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율구미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9. 노일전쟁과 율구미 139. 노·일(露·日) 전쟁과 율구미(栗九味) 노국의 조계지인 율구미는 1903년 1월 5일을 마지막으로 노국 수변 8명이 철수한 후에는 공지화되었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노국 영사 카자코브는 치지코브라는 자에게 그곳을 관리 시켰다. 관리 조건은 마산포에 입항하는 노국 군함에 공급할 용수정(用水井) 하나를 마련할 것과 산에 감시인을 두기로 하고 매월 10원씩 주던 것을 무급으로 하되 한국인에게 소작을 시켜 수확된 절반을 취득케 하였다. 노일 전쟁이 일어나 1월 8일 치지코프가 마산포를 철수할 때 그가 가졌던 상품을 일본인 강기(岡崎)라는 자에 매도한 것이 연고가 되어 율구미 조계지를 이 강기(岡崎)가 관리했다. 또 부산에 살던 일본이 강본(岡本)이라는 자가 로인(露人)과 친했기 때문에 치지코프로부터.. 2017. 2. 27.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2. 아라사 함대 입항 132. 아라사 함대 입항 아라사(노국의 별칭) 함대가 마산포에 투묘(投錨)한 것은 1899년(광무 3년, 명치 32년)이 처음이었다. 주한공사인 파브로프가 탑승한 군함 만츄리아 호가 인천에서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상해로 간다 하고는 줄곧 마산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같은 동양함대 사령장관 마카로프가 좌승(座乘)한 루리크호 외 한 척과 합류했다. 그들은 마산만을 중심으로 일대의 해심과 연안을 상세하게 측량하고 군사상 필요한 육지를 구획, 포목을 꽂았다. 그들은 광대한 토지를 점거하여 용암포와 같이 해군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해군 반거지(蟠據地)로 타정(唾涏) 삼척(三尺) 욕심을 갖고 있는 일본이 한국정부를 위협하는 동시에 강경하게 노국에 항의한 경과 그들의 계획은 .. 2017. 1. 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마산포부근 지도- 1902년 / 향월원태랑 / 동경 청목숭산당 / / 한국안내 제8편 마산포안내 / 서울대중앙도서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이 지도가 실려있는 책『한국안내』는 일본인이 편찬한 마산관련 문헌 중 최초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지도는 책의 부록에 첨부된 것이라 상세하지는 않습니다만 개항 초기 마산만 주변의 상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도에는「마산포 사건」으로 유명한 율구미(栗九味)의 노국전관거류지(露國專管居留地)와 자복포의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20세기 초 마산포를 먹으려 혈안이었던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을 짐작케 해줍니다. 도시지역에 대한 상세한 표기는 없고, 각국거류지와 마산포와 구(舊) 성적(城跡, 현 용마산에 위치한 산.. 2010. 12. 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마산포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식민야욕을 불태웠던 각축장이었습니다. 시기는 개항 전후였고 그 절정이 「마산포사건」입니다. 「마산포사건」은 러시아가 부동군항(不凍軍港)을 얻기 위해 마산포를 점령하려했던 사건입니다. 사건개요를 요약합니다 러시아는 군사적 목적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우선 조선정부와 마산포 저탄소(貯炭所) 설치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일본이 러시아가 목적한 토지를 미리 매입해버림으로써 러시아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1900년 때 일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단념하지 않고 마산포 남쪽의 율구미(현 마산시 가포동의 국립결핵병원에서 MBC 송신소에 이르는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역)를 얻어 1900년 6월 4일 30여 만평의 러시아 단독조차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질세라.. 2010. 7.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