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포사건'에 해당되는 글 6건
- 2011/09/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 2010/12/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
- 2010/12/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 2010/09/13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3) - 개항기
- 2010/07/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2)
- 2010/02/03 나도향, 김지하 그리고 '산장의 여인' (10)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2011/07/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2011/07/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2011/07/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2011/08/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2011/08/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0) - 강점제1시기
2011/08/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1) - 강점제1시기
2011/08/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2011/08/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2011/09/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2011/09/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8) - 강점제1시기 (0) | 2011/10/03 |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7) - 강점제1시기 (0) | 2011/09/26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0) | 2011/09/19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0) | 2011/09/12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0) | 2011/09/05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0) | 2011/08/29 |
-마산포부근 지도-
1902년 / 향월원태랑 / 동경 청목숭산당 / / 한국안내 제8편 마산포안내 / 서울대중앙도서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이 지도가 실려있는 책『한국안내』는 일본인이 편찬한 마산관련 문헌 중 최초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지도는 책의 부록에 첨부된 것이라 상세하지는 않습니다만 개항 초기 마산만 주변의 상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도에는「마산포 사건」으로 유명한 율구미(栗九味)의 노국전관거류지(露國專管居留地)와 자복포의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20세기 초 마산포를 먹으려 혈안이었던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을 짐작케 해줍니다.
도시지역에 대한 상세한 표기는 없고, 각국거류지와 마산포와 구(舊) 성적(城跡, 현 용마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것임) 등 일본인들이 관심가질만한 곳들만 간략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산포에서 부산으로 가는 도로는 팔용산 아래 봉암동을 거쳐 현재의 봉암교(당시는 다리가 없었음) 부근을 통과하여 진해 쪽으로 이어 지고 있습니다.
이 도로는 양덕동 부근에서 창원으로 가는 도로와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의 창원공업단지 일부가 바다였다는 것도 이 지도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지도 상부에 별도로「馬山浦各國居留地市街圖」란 제목의 조계지(신마산) 도면이 별도로 그려져있습니다. 꽃이 만개한 모양의 확대지도입니다.
여기에는 조계지 내에서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조성된 도로가 표기되어 있으며 북쪽 일부 도로, 즉 예전의 마산극장 부근에 있는 도로가 매립된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관장관택(海關長官宅)과 우편국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습니다. 해관장 사택은 현 제일여고 부지로 신사로 이용됩니다.
이 지도가 실려있는 『한국안내』에는 20세기 벽두 마산상황이 자세히 실려있습니다.
그 중 재미있는 것 하나 소개합니다.
책 마지막 부분에 '명소고적(名所古跡)'이라 하여 당시 마산에서 가볼만한 곳을 소개하는데, 제일 끝에 '유렵지(
遊獵地)'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이 있습니다."마산부근 일대는 조류가 많아 겨울에 총을 지니고 해안을 따라서 돌아다니면 총 한발에 새 열 마리 이상 잡는 일이 많다고들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날짐승 고기가 가장 싼 곳이 마산으로 오리 한 마리에 12전이라고 한다)"
이 지도가 그려질 즈음,
개발이 있기 전인 그 때 이 도시의 해안은 전부 갈대밭이었으니 당연히 새들도 많았겠죠.
새가 얼마나 많았으면 새고기 값이 전국에서 가장 낮았을까요.
철새 때가 하늘 높이 날아 다니는 아름다웠던 마산의 해안,,,
콘크리트 호안으로 둘러싸인 지금, 옛날의 그 광경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위 지도 위치의 현재 모습을 위성사진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 | 2011/01/03 |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0) | 2010/12/27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 | 2010/12/20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0) | 2010/12/13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3) | 2010/12/06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 | 2010/11/29 |
-
김용택 2010/12/20 07:37
이 귀한 자료를 어디서 구했습니까?
참 재주도 용하십니다.
그나 저나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지역사 사람들 망연회나 한 번 해야되는 게 아닐까요?
연말 잘 보내세요.
개항이후부터 1910년 이전의 시기에 제작된 마산지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지도의 기본정보 표기는 개항기 때와 같습니다.
<․․․>는 지도의 제목이며 제목 아래에 표기한 것이 지도의 기본 정보입니다.
표기 순서는「제작연도 / 제작자 / 발행처 / 축척 / 수록처 / 소장처」순입니다.
기록이 불가능한 부분은 해당 칸을 비워「/ /」로 표기하는데 지도제목이 동일한 경우에는 지도명칭 뒤에「*, **, ***」를 붙여 구분하겠습니다.
<신마산의 러시아 흔적>
-조계지현황도**-
1900년 / / / 마산포사건 관련 일본 해군대신관방서류(秘) / 미의회도서관(11)NT(C)NO.178
지도의 명칭은 원래 없었습니다.
「馬山機密本第八六號附屬 (마산기밀본 제86호 부속)」이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는데 지도의 내용을 참고하여 제가 임의로 지도의 명칭을 붙였습니다.
조계지 조성 직후의 신마산 사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만 너무 흐려서 지도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영국영사관 부지(계획으로만 그쳤음) 위쪽인 현 경남대학교 운동장 부분이 공원예정부지로 되어 있으며 각 대지를 일본인 소유지, 노국인(露國人)소유지, 기타외국인소유지, 미경매지로 구분하여 표기하고 있습니다.
본 지도에 의하면 중심에 있는 간선도로변에 러시아인 소유의 대지가 많아 러일 전쟁 전까지 마산 조계지에 존재하던 러시아세력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일본인과 러시아인이 살던 가옥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추측으로만 가능했던 개항 초기 일본인과 러시아인의 주거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1900년이면 개항한지 1년 밖에 안되는 시긴데 이미 건물이 들어서있습니다.
러시아인의 가옥은 구 일성펌프 자리(현 경남대 정문 앞)에 여러 채가 집중해 있습니다. 이 자리는 일성펌프가 철거되기 전까지 러시아 양식의 건물이 남아있었습니다.
일본인의 가옥은 월남동 3가와 홍문동 일부에 걸친 현 신동아 빌라 아래의 일대에 몇 채가 집중해 있었던 것을 비롯해 여러 채가 산재해 있다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검게 칠해져 있는 직사각형이 일본인 소유 건물인데, 진해에도 많이 남아 있는 일본식 장옥(長屋)으로 보이는 건물도 있습니다.
지도가 제작될 시기에는 조계지의 북서쪽 부분은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조계지 범역 안에 포함되는 북서쪽부분이 지도에서도 빠져 있습니다.
아래는 경남대 유장근 교수가 구 일성펌프 자리에 있던 러시아 건물을 철거한 후 버려져 있던 벽돌을 한 장 주워 놓은 사진입니다.
그 밑은 위의 지도에 표기된 부분과 똑 같은 위치를 위성사진에서 잘라 비교한 위성사진입니니다. 주황색으로 표시한 점이 지도와 위성사진의 동일지점입니다. <<<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0) | 2010/12/27 |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 | 2010/12/20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0) | 2010/12/13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3) | 2010/12/06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 | 2010/11/29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 | 2010/11/22 |
흰 천 위에 그려진 세 개의 광산
<마산소재 광산경계도>
1900년 직후(규장각추정)/ 외국인(규장각추정)/ / / / 규장각
110년 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지도 한 장 소개합니다.
마산포 주변의 마산만 일대 지도인데, 흰 천 위에 그려져 있으며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규장각의 설명에 의하면,
제작자는 알 수 없지만 지도에 러시아 로마노프왕실의 문장이 새겨진 도장이 찍혀 있고 설명이 영어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영어권 국가에서 작성한 것 같으며, 제작시기는 마산포 사건과 마산개항시기 등으로 미루어볼 때 1900년 직후라고 했습니다.
로마노프왕실 문장 옆에 적힌 정대유(丁大有)는 이 지도가 제작될 당시에 활동했던 서화가(1852~1927)입니다. 매화를 많이 그렸고 예서(隸書)와 행서(行書)에 능했던 분입니다.
그가 왜 이 지도에 이름을 올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혹시 그가 이 지도를 흰 천 위에 모사한 장본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광산을 표시하기 위한 지도라 그런지 내용이 너무 간략합니다. 하지만 해안선을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어서 매립하기 전의 자연상태 마산포 해안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지도에 MASANPHO(마산포)라고 기재된 취락이 개항기에 형성되어 있던 지금의 남성동과 창동일대의 원마산입니다.
각국공동조계지(신마산)는 경계만 간략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왼쪽 무학산에서 마산만으로 흘러드는 세 개의 하천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제일 윗쪽이 회원천과 교방천이 합져져 오동교로 내려오는 하천이며, 중간 것이 마산시청 옆을 흐르는 장군천입니다.
제일 아래쪽 신마산 경계 복판을 지나는 하천은 옛 마산시장 관사 앞의 창원천(대곡천)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지도에는 가포만을 둘러싸고 세 개의 광산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저 지역은 러일전쟁 직전에 러시아가 자국의 단독조계지를 시도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광산 소재의 사실 여부는 확인해보면 알겠지만, 마산포를 둘러싸고 각축을 벌였던 당시 열강들의 아욕이 눈에 보이는듯 합니다.
광산이라고 표시해 놓은 저 세 곳을 파보면 지금도 땅 속에서 뭔가가 나올까요?
그래서,,,,
현재의 지도에 저 세 개 광산의 위치를 표시해 보았습니다.
혹시 압니까?
요즘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는 금덩어리가 저곳에 잠자고 있을지.....<<<
2010/04/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2010/04/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2010/04/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2010/04/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2010/05/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2010/05/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2010/05/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2010/05/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2010/05/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2010/06/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2010/06/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2010/06/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2010/06/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2010/07/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2010/07/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2010/07/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 - 개항기
2010/07/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2010/08/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
2010/08/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 - 개항기
2010/08/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 - 개항기
2010/08/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
2010/08/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 - 개항기
2010/09/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2) - 개항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5) - 개항기 (4) | 2010/09/27 |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 (0) | 2010/09/20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3) - 개항기 (0) | 2010/09/13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2) - 개항기 (0) | 2010/09/06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1) - 개항기 (0) | 2010/08/30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 (0) | 2010/08/23 |
마산포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식민야욕을 불태웠던 각축장이었습니다. 시기는 개항 전후였고 그 절정이 「마산포사건」입니다.
「마산포사건」은 러시아가 부동군항(不凍軍港)을 얻기 위해 마산포를 점령하려했던 사건입니다. 사건개요를 요약합니다
러시아는 군사적 목적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우선 조선정부와 마산포 저탄소(貯炭所) 설치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일본이 러시아가 목적한 토지를 미리 매입해버림으로써 러시아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1900년 때 일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단념하지 않고 마산포 남쪽의 율구미(현 마산시 가포동의 국립결핵병원에서 MBC 송신소에 이르는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역)를 얻어 1900년 6월 4일 30여 만평의 러시아 단독조차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질세라 일본도 1902년 5월 17일을 기해 자복포(구 한국철강과 월영동 아파트단지, 구 국군통합병원 일대)에 일본 전관거류지 30여만 평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미 설치된 신마산 각국공동조계지 인근 두 곳에 러·일 단독조계지가 추가되는 기현상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나라 각축이 있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 단독조계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러시아 단독조계가 없어지니 일본도 굳이 단독조계를 설치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일본은 각국공동조계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처럼 사용하고 자복포의 단독조계는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 몇가지 소개합니다.
당시 마산의 분위기가 그랬던 만큼 강대국 군함의 마산 입출항도 많았습니다.
1899년 4월부터 1900년 11월까지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외국 군함의 마산항 출입 상황은 러시아가 가장 많은 28척, 일본이 10척, 영국이 4척, 독일이 1척이었는데 이 배는 모두 병함(兵艦) 혹은 수뢰정(水雷艇)이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는 가포 인근인 율구미에 군대까지 주둔시켰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의미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 두 장은 당시 러시아 해군이 율구미에 주둔했던 사진입니다.
먼저 것은 ‘율구미 주재 러시아 사관 및 부영사 가족’ 사진입니다. 사택으로 보이는 뒷 건물에 사용된 재료는 형태를 보아 조선 현지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조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율구미 주재 러시아 군대 체조장의 사관 및 수병’들 사진입니다. 수병들이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했습니다.
개항 나흘 후인 1899년 5월 5일, 러시아 고위공직자들이 마산포에 왔습니다. 주(駐)조선 러시아공사 파블로프가 일행과 함께 만추리아호를 타고 마산포에 도착합니다.
일행은 율구미라 부르는 자복봉 능선을 따라 30여만 평의 토지에 표석 500본, 표목 500본을 꽂아 임의로 그곳이 자신들의 영역임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국기가 달린 5.4m의 표간(標杆)을 자복포 배후의 구릉과 가포에 인접한 해안에 각각 12개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나중에 러시아 단독조계지가 됩니다.
위 그림 왼쪽에 그려진 것이 바로 그 표간입니다.
미의회 도서관자료인데 마산포사건과 관련한 일본해군대신 관방서류에 수록되어 있는 자료입니다.
이 도면에는 율구미 능선을 따라 늘어선 표석과 표목의 위치와 함께 러시아 국기가 달려있는 표간의 상세한 도면이 그려져 있으며 표시물의 위치와 숫자는 이 도면을 설명하는 보고서에 별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구미 일대에 꽂힌 표석과 표목 각각 500개, 그리고 율구미 능선과 가포해안에 선 5.4m 높이의 24개 깃발을 상상해 보십시오. 러시아의 위세가 당시 어떠했는지,,,,
표목과 표간은 이미 썩어 없어졌겠지만 표석 500개는 땅 밑 어딘가에서 아직 잠자고 있겠지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표석 발굴에 나서 보면 어떨까요?
이러한 러시아의 행동은 호시탐탐 마산포를 넘보던 일본을 자극하였습니다.
일본은 마산포의 당시 상황을 일일이 본국 정부에 보고하면서 마산포를 러시아보다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에 이어 일본도 자복포에 전관거류지를 설치하게 되었던 겁니다.
다음 그림은 그 시기에 첩보용으로 율구미를 촬영했던 사진입니다.
일본 해군소속 군함 '대도(大嶋)'의 첩보주임 이집원후(伊集院後)가 1900년 5월 1일에 촬영한 것입니다. 가운데 높은 봉이 갈마봉인가요?
마산포로 진출할 의사를 가진 나라가 러시아와 일본, 영국뿐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도 석탄하역장과 해군병원의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마산포 부근에 진출을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1885-1913년 외교보고서』 중 마산관련 자료입니다.
No 65
1901년 9월 17일, 동경
조선에서의 프랑스와 러시아
존경하는 백작각하!
제가 이미 이전의 보고에서 자주 말씀드렸던 바, 조선 내에서의 프랑스의 활동은 일본신문에 계속 표제화되고 있습니다․․․․․․․․
신문들에 의하면 이전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이제 프랑스도 석탄하역창과 해군병원의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마산포 부근에 위치한 작은 항구를 양도해 줄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암브로 <<<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2010/05/10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2010/06/2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2010/07/05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2010/07/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2010/07/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 - 개항기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 - 개항기 (0) | 2010/08/09 |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 (0) | 2010/08/02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2) | 2010/07/26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 - 개항기 (0) | 2010/07/19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0) | 2010/07/12 |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2) | 2010/07/05 |
'마산도시탐방대' 여덟 번째 길이다.
1월 30일 오후 1시 반, 걷기 좋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였다.
우리는 가포로 가기 위해 비움고개를 넘었다.
마산도시의 끝자락인 가포(자복포, 율구미 포함)는 한 많은 땅이다.
110년 전,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을 때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먹겠다고 각축을 벌인 ‘마산포 사건’의 현장이다.
잊혀져가는 굴욕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겨울 오후 바닷가를 4시간 쯤 걸었다.
나라 뺏긴 설움만 있는 곳이 아니다.
가포에는 마지막 꺼져가는 심지처럼 생명이 사그라진 가슴 아픈 현장도 있다. 바로 국립마산결핵병원이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에 상이군인요양소라는 이름으로 세운 결핵전문병원이었지만 지금은 한국 최대의 국립특수의료기관이다.
우리는 병원 건너편 숲 속에 있는 ‘산장병동’ 터를 찾아 들어갔다.
이곳은 노래 ‘산장의 여인’의 애절한 주인공이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그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겨울 낙엽 밑 어딘가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기대를 안고 숲으로 들어갔다.
울창한 숲 속에는 산장이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작은 건물의 흔적을 여기저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카테이지(cottage)라 불렀던 2인용 병사(病舍) 10동과 부속건물들의 흔적이었다. 일제 때 세웠지만 1950년대 후반에 모두 철거된 뒤 남은 잔해였다.
썩을 것들은 이미 썩어 없어지고 수십 년 세월에 이긴 것들만 남아 있었다. 건물의 구조와 규모는 잔해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였다.
사방에 콘크리트 기초가 둘러 진 것으로 보아 입원실이었음직한 자리에 한 아름드리 나무가 자라 서있었다.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외로이 살았던 여인이 떠난 뒤 긴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었다.
지금은 OECD가입국까지 되었지만, 한 때 대한민국은 ‘결핵왕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있었다. 대부분 폐결핵이었다.
결핵은 가난에 의한 비위생적인 생활관습이 주요 원인으로 선후진국을 구별 짓는 사회상징 중 하나였다.
변변한 치료약조차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의 약이었다.
하여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전국최고였던 마산과 인근에 결핵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곳곳에 들어섰다. 6·25전쟁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도립마산병원, 국립마산요양소, 마산교통요양원 외에 마산상고 교사(校舍)를 징발해 급히 세운 국립신생결핵요양원, 결핵전문 제36육군병원, 공군결핵요양소, 진해해군병원결핵병동 등이 그것이며 결핵을 전문으로 보는 개인병원도 많았다. 바야흐로 마산은 결핵치료의 메카였다.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고 불릴 만큼 문인들 사이에 만연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마산결핵병원에도 수많은 문인들이 거쳤고 글자취도 남겼다. 마산문학관 학예사 한정호박사가 정리한 바 있다.
결핵을 앓다 죽은 대표적 문인들로는 최승구, 나도향, 이상, 이광수, 김유정, 임화, 권환, 이용악, 오장환, 현진건, 채만식, 권태웅 등이고,
한 때 결핵을 앓았던 문인들로는 백석, 구상, 박철석, 남윤철, 고은, 이형기, 김지하, 김혜순, 천양희, 박정만, 성찬경 등이다.
일제기에 요양 차 이곳 마산에 왔던 문인은 나도향, 임화, 지하련이었고 광복 후에는 권환, 이영도, 김상옥, 구상, 김지하 등이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이밖에도 함석헌, 김춘수, 서정주 등 유명 문인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오갔다.
「이름모를 소녀」로 70년대를 풍미하다 요절한 가수 김정호도 이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도향은 가난과 방랑으로 떠돌다 1925년 요양 차 마산에 와서 3개월 동안 노산 이은상의 집에서 식객노릇을 하며 염상섭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의 단편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을 남겼다. 그 해는 그의 대표작「물레방아」「뽕」「벙어리 삼룡이」를 발표한 나도향 소설의 절정기였다.
다음 해 그는 스무 넷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했다.
엄혹했던 시절,
김지하는 폐결핵으로 서울시립 서대문요양원과 인천 적십자병원을 거친후 장편 시 비어(蜚語)을 발표, 체포되었는데 폐결핵 때문에 기소되지 않고 마산결핵병원에 강제 연금 당했다. 그 시절 발표한 글이다.
벗들
병든 나를 찾지 마라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머물려거든
매화 봉우리
아조아조 향그럽게 머물고
피우려거든
더욱더 새빨갛게 꽃피워라
동백이여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따뜻한 춘삼월에 만나자 벗들
눈겨울 외로움 속에
맑은 향기로 머물었다
매운 꽃으로 들에 홀로 피어났다
춘삼월 그 흔한 바람 속에 흐드러져
수월히 만나자 벗들
어렵게 수소문하여
나를 찾지 마라
병든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김지하, 「편지」 전문-
마리아가 내게 은단을 보내왔다. 마치 사약을 내리듯이, 독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김지하, 「가포일기」중-
내가 해야 할 일, 그것은 쓰는 일이다. 연필 한 자루와 한 뭉치의 종이, 그것이면 족하다. 나머지는 모두 여기, 그리고 저기에 가득하다.
사랑도 친구도 가족도 결핵 때문에 잃어야 했던 그 시절,
가수 권혜경이 부른 ‘산장의 여인’은 전 국민의 심경을 녹아내리게했다.
애절한 노랫말을 쓴 이는 마산사람 반야월이었다. 그는 진방남이란 이름으로 가수로도 활동했다.
그가 가수 진방남으로 불렀던 곡은 ‘불효자는 웁니다’이고,
작사자 반야월로 쓴 노래는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소양강처녀’ 등이다.
6·25 직후 반야월은 고향 마산에서 위문단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한번은 그가 마산결핵병원 환자위문공연에서 자신의 대표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한 곡 뽑았는데, 객석 맨 뒤편에서 하얀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이상하다 싶어서 공연 후 사연을 물었더니, 그녀는 병원 건너편 숲속 ‘산장병동’에서 요양 중인 폐결핵환자였다.
꺼져가는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쓸쓸히 살아가는 미모의 젊은 여인에 끌려 작사자 반야월은 가사 한편을 남긴다.
이 글을 뒷날 마산결핵병원에서 요양하기도 했고 결국 한쪽 폐를 잘라내기까지 했던 「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의 작곡가 이재호에게 넘겼다.
「산장의 여인」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나이가 들어 울창하게 숲을 이룬 키 큰 나무들,
가포만에서 불어드는 청량한 바람,
뚜렷이 남아 있는 병사(病舍)들의 잔해,
외롭게 살아갔던 여인이 남긴 애절하고 낭만적인 스토리텔링,
그리고 '산장의 여인'·······.
이만한 볼거리가 없다 싶었다.
애처로이 밤 새워 울었던 풀벌레와 행운의 별을 보며 속삭였던 그날 밤의 추억까지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숲이었다.
마산을 찾는 사람에게,
아니 마산을 찾고 싶도록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근대낭만유산이었다.
'찾아간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가출 청소년 쉼터'에서 비롯된 '담장허물기 운동' (1) | 2010/12/01 |
|---|---|
|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을 찾아서 (2) | 2010/10/06 |
| 나도향, 김지하 그리고 '산장의 여인' (10) | 2010/02/03 |
| ‘구(舊) 마산형무소 터’ 의 추억 (4) | 2010/01/24 |
|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 (30) | 2010/01/07 |
| 내서읍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15) | 2009/12/13 |
-
-
-
김영철 2010/02/04 17:14
마산이 고향인 저로서도 처음 접하는 이야기들이네예.
가포 결핵병원에 그렇게 슬픈 사연이 많으리라고는 미처 생각치 못했습니다.
마산의 숨은 이야기 계속 부탁 드리겠습니다. -
유림 2010/02/05 13:09
매번 참석을 하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기쁨이 참 큽니다.
가포 탐방도 참 좋았습니다
비록 신발이 엉망이 되고 온 바지에 도둑놈(?)이 붙어서 귀찮았지만..
스잔했던 그 숲이 떠오릅니다 -
조원문 2010/02/05 18:21
가끔 지나는 길인데,,이렇게 알고 보니 정말 새로운 기운이 남닙다,
회장님 정말로 마산을 많이 배우고 싶읍니다,,
함께 많은 시간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열심히 노력 하겠읍니다,,,수고 많이 하셨읍니다.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오늘부터는 ‘중앙마산의 형성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앙마산’이란, 20세기 초에 존재했던 마산의 두 도시, 즉 옛 부터 자연발생적 취락으로 발전해온 '원..
광선반은 간단히 말해 앞서 설명되었던 측창채광으로 들어오는 빛을 실내 깊숙이 들이는 장치입니다. 햇빛이 선반의 반사면에 부딪혀 다시 천정으로 반사되어 유입되는 것으로 측창채광에 비해 실내에 빛이 고른 분포를 가지게 됩니다. 개..
'마우스랜드'라는 생쥐들이 모여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들도 우리가 사는 사회처럼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뽑은 지도자는 생쥐가 아니라 매번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가 생쥐를 위해 일할리가 없..
<1920년대 교장들의 학교건물에 대한 생각> 직전 포스팅에서 설명드린 『朝鮮と建築(조선과 건축)』의 1928년 편을 보면 「學校建築號」라는 주제의 특집기사가 있습니다. 당시의 학교건축물 현황의 일편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
● 어는날 갑자기! 사는 곳이 해안도로 근처라 아침마다매 창문을 열면 마주하게 되는 거대한 시설물이 하나있다. 그것은 바로 시멘트를 담아두는 창고와도 같은 곳으로 '싸이로(Silo)'라는 놈이다. 그런데 몇일 전부터 이 싸..
<1920년대 마산의 건축물과 각종공사> 마산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근대식 건축물을 많이 세웠습니다. 한일병합 이전까지는 주로 목조로 지은 공공기관이 주류였습니다만 1910년경부터는 벽돌조도 많이 지었습니다...
측창채광은 천창채광과는 달리, 말그대로 벽면에 위치한 개구부(창문 등)를 통해 자연채광을 실내로 들여오는 방법입니다. 창문외에도 유리블럭, 낮은 고창, 채광뜰(Sunken)이나 안뜰로난 수직 개구부 등을 통해 측창채광으로 얻는..
‘진해’ 지명에 대한 글입니다. ‘진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옛 마산시 진동면 일대’의 ‘진해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대한제국시대에는 ‘통합 이전 창원시(옛 의창군)와 옛 마산시 진동면·진전면·진북면 일원’을 ‘진해군’이라..
<마산사람들의 배일감정> 일본인에 의해 사회 모든 분야가 달라지면서 한국인의 생활 방식도 많이 변했습니다. 1918년경만 하더라도 마산포 장날에 머리카락을 짧게 단발한 한국인이 보이면 신기하게 쳐다보았지만 1년이 지난 1919..
자연채광 부분에서 잠시 거론되었지만, 파사드(전면) 개구부(측면 창문)를 통해 유입되는 자연채광이 닿지 않는 공간에 보조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으로 천창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측면에 창을 두는 것이 아니라 머리위 천정에 창을..
1년동안 벽에 걸어두고, 또는 책상위에 놓게 되는 달력들은 1월에는 넘쳐납니다. 여기 저기서 받아둔 달력중에서 어떤 달력을 놓을까 잠시 고민하게 됩니다. 절에서 나온 달력이며, 근사한 미술작품을 곁들인 은행달력, 자사의 실적홍..
지난 연말, 재경마산향우회 송년회용으로 마산도시사에 대한 동영상을 만들었습니다. 서툰 작품이지만 나쁜 평은 하지 않아 공개합니다. 곧 설입니다. 마산사람들, 가족들과 함께 보면서 마산에 얽힌 추억이라도 나누어보시죠. 분량은 1..
자연채광은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건물내 다양한 공간들에 햇볕이 잘 들도록 하는 통합적 설계방법입니다. 자연채광을 위한 설계에 있어서는 방(실)별로 유사한 목적과 유사한 빛 환경을 필요로 하는 방들을 모으는 것이 중요합니..
최근 창원호텔 맞은편에 현장이 생겼습니다. 두 달 남짓 사무실이 있는 정우상가쯤에서 중앙동 민원센터까지 하루에 두세번씩 걸어갔다 옵니다. 분명 보도가 설치되어 있는 길임에도 주차된 차량으로 인해 차도로 내려갔다 올라오길 몇차..
<마산상공회> 1914년에 조선인 상업회의소가 와해되고 1908년에 설립된 일본인 상업회의소도 그 뒤 흐지부지된 후 1920년대까지 지역의 상공인들 단체는 없었습니다. 이 공백기에 「마산간담회」「마산경제회」「마산번영회」라는 상..




Prev
Rss Fe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