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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8 00:00

누가 이 나무를 모르시나요?

<진해 중원로터리 팽나무>

일제에 의해 계획된 진해 신도시의 한복판 중원로터리에는 늙은 팽나무 한그루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나무입니다.

식민지 시대, 일본해군은 이 나무 아래서 행사도 많이 했습니다.(1930년대 사진)


1950년대 중반에 제 수명을 다해 고사(枯死)했는데 당시 수령이 1,200여년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팽나무는 신라, 고려, 조선 세 왕조를 지켜본 진해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만합니다.

이 늙은 노거수(老巨樹)는 어디에서나 불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아니었습니다. 

1899년 일본해군에서 제작한 「마산포 및 부근」이라는 지도에 의하면 당시 웅천군 웅중·웅서 양면이 자리 잡은 진해신도시지역은 넓은 평야였습니다.
북쪽은 장복산이 막아주고 남쪽으로는 야트막한 산과 오목조목한 해안을 낀 살기 좋고 아름다운 지역으로 ‘중평’이라는 이름을 가진 들판이었습니다.

그곳에는 9개 마을이 들판을 사이에 두고 오손도손 살고 있었는데, 이들 2천 여명을 벼락같이 내쫓고 만든 것이 진해신도시입니다.
하지만 이 늙은 팽나무는 쫓겨난 마을주민들과 달리, 진해 신도시의 중심에 살아 남아 신도시의 랜드 마크 역할까지 했습니다.

중평마을에서의 팽나무 위상을 확인해보기 위해 팽나무의 위치와 일본인들에 의해 사라진 9개 마을의 위치를 추정해보았습니다.

해방 2년 후인 1947년 7월에 일본식 동리명칭을 우리 식으로 다시 고치는 작업이 있었고, 1955년 8월 진해읍이 ‘진해시’로 격상될 때 다시 동명조정이 있었습니다.
이때 위 9개 마을의 명칭이 대부분 되살아났습니다.
현동·도만·도천·중평(이상 중앙동)·안곡·속천(이상 태평동)이 법정동으로 되었고, 여명리(余明里)의 ‘余’자와 통자되는 ‘餘’를 취하고 좌천리(左川里)의 ‘左’와 자음이 같은 ‘佐’를 취해서 여좌동(餘佐洞)이 되었습니다.

이 동(洞)들의 명칭을 정할 때 옛 마을 위치에 맞추어 결정했는지의 문제에 대한 전문가의 견해를 살펴보았더니, 창원대 민긍기 교수는 옛위치가 그대로 적용된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하지만 진해·웅천향토연구회 황정덕 회장의 견해는 달랐습니다.
군사지역 때문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현재 동의 위치는 옛날 리(里)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2011년 8월 8일, 황정덕 회장에게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황정덕 회장이 쓴 『우리고장문화유적길잡이』에 실린 ‘옛 중평마을 일대 추상도’에도 도만리·도천리·여명리는 현재 도만동·도천동·여좌동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다음 그림은 옛 이름을 가진 현재의 동과 팽나무를 함께 앉혀본 도면입니다.
황정덕 회장의 견해가 맞다고 볼 때, 당산나무였던 팽나무를 중평들판 중앙에 두고 각 마을들이 둘러 앉아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거당한 마을주민들은 물론,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중평들판에 있어서 팽나무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만든 진해라는 일본인도시 한복판에 오랜 세월동안 9개마을주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팽나무가 있었던 겁니다.

뿐만아니라 이 나무 주변에 일본제국을 과시하는 시설들도 들어섰습니다.
러일전쟁기념탑과 진해신사를 비롯하여 진해역·진해우체국·진해면사무소 등이 그것들입니다.

신도시가 완성되고 정착된 1920년경의 도시전경인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도시중심에 앉은 중원광장 팽나무(화살표 방향)는 크기가 대략 폭 30m 높이15m 정도로 짐작되는 도시의 강력한 상징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엽서 4장을 연결해 만든 겁니다.
대정10년(1921년) 9월 3일자로 소인된 엽서라 1920년경으로 추정하였습니다.
보시죠.

 


일본해군은 이 팽나무를 중원로터리 중심에 두면서 방사상(放射狀) 신도시 디자인의 기점으로 삼았습니다.
추정해 보면,
진해신도시를 설계하기 위한 사전현장조사과정에서 팽나무의 크기·모양·위치·앉은 높이를 비롯하여 나무에 얽힌 역사와 주민들과의 관계까지 충분히 조사 분석하였을 겁니다. 
그런 후, 팽나무가 앉은 위치에 맞추어 중원로터리를 배치한 후 북원광장, 남원광장과 크고 작은 도로들은 그에 적절히 어우러지도록 설계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진해신도시계획의 전체 틀은 바로 이 팽나무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 오래된 팽나무를 신도시계획의 모티브로 삼았을까요?

강제로 철거당한 마을의 당산나무였던 팽나무를 신도시의 중심기점으로 삼은 것은 작은 의미가 아닙니다.

당산나무단순히 나무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믿어 신목(神木)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당산수를 베거나 해를 입히면 큰 재앙을 입게 되며 천재지변으로 나무가 죽거나 쓰러져도 마을 전체가 큰 화를 입는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당산나무는 마을주민들의 대소사를 치렀던 행사장으로, 때로는 지친 심신을 품어주는 휴식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마을의 상징이자 자부심이었습니다.

이런 나무를 남겨 도시설계의 모티브로 삼은 것을 두고 생태와 경관을 고려했다고도 볼 수 있고, 벌목에 대한 미신이 작용했다는 등 다양한 추측이 가능할 겁니다.

하지만 급하게 토지를 수용했던 당시의 정황을 보면, 이런 이유보다는 군항건설과정에서 저지른 자신들의 만행에 대한 민심을 우려하여 선택한 수습책 아니었나 싶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내쫓긴 9개마을 주민들의 '고향의 상징' 당산나무마저 베어냈을 때 생길 후환을 고려했다는 뜻입니다.

이 추정은 물리적인 도시구조에 대한 결과론적 담론보다는 식민도시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억압과 수탈의 과정에 대한 담론으로 진해신도시를 조명해보자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 늙은 팽나무의 위치가 신도시의 상징공간이었던 중원광장 한복판이라는 점은 ‘비록 마을은 없어졌지만 그 역사와 전통은 존중한다’ 고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의 강제토지수탈을 ‘부득이한 조치’ 로 위장하기 위한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오래된 나무는 신도시건설 이전의 한국전통마을과 신도시건설 이후의 일본인 전용도시를 아우르는 상징이었습니다.

수령 1,200여년을 채워 천수를 다한 나무를 대신해
현재 중원로터리에는 작은 나무들과 조형물이 들어서있습니다.
어차피 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니,
역사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이것들 대신, 잘 생긴 팽나무 한 그루를 다시 심는 것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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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1.09.28 15: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대단한 글입니다.
    어제저녁 포커스경남 시청 잘 했습니다^^

  2. 대자연어머니 2016.04.04 18: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얼마전 진해를 방문하여 나무의 존재를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글 마음에 남기고 마지막 말씀 저도 같은 생각이라 말하고싶습니다.

2011.08.31 00:00

욱일승천기를 모방했다는 진해 중원광장

제국주의 일본 군부가 강압적으로 건설한 계획도시진해(구 진해시청 부근, 서부지역)가 탄생한지 100여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적인 도시계획기법이 적용된 도시이지만 설계자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일본군부가 외부전문가에게 의뢰했지 않았겠느냐' 라고 추정하는 정도입니다.

당시 설계된 진해시가지 계획도입니다. 

보는 것처럼 진해는 방사형가로구조를 가진 도시입니다. 북원(北苑)·중원(中苑)·남원(南苑)광장을 두고하는 말입니다.
강점기에는 이 세 광장을 북십(
北辻) 中辻(중십) 南辻(남십)이라 했습니다. 십(辻, 쯔지)은 우리나라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인데 '네거리, 큰길'이라는 뜻입니다.

방사형가로구조로 설계된 도시가 또 있습니다.
진해와 비슷한 시기인 1907년 시작된
함경북도 나남시입니다.
아직 원형광장이 남아 있을까 싶어서 위성사진에서 확인해 보았더니 나남시에는 방사형가로구조의 원형이 없어져버렸습니다.

따라서 비록 일제에 의한 도시계획이었지만 진해는 근대기 초에 디자인된 방사형가로구조를 가진 한반도 유일의 도시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도시사적 가치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 그림이 20세기초에 일제가 계획한 나남시의 도시계획도면(재 작도)과 며칠 전 제가 확인해본 '같은지역의 위성사진'입니다. 광장의 흔적은 조금 남아 있습니다. 


진해 도시설계의 특징을 두고 다양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은 중원광장에 모이는 8개의 도로, 즉 방사동심원형광장(放射同心圓形廣場)이 일본군의 깃발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모방했다는 해석입니다.

일제시기에 건설된 진해도시계획을 설명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흔하게 듣는 말이며, 많은 사람들이 별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알고 있고 그냥 그렇게 전하고 있는 이야깁니다.

최근에 진해도시를 주제로 논문을 한편 쓰다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제 나름의 결론을 얻었습니다.

이 글은 ‘진해중원광장의 욱일승천기 모방설’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너무 심한 비약’입니다.

아래 사진은 현 진해 탑산 정상에 일본해군이 세운 러일전쟁 승전기념탑입니다. 해방될 때까지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자랑스러워했던 욱일승천기가 탑꼭대기에서 펄럭이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혐오스럽기까지한 깃발입니다만 제가 생각하는대로 의견을 개진해 보겠습니다.

중원광장과 같은 방사동심원형광장은 도시가로망계획에서 흔히 나타나는 기법으로 유럽의 도시가 근세에 들어와서 많이 채택한 형식입니다.

대표적 도시로서는 파리를 들 수 있으며 유럽전원도시에서 이 형식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러시아가 동방에 건설한 중국의 대련과 심양에도 이런 원형광장이 나타나며, 계획도시 뉴델리와 캔버라에도 방사동심원형이 나타납니다.
멀리는 로마시대에서도 이 형태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방사동심원형광장의 디자인은 욱일승천기와 비슷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원형광장을 중심으로 도로를 뚫으면 이 모양 외에 어떤 그림이 나오겠습니까?

굳이 따져보면 욱일승천기는 깃발 중심에서 뻗어나가는 선이 16개라 도로가 8개 밖에 안 되는 중원광장과는 차이도 많습니다.
오히려 개선문이 자리잡고 있는 파리의 드골광장이 욱일승천기와 더 가깝습니다.

각 도시의 원형광장과 욱일승천기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순서는
욱일승천기  / 진해중원광장
파리 드골광장 /  로마의 광장
뉴델리의 광장 / 워싱턴 뒤폰트 광장 입니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군부의 상징인 욱일승천기는 태양을 중심에 두고 그 빛이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그 중심, 즉 태양의 한복판 지점에 일본인들이 진해에 군항을 건설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당산목 팽나무가 강점기 내내 심겨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위 진해시가지도에 나타나는 중원광장에도 자세히 보면 이 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다음 사진이 중원광장에 심겨져있던 팽나무입니다. 1920년 경 찍은 사진 같습니다.

 

 
중원로터리 디자인이 욱일승천기를 모방했다면, 
한국사람들이 조상대대로 신목(神木)이라고까지 부르며 제를 올리기도 했던 당산목 팽나무를 왜 그 한복판에 두었을까요?
설명이 참 어렵습니다.

중원광장이 욱일승천기와 비슷한 건 사실입니다만 그렇게 된 이유는, 단순히 도시디자인을 방사동심원형광장형식으로 선택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일제의 악의를 포장해주고 싶어서 쓰는 글이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 그 진실여부를 밝힐 수도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사건이든 사물이든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감정개입 없이 사실(fact)에만 근거해 설명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올리는 글입니다.
역사에 감정이 개입되면 ‘아팠던 역사’조차 극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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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재종 2011.08.31 20: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도 좀 찜찜했는데 읽고보니 정리가 되었습니다.

    • 허정도 2011.08.31 23:45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보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올려보았습니다.

  2. 2011.09.14 11:50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3. 타논 2015.03.27 14:5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당산나무를 그대로 둔 이유가.. 혹 없앨 경우 조선인들의 예상되는 반발, 일본이 그래도 조선의 마지막 정신을 배려한다는 위장술의 일종이거나, 또 자신들 스스로를 위한 종교상의 호신책 등으로 일정 시간 그냥 놔둔 것은 아닐까요? 아무 생각없이 당산나무를 그냥 놔두었다고는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치밀한 것으로는 일본인을 못 따라가니 말이죠.

    • 허정도 2015.03.30 10:27 신고 address edit & del

      당연한 말씀입니다.
      말슴하신대로 '예상되는 반발' 때문이었을 겁니다.

  4. 홍이표 2016.05.25 15: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는 홍이표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블로그 내용 잘 읽었습니다. 많이 배웁니다. 이 글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조금 적을까 합니다. 물론 서양의 도시 계획 모델이 비슷한 게 많으니, 그것들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규정돼 있지 않던 천황의 상징인 국화의 잎 수를 1868년 경, 메이지 유신 직후 '16엽'으로 공식 제정합니다. 욱일승천기가 총 16개 빛줄기로 뻗어나가게 설계된 것도, 천황의 상징인 국화 잎 숫자와 관련돼 있습니다. 그렇다고 16개의 방사형을 도시계획에서 구현하기는 쉽지 않지요... 그 상징을 보완하는 개념이 바로 '핫코우이치우'(八紘一宇) 이념입니다. 천황의 세계가 동서남북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하나의 집,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일본제국의 무한팽창 이념입니다. 여기서는 '팔'(八)이 명확히 강조되어 있지요... 진해의 해양기지로서의 상징성은, 도시계획 때에도, '4', '8', '16'으로 이어지는 일본인들의 팽창 욕구가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운데 당산나무를 가운데에 살려 둔 것은, 그들이 절대자로 모신 '천황'이란 존재도 신도의 오야붕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시신도가 근세에 이르러 '복고신도', '근대에 이르러 '국가신도'(근대천황제)로 변화돼 왔지만, 그 뿌리는 결국, 자연물(동식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과 정령숭배의 '에니미즘' 등을 기반으로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지역에서 오랜 세월 숭배되어 온 자연물에 대한 경외는 '신도'라는 종교 체계 안에서는 본능적으로 자연스럽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건 '조선민족', 혹은 '대한제국의 국가상징'이 아니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순간, 곧바로 '국가신도'의 하나의 자산으로서의 '영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 의견이 참고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근현대의 다양한 종교상징과 국가상징, 민족상징의 상호 역학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https://www.facebook.com/yipyo.hong.5

    • 허정도 2016.05.27 06:4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홍 선생님의 글을 읽고보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가 이 글을 쓴 까닭은 극일을 위해서는 역사를 과대포장해서도 안되고 과대해석을 해도 안된다는 소박한 생각 때문입니다.
      진해중원광장에 여덟 길이 만들어진 까닭을 지금 정확하게 알기는 힘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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