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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5/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2)
<전쟁, 그 이후의 고통>
두 번의 전쟁 후,
조정에서는 마산지역의 지명이었던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는 회원(會原)으로 개칭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수령이 통할하던 이곳에 현령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지위를 승격시켰습니다. 일본 정벌기간에 보여준 마산지역 민관의 노고를 치하해 내린 조치로, 소위 민심수습책이었습니다.
'합포'와 '회원'은 최근 통합창원시 출범으로 두 개의 구청이 들어서는 마산에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행정구 명칭이 되었고 '의창'은 현 창원시의 두개 구 중 하나의 명칭인 '의창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배려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고난을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내린 충격은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우리 연안을 처음 침범한 것은 고종 10년(1223년)으로 여원연합군 1차 전쟁 50여 년 전입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노략질이 계속되다가 공민왕 때와 우왕 때에 가장 심해 무려 452회나 침략을 받았습니다. 고려기 전체 침입 484회의 90%가량이 이때에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삼강행실도의 열부입강(烈婦入江) 부분입니다.
고려 말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정절을 지키려고 강으로 도망쳤다가 왜구의 화살에 맞아 죽은 열부의 행실을 칭송한 그림으로 당시 왜구의 횡포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지역이었습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와 노략질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심할 때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에 수천 명이 타고와 침범할 때도 있었습니다.
마산 인근에는 고종 14년(1227년) 5월 웅신현에 침범한 일이 최초이며 2차정벌 1년 전인 충렬왕 6년(1280년) 5월에 합포로 침범해 고기잡이 하던 어부 두 명을 잡아가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는 모두 소규모 노략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0년 뒤 충정왕 2년(1350년) 6월에는 20여 척의 배를 타고 합포에 침입하여 병영에 불을 질렀고, 공민왕 1년(1352년) 9월에는 54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끌고 와 합포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왜구 침입사상 이곳 합포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공민왕 23년(1374년) 4월에 왜선 350척이 합포를 공격했을 때입니다.
이 때 왜구들은 별 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군영(軍營)과 병선(兵船)을 모두 불사르고 무려 5천여 명의 인명을 해친 다음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입은 우왕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우왕 2년(1376년) 11월부터 시작해 그해 겨울은 경남지방의 진주, 함안, 동래, 양산, 언양, 기장, 고성, 울산, 진해, 반성 등이 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구가 이곳에 상륙하여 의창현과 회원현의 관가를 공격하고 민가를 불살라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범이 마산지역에 특히 많았던 사실을 두고 학계에서는 합포가 두 번에 걸친 일본 정벌의 원정기지였기 때문에 받았던 일본의 보복성 공격이라고 해석합니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마산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은 이곳이 두 번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발진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마산이 동아시아의 군사적 중심도시로 부각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가치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래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주요 루트가 김해였던 사실에 비추어, 13세기 여원연합군의 대선단이 지금의 마산항을 발진기지로 설정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 자체로 우리 지역의 소중한 역사자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동행성으로 사용되었던 자산성에 대해서조차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학술조사도 없었습니다. 역사자원을 보존, 활용하지 못하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설화도 사실인양 뭔가를 만들기도 하는 세상인데, 있는 자원도 활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일본이 하카다(博多) 일대에 당시 몽고군과의 전쟁 유적을 발굴 보존하고 이를 역사문화관광지로 다듬어둔 사실과 비교되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지금도 마산시 자산동 3·15의거기념탑 옆에는 ‘몽고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일제기였던 1930년대 몽고정의 사진이며 아래 사진은 80년 뒤에 찍은 지금 모습입니다.
몽고 군사와 말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몽고정 옆에는 직경 1.4m의 바퀴모양 석물이 한 개 있는데 몽고군 전차바퀴이거나 물을 길을 때 발판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초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이 우물은 원래 ‘고려정’으로 불렀으나 일본인들이 ‘몽고정’으로 개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6년경까지 이 우물에는 ‘서성리수백년지음정(西城里數百年之飮井)’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 여원연합군이 떠나고 난 뒤부터 마산포의 서성리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한 우물이었다는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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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포 선정이유와 민중의 고통>
왜?
원 세조 쿠빌라이와 고려 충렬왕은 대일본 원정기지로 남도의 작은 포구 합포를 택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당시 이 도시가 가졌던 자연적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습니다.
학계에서 정리된 내용은 대략 다음의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위치입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합포가 해로(海路)상 일본과의 최단거리에 있는 항구입니다. 그리고 거제도와 쓰시마 사이를 지나는 쓰시마 난류를 타면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쓰시마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갈 수 있는 첩경(합포-거제도-대마도-이키-일본본토)이라는 점입니다.
해로 뿐 아니라 육로도 수도 개경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한 최단거리에 위치한 항구가 합포였습니다.
둘째는 항구시설입니다.
합포에는 이미 조창이었던 석두창이 설치되어 상대적으로 다른 포구보다 양호한 항구시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운선을 위한 정박시설, 내륙으로의 조세운반을 위한 교통로, 조운선의 건조와 수리를 위한 조선시설, 군량미 보관에 용이한 기존의 창고시설 등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에서 인근 지역의 조세가 수납되고 있었기 때문에 군량의 확보도 유리했을 것입니다.
셋째는 포구의 조건입니다.
아래 그림처럼 합포는 리아스식 해안에 포구가 깊어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형세입니다.
거제도를 비롯한 모도․저도 등의 크고 작은 섬들 때문에 외해의 풍랑을 거의 받지 않는다는 점도 작용하였을 겁니다.
넷째는 기존의 군사시설 때문입니다.
통일신라 이후부터 동남도병마절도사영(東南道兵馬節度使營)이 설치된 이래 합포에는 계속 군사기지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위한 시설과 무기의 제조 및 보관 등을 용이하게 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백성들의 고통-
이 네 가지 조건에 의해 합포가 대일본원정기지로 선택되었지만, 두 번에 걸친 전쟁준비로 겪은 마산인근의 백성들이 받았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정벌준비에도 쉽게 동원되었을 뿐 아니라 조세도 타 지역민보다 가혹하게 부담하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정벌은 권력 확장을 꾀한 통치권자의 정치적 목적과 의도 이전에 백성들에게는 피할 수도 이겨낼 수도 없었던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수선사(오늘의 송광사) 승려 원감국사 충지(沖止)는 일본정벌로 고난을 당하고 있던 영남지방 민중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영남의 쓰러진 모습
말로 하려니 눈물이 앞서네
두 도에서는 군량을 바치고
세 산에서는 전함을 만드느라
세금은 백배나 늘었고
역역은 삼년에 걸쳐
징발은 성화같이 급하고
호령은 우레같이 전하네
····
처자식은 땅에 주저앉아 울고
부모는 하늘보고 울부짖네
저승과 이승은 다르건만
목숨 보전을 어찌 기약하랴
남은 사람은 노인과 어린이 뿐
억지로 살려니 얼마나 고달프랴
고을마다 반은 도망간 집이요
마을마다 모두 황폐한 토지로다
,,,, 전쟁 때 힘 없는 백성만 죽어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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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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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후반,
고려의 남쪽 해안에 있던 합포는 행정상으로 경상도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의안군 관할의 영현(領縣)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려 현종 군현체제 개편 때 지금의 양산인 양주에서 금주로 이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합포는 동아시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국제군사도시였습니다.
당시 세계최대 강국이었던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이 이곳 합포를 일본정벌기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때는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이었습니다.
여원연합군은 지금의 합포고등학교 남쪽 일대를 싸고 있던 현 자산성을 정동행성(征東行省)으로 삼고 전함건조(戰艦建造) 및 군사훈련을 비롯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대대적인 준비를 시작합니다.
둔전은 황해도 봉주(봉산)과 경상도 금주(김해)에, 선박건조는 제주도와 전라도 쪽에서 맡았습니다.
군사만 자그만치 33,000명이었습니다.
이들의 숙식과 훈련을 비롯하여 일본까지 배로 건너가는데 필요한 인원 등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 합포에 모여들었겠습니까. 뱃사공과 도선공, 수리공이 6,700명이었다고 하니 이곳 마산이 사람들로 북새통이었을 겁니다.
사람뿐아니라 전쟁에 나설 크고 작은 배들도 깃발을 펄럭이며 마산만으로 몰려들어 땅 바다 할 것없이 전쟁기운이 합포 하늘을 찔렀을 겁니다.
『고려사』가 그때의 정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해 10월 3일,
여원연합군이 일본 정벌에 나섰습니다.
위 그림 중 위의 것은 여원연합군 일본정벌 원정루트이며 아래 것은 다카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 전시된 당시 여원연합군의 전함입니다.
여원연합군은 쓰시마섬과 이키섬을 거쳐 하카타까지 승승장구하다가 밤이 되자 일본군의 야습을 피해 하카다만(博多灣)으로 후퇴해 선상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갑자기 들이닥친 태풍으로 배에 타고있던 연합군은 하룻밤 새 풍지박산되고 말았습니다.
세계 정복을 꿈꾼 원 세조 쿠빌라이의 첫 번째 패배였습니다.
7년이 지난 1281년,
여원연합군은 다시 원정군을 편성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병력 40,000여명에 전함 900척이었습니다.
5월 12일 출병했는데 출병 전 충렬왕이 친히 이곳 합포까지 내려와 연합군의 일본정벌을 격려했습니다.
국가통치권자가 마산을 방문한 첫 사례입니다.
연합군의 검열 차 내려와서 두어 달가량 있었는데 우부승지 정가신(鄭可臣)을 대동하였습니다. 환주산에 있는 현재의 자산성에 머물면서 중간에 김해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왕까지 내려왔으니 합포는 마치 전쟁기 임시수도와 같은 분위기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2차 원정에서도 갑자기 우박을 동반한 무시무시한 태풍이 일면서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두 번이나 태풍이 일본을 지켜주었던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자신들을 지켜준 이 두번의 태풍을 두고 카미카제(神風)이라 부릅니다. 이로 인한 허황된 의식이 역사를 오판하고 합리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두 번에 걸친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일본정벌의 출발지였던 합포에는 당시 주둔군 숙소와 군영 등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을 것입니다.
각지에서 들어오는 군량미는 물론,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들 때문에 시장도 활성화되었을 것입니다.
두 차례의 원정이 실패한 후에는 부상당한 군사들의 치료와 구제에 필요한 시설물들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도시의 규모와 성격 측면에서 본다면, 13세기 후반의 합포는 위상이 아주 높았던 국제군사항구도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 군사적 필요에 의해 조성된 각종 시설들이 뒷날 조선 후기 남해안 최대의 상업포구로 발전해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700여년 전에 이 도시 마산이 한중일 국제전의 요충지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이 도시가 오늘이 있기까지 경험했던 사건들과,
이 도시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이야기들과,
이 도시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과 사람들의 사연들이,,,,
얼마나 많을까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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