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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부윤2

김형윤의 <마산야화> - 69. 도로의 변천 69. 도로의 변천 신마산 일대의 해군기지를 둘러싸고 일·로의 각축이 첨예화되어 가던 무렵 일본은 그들 거류민의 집단 거주지 지역에 대한 시가지 도로의 확충에 주력했다. 진해의 근대식 시가지 구획정리와 더불어 신마산 일인가(日人街) 도로 역시 미비하다고는 하나 그 당시로 봐서는 제법 제격을 갖춘 형태였다. 그러나 구마산 일대의 도로는 1913년까지 노폭이 겨우 3미터 정도(신마산에서 구마산으로 연결되는 길, 진주 방면으로 가는 길)를 가지고 소위 ‘신작로’로 불리었다. 그런데 1913년에 현재의 부림시장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는 도로와 제일은행 앞에서 남성동 쪽으로 동행(東行)하는 길이 확장됐으며, 1923년 10월경에는 중성동에서 시민극장 앞으로 내려가는 길과 현 조흥은행 앞길이 현재의 폭으로 확장되었다(.. 2016. 1. 18.
김형윤의 <마산야화> - 58. 역대 마산부윤 58. 역대 마산부윤(歷代 馬山府尹) 마산포는 요새지로서 일로(日露) 양국의 각축지로 각광을 나타낸 유명한 곳이다. 일본은 재빠르게 선수를 뻗쳐 신마산 현 월영국민학교로부터 서편에 걸쳐 99개년 즉 1세기의 조차조약(租借條約)을 체결함으로써 그들의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영사(초대 三浦, 현 중화소학교), 헌병분견대, 경찰, 세관 등 중요기관을 설치하고 학교조합을 만들어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때에 한인들은 신마산을 조계(租界) 혹은 거러지(거류지)로 천칭하였다. 1899년(원문에는 1905년) 5월 1일에 소위 개항이라고 저희들 멋대로 개장하였던 것이다. 영사제(領事制)는 1907년 경에 이사로 하여 현 창원군청에 이사청을 구미식(歐美式)으로 건축하고 초대 이사에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이 취임하였.. 2015.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