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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우5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고 마산시민 모두가 앞장서 싸웠기에 자기 혼자만이 영웅취급을 받는다거나 어떤 보상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증언록, 478쪽)이라고 말했다. 그는 필자에게 “들켜서 보복 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려 패가망신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는 동안 그가 증언할 마음을 먹었을 수도 있는 계기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그가 구체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짐작해본다. 먼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이.. 2018. 11. 12.
마산·창원 역사 읽기 (17) -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10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학우여러분!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약 1시간 이상을 이렇게 멍청히 앉아만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렇게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경남대의 모습입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경남대만 과거 유신헌법을 유일하게 전국대학 중에서 지지했다는 치욕적인 이유로 현재 전국대학생연합회에 조차 가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지금 부산에서는 연 이틀동안 우리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유신독재에 맞서 처절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익히 알면서도이렇게 앉아만 있다니 기가 찰일 입니다. 1979년 10월 18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남대 도서관 앞에 모.. 2014. 9. 15.
마산·창원 역사읽기(1) - 지역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예고해 드린대로 오늘부터는 우리 지역의 역사서 「마산·창원 역사읽기」를 올리겠습니다. 모두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라 택했습니다 이 책은 전공분야가 연구분야가 다른 31명이 함께 쓴 책입니다. 저도 함께 했습니다. 이제는 도시통합이 되었지만 원래 책 제목대로 이 글 제목도 「마산·창원 역사읽기」로 하겠습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한 꼭지에 5-10개 정도의 작은 꼭지가 있기 때문에 약 40 꼭지 정도 됩니다만 해방 이후 부분이 준비될 때까지만 싣겠습니다. --------------------------------------------.. 2014. 5. 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마산인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요?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그 동안의 다양한 연구와 유적 발굴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창원시 반계동 선사유적지 발굴현장에서 빙하기에 형성된 토층 발굴과 창원 동면 덕산의 합산패총, 그리고 진해 안골포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土器)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마산의 현동․구산면․진동․진북 등지에 분포된 고인돌과 고대취락지가 있습니다. 마산 도시 한복판에서도 청동기시대유적 이 나왔습니다. 바로 위 사진입니다. 마산 회원동의 무학여고 뒤 이산미산에서 1972년 출토된 붉은 채색간토기(紅陶)입니다. 채색간토기는 고운 흙을 사용하여 형태를 만든 뒤 표면을 갈아 반들거리게 하고 그.. 2010. 4. 12.
내서읍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다섯 번째 길에 나섰다. 이번에는 내서읍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 창원읍성의 서쪽지역 중 내륙 쪽은 내서(內西)면, 바닷가인 현재의 마산시내지역은 외서(外西)면이라 불렀다. 외서면은 마산부가 되어 실명(失名)했고 내서만 살아남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중리’라고 알려진 내서읍에는 현재 중리, 안성리, 평성리, 호계리, 용담리, 상곡리, 원계리, 삼계리, 신감리, 감천리 모두 10개 리가 있다. 집결지는 중리 역, 12월 12일, 오후 1시반이었다. 탐방은 중리역을 기준으로 광려산 쪽으로만 방향을 잡았다. 아래 호계리 쪽은 시간이 없어 포기하였다. 탐방대원들의 얼굴을 밝았고, 기대감에 찬 눈빛이었다. 인원도 늘어 모두 3-40명이나 되었다. 창원대 사학과 남재우 교수가 시간을 내 해.. 2009.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