reply

    80년대후반 한일인으로 일하며 공부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렇게 변한줄 몰랐네요. 팔도잔디를 밟으며 미래를 꿈꾸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 허정도 2010/06/25 07:04 address edit & del

      예,,, 한일합섬의 영광은 한 때의 신기루가 되어 우리 곁에서 사라졌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2009/12/13 21:11

내서읍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다섯 번째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내서읍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창원읍성의 서쪽지역 중 내륙 쪽은 내서(內西)면, 바닷가인 현재의 마산시내지역은 외서(外西)면이라 불렀다.
외서면은 마산부가 되어 실명(失名)했고 내서만 살아남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중리’라고 알려진 내서읍에는 현재 중리, 안성리, 평성리, 호계리, 용담리, 상곡리, 원계리, 삼계리, 신감리, 감천리 모두 10개 리가 있다.


                         <1926년 조선교통도에 나타난 내서지역>

                      <1956년 한국지형일람도에 나타난 내서지역>

집결지는 중리 역,
12월 12일, 오후 1시반이었다.
탐방은 중리역을 기준으로 광려산 쪽으로만 방향을 잡았다. 아래 호계리 쪽은 시간이 없어 포기하였다.
탐방대원들의 얼굴을 밝았고, 기대감에 찬 눈빛이었다.
인원도 늘어 모두 3-40명이나 되었다.

창원대 사학과 남재우 교수가 시간을 내 해설을 맡았다.
내서읍에 아파트가 들어섰던 초기부터 최근까지 이곳에서 살았다는 게 초빙 이유였다.
“선진도시에서 살아보려고 창원으로 갔는데 통합된다니 괜히 옮긴 것 같다”는 조크로 시작된 남 교수의 내서 설명은 넓고 깊었다.

중리 역에서 길을 건너 함마대로(마산 함안 간을 연결하는 큰 길이라는 뜻 같다)를 따라 동신아파트 쪽으로 간 후 광려천을 따라 걸어 올랐다.

내서에서 이 길을 걸어보는 것은 처음.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와보았지만 차속에서만 옮겨 다녔지 길게 걸어본 적은 없었다.

제일 먼저 우리를 맞은 것은 동신아파트에서 흘러나오는 폐수의 악취였다.
모두 코를 막으며 불쾌감을 노출했다.
오수 우수를 분리하지 못한 결과일 터.
어디가나 이 문제에 자유로운 하천이 없다.

광려천 변의 간선도로는 자동차를 위한 도로라 걷기도 힘들었고 걸을 수 있는 조건도 좋지않아 뒷길로 들어섰다.
차로에 비해 턱 없이 좁은 보도도 문제였지만, 그 좁은 보도에 시설물이 버티고 있어서 걸을 기분도 나지 않았다.

뒷길은 괜찮은 편이었다.
오래 전부터 내서읍에 존속했던 자연마을의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고, 산자락도 가까워 걸을 만한 분위기였다.
군데군데 아무렇게 쳐 놓은 텃밭 경계막이 분위기를 망쳤다.
학교 인근이었는데 아이들을 보더라도 어른이 할 짓은 아닌 듯싶었다.



상곡리와 삼계리를 걸으면서 그간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보았다.

상곡리의 서대(西臺)는 처음 보는 형식의 재단이었다. 
망국의 한을 애통하며 1937년에 세운 재단이다.
비석 곁에는 마치 나라 잃은 슬픔에 잠겨 고개를 떨군듯한 또 다른 비석 서대기(西臺記)가 있어서, 당시 식민지 백성의 비통함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삼계리에서는 잘 알려진 마을 숲(삼풍대공원)에 가 잠시 앉았다.
생태해설가인 최승미 선생이 실력을 발휘, 수종과 수령 그리고 나무에 깃든 새들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했고 많은 박수를 받았다.
가운데 선 느티나무는 족히 2-300년 되었다니, 망해가는 조선과 일제기와 전쟁기 등 격동의 세월을 말없이 지켜본 나무 아닌가.
공원 복판에는
‘삼풍대’ 비석 곁에는 ‘광려산 철쭉 입에 물고 삼풍대 천년 숲 바람에 땀 식히던 곳······’ 으로 시작되는 근대 마산의 대표적 시인 월초 정진업 선생님의 ‘삼풍대소사(三豊臺小史)’라는 시가 돌에 새겨져 공원을 지키고 있었다.



원래의 모습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마을은 달성 서씨 집성촌이었던 원계마을.
지형상 한쪽으로 비켜있어서 아파트단지로 개발되지 않고 단독주택지로 이용되면서 원형이 살아남은 것 같았다.
일부 담장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이끼 낀 낮은 담들이 ‘원계마을’의 연륜을 말해주고 있었다.
스레이트 지붕이라 원형이랄 수는 없지만 초가였을 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낮은 산들과 그 안에 옹기종기 어깨 맞대며 앉아있었을 집들과 집, 원계마을의 옛 모습이 상상되었다.
새로 지은 콘크리트 단독주택들의 부조화가 눈에 거슬렸다.

시간 탓에 신라고찰 광산사까지는 가지 못했다.
탐방을 끝내고 내서를 생각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 오래된 습관이다.

사람이 자그마치 8만 명이다.
함안군이 6만 6천 명, 의령군이 3만 명이니 내서읍 인구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다. 시로 승격된 밀양시 인구가 11만 명밖에 안 된다.

60년 대 이후부터 시작된 도시의 인구집중화 현상은 곳곳에 소위 주거형 인공도시를 탄생시켰다. 지금은 금싸라기 땅이 된 서울의 잠실 대단지를 시작으로 인근의 일산, 분당, 광명, 부천 등 인구100만을 넘나드는 대 도시들의 탄생배경이 모두 그렇다.
우리 지역에서는 김해시의 장유와 마산시의 내서가 대표적인 사례다.

베드타운이라 일컫는 소위 주거형 도시는 산업과 주거를 분리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는 도시이론에서 시작되었다.
산업지역은 산업지역대로, 주거지역은 주거지역대로 그 목적에 맞는 자연적 환경적 최적상태를 유지시킴으로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시도된 도시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과 달리 직주분리에는 많은 문제가 뒤따랐다.
엄청난 양의 자동차가 필요했고 대량의 연료가 소비되었다. 광대한 도로가 있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환경과 에너지문제 등에서 지속가능한 도시형태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개념이 자족형 도시다.
직장과 주거가 동시에 가능하고 교육과 문화시설도 충분히 갖추어진 도시를 말한다.

내서읍의 도시적 성격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적절한가?
주거형 도시인가? 자족형 도시인가?

아파트가 숲처럼 들어차고 주민 대부분이 내서읍이 아닌 곳에 직장이 있다는 사실이 주거형 도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마산벨리와 내서공단 등을 생각하면 자족적 성격이 없지도 않다.

미래의 도시발전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도시의 성격규정은 내서읍이 처해있는 입지조건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내서읍은 일부 자족형 성격이 있지만 주거형 도시로 규정하고 발전 방향을 잡는 것도 좋다고 본다.
주거에 필요한 공간 외에 일터를 더 이상 갖추기에는 공간적 한계가 많기 때문이다.

혹자는 주거도시가 산업도시에 비해 조성과정이나 조건이 손쉬운 것 아니냐고, 경쟁력이 낮은 도시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다.
주거도시야 말로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들로 채워져야 될 가장 높은 수준의 도시다.
교육, 문화, 예술, 복지, 체육, 휴식, 유통, 위락, 심지어 종교시설까지 충분히 갖추어야 되는 고급도시가 주거도시다.

과연 이런 시설들이 내서읍에 충분한가?
아니면 충분히 갖출 여건은 되어 있는가?
그도 아니면 주거형 도시조건을 갖출 준비는 하고 있는가?

답은 ‘아직’이지만, 주거형 도시로서의 조건은 좋은 편이다.
내서를 아우르고 있는 산과 물의 자연조건과 인근 마산 창원 함안과의 적당한 거리 등 입지조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얼마든지 품격 높은 주거도시로 발전시킬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그 가능성을 지키기 위해서 뿌리쳐야할 것이 있다.

'인구의 유혹'이다.
더 이상 사람을 끌어드리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람 수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다.
'인구의 유혹'에 빠지면 내서읍의 미래는 어둡다.
단지 잠만 자는 하나의 거대한 주거용 게토가 될지도 모른다.
사람을 늘일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시설을 늘여야 한다.
인구 조절에 실패하면 제아무리 시설을 공급해도 삶의 질은 나아지지 않는다.

살아 숨 쉬는 도시가 되어 부러움을 살 것인가?
앞뒤가 막혀 버린 거대한 숙소가 되어 눈총을 받을 것인가?
그 선택은 행정과 주민의 손에 달려있다.

초겨울 토요일 오후,
당산나무 아래서 탐방대원들과 함께 원계마을의 옛 돌담을 바라보며
‘10년 100년 후의 이 마을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한가롭게 상상했다.

겨우 5시 반인데 산 밑이라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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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서 삼계 주민....(학생) 2009/12/13 22:22 address edit & del reply

    글 잘읽었습니다. 오늘 다녀 오셨다 가셨나요..? 진짜 내서 인구는 많긴 많은것 같습니당... 삼계 호계 중리만 합쳐도 이건뭐....옛날부터 여기 살았는데 옛날엔 광려천에 깨끗한 물도 많이 흐르고 했는데 요샌 많이 없어졌네요...ㅠ.ㅠ 이 시골마을도 점차 커진다는것에 한편으론 뿌듯하고 한편으론 씁쓸하네요.....좋은 자연 환경이 많이 사라진다는것에 대해서...

    • 허정도 2009/12/13 23:06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내서가 좋은 도시로 변하기 바랍니다.
      자연조건은 정말 좋았습니다.
      원계마을 흙담이 눈에 선하네요

  2. wonhaw 2009/12/14 10:17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네요.
    마산에서만 30여년을 살다(그중 5년은 중리현대거주) 타향살이 하는 40대의 아줌마입니다.

    회원동 500번지, 내가 다니던 회원국민학교 인근이겠죠?

    화란주택 -국민학교 때 담임이 거주하던곳인거 같은데.

    삼풍대,광교천 , 동신아파트 ....

    옛생각을 잠시 하게 하네요.

    • 허정도 2009/12/14 11:06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저는 회원국민학교 20회입니다.
      500번지에사 태어났고요.
      방문감사드립니다.

  3. 똑바로 2009/12/14 10:34 address edit & del reply

    꼭 함께 하고 싶었는데 아이 둘을 데리고 갈 수가 없어 맘을 접었습니다.

    글을 보니 참가 했었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 허정도 2009/12/14 11:07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니 '누구실까?' 궁금하네요.

  4. 천부인권 2009/12/14 12:30 address edit & del reply

    희미해지는 기억의 한켠을 보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대의 비석이 특히 인상적입니다.

    • 허정도 2009/12/14 12:53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우리 주변에 재미있는 것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5. 노치환 2009/12/14 15:21 address edit & del reply

    올리시는 글 너무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오래된 자료들 구하시는게 보통 일이 아니실텐데
    마산을 연구하시는 그 마음 너무나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찾다 보면 개발보다 더 좋은 구경거리와 얘기거리로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도시이야기에 흥미를 더 가지게 됩니다...
    앞으로도 우리 지역의 좋은 이야기 계속 부탁드리겠습니다...

    • 허정도 2009/12/14 16:12 address edit & del

      방문 고맙소.
      함께 마산 걱정합시다.

  6. 김성준 2009/12/14 18:05 address edit & del reply

    내서를 방문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고생많으셨구요!
    내서에서 초,중학교를 다닌 저로서도 머리로만 걱정해온 한사람으로서,
    내서읍의 미래를 걱정하시는 모습에 부끄럽기도하지만,누군가가 해야할일이라면
    너와 내가있을수없다는 생각에 모든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허정도 2009/12/14 18:08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내서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니 물어보겠습니다.
      오래 전에 '내서동중'이라고 있었는데 혹시 그 학교 출신인가요?
      그 학교의 위치가 어디였는지요?

  7. 김정수 2009/12/14 23:17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도시탐방대에 가입만해놓고 한번도 참석못한 불량회원입니다.
    내서에는 제가 알지 못하는 풍경들이 많네요.
    서대와 원풍대공원, 증산서원은 아직 들어본 적도 없는 곳인데...
    나중에 시간내서 한번 가봐야겠네요.
    참, 배울게 많은 탐방길인데 시간내는게 쉽지 않네요.

    • 허정도 2009/12/15 08:36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다음 여섯번째 탐방에는 꼭 참석하시죠.
      참 유익하고 재미있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2009/11/30 01:00

마산시 회원동 500번지


11월 28일(토) 오후,「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네 번 째 길을 걸었다.
마산시립박물관 앞마당에서부터 길을 열었다.
벌써 네번째라 낯이 익었고, 처음보는 얼굴도 있었다.

성덕암→회원현성→환주산 정상망루→성문→일제기 화장장터를 거쳐 한강 정구를 기려 세운 관해정을 둘러본 뒤 산복도로를 길게 걸어 회원동으로 왔다.

회원동 코스는
화란주택→회원천→정자나무와 비석들→회원동 500번지 골목길→철도시장→구 창신학교 터까지 였고, 이어서 북마산역 터와 노비산을 끝으로 네 번째 일정을 마쳤다.



오후 1시 반에 시작된 도시탐방은 5시 15분, 모두 3시간 45분 걸려 끝났다.
걸은 길은 대략 5-6킬로미터 정도.
스스로 원해 걸은 탓인지, 어느 한 사람 다리 아프다 투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학생, 공무원, 주부, 사업가, 회사원, 각계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고 20대 초반에서 50대 후반까지 연령 폭도 넓었다.
지적 호기심이 많은 탓인지 모두들 관찰과 해석에 열중했다.
선선한 바람에 늦가을 하늘은 높았고, 웃음 섞인 말들이 훈훈하고 즐거웠다.

많은 것을 보았지만 두 가지만 쓴다.
먼저 회원천.

회원성당 앞 회원동 8거리 인근 하천.
허연 폐수가 찐득히 흐르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은 역겹다고 했다.
차마 오래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이도 있었고 코를 막기도 했다.

마산시가 야심차게 생태하천을 계획하고 있는 상류다.
하천 전체를 치면 중상류 정도지만 도시지역만 보면 최상류나 마찬가지다.

며칠 전 마산21포럼이 주관한 토론회에서 마산시는 교방천 회원천 삼호천 산호천 광려천 등 마산의 주요 하천을 생태하천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한 방청객이 발언권을 얻어 ,
“생태하천이 완공되더라도 사실상 생물서식은 불가능하니 사업명칭을 하천정비사업 정도로 바꾸어야 되지 않느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안일한 생각.
상류의 썩은 물이 내려갈 텐데 생태하천은커녕 하천정비사업이라도 제대로 될까?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너도 나도 한마디 씩 했다.
"이렇게 더러운 물이 내려가는데 생태하천이 될까??"
"이것부터 해결해놓고 다른 걸 계획해야지, 어휴~~"

원인은 간단하다. 우수와 오수 분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단순한 이유이지만 도시의 지하관로가 워낙 복잡해 바로잡기가 어렵다.
몇년 전부터 마산시 전역에 우오수 분리공사를 한다고 했으나 회원천의 수질은 큰 변화가 없다.

어떻게 구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 썩은 하천 그대로 두고 생태하천 만든다며 하류에서 공사를 시작할 런지.
상식만으로 알 수 있을 터.
상류가 썩었는데 하류에 생태하천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는.

오래 전, 마산 하천을 두고 쓴 글 한 조각을 소개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별 달라지지 않았다.

························
그것은 시궁창이었다.
10분 정도 걸으니 역한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났다.
슬펐다.
썩은 하천냄새 때문에 구토가 나는 도시에 살고 있는 내가 슬펐다. ························
오늘도 마산시 청사 정면에는 이 도시를 ‘세계 일류’로 만들겠다는 구호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을 터.
세계 일류, 그 환상의 야무진 꿈을 생각하니 더욱 슬펐다.
························
<경남도민일보 칼럼, '슬픈 도시' 중 / 2003년>

       <회원천 / 2009년 11월 28일 오후 4시반 촬영 / 회원성당 앞 8거리>


다음은 회원동 500번지
, 그 골목길.

폭 1-2미터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는 걷기 힘든 길.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집안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이 신기해 입술을 뾰르퉁 모으기도 했지만 내게는 오래된 과거의 익숙했던 놀이터였다.

공동화장실을 지나 교회 담장을 돌고 공동우물터, 대장간, 두부공장, 이발관, 구멍가게를 지나 내가 살던 옛 집에도 가보았다.
일부러 간 건 아니고 탐방코스 중 자연스레 지나게 되었다.

아버지께서 직접 지은 집.
30년간 살았으니 내 마음의 뼈와 살이 묻어있어 결코 잊지 못할, 잊어서도, 잊을 수도 없는 좁은 골목과 낮은 집,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나서 자랐고, 결혼하여 신방을 꾸몄고, 지금은 서른하나 스무아홉이 된 두 아이를 낳고 길렀던 집이다.
이 집과 골목길, 그리고 어린 시절에 대해 쓴 글이 두어 편 있다.

경상남도 마산시 회원동 500번지.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빈민촌이었지만 부끄럽지 않은, 내 삶 전체에 축축이 젖어 있는 몸과 마음의 고향입니다.
························
회원동 500번지는 일본 군용창고와 마구간이 있던 곳인데, 해방 이후 마산항을 통해 일본에서 귀환자들이 떼로 몰려와 거주하면서부터 사람 사는 동네가 되었습니다.
························
10대가 되도록 회원동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산자락 대밭의 후드득거리는 바람 소리를 헤치며 다녔고, 해가 떨어지고 나면 어둑어둑한 골목길에서 편을 갈라 연탄 부스러기를 던지며 싸움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
자장면을 처음 먹어본 게 고등학교에 가서였으니 중학교에 다니도록 나의 세계는 회원동 작은 공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책 읽어주는 남편' 중 / 2009년>

어릴 때 살던 집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나는 좁은 골목길 끝의 낮은 양철지붕 조그만 집에서 30년 쯤 살았다.
흙 놀이에서 축구경기까지 가능했던 그 골목길은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회상 장치다.
전에는 컬러였는데 지금은 흑백으로 보인다.
나는 일 년에 두어 번 쯤 그곳을 간다.
혼자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내와 함께 가기도 하는데 그때는 아내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 토막 해준다.
내 어린 날의 흔적을 되새김질할 수 있는 그 작은 집과 좁은 골목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공간이다.
재개발로 내 추억의 장소가 사라질 것이라 걱정이다.

장소란 바로 이런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오래 전의 추억을 만나게 되는 곳. 과거 속에서 지금의 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
문신예술과 도시의 장소성' 중 / 2007년>


사용자 삽입 이미지
<회원동 500번지 골목길 / 세번째 네번째 사진이 내가 살던 집, 세번째 사진의오른쪽에 지붕 끝만 보이는 낮은 지붕이 30여년 전 정미라와 신방을 차렸던 방>


5시 15분.
탐방이 끝났다.
노비산 언덕에 올라 옛 시인의 노래를 불렀다.

          <옛 동산에 올라 >

내 놀던 옛 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지고 없구려

지팡이 도로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려



지금은 주거지가 되어버린,
그래서 그 땅에 서린 역사도 문학도 추억도 모른 채 아스팔트 포장길을 무심코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곳.
옛 동산과 그 큰 소나무도 없어졌고 키를 재려는 새 솔도 남아 있지 않다.
스토리텔링이라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생각하니 아쉽다.

사람 없는
노비산 언덕,
늦가을 저녁 바람이 스산했고 발 아래 도시는 회색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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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진 2009/11/30 16:54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발품을 들여야 생각이 여무는 것 같습니다.
    생각이 깊은 도시는 길어다니면, 여러가시 생각이 떠 오르는 도시인 것 같습니다.

    • 허정도 2009/11/30 17:10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시간되면 함께 걸어보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2. 이진규 2009/12/01 09:35 address edit & del reply

    회원천이 저토록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무심했던 마산시민이 도시탐방대의 걸음뒤에서 고개를 떨굽니다.
    역사와 문화와 환경을 아울러 관찰하고 고민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도시탐방대 화이팅!!!

    • 허정도 2009/12/01 10:38 address edit & del

      다음 탐방에는 같이 갑시다.
      고운 색시도 함께.

  3. 구선미 2010/04/13 17:45 address edit & del reply

    아! 내가 살던 회원동500번지. 초,중,고를 다니면서 친구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던 내 고향,

    내 집... 지금은 결혼한지 18년째,이제 내가 내아이를 위해 서울 강남에 살고 있네요.

    다시 한번 가보고싶은 회원초등학교길, 친정부모님이 살고 계셔도 마음놓고 가지를

    못하네요. 사진을보니 가슴한쪽이 아련합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 허정도 2010/04/13 18:12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합니다.
      어디서 살더라도 회원동 500번지의 끈질긴 기질 잃지 마세요.

  4. 구선미 2010/04/13 18:21 address edit & del reply

    저기 보이는 목욕탕 굴뚝이 남일탕인가요?

    • 허정도 2010/04/14 10:42 address edit & del

      남일탕 아니고 정자나무 아래 쪽입니다.

  5. 구선미 2010/04/13 18:24 address edit & del reply

    우리집은 공중화장실쪽에 있었는데, 지금은 친정아버지가 팔거리로 이사를 하셨어요

    • 허정도 2010/04/14 10:44 address edit & del

      나도 공중화장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았습니다.
      지금도 팔거리 가까운 곳에 살고 있습니다.
      팔거리의 위치가 옛날에는 회원동 아주 윗쪽이었는데 지금은 동네 한 복판입니다.
      세월에 따라 사람도 바뀌고 도시도 많이 바뀌죠.

  6. 양동환 2010/07/04 10:40 address edit & del reply

    전 천지리치빌 삽니다
    마산동중학교 다닙니다

    • 허정도 2010/07/04 15:17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방문 감사드리고요.

2009/11/25 00:32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세 번째 참석 후의 글이다.
원마산(마산포)에 자연취락이 형성되면서 생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1760년,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된 후 마산이 도시 형태를 띠면서 도시공간의 성격도 형성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마산창 주변은 공공업무지구로, 현재 황금당 옆 골목길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동성동과 오동동 즉 코아양과점 뒤편 일대는 배후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는 루쉰의 말처럼,
마산포에도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자연취락 특유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옛 마산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골목길>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원마산의 좁은 골목길들은 멀게는 250년 가깝게는 200년이 족히 된 마산사람들의 ‘길’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곳 사람들이, 때로는 조창 쪽으로 때로는 해변의 선창 쪽으로 아침저녁 부지런히 다녔던 바로 그 길이다.
단지 길로서만이 아니라 마산 선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남성동 성당 옆 좁은 내리막 길도,
마산사람 누구나 친숙한 전설적인 떡볶이가게 ‘복희집’ 앞길도,
삼겹살로 유명한 삼도식당 골목도,
홍화집과 골목식당 길도, 아구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성동 좁은 골목길도,
옛 마산사람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것만큼 느낀다’고 했는데,
이 좁고 보잘 것 없는 골목이 ‘조선시대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사람들은 무심코 길을 지난다.

도시탐방대원들과 골목길 내력을 이야기하고 복원도와 비교확인도 하면서 이 도시의 지난 시간을 맛보며 함께 걸었다.
간간이 들리는 옅은 탄성과 함께 탐방의 즐거움이 거리를 메웠다.



         <위 부터 남성동성당내려가는길, 삼도식당 길, 복희집, 홍화집 길>


<마산사람들의 자랑이었던 「원동무역」>

탐방길 시작한 후, 마산창(馬山倉), 매립 전 해안선, 어시장의 진동골목, 대풍골목, 서굴강, 동굴강을 지나 도착한 곳은 원동무역주식회사.

원동무역은 1919년 9월 독립지사 옥기환 선생과 명도석 선생이 마산 최초로 설립한 회사다.
현재 남성동 91-1번지에 남아 있는 사옥은1927년 8월에 착공해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이다.
영욕의 세월을 지내고 외피만 바뀐 채 오늘도 말 없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계한 사람이 누구이지 시공한 이는 또 누구인지 알길 조차 없지만 세련된 근대미의 격조 높은 이 건물은 일제기 마산포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껏 채워준 건물이었다.
이 회사에서 남긴 이익금의 일부가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로,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갔다고 한다.

옥기환 선생은 해방 후 초대 마산부윤(마산시장)을 지냈고, 허당 명도석 선생은 건준에 참여하는 등 해방 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봉암로에 가면 허당 선생의 추모비도 있다.
마산이 배출한 주요인물 중 친일이니 친독재니 궂은소리 때문에 기념사업에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삶에는 흠결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암흑기의 자랑스러운 마산 어른이시다.


          <표지석 / 원동무역의 본래 모습 / 현 상태, 3층부분은 뒤에 증축>


<원마산 복원도 제작>

10여 년 전, 도시연구를 하면서 원마산(마산포)의 도시형태를 복원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를 이용해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해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했던 작업이 끝난 후 복원도를 들고 시내로 나갔다. 실제상황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현장 확인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골목골목 다니며 현장과 도면을 비교하면서 두 번 놀랐다.
도면상 복원한 작업의 정확도에 스스로 놀랐고, 복원도에 나타난 그 복잡한 골목길들이 그때까지 대부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난 토요일, 도시탐방대가 걸었던 길은 바로 그 때 확인되었던 길들이었다.
조그맣게 복사된 복원도와 창동 남성동의 골목길을 대조하면서 탐방대원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즐거웠다.

<1908년 조선통감부 철도관리국에서 발행한 '마산전도' / 오른쪽 단선으로 표시한 길들이 원마산 골목길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마산, 1/10,000지도' / 새로난 신작로와 원래의 골목길들이 그려져 있다.>

<복원도 / 1910년 경의 것이지만 도시계획이 없었던 시기라 조선시대로 까지 추정가능하다>
    <원마산의 옛 길 / 노란 색이 복원도에서 확인된 길인데 대부분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뒤늦게 합류한 ‘창동의 산 역사’ 이승기 선생님의 창동과 극장과 영화에 읽힌 이야기가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웠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즐겁기는 매한가지, 지나간 마산이야기에 토요일 오후가 금세 지나갔다.





<도시에서 역사란?>

마음만 먹으면 현대기술로 어떤 도시라도 만들 수 있다.
넓은 도로를 뚫고 번쩍번쩍한 건물도 짓고 키 큰 나무도 얼마든지 심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를 급조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하고, 다음 세대에 잘 넘겨주어야 한다.

웬만큼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여행이란 것이 대부분 도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의 어떤 도시에서는 심지어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인 조계지까지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도시의 역사는 단지 옛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도시의 소중한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서부 개척시대의 술집 따위들까지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집주인에게 국가재정까지 지원하면서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산 도시의 역사를 모두 복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가진 도시에서 어떠한 역사적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이를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는 것은 심각한 도시적 비극이다.

창동과 동성동 일대에 남아 있는 골목길들은 자연취락을 원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며 마산의 도시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곳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이런 길을 만날 수 없다.
혹자는 꾸부러지고 좁은 골목길이 수치스러운 전근대적 모습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오늘의 마산이 있기까지 마산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았던 발자국이며 고금 모든 마산 사람들의 호흡과 땀이 녹은 생생한 기록이다.
그 역사적 가치는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한때 번성했던 마산 오동동이 최근 들어 점차 쇠퇴해지고 있는데 이곳을 살릴 길이 이 오래된 골목길 속에 묻혀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250년이라는 긴 시간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하루저녁 친구와 즐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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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09/11/25 09:46 address edit & del reply

    아침에 좋은 글 보고갑니다.
    특히 새로 작성한 원마산도로 지도가 좋습니다.
    이걸 들고 다시 옛길 탐사를 좀 해야겠군요^^

    • 허정도 2009/11/25 18:02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공부해야할 것도 많을텐데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신다고 고생이 많습니다.
      언제 날 잡아서 물메기탕이나 한 번 먹읍시다.

  2. 영영사랑 2009/12/01 00:20 address edit & del reply

    남성동,창동,복희집.. 떡볶이,오징어튀김.... 감동입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마산에는 골목이 많아 길을 잃었을때 어떻게 큰길로 나오는지? (하수구관따라 가다보면 큰길이 나왔어요 경험입니다) ?? 즐겁게 보고갑니다

    • 허정도 2009/12/01 10:40 address edit & del

      하수구관 따라가 아니라 하수구 두껑따라 아닌가요?
      내 눈에는 하수구 관이 안 보이던데......
      방문 감사합니다.

2009/11/16 13:42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유장근교수의 도시탐방대에서는 신마산의 조계지에 설치된 신작로를 따라서 유서 있는 건물들을 찾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현재 건물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건물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시간속의 여행을 체험하는 색다른 의미가 있을것 같았다.

특히 조계지내에 설치된 세관은 개항과 함께 설치된 시설로서 그 위치가 변천하는 과정과  건축의 이력을  알아보는 것을 통해서, 땅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추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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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지 지도 : 중앙하단부가 해관부지임(1907)

남성동 해관업무개시

해관은 110년 전 구한말인 1899년 5월 1일 마산항이 개항장으로 발족됨과 동시에 마산해관지서로로 창설되었다..
해관세무사는 조선말기 관세의 징수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개항장에 창설하였던 해관의 제반업무를 관정한 기관이다. 이후 해관이란 명칭은 1907.12.16부터 세관으로 개칭되었다.

마산해관지서가 처음으로 그 업무를 개시한 곳은 현재 남성동 제일은행 2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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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창원감리서가 있던 곳,조선식산은행(이후 제일은행, 1918)

마산항 개항에 앞서 1898년 5월에 외부대신 박제순을 통해 마산포 개항사실을 조선 주재 각국공사에게 통고하고 마산포에 있는 유정당에 창원감리서를 설치하였다.
  창원부윤 안길수가 개항을 위한 감리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그 별방에 마산해관지서가 남성동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

창포동 세관 이야기

이후 조계지내 가로가 형성됨에 따라 창포동 2가-31에서 1901년부터 업무를 보다가 1910년에 마산세관지서 건물을 지어 1946년까지 업무를 본 곳이다.

현재 수협이 있는 자리이며, 접안시설로 목조 잔교가 설치된 위치는 현재 창포경남맨션과 한백아파트 사이 길에 해당되는 곳이다. 당시 조계지 지도를 보면 이 두아파트는 바닷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해관이 있는 창포동은 조계지내에서 당시 영사관(현 경남대 평생교육원)에서 해안으로 향하는 길에 접하는 위치로 맞은편에 우체국(1902년 설립)과 함께 영사관과 업무연락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입지를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06년에 정부는세관의 해륙설비공사를 하기로 의결하고 08년에 추진하게 된다. 당시 공사예산액은 1만 천원으로 부두의 길이84.5M 돌제부 길이10M를 보완하여 등대를 설치하고 여기에 폭이 3.4M 길이9M의 목조잔교를 가설하고 해안의 세관구내를 간조면 위로 3.79M 와 5.76 높이로 땅을 정리하여  창고 1동을 세웠다. 해관 주위는 철조망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 1동도 신축했다. 마산항 최초의 항만시설이 완성된 것이다.


목조 잔교가 있는 해안 구내의 좌측에 목조 단층건물로서 아연도칠을 한 골함석을 지붕의 50평규모의 창고 한동이 있으며, 건평23평의 2층 목조건물인 세관지서장 관사 1동이 사진 우측에 나타나고 있다. 부두에 전신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은 1911년 이후에 촬영한 듯 하다.            
(마산에는 한일와사전기회사에 의해 1911년에 시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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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해관 목조잔교(1908-1910)

창포동에 소재했던 세관지서는 러시아식 단층 목조건물로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다. 정면은 포치(현관부분)를 두어서 박공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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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해관 마산지서전경(1910)

현재의 건물은 영생아파트와 1층에 수협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영사관에서 바로 보이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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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포동 해관위치의 현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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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관에서 영사관(경남대 평생교육원)을 바라본 모습

당시 세관과 영사관은 상당히 힘있는 사람들이 지나치던 길이었을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이 거리를 지나건만 그 때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런지-----

월남동 부두국 이야기

세관은 1943.12.18 폐청되고 조선총독부 교통국 산하에 부두국 소속됨에 따라 월남동에 월남동 46-4번지에 소재하는 부두국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창포동 세관이 이 곳으로 이전한 기록이 없다.
세관은 폐쇄되어도 마산항을 출입하는 모든 외항선들은 입출항은 일본인 마산세관장의 출입을 받아야 했던 것으로 보아, 양측에서 업무를 나누어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월남동 부두국 건물은 목조2층 구조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90년대까지 사용되었으나 해안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철거되었다.
 현재 타이어상점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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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동 부두국,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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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국 위치의 현재의 모습

해안도로의 확장에 의해 필지가 짤려지고 일부에 건물이 남은 모습이다.
이마저도 주변 아파트 재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있어 땅의 흔적도 없어질 지경이다.

월남동 세관이야기

해방이후 1946.08.19 세관은 월남동2가 47번지(현재 마산식당)로 이전하였다. 여기로 세관을 옮긴 이유는 해방까지 해안의 매립에 부두가 현재의 해안도로변까지 확장됨에 따라 업무기능상 동선의 편의를 고려하여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월남동 마산식당 청사는 해방후 마산교회로 사용하던 것을 미군정청과 마산세관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여 사용하였고 한다.
그리고 원래의 창포동 해관자리가 59년에 마산교회의 자리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마산교회와 임대차 계약이후 창포동 건물과 교환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산식당의 건물은 다행히 당시의 구조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의 이력을 알아본 바 [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 경상남도, 2004에 의하면 건축물 관리대장상은 1939년 등재되어 있으나 건물은 1905년에 지어진 것을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개인영업(1939년 기준)에서 이 건물은 일이삼식당이란 상호로 古本露라는 사람이 요리집을 경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상공회의소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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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마산식당 모습

당시 두월동에 여관이 유명한 곳으로서 그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여관은 요리와 숙박을 같이하는 지금의 호텔같은 기능을 하였기에 지어질 당시는 세관과 같은 업무기능은 아니었지만, 부두가 있는 해안으로 접근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건물은 원형이 잘보존 된 상태라서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주변개발에 포함되어 곧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안타까울 뿐이다.


월포동 세관이야기

55년 8월 현재의 세관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 1부두, 2부두, 중앙부두가 확장된 상태이었으며, 현 청사 부지는 당시에 보세지역으로 1951년 3월 2일 고시되었으나, 보세구역 및 창고는 조국해방에 따른 귀환동포 임시거처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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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세관으로 사용된 월포공립초등학교(1955)



당시 임시청사로 사용된 건물은 월포공립국민학교로 사용중이던 건물을 미군이 보급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55년 4월 19일 징발한 것을 임시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건물을 보수해 사용하다 57년 사라호 태풍으로 넘어지자 1958.4.1.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을 신축했다. 지금의 청사는 1995년 1월에 신축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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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건축한 벽돌조 2층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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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신축한 현재의 마산세관

그나마 현재의 청사마저도 지방합동청사 추진계획에 의해 옮겨질 신세에 놓여 있다.

신포동 2만㎡ 부지 이달 입찰 공고·내년 6월 착공
2012년 완공…세관·검역소 등 6개 정부기관 입주
마산 서항 지구 해양신도시 조성 예정지에 산재해 있는 6개 정부 기관을 한 곳으로 이전시키기 위한 지방합동청사가 신포동 1가 78 일대 2만6155㎡에 2012년까지 들어선다. 마산시는 3일 국비 482억원을 투입해 건물 연면적 2만4600㎡ 규모의 지방합동청사를 내년 6월 착공, 오는 2012년 3월 준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건물은 가만히 있으려 하나, 사람이 가만히 두지 않는 꼴이다.
 
건물과 땅의 흔적들을 생각하며

한 건축물의 110년간의 이동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사람과 같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동을 하게 되고 다양한 건물의 형식을 통해 변모하는 것을 보았다.
세관건물은 물리적인 위치의 변경을 가지게 된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한 장소에서 지어지는 건물의 수많은 흔적들도 누군가는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화산재에 묻혀있던 폼페이라는 도시를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독일의 요한 빙켈만 같은 고고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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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용팔 2009/11/16 08:49 address edit & del reply

    시간이 지나고 그 발자취들이 희미해지는것을 보니 왠지 마음이 허 하네요.

    • 삼식이 2009/11/16 10:55 address edit & del

      혹시 내 친구 용팔인지요?
      우리 지역에서 사라져간 것들을 하나씩 챙겨 놓으면, 다음에 허전함이 덜하겠지요!

  2. 2009/11/16 11:31 address edit & del reply

    그날 따라 신종플루도 아닌 것이 몸살기운이 심해 참석하지 못했네요. 아쉽군요. 그래도 이렇게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삼식이 2009/11/16 11:55 address edit & del

      몸관리 잘하시죠, 이번주는 이승기 선생을 섭외중입니다. 아마 창동, 오동동의 숨어있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저도 기대가 됩니다.

  3. 류창현 2009/11/16 22:50 address edit & del reply

    도시탐방대 카페에도 올려주세요.

  4. 임민규 2009/11/23 18:32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내용 감사합니다.퍼갑니다

2009/10/26 07:39

마지막황제 순종의 행차길


경남대 유장근 교수의 「마산도시 탐방대」에 참가하여 20여 일행들과 '진주가도'를 걸었다.

'진주가도'는 근대기 이전에 진주와 창원을 잇는 큰길이었다.
현재의 소답동에 위치했던 창원도호부에서 마산포를 거쳐 자산리 완월리 신월리 월영리를 지나 밤밭 고개를 넘어 진동 양촌을 거쳐 진주로 가던 길이다.
롯데그룹 소유인 구 크리스탈 호텔 앞길인데 장군동 거쳐 중앙동 신월동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가장 좋은 도시는 ‘걷고 싶은 도시’라 했는데,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좋은 길은 아니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행차길-

100년 전인 1909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즉위 후 몇 차례에 걸쳐
지방 순행에 나섰다.

순종황제의 남부지방 순행은 1909년 1월 7일~13일까지 6박 7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황제의 마산 순행 일정에 대한 『승정원일기』순종 3년 1월 5일자 기록이다.

「…… 9일에는 부산에 머무르고, 10일 오전 9시에 부산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25분에 마산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11일에는 마산에 머무르고, 12일 오전 8시 40분에 마산 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45분에 대구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원래 통치자의 순행은 지방의 사정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하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내각과 통감부 관원들을 대거 수행하고 순행에 나선 것은 황제의 권위와 권력을 내세워 지방민들을 통제하려는 일제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 아닌가싶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순행의 정치적 해석보다는 융희 황제가 이곳 마산에 왔다는 사건에만 관심을 갖는다.

궁정열차를 탄 황제는 1월 10일 아침 9시에 부산역을 출발하여 9시 59분 삼랑진에 도착하여 마산이사청 이사관과 동래부윤의 알현을 받았다.

11시 25분 마산역(마산중부경찰서 건너 편 벽산 아파트 자리)에 도착하여 역내에 마련된 편전에서 잠시 쉰 후에 12시쯤에 바로 이토통감 이하 수행 관원들을 거느리고 어교를 이용하여 행재소가 마련되어 있는 마산이사청(현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중요한 관민을 만났다. 모두 일제 관리와 군인들이었다.

오후에는 창원부청(지금의 남성동파출소와 제일은행 일대)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경상남도 각 군 군수, 기타 고등관, 민간인 등을 만났다.

황제는 11일 하루를 마산에 머문 후 12일 화요일 오전 8시 40분에 마산역을 출발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파견한 제1, 2함대에서 예포를 각 21발을 발사하며 경의를 표시했다.

순종황제의 행렬을 보기 위해 마산에 이르는 철도변과 각 역에는 사람들로 넘쳤다.
약 3만 여명의 군중들이 모여 황제의 일행을 맞이하였으며 떠날 때에도 연도의 관민들은 각 역 및 그 부근에서 만세를 외치며 황제와 일행을 봉송하였다.

2박 3일 간의 순종황제 마산순행 중, 행재소와 창원부청 간이 가장 긴 이동거리였다.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남성동 파출소까지의 길이다.

당시에는 신마산 일부에만 근대식 직선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신마산에서 장군동 다리까지는 일제가 놓은 근대식도로를 이용했고, 장군동 다리부터는 진주가도라 불렀던 크리스탈호텔(전) 정문 앞길을 통과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로
「마산도시 탐방대」 일행과 함께 걸었던 길의 일부다.

봉건왕조 시대에 통치자가 마산을 방문한 것은 단 두 번이다.

고려시대 일본정벌을 준비하던 여몽연합군을 격려하기 위해 마산에 왔던 충렬왕과 100년 전인 대한제국 순종, 융희황제이다.
충렬왕이 마산에 머물 때의 기록은 상세하지 않다. 하지만 순종황제는 그렇지 않다.
수행자의 숫자와 직위, 어가 행렬, 궁정열차의 배치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다.



국화축제로 온갖 이벤트가 넘치고 있는 마산의 가을, 토요일 오후.

진주가도를 걸으며 이 길을 지났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지났던 길, 그 흔적의 역사 문화적 가치는 없는 것일까?
이 도시에 남겨진 과제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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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개항의 배경> 한국 개항의 효시인 부산에 일본단독조계가 설치된 이후 전국의 여러 도시에 조계(租界)가 계속 설치되었습니다. 1876년 부산에서 시작된 조선의 개항은 1880년대에 원산·인천·서울(*)·용산(*)·경흥(*)..

통합시가 배워야 할 창조적 도시디자인 사례(3)-빌바오의 도시재생

<통합창원시가 배워야 할 창조적 도시디자인 사례> (1) 8년동안 만든 도시계획-도쿄 도심재개발 (2) 도시정비계획 수립후 협의만 10년, 독일 에슐링겐 (3) "빌바오 효과"... 15년전 예견된 성공사례 (4) 민관협력으로..

마산만 워터프런트의 미래는?

두바이의 인공섬(팜 아일랜드) 프로젝트는 들어보셨나요? 총3개의 인공섬 계획 중 팜 주메이라의 모습이 공개된 후, 월드축구스타인 '베컴'이 이곳에 집을 하나 산다고 떠들썩하기도 했습니다. (※ http://blog.naver...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개항기'에 대한 글은 모두 10편으로 나누어 올릴 예정입니다. 도시문제에 시각을 맞추겠습니다만 개항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간략히 싣겠습니다. 이 글은 마산개항 직전의 국내외 상황을 소략하게 쓴 글입니다. <개항..

통합창원시가 배워야 할 창조적 도시디자인사례(2)-에슐링겐

통합창원시가 배워야 할 창조적 도시디자인 사례 (1) 8년동안 만든 도시계획-도쿄 도심재개발 (2) 도시정비계획 수립후 협의만 10년, 독일 에슐링겐 (3) "빌바오 효과"... 15년전 예견된 성공사례 (4) 민관협력으로 성..

여러분의 출근길은 어떠세요?

<출근길이 즐거우면 하루가 즐겁다> 가까운 거리면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할 것이고, 대중교통이 편리하면 버스나 지하철을, 규모가 큰 회사는 통근버스를, 이도저도 아니면 자동차를 직접 몰고 출근길에 나섭니다. 출근시간을 이용하는..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동해 원산, 서해 강경, 남해 마산> 18세기 후반부터 조창과 더불어 발달하기 시작한 마산포는 중서부 경남의 곡물과 남해안 수산물의 대표적 집산지로서, 화폐경제와 함께 성장한 굴지의 시장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마산포구에는..

통합창원시가 배워야 할 창조적 도시디자인 사례 (1)

(0) 시작하며 요즘 여러분야에서 '디자인(Design)'은 최근의 월드컵열기만큼이나 뜨겁고도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도시의 공공공간에 대해 우리 사회의 기대수준이 높아지고, 또한 도시공간에 대한 올바른 표현이 무엇인..

'내 고향 마산'이 없어집니다

'2010년 6월 30일 밤 11시 10분입니다' 내 고향 마산.... 까마득한 시절에 내면화되어 떼놓을 수 없는 ‘내 고향 마산....’ 인간의지로 불가능한 일이 ‘탄생’이라면 ‘내 고향 마산’ 역시 ‘탄생’처럼 숙명이었습니..

친환경 도시를 원한다면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할까?

11) 일본의 생태주거단지 방문기를 마무리하며 지난 4월초에 방문했던 일본 탐방을 글로서 정리하는데에는 약 10주에 걸쳐 이루어졌다. 블로그 연재를 하기위해, 방문시 받았던 자료와 사진의 정리를 통해 개인적으로 학습하는 계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