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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마산지명 기원설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에서부터 고려시대 여원연합군 일본원정 때 이곳에 몽고군들이 주둔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먼저,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 주장입니다.
그는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다」
고 하였습니다.
이 주장은『마산시사』를 비롯한 관찬자료와 마산과 관련한 많은 문헌에서 인용하였으며 사실상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마산의 지명 기원설입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자료에서 마산이란 지명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거 없이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한 일본지식인이 활자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
일제강점기 조선운송주식회사가 펴낸『조선항만지사정』에서는 마산지명의 기원에 대해 「조선 제18대 현종(1660년-1674년 재위) 때부터 마산포라고 칭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종의 재위기 이전에 이미 마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초로 마산이란 용어가 등장한다며 그 기원을 주장한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중종 25년(1530년)보다 100여 년 전인 세종7년(1425년)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오른쪽 그림이 표지 제목) 내상조에
「(경상)우도내상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인 마산포와 4리 317보 떨어져있다 (右道內廂 在昌原府 去海口馬山浦 四里三百十七步所屬)」
라는 마산포에 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세종10년(1428년) 8월 기록에
「경상도 마산포의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는데 물고기가 죽은 놈이 있었다 (그 당시 마산만에 적조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는 마산포 기록이 있으니 이 주장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음차현상으로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으나 근거가 불명확합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새로운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합포에 진주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한 박희윤의 주장입니다.
박희윤은 와세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현재 일본굴지의 도시개발회사 간부로 근무하는 마산사람입니다. 마산도시사연구는 국내에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작년 추석에 고향이라고 마산와서 쇠락해가는 도시모습을 보며 많이도 안타까워하더군요.
박희윤은 몽고군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합포(마산일대의 당시 지명)에 진주할 때
「몽고군 1인당 말 4필로 보면 4만 필인데 이를 먹일만한 장소로 산호동 지역 바냇들 뿐이어서 이곳에 몽고군의 목마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로 인해 「용마산」「큰 말굿」「작은 말죽통」 등의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용마산 아래에 있는 포구라는 의미와 일본원정당시 말들을 실어 나르던 포구라는 의미에서 「마산포」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시기를 고려후기로 추정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현재 지도 위에 당시의 지리적 상황과 박희윤의 추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목마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추정한 바냇들의 면적은 약 25만여 평입니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이 곳 합포의 자산성에 정동행성을 둔 것이 1274년이고, 두 번째 원정이 128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도 더된 시기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생긴 셈입니다.
600여년 전에 간행된 사료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니 앞의 주장들 처럼 시기적으로 오류가 있지는 않습니다.
몽고군-말-목마장-용마산-마산포로 이어지는 연결이 그리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몽고군이 ‘몽고정’만 남긴 것이 아니라 ‘마산’이라는 이름까지 남겼다는 주장, 참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창원'이라는 지명은 조선 제3대 왕 태종이 재위하던1408년에 탄생하였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1425년 세종이 편찬한 『경상도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창원'과 '마산' 중 어느 지명이 먼저 생겼을까요?
확인 되지도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는 ‘마산’ 지명의 정확한 기원은 무엇일까요?
이 오래된 지명은 언제 무슨 사연을 담고 만들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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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그 이후의 고통>
두 번의 전쟁 후,
조정에서는 마산지역의 지명이었던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는 회원(會原)으로 개칭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수령이 통할하던 이곳에 현령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지위를 승격시켰습니다. 일본 정벌기간에 보여준 마산지역 민관의 노고를 치하해 내린 조치로, 소위 민심수습책이었습니다.
'합포'와 '회원'은 최근 통합창원시 출범으로 두 개의 구청이 들어서는 마산에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행정구 명칭이 되었고 '의창'은 현 창원시의 두개 구 중 하나의 명칭인 '의창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배려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고난을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내린 충격은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우리 연안을 처음 침범한 것은 고종 10년(1223년)으로 여원연합군 1차 전쟁 50여 년 전입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노략질이 계속되다가 공민왕 때와 우왕 때에 가장 심해 무려 452회나 침략을 받았습니다. 고려기 전체 침입 484회의 90%가량이 이때에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삼강행실도의 열부입강(烈婦入江) 부분입니다.
고려 말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정절을 지키려고 강으로 도망쳤다가 왜구의 화살에 맞아 죽은 열부의 행실을 칭송한 그림으로 당시 왜구의 횡포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지역이었습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와 노략질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심할 때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에 수천 명이 타고와 침범할 때도 있었습니다.
마산 인근에는 고종 14년(1227년) 5월 웅신현에 침범한 일이 최초이며 2차정벌 1년 전인 충렬왕 6년(1280년) 5월에 합포로 침범해 고기잡이 하던 어부 두 명을 잡아가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는 모두 소규모 노략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0년 뒤 충정왕 2년(1350년) 6월에는 20여 척의 배를 타고 합포에 침입하여 병영에 불을 질렀고, 공민왕 1년(1352년) 9월에는 54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끌고 와 합포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왜구 침입사상 이곳 합포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공민왕 23년(1374년) 4월에 왜선 350척이 합포를 공격했을 때입니다.
이 때 왜구들은 별 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군영(軍營)과 병선(兵船)을 모두 불사르고 무려 5천여 명의 인명을 해친 다음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입은 우왕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우왕 2년(1376년) 11월부터 시작해 그해 겨울은 경남지방의 진주, 함안, 동래, 양산, 언양, 기장, 고성, 울산, 진해, 반성 등이 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구가 이곳에 상륙하여 의창현과 회원현의 관가를 공격하고 민가를 불살라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범이 마산지역에 특히 많았던 사실을 두고 학계에서는 합포가 두 번에 걸친 일본 정벌의 원정기지였기 때문에 받았던 일본의 보복성 공격이라고 해석합니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마산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은 이곳이 두 번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발진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마산이 동아시아의 군사적 중심도시로 부각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가치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래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주요 루트가 김해였던 사실에 비추어, 13세기 여원연합군의 대선단이 지금의 마산항을 발진기지로 설정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 자체로 우리 지역의 소중한 역사자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동행성으로 사용되었던 자산성에 대해서조차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학술조사도 없었습니다. 역사자원을 보존, 활용하지 못하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설화도 사실인양 뭔가를 만들기도 하는 세상인데, 있는 자원도 활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일본이 하카다(博多) 일대에 당시 몽고군과의 전쟁 유적을 발굴 보존하고 이를 역사문화관광지로 다듬어둔 사실과 비교되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지금도 마산시 자산동 3·15의거기념탑 옆에는 ‘몽고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일제기였던 1930년대 몽고정의 사진이며 아래 사진은 80년 뒤에 찍은 지금 모습입니다.
몽고 군사와 말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몽고정 옆에는 직경 1.4m의 바퀴모양 석물이 한 개 있는데 몽고군 전차바퀴이거나 물을 길을 때 발판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초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이 우물은 원래 ‘고려정’으로 불렀으나 일본인들이 ‘몽고정’으로 개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6년경까지 이 우물에는 ‘서성리수백년지음정(西城里數百年之飮井)’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 여원연합군이 떠나고 난 뒤부터 마산포의 서성리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한 우물이었다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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