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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선일보4

김형윤의 <삼진기행> 1 / 1954년 4월 14일 (수) 오늘부터의 포스팅은 창원지역에서 평생 언론인으로 살다간 목발(目拔) 김형윤(金亨潤) 선생이 남긴 기행문이다. 마산일보(현 경남신문)에 실렸고, 기고자는 본명 대신 ‘H 생’이라 되어 있다. 제목은 「삼진기행」이며 1954년 4월 14일부터 23일까지 9회 실렸다. 당시 마산일보 사장이었던 김형윤 선생이 15명의 벗들과 함께 1933년 순국한 독립지사 '죽헌 이교재 선생'의 유족을 찾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을 찾았던 기록이다. 이 글의 가치는 이교재 선생과 유족에 대한 내용과 함께,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당시의 삼진지역(진동, 진전, 진북)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다. 김형윤 선생의 기고문에 맞추어 모두 9회에 걸쳐 포스팅할 예정이다. 원문 그대로 옮기지만 일부 고문(古文)은 읽기 편하게 고쳐 쓰고,.. 2019. 10.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2. 남선일보의 수난 122. 남선일보(南鮮日報)의 수난 일문(日文) 지방신문 남선일보가 경영난으로 세인의 동정이 쏟아졌다는 것은 별보(別報)와 같거니와 이 신문이 일반에 주는 성격상 인상은 하등의 정치적 재정적 배경도 그리고 국수사상이나 군벌 예찬 같은 그런 것은 아예 없고 말하자면 지방으로 전락한 자유주의자 몇 사람이 제작한 순수한 지방지라는 것이 적중할 것이다. 발행 부수와 보급 범위가 극히 좁고 경제적 기초가 없으니 사원의 보수와 신문사로서 항상 재고되어야할 용지마저 그날그날 허덕이는 판이니, 활자 개체(改替)같은 것은 일종의 몽상에 지나지 못한 형편으로 ‘루비’ 활자 전체가 폐자(廢字)가 되다시피 망가져서 교정원들은 비명을 울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시기가 마친 검열 당국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소화 천황의 즉위식.. 2016. 11. 7.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1. 경영난의 남선일보 121. 경영난의 남선일보(南鮮日報) 마산지방에서 발간하는 일간지(일문 4페이지)는 멀리 명치 38년 경에 마산신문으로 발행하다가 폐간, 그 후 명치 43년 경 경성일보가 발행권을 가졌다. 강용일(岡 庸一)이란 사람이 10년 계약으로 운영하였는데, 기계는 16혈(頁) 수동식, 소설은 일본서 지형(紙型)아닌 연판(鉛版)으로 들어오고, 사옥은 신마산 진일기계사 창고 옆에 있다가 다시 구 러시아 영사관(현 일성펌프공장)으로 옮겼으나, 기계에 모터 장치란 꿈에도 모를 때고, 족답(足踏)으로는 회전이 되지 않아서 기계공 4명이 수동을 하여 신문 한 장이 나오는 시간이 약 4초 내지 5초가 소요되었다. 기계공 4명 모두 유발자(有髮者)라 수동할 때 상방(相方) 2명의 상투가 수동 회수에 따라 꺼떡거리는 광경은 지금.. 2016. 10. 31.
김형윤의 <마산야화> - 95. 엄원도의 일본 의인 95. 엄원도(嚴原島)의 일본 의인(義人)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에 동경 고학생 중 거의가 무등산치(武藤山治)라면 기억할 것이다. 그는 종연방적회사(鐘淵紡績會社) 경영주인데 사회에 불행한 인물만 있으면 반드시 몇 푼을 등기 우송해 주던 사람이다. 중야(中野)인가 황천약사(荒川藥師)인가 문인(이름은 밝히지 않음) 2, 3인이 백구사(白鷗舍)라는 곳에서 자취생활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름 폭우가 지난 뒤에 백구사(白鷗舍)의 사람들은 한 묘안을 냈다. 즉 조선인 노동자의 합숙소인데 저번 수해로 노동할 길이 없어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는 무슨 범죄라도 해야겠다는 요지의 편지를 띄웠다. 인심 잘 쓰는 무등(武藤)은 긴급히 관할 경찰서를 통해 우선 50원을 가지고 임시 구조를 하라고 했다. 현금을 전달하려고 고.. 2016.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