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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0) - 강점제2시기

<1920년대는 마산포에 근대식 도로망이 확산기>

먼저 1930년 원마산 상황과 1920년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두 도면을 통해 이 시기 마산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근대식 도로가 여기 저기서 뻥뻥 뚤렸습니다.

지금의 코아양과 앞 도로, 오동동  문화의 거리가 그 때 생겼습니다.

두 도면의 내용을 비교 검토하여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발생한 도시 구조의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⑧까지의 번호는 1930년 토지이용도에 표기된 도로번호와 일치합니다.

① 먼저 현재의 창동 네거리를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도로, 즉 부림시장에서 코아양과점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남북방향의 삼성생명 앞에서 현 대신증권까지의 도로가 1923년 개설되었다.

② 이어 1924년에는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개설되었다.

③ 1926년, 삼성생명에서 대신증권까지로 이어진 도로가 아직 매립이 안됐던 동굴강까지 이어졌다.

④ 1913년 신마산에서 조창을 관통하며 개설된 현 남성동파출소 앞 도로는 그림4-20에서 추정할 수 있듯이 정차장을 끝으로 막다른 형태의 도로였으나 이 도로가 1927년 오산선창이 있던 오동동 해안까지 연결 개통되었다.

⑤ 토지이용도의 우측 상부 모퉁이, 즉 현재의 「프라자일번가」 건물 앞에서 오동교까지에 이르는 도로가 확장되었다.
이 도로공사를「부군연선도로개수(府郡連線道路改修)」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의 마산부 경계가 오동교까지였고 오동교를 넘어서면 창원군이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한 것이다.

⑥ 1927년에는 동굴강이 부분적으로 메워지면서 대신증권에서 내려오는 도로와 매립지의 도로망이 연결되었다.

⑦ 같은 해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 해안으로 연결된 도로와 남성동파출소에서 해안까지 연결된 도로가 이어졌다.

⑧ 1930년에는 오동동 파출소 앞을 남북으로 지나는 도로가 개통되었다.

⑨ 토지이용도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현 로얄호텔에서 전(前) 북마산파출소에 이르는 도로가 1924년에「구마산시구개정인가(舊馬山市區改正認可)」신청을 하여 이후 시행되었다.

이 도로공사는「停車場連線道路新設」이라고 했는데 이 도로가 교차하고 있는 현재의 육호광장이 바로 구마산 역(철도정차장)이었으며 이 길이 북마산 역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당시 날로 늘어나는 구마산 역의 통행량 때문에 도로가 개설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기록보존소 문서「도시토목공사(구마산시개정인가)」의 「문서번호 87-702, 필름번호 87-747」에 의하면, 이 도로 개설계획을 하는 이유에 대해 ‘구마산 시가는 대체로 도로가 협소하고 꾸불꾸불한 것이 심하며 차마(車馬)가 다니는 노선이 겨우 2-3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창원군 웅남면에 통하는 부군연선도로(府郡連線道路) 연장 309칸(間) 및 구마산 역과 북마산 역과의 연선도로(連線道路) 연장 207칸(間)은 그 일대의 교통상황을 고려해 볼 때 시공이 급하다고 판단되어 1924년 실행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어서 도로의 세부적인 구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도로는 위치상 당시 구마산 역과 북마산 역을 연결하는 도로였는데 이를 보아 두 역세권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처럼 도로가 신설 혹은 확장되면서 도로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위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도로 개설 이후 토지 소유권 변화가 생겼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①에서 설명한 창동 네거리를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도로, 즉 부림시장에서 코아양과점으로 연결되는 도로변(현재 마산에서 가장 번화한 도로 중 하나)의 일본인 소유 대지가 1920년에 비해 1930년의 토지이용도에서는 늘어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의 원마산은 근대적 도로의 확산기였습니다.

1910년대가 창동과 남성동 지역에 한해서 도로망이 건설된 시기였다면 1920년대는 중성동․오동동․동성동으로 도로망이 확산되면서 원마산 외곽으로 계획도로가 뻗어나간 시기였습니다.

이로써 이전까지 근대식 도로로 구획된 지역의 외부에 머물렀던 동성동이 구획 내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동성동에서 오동동으로 연결되는 지역, 즉 현재의 오동동파출소 부근까지 원마산의 도심권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회사령 철폐 이후 급증한 도시인구에 부응하고 자동차라고 하는 유통기구에 적절하도록 도시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앞에서 이미 밝힌바와 같이 1910년대 초반에 매립을 비롯한 도로개설사업이 집중적으로 진행된 원마산에는 그 뒤 1910년대 후반에 이르러 수성동에 일부 도로의 폭이 확장된 것 외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923년 이후부터 급속히 도로개설공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유는 당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던 시구개정사업 때문이라 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마산시사』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서도 많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마산부윤이던 사도리구(寺島利久)가 원마산의 도로망 건설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대대적인 원마산 도로 개설공사를 시행하였으며 이 시기가 원마산 도로 개설의 절정기였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마산시사』,『마산개항백년사』,『마산관련 논문』 등 여러 자료에서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이 주장의 근거는 추방사랑이『마산항지』에서 「마산부윤으로 사도리구 씨가 부임한 이래 도시가 현저히………그의 치적은 영구불멸…(馬山府尹寺島利久氏の着任以來の顯著なる․․․․․․寺島府尹の治積は永久不滅たり…」라는 내용 때문입니다.

물론 이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920년도의 토지이용도와 1930년도의 토지이용도를 비교해 보면 이미 1910년대에 이미 가장 중요하고도 중심이 되는 도로가 개설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동과 남성동지역에 근대식 도로가 개설되고 이 도로들이 매립지역의 신설도로와 연계되어 격자형의 도로구성이 시작된 것이 1910년대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1920년대를 도로개설 절정기로 보는 견해는 무리가 많다고 봅니다. 도로개설의 절정기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1910년대에 개설된 근대 도로망이 확산된 시기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1930년 기준으로 마산포의 도로율은 23.24%로 1910년의 14.57%, 1920년의 21.42%에 비해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부윤 寺島利久의 의지로 시행된 원마산의 집중적인 도로망 확산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입니다.

위 도면에 나타난 지역의 현재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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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9) - 강점제2시기

오늘부터는 1920년대 마산포(원마산)의 변화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 마산포는 근대식 도로망이 확산되는 시기였으나 도시시설의 수준은 낮았습니다.

<초가에서 콩기름으로 램프 불을 밝혔던 마산포>

일제하 마산의 유통시장은 원마산과 신마산 상가로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원마산(마산포) 지역의 상가는 남성동 제일은행 자리에 1910년대 새로 개설된 도로 주변이 중심상권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마산포 지역의 상권은 중심번화가인 남성동과 창동을 비롯해서 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형성되어있었고 부림시장과 그 주변 및 남성동 어시장 근처의 해안매축지에도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인들이 즐비했습니다.

그 때까지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곳 마산포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영했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1920년대 후반 경에는 구마산 역(현 6호광장 자리)의 유통기능 강화와 북마산 역의 신설 때문에 추산동과 상남동 및 교방동, 즉 현재의 북마산 쪽으로 범역이 넓어졌습니다. 또한 제법 규모 있는 점포들이 들어서서 상가지역들이 두드러지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1926년경 신마산의 대성동과 장군동의 전답 지가는 평당 2원 4-50전이었으며 비싸도 삼원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산포의 오동동 방면은 평당 20여원이었으며 전답도 4-6원에 이르렀을 정도로 가격이 높았습니다.

추방사랑은 『마산항지』에서, 이렇게 된 이유는 장차 원마산 지역이 크게 발달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마산포의 높은 땅 값에 비해 도시시설의 정도는 그 때도 매우 낮았습니다.

장전 순(長田 純)과 고수마공(高須瑪公)이 함께 펴낸 『마산현세록』에 의하면 마산포에 있던 건물은 대부분 초가였으며 그 때도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콩기름을 이용한 램프나 촛불을 사용하고 있었다고합니다.

1920년대의 원마산 변화를 지적도에서 찾아내어 1930년 당시 원마산을 복원한 도면이 다음 그림입니다.
이 도면은 1920년 토지이용도를 기준으로 그 이후 10년 동안 시행된 매립과 도로의 개설 및 폐쇄, 대지의 분할과 합병, 소유 변경 등의 변화를 지적도와 토지대장을 이용하여 실증한 것입니다.

그 밑의 두 도면은 1920년과 1910년 도면입니다.
10년의 시차를 두고 표현된 도면이니만큼 비교해보면 마산포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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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3) - 강점제2시기
2012/04/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4) - 강점제2시기
2012/04/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5) - 강점제2시기
2012/04/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06) - 강점제2시기
2012/04/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7)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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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1) - 강점제1시기

-일본인의 마산포 토지 소유-

남성동의 매립으로 1912년 당시 전체면적의 31.4%이던 일본인 소유 토지가 1920년에는 35.0%로 변했습니다.

매립 직후에는 매립시행자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이 전량 소유함에 따라 41.1%로 급증하였다가 35.0%가 된 것입니다.

이 시기 한국인들이 소유한 토지는 1912년 당시 63.2% 이었으나 1920년에는 62.5%로 줄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토지소유변화를 단순 비교하면 일본인 소유의 토지는 3.6% 증가하고 한국인 토지는 0.7% 줄어든 셈입니다.

아래 표는 1912년과 1920년의 마산포 토지소유 변화를 나타낸 것입니다.

 구분 정부. 마산부  기업. 단체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게
 필지수  5  10 853   271 18   1,157
 비(%)  0.4 0.9   73.7 23.4   1.6 100.0 
 면적 5,783.54  1,299.18  107,051.13  53,228.14  2,105.79  169,467.77 
 비(%) 3.4  0.8  63.2  31.4  1.2  100.0 
 필지평균  1,156.71 129.92  125.50  196.41  169.99  146.47 

 필지수 10  981 274 12  1,286
 비(%)  0.7 0.8  76.3  21.3   0.9  100.0
 면적 760.99  2,714.05  116,320.88  65,000.11  1,323.64  186,119.67 
 비(%) 0.4  1.5  62.5  35.0  0.7  100.0 
 필지평균 84.55  271.41  118.57   237.23 110.30  144.73 
             


그렇지만 원마산(마산포)에 새로 조성된 박간(迫間) 소유의 토지가 8,078평이었던 것을 감안해보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오히려 이 시기에 박간 외에 다른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에게 1912년 이전에 사들였던 토지를 상당히 넘겼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1912년과 1920년 토지소유를 비교한 아래의 두 그림을 보면 쉽게 이해 가능합니다.

이렇게 일인 소유의 부지가 1910년 대 후기 동안 작아진 이유는, 매립지 때문에 중심상권이 바뀌면서 발생한 소유권 이동 및 사업장 이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때까지 신마산과 원마산이라는 두 핵에만 집중해 있던 여러 시설들이 시내 전역으로 흩어지는 시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원마산 중심상권에 변화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미 전국에 알려질 정도의 시장으로 발전해 있던 마산포장(馬山浦場)이 매립이라고 하는 새로운 변화에 의해 크게 바뀌었습니다.
굴강과 선창은 없어지고 박간의 토지가 원마산 해안의 중심이 되는 구역을 차지하게 되어 마산포는 바다와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일찍이 창원부윤 이기(李琦)는 마산포가 매립되면 도시구조가 크게 바뀔 것이라고 예측하여 1907년(隆熙元年) 11월1일,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이 세우고 있던 원마산 해안매립계획을 무산시키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올렸던 보고에서 「․․․만약에 (원마산 해안을) 타인이 매립해 버리면 (원마산은)입이 틀어 막힌 목구멍이나 문이 잠겨버린 집과 같이 되어 (원마산 내의) 수천 호 주민은 결국 생업을 잃고 흩어져 비참하게 될 것이라․․․ (
昌原港案1, 議政府 外事局, 隆熙元年11月1日字 報告 第3號 / ․․․萬若讓與於他人埋築오면 便同塞口之咽喉요 閉戶之門扉라 本港幾千戶居民은 勢將失業渙散乃己기․․․)고 했는데 이 예측이 현실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② 일본인의 소유변화가 수성동 일대에서는 적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성동은 새로 조성된 매립지와 가깝고 상업용보다 주거용의 건물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상권변화의 영향이 적은 지역이었습니다.
위의 두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본인들의 토지매매는 수성동을 제외한 동성동․오동동․중성동 등에 산재해 있던 토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중심권으로 부상한 매립지 부근의 땅은 매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래 동안 지속해 왔던 서성선창과 백일세 선창, 그리고 서굴강이 없어지고 외부에서 마산의 선창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새로 개통되는 도시구조의 변화는 당시의 원마산 상권이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실을 근거로 볼 때, 일본인들의 토지매도 이유는 원마산의 상권이동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이동 장소는 박간의 매립지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새롭게 중심상권으로 부각된 매립지로 옮겨가기 위해 그 때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를 처분하거나 아니면 사업장을 그곳으로 이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간파한 박간이 매립지의 차지료(借地料)를 고가로 받았던 것입니다.

매립으로 일인소유의 토지 필지 수는 271필지에서 274필지로 3필지 늘었습니다. 필지 당 평균면적도 196.4㎡에서 237.2㎡로 40.8㎡가 커졌습니다.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소규모 형태에서 매립으로 조성된 큰 규모의 형태로 변하는 과정에서 그 단위면적이 커진 것입니다.

이는 1910년대 초기에 비해 일본인들의 소규모 토지 중 일부가 한국인에게 다시 넘어갔지만 대신 중심상권지역에 대한 지배는 강화된 결과입니다.

이런 변화는 개항 때부터 시작된 일인들의 원마산 토지지배가 점점 구체화․집중화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통계도 일본기업을 제하고 개인 소유의 토지만 계산한 것이므로 실제로 기업소유의 토지까지 합한다면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율은 이 보다 더 높았습니다. 기업소유 부지 중 거의 전부가 일본기업이었기 때문에 이런 계산이 가능합니다.

이에 비해 중국인 소유의 토지는 1912년 당시 1.2%, 18필지였던 것이 1920년에는 0.7%, 12필지로 변하였습니다.

중국인 소유의 토지가 이렇게 작아진 이유는 일본의 지배체제가 합방 이후 점점 강화되면서 중국의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림동 일대 중국인 집단주거 현상도 강점기가 지나는 동안 많이 퇴색되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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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1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0) - 강점제1시기

<달라진 마산포 해안>

1910년대 마산포에는 해안선 변화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최초의 대규모 매립공사가 이루어져 석축돌제 등만 조금 있었던 자연형의 해안에 凹형의 폭 약 300m에 이르는 석축 호안과 정박장이 생긴 것입니다.

또한 해안선이 당시 수심 약 2m 정도(당시 수심 기록된 지도로 확인)까지 바다 쪽으로 진출하면서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발전된 형태의 부두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공사가 완성되기 전에는 간석지역의 굴강에 선박을 정박하였을 경우, 간조(干潮) 때에는 수심이 낮아 선박의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남성동 매립으로 오랜 세월 동안 원마산 해안을 지켜온 네 개의 선창과 두 개의 굴강 중 서굴강을 포함하여 서성선창과 백일세선창은 완전히 그 모습이 사라졌으며, 매립지에서 벗어나 있던 동굴강과 어선창․오산선창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동굴강은 위치상 매립에 포함될 부분이었지만 아래 그림처럼 매립 후 상당기간까지 존속하였습니다.
두번째, 세번째 그림은 제가 복원한 1920년 도면인데 첫번째 지도와 똑 같습니다.

 




동굴강을 그대로 둔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매립이 필요 하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매립 시 방파제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여(방파제는 1924년에 조성) 방파 역할을 해낼 수 있었던 동굴강의 가치가 인정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마산포 한국사람들의 원성을 우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동굴강만은 1927년에 일부가 매립되고 1935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매립되어 사라집니다.

박간(迫間)의 매립으로 만들어진 원마산의 해안은 1985년부터 1993년까지 시행된 구항 매립 때까지 70여 년 동안 사용되면서 마산항의 중심부로 이용되었습니다.

凹형의 오목하게 파인 부분은 거제 통영 등 인근연안 여객선이 드나들던 유서 깊은 해안이었죠.

저도 청년시절 배낭메고 거제로 캠핑 갈 때 이 부두에서 배에 올랐습니다. 지금 농협 어시장 지점 자리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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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마산포에 뚫린 최초의 신작로>

통감부 시절인 1907년경에 이미 마산포의 도로 폭을 조금 넓히거나 형태를 곧게 하는 가로개수 공사가 마산경찰서 주관으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근대식 도로가 건설된 것은 1912년부터 1915년까지였습니다.

이 때 개설된 도로들을 사정토지대장에서 확인해 보면 1912년부터 1915년까지이지만 시기는 다양합니다. 도로의 개설 시기가 토지대장에 기록된 시기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3-4년 사이에 공사가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업으로 자연발생적인 좁은 골목길뿐이었던 마산포에 폭8m, 10m의 쭉 뻗은 새 도로가 신설되었습니다.

다음 도면은 도로가 개설되기 전의 마산포와 개설 후 모습, 그리고 도로개설 후인 1916년 지도에 나타나는 마산포 모습입니다.
두 번째 도면에서 직선으로 뻗은 넓은 길이 신설된 계획도로입니다.

 

박간(迫間, 하사마)에 의한 매립공사가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시행된 것을 감안하면 이 도로개설공사는 매립공사와 동시에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시에 진행되었을뿐만 아니라 마산포 전체의 도로망 구성을 볼 때 매립지의 도로망과 신설된 도로망은 마산포 전체도로계획 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원마산의 계획도로 개설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1912년 10월 7일에 조선총독부관보 제56호로 각도 장관에게 보낸 훈령 제9호로부터 시작된 전국적 규모의 「시구개정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구개정사업」이란 도시의 도로․교량․하천 등을 근대적으로 정비하고, 구획별로 건축물의 근대화를 달성하기 위한 도시계획의 성격입니다.

총독부 훈령 내용은「지방에 있어서 추요(樞要)한 시가지의 시구개정 또는 확장을 하려고 할 때에는 그 계획설명서 및 도면을 첨부하여 미리 인가를 받을 것. 다만 일부의 경이(輕易)한 변경은 그러하지 아니하다」입니다.

이 시구개정사업에 관한 훈령에는 그 구체적인 목적과 비용부담 등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한 장의 훈령이 그로부터 20년 이상이나 한국 땅 안의 시가지를 개조하고 규제하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마산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마산항지』에서 이 도로개설사업에 대하여「마산포의 시구개정문제(馬山浦ノ市區改正問題)」와 「제4회 민회의원선거」라는 항목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마산의 민회의원 16명 중 마산포에 거주한 의원이 7명이었다. 그런데 마산포와 신마산에 거주하는 의원들끼리 서로 마산포에 개설될 도로의 노선(路線)에 관한 이해관계 때문에 다툼이 많아 회의가 계속 공전되면서 결론을 얻지 못했다. 결국 당국에 일임하게 되었지만 시행하지 못하다가 1912년 제4회 민회의원들에 의해 마산포의 도로개설사업이 비로소 최종 확정되었다. 모두 13호선까지 계획했으나 높은 지가(地價) 때문에 1호에서 5호까지만 공사를 하고 6호부터 13호까지는 시행하지 못했다」

계획도로의 노선 때문에 민회가 공전되고, 민회의원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싸웠으며, 높은 지가 때문에 계획한 것만큼 공사를 시행하지 못했다는 등의 사실은 당시 마산포가 얼마나 상업중심지로서 가치가 높았던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기야 당시 나온 자료를 보면 마산포가 신마산에 비해 훨씬 거래량이 많았으며 이 때문에 신마산의 일본인들도 마산포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니 세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아마 앞의 두번째 그림에 표기된 신설도로가 위 기록에 나오는 1호에서 5호까지의 도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6호부터 13호는 시행하지 못했다니, 그곳이 어딘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때 신설된 도로의 위치는 가능한 한 기존의 골목길을 확장하여 도로를 개설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① 기존 도로의 체계를 유지하고
② 복잡한 이해관계를 해소하기 위한 보편적인 방법을 선택했으며
③ 토지 보상비용의 절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1912년 토지이용도와 1920년 토지이용도를 비교해 보면 대부분의 도로가 기존의 골목길을 넓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산항지』에「도시계획에 저촉되는 대지의 보상비가 너무 고가였다」라는 내용을 보아도 기존 골목길을 도로로 활용하여 비용절감효과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때 뜷린 도로는 마산포 최초의 근대식 도로로서 신마산에서 시작된 장군로와 이어졌으며 매립지의 도로와도 연결되었습니다.
비록 미미하지만 원마산에 최초로 격자형의 근대적 도로망을 갖추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최초로 나타난 정형의 부지와 근대적 도로는 이미 원마산 상권의 중심지였던 이 일대를 더욱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번에 걸쳐 살펴 본 바와 같이 ‘남성동 매립’ ‘마산창 철거’ ‘근대식도로개설’ 등 1910년대에 나타난 마산포의 세 가지 변화는 1760년 조창 설립 이래 지속되어온 원마산 도시공간형태를 대폭 바꾸어놓았습니다.

이 변화가 1910년대 전반기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에서(매립 1911-1914, 마산창 철거 1913, 도로개설 1912-1915) 이미 통감부 시대부터 시작된 식민지배 기반구축사업의 일환으로 파악됩니다.

즉 신마산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이 이동에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그들의 '최고의 시장'이라고 여겼던 마산포를 적극적으로 개발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효율적이고 근대적인 도시시설을 준비하여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식민도시정책의 적극적인 준비’였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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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마산포 최초의 수익용 매립-

馬山(1919年修正測圖)

1919년 / 육지측량부 / 조선총독부 / 1:10,000 / 柏書房 影印本 / 울산대 도서관

지난 주에 포스팅한 「馬山」을 보완한 지도입니다.

1916년 측도하여 1917년 발행했던 지도「馬山」을 1919년 제1회 수정측도하고 1924년 6월 25일 인쇄하여 6월 30일 발행한 것이 이 지도입니다.
따라서 이 지도의 도시상황은 1919년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저작권과 인쇄 및 발행자는 앞의 지도와 같습니다만 지도 가격은 인상되어 18전하던 것이 40전으로 많이 올랐습니다.
영인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삭제했는지 모르지만 이 지도에는 범례가 없다는 것이 앞 지도와 다릅니다.


지도에 나타나는 도시공간의 상황은 1916년 당시의 지도인 「馬山」과 거의 동일합니다. 1916년 이후부터 1919년까지의 시기에는 마산 도시공간의 변화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밀하게 검토해보면 약간 달라진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예를 보아 이 지도의 제작이 매우 정밀하게 수정측도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다음 두 그림을 보면 매립 이후의 남성동 상황변화가 뚜렷이 나타납니다.
1916년에는 우편소와 몇몇 건물만 있었을 뿐이었던 이곳에 도로와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전과 많이 달라져있습니다.

두 지도의
남성동 매립지와 현재 위성사진을 비교한 그림입니다. 빨간색으로 표시해 놓은 곳이 남성동파출소 자리입니다.
불과 100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도시가 얼마나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들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길 중에서 어느 길이 옛부터 있었던 길인지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두 지도에 나타나는 남성동 매립지의 도로망도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16년에는 큰길만 있었지만 1919년에는 좁은 길까지 뚫렸습니다. 건물도 그 사이 많이 들어섰습니다.
매립지 시작 부분에 '우편소'라고 적혀있는 건물이 지금의 남성동 성당 앞에 있는 남성동우체국입니다. 물론 지금 건물은 다시 지은 것이고요.

이 남성동 매립은 일제가 시행한 최초의 수익목적 매립입니다.
이 매립 이후 해방 때까지 마산 해안에는 땅으로 돈을 벌기 위한 일본상인들의 매립이 줄을 잇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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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마산포의 길과 땅>

-마산포의 길-

포구를 끼고 발생한 마을의 경우, 마을 규모가 작을 때는 한 개의 선창을 중심으로 단순하지만 마을 규모가 클 때는 몇 개의 선창을 연결하는 주도로를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길들이 형성됩니다.

마산포의 경우는 후자처럼 창원가도(昌原街道)를 중심으로 수계(水系)와 능선 그리고 등고선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얼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난 회에 올렸지만 다시 한 번 마산포 복원도를 보겠습니다.



남성동 파출소 일대, 즉 조창지 부근지역은 조창과 관련한 관리들 거주지 혹은 조창관련 건물들 탓에 계획된 도로로 보이는 직교격자형이 많았습니다.
이 지역은 한일병합 이후 근대식도로가 개설되면서 금융 등을 비롯한 새로운 산업시설을 담당하는 마산포의 중심공간으로 변하게 됩니다.

이와 달리 인구 증가와 함께 동쪽(그림에서 오른쪽, 지금의 아구찜 거리와 코아양과점 뒷편)으로 취락이 확산되면서 소규모 토지에 불규칙한 미로(迷路)형 세도(細道)가 많았습니다.

1908년에 제작된 마산지도 중 마산포(원마산)의 도로를 표기한 것과 복원도에서 골목길 부분을 확대한 것이 다음의 두 그림입니다.
비교해 보면 당시 마산포 골목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마산포를 통과하는 창원가도의 위치를 비정해 보았습니다.

아래 그림(1902년 제작된 지도)을 통해 산호동 해안을 끼고 창원읍과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복원도의 ●지점과 ●지점을 잇는 도로가 이른바 창원가도(昌原街道)로 보입니다.
 

진주와 창원을 연결하면서 마산포를 관통하는 창원가도(昌原街道)의 형태는 마산포 생성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결과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그림은 당시 마산포가 외부와 연결되는 도로체계를 도로의 형상과 인근지역의 위치를 감안하여 정리해본 도면입니다. 회원․성호․교방․석전지역이 마산포 와 연결되는 주도로라고 보면 됩니다.
그림에서 굵은 점선으로 그려진 길이 당시에 가장 번화했던 길입니다.

 

-마산포의 땅-

복원도에서 확인된 1910년 경 마산포의 면적은 약 170,000㎡(51,000평)이었습니다.

각 필지별 대지의 규모는 작았습니다.
총 1,157필지 중 50(15평)미만이 20%, 50-100(15-30평)이 33%, 100-200(30-60평)이 28%로 60평 이하의 땅이 81%를 차지했습니다.

좁고 꾸불꾸불한 골목길에 조그만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산포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대지는 그림에서 녹색으로 표시된 마산창(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부지였는데 면적은 5,097.52㎡(1,530평)였습니다. 사정(査定) 당시의 지번은 '원정(元町, 남성동) 142번지'였습니다. 

아래 그림의 점선 내 토지 형태를 유심히 보면 동굴강을 감싸고 있는 대지 중 어선창 쪽으로 나가는 길가에 일정한 폭의 전면부를 가진 소규모 필지들이 군집해 있습니다.


이 토지형태에서 착안, 이곳에서 마산포 시장이 발원한 후 시간이 흐르면서 조창주변의 상권과 연결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추정 이유는 유독 이곳의 대지 형태가 이질적이라는 점과 이 지역이 민간인 전용굴강으로 추정되는 동굴강과 연근해 어선들이 모여들었던 어선창, 그리고 창원가도 변에 있으면서 오산진(현재의 산호동 용마산아래 마을)과 연결되는 오산선창이 이어지는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초기에는 길을 따라 장이 열렸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장터로 사용되었던 길가에 점포가 상설화된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한편, 마산창을 기준으로 선창에 이르는 일대의 도로는 반듯한 직교격자형이고 토지도 정형이며 규모도 큽니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마산창을 중심으로 의도적으로 계획된 도시구조체계라고 볼 수 있으며 부지의 용도는 마산창과 관련된 관리들의 가옥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된다.

박희윤은 이 지역을 큰 곡물(穀物) 객주와 선어물(鮮魚物) 객주들의 건물이 들어서있던 상업 및 업무지역이라고 추정했습니다만 부지의 위치나 형태, 그리고 인근의 다른 토지 중 관리가 거주했을만한 부지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관리들의 가옥으로 추정한 것입니다.

아무튼 이 지역은 개항기부터 금융기관이 들어서는 등 도시의 중심지로서 기능했지만 한일병합 후에 근대식도로가 개설되면서 마산포의 중심기능을 점점 강화하게 되었고 이런 현상은 최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손수레나 지게만 통행이 가능했던 마산포 골목길,,,,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 앉은 작은 집들,,,,
길을 넓히고 건물을 지으면서 변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존속해 오고 있습니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이것입네’하는 세상인데,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이 골목길과 오래된 동네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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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usiness logo design 2011.08.06 18:0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한 번 해보고 싶어지네요ㅎㅎ
    초보블로거라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2011.03.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里)의 위치는?>

지난 주 포스팅한 내용처럼 마산포 6개리의 명칭이 일본식으로 바뀔 때, 6개리의 경계가 새롭게 획정되었습니다. 여러 자료를 통해 추적한 결과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변경되기 전 6개리의 경계를 복원해보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마산이라는 근대 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입니다.

 
마산포라는 지명은 고려후기 혹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산포를 도시로 만든 맹아는 1760년 마산창 설치 후 발생한 6개리(里)였습니다.

동성리․서성리․중성리․성호리․오산리․성산리의 마산포 여섯 리(里)가 최초로 나타나는 지도는 마산포가 개항된 1899년에 간행된 창원읍지에 수록된 지도입니다.

                    <1899년 간행된「창원읍지」에 나타나는 마산포 6개리>

관찬과 사찬을 통틀어 지금까지 행해진 마산연구에서 ‘마산포가 조창 설립 이후부터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6개리가 생겼다’고만 밝혔지 6개리의 경계에 대해서는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막연하게 지명의 연속성에 근거해 동성리=동성동, 서성리=서성동, 중성리=중성동, 성호리=성호동, 오산리=오동동과 산호동 정도로만 짐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마산포의 범역 내에는 위의 동 외에 창동과 남성동․부림동․수성동․추산동 등이 있는데 이들 동과 마산포 6개리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려진바 없습니다.

아무도 조선시대 6개리의 경계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고, 설령 알려고 했어도  알기 어려웠을 겁니다.
6개리 경계를 추정할만한 자료 찾기도 어려웠고, 복원에 필요한 마산포 원래 모습을 알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자는 조선총독부가 1914년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위하여 1913년 12월 29일자 조선총독부 관보 호외를 통해 발행한 「마산부관할구역도」라는 지도 속에 6개리의 경계가 표기되어 있으며, 후자는 원마산(마산포)도시형태 복원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 복원자료는 다음 회부터 포스팅할 계획입니다.

두 자료를 토대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부분적이긴 하지만 김경덕의 매립청원서에 첨부된 지도(2010/09/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에도 해변을 낀 원마산의 리(里) 경계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행정구역개편이 끝난 뒤인 1910년대 중후반에 간행된 자료들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자료들을 교차확인해본 결과 추정할 만한 단초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마산부 관할구역도」에 표기된 마산포 6개리>

착안은「마산부관할구역도」에 나타난 6개리의 경계가 도로에 의해서 구분되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산부관할구역도」의 도로 형태에 가장 근접하는 위치의 도로를 당시 「원마산 복원도」에서 찾아내어 오버랩시켜 보았습니다.

「마산부관할구역도」는 「원마산 복원도」에 비해 정확도가 매우 낮기 때문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가장 근접한 위치의 도로를 기준으로 6개리의 경계를 확인하였습니다.

다음 그림이 이 방법으로 얻어낸 마산포 6개리 경계도입니다.

                              <사정지적도에서 재구성한 마산포 6개리>

이 그림은 1910년경에 개설되어 있던 도로를 기준으로 작성한 경계도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선 후기부터 있었던 6개리의 경계와는 차이가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위 그림을 이용하여 현재의「마산시가지도」에 당시 마산포 6개리의 위치를 개략적으로 표기한 것이 다음 그림입니다.

                        <현 시가지 도면에서 추정한 마산포 6개리 경계도>

이 그림으로 볼 때,
창동 네거리를 기준으로 남쪽인 제일은행․경남은행 창동지점․대신증권과 구 극동예식장 일대가 중성동이었으며, 북쪽이 성호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불종거리의 동쪽인 코아양과점에서 오동동 네거리 일대가 동성리였고, 동성리의 동쪽이 오산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성호리와 중성리의 서쪽인 구 강남극장과 부림시장 그리고 현재의 수성동일대가 서성리였으며 그 서쪽이 성산리였고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동성리=동성동, 서성리=서성동이라는 식의 조선시대 동리명과 현재의 동명을 수평적으로 연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위의 그림들은 옛 리(里)경계를 현재 도시상황 위에서 재현한다고 하는 기본적 한계 때문에 정확하지 않습니다.
마산이라는 근대도시를 탄생시킨 「조선시대 마산포 6개리 추적」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쓰는 글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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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는?>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지우 경남대 교수)에서「당시 마산포라 불렀던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느 지점, 현 산호동 어딘가에 있다가 조선조에 현 어시장 해변으로 옮겼다」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이 주장에서 사용한 근거자료는,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 영조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 1895년에 간행한 『영남읍지』 등 입니다.

두 번째는 저의 주장입니다.
저는 앞의 주장이 문헌 해석방법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석두창이 현재의 남성동 해안으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근거자료로는 지명과 자연조건 그리고 지형을 제시했고 사용한 자료는 『고려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99년 일본에서 제작한 근대식 지도, 조선시대 마산포 복원도 등 입니다.

세 번째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석두창의 위치가 「산호동 일대이지만 반월산(무학여고 뒷산)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추정근거로 지명의 의미 및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들었습니다.

위 세 주장에서 제시된 위치를 세 종류의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주장 '산호동'은 청색,
두 번째 주장 '남성동'은 적색,
세 번째 주장 '반월산에서 해안가'는 녹색
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대충이나마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1833년에 제작된 고지도에 그려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에 백여년전 해안선을 복원한 후 비교해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상에 위치를 표시해보았습니다.
세 곳 모두 도시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해안이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녹색부분은 삼호천과 산호천이 합해진 하류인데 지금은 복개되었습니다>

셋 중 어느 주장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 논의가 종결되지도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천 년 전 합포의 최대 최고시설이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다면 통합 창원시 최고의 문화유산이 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쯤 있었을까요?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은,,,,



<석두창 위치비정에 대한 세 주장의 상세 글>   - 길어서 읽기 지겹습니다 -
 

첫 번째,
‘산호동 일대’라는 주장의 근거자료로 사용되었던 문헌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조세(租稅)조에서「이전에는 도내(道內)에서 세(稅)를 거둬 실어다 바치는 곳이 세 군데 있었다.
김해 불암창, 창원 마산창(옛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라는 기록.

② 『경상도지리지』 내상조(內廂條)에서「우도내상(右道內廂)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海口) 마산포와 4리317보 떨어져있다」는 기록.
'병영성(兵營城)과 내상성(內廂城)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내상(內廂)은 현 합성동의 당시 ‘우도병마절제사영성(右道兵馬節制使營城)을 말함'

③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창원도호부 산천조(山川條)에「馬山浦 在會原縣 猪島在月影臺南 合浦在府西十里․․․․․․」라고 하여 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

④ 영조(英祖)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대도호부조(昌原大都護府條)에 수록되어 있는 창원부의 지도에서 석두창의 위치가 반룡산(盤龍山, 현 팔용산)밑인 지금의 산호동 일대(팔용산과 월영대 중간지점)에 도시(圖示)되어 있다는 것

⑤ 1895년 간행한 『嶺南邑誌』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조에서「조창은 해창 부근에 있는데 새로 지은 것이다」라는 기록 등 입니다.

이 문헌들에 근거하여 내린 결론은

①「마산에 두 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산호동 일대)의 마산포이고 다른 하나는 현 어시장 쪽의 합포였다」고 규정하여

②「마산포에 석두창이 있었으니 현 산호동 어딘가에 석두창이 있었다」라고 결론짓고

③ 그러다가 조선 영․정조시기에 자연충적(自然沖積)으로 마산포에 선박출입이 어려워지자「현 어시장 해변인 해창 부근, 즉 합포로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박희윤은 마산포에서 합포로 옮겨 간 사실을 두고 「산호동 일대는 구강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여기서 열리던 장을 ‘구강장’이라고 하였고 어시장 쪽에서 열리는 장을 ‘새강장’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습니다.
즉 마산포에 있던 석두창이 퇴적물로 인해 조선 후기에 합포 지역으로 조창을 이전했기 때문에 원래의 지역을 ‘구강’, 새로운 지역을 ‘새강’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마산포라는 지명은 기존의 산호동 일대만 지칭하다가 현재의 남성동 일대인 합포 지역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고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남성동 어시장 일대’라는 제 주장입니다.
위 석두창 위치비정 논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합니다.

①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규명하는 방법에서「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을 이용하면서, 마치 자로 잰 듯이 당시 행정구역인 회원현의 범역과 창원대도호부의 위치를 자구(字句) 그대로 적용하여 현 산호동 일대가 마산포이고 남성동 일대가 합포인데 석두창이 마산포에 있다고 한 점입니다.
따라서 산호동의 용마산에서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딘가 그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석연치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의「대동여지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위의 주장과 정반대의 위치에 마산포와 합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활용한 문헌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범례에는 ■은 倉庫, ●은 古縣이라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合浦●」의 표기는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시행한 행정구역 정비 때 의안군에 영속되었던 합포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과거에 현(縣)이었는데 성(城)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양상을 보아도 마산포는 기존의 연구처럼 산호동 일대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부 지도에 도시(圖示)된 석두창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나는 시설물들을 보면 축척과 거리의 개념보다는 존재 유무의 개념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에 나타나는 석두창의 위치를 사실로 연결시키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많습니다.

또한 석두창이 산호동 부근의 마산포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시기와 명칭과의 관련성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③ 조선 영․정조에 석두창을 현 어시장 쪽인 합포로 이전했다는 내용에 대한 주장의 타당성입니다.
이 주장은 석두창을 현재의 산호동 쪽에 있었다는 것을 결정해 놓고, 『영남읍지』의 ‘조창이 합포에 있던 해창 쪽에 있다’는 기록과 연결짓다보니「이전」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요한 관아였던 조창이 이전되었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이 이전했다면 영조 때 개창한 마산창의 위치로 이전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고 마산창은 별도로 신설한 것인지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석두창 이전 설은 현재로서는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셈입니다.

④ 석두창이 오래 동안 사용되다가 자연충적 때문에 이전했다고 한 점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석두창이 있었다는 산호동 해안의 지형지세를 보면 원래부터 퇴적물이 많았던
곳이지 석두창이 생긴 후 언제인가부터 퇴적물이 생기기 시작한 곳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제시한 「1899년 산호동 일대의 해안지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일본 해군에 의해 작성된 근대식 지도로서 마산만의 간조선이 표시된 지도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지금까지 석두창이 있었다고 주장한 해안은 팔용산에서 내려오는 하천를 비롯하여 양덕천․산호천․삼호천 등의 하천 때문에 간석지의 폭이 무려 1㎞나 되는 곳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창부지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의 네 가지 이유를 보더라도 석두창이 현 산호동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석두창이 처음부터 현재의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비정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고려사』권79 조운, 성종 11년 수경가조(輸京價條)에 「나포 전호골포 합포현석두창 재언(螺浦 前號骨浦 合浦縣石頭倉 在焉)」이라고 하여「나포는 전에 골포라 하였고 합포현의 석두창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기록은 석두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즉 螺(라, 소라)라고 불렀던 포구라면 그 형상이 소라의 형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버드나무가 많다고 해서 유호(柳湖)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제가 복원한 원마산 지형도입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동굴강의 형태가 나포(螺浦)라는 명칭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② 조창의 명칭이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점입니다.
중국어에서는 ‘석두(石頭)’라는 단어를 곧 돌(石)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갈대밭이었으며 간석지였던 해안에 소라 모양을 띤 움푹 들어간 포구 한 곳을 돌로서 호안(護岸)하여 굴강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 형상으로 보아 사실상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포구를 인공으로 호안(護岸)하여 조성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③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 사이에는 여러 개의 하천 때문에 생기는 퇴적물로 인해 간석지가 매우 넓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선의 형태가 밋밋하여 작은 풍랑도 피하지 못할 조건이었습니다.

반면 위의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표의 동굴강은 간석지가 좁고 해안선의 형태도 항만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근에 이렇게 좋은 조건을 놔두고 산호동 쪽에 조창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고 봅니다.

이상과 같은 추정을 근거로 석두창의 위치는 애초부터 남성동해안의 동굴강에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굴강을 끼고 몽고군의 일본 정벌 때 사용된 전선소(戰船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존의 굴강을 전선소 굴강으로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굴강은 그 규모로 보아 당시 900여 척에 달했던 전함의 수리를 모두 맡기에는 부족했을 것이지만 기왕에 존재했던 굴강이었기 때문에 일부라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추정이 적절하다면 그 위치는 현재의 어시장 입구에 있는 속칭「너른 마당」의 북쪽 인접대지 일대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조선시대의 마산창은 고려시대의 석두창을 이전한 것이 아니라 석두창으로 사용하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창지(倉址) 옆에 새로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반론이 나왔습니다.

세 번째,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근거로 하여 석두창의 위치를 비정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① 석두창은 합포현 내에 있는 골포(=螺浦)에 위치하였다.
골포의 골(骨)자는 우리만 의미에서 골짜기 깊숙이 들어간 곳의 의미가 있으므로 마산만 깊숙이 들어간 어느 지점에 형성된 포구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남성동 보다는 더 내륙으로 들어간 산호동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②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을 검토한 결과, 만(灣)의 입구보다는 내륙으로 들어간 해안이나 만의 깊숙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바다로 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는데 그 역시 산호동 일대가 타당한 조건이었다.

③ 조창의 운반 조건을 볼 때 수운 이용이나 하천을 따라 형성된 소로의 이용이란 측면에서 내륙하천과 마산 앞 바다의 결절지점에 석두창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볼 때, 석두창의 위치를 용마산 아래의 산호동 앞 바닷가 일대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나아가 조창의 입지조건이나 교통망 그리고 당시 해수면의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용마산 일대보다 내륙으로 더 들어간 지점일 수 있다고했습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석두창이 지금의 반월산(무학여고 뒷산, 이산, 이살미산, 와우산이라고도 불린다)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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