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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7. 최초의 야학교

107. 최초의 야학교

 

 

1911년 창원군 외서면 고산포(高山浦, 구마산)에는 한국 최초로 야학교(남자)가 탄생하였다.

 

발기인과 간부들은 지금은 전부 타계한 분들이지만 명부에 나타난 인물은 설립자 유천(柳川), 구성전, 교장 남전(藍田) 옥기환, 교감 창산(蒼山) 이형재, 경리 소원(小園) 김철연, 외 허당(虛堂) 명도석, 일파(一波) 김용환, 나인한(호 망각) 등 그때에도 쟁쟁한 청년 선각자들이다.

 

장소는 현재 시가지 구역확장으로 통로가 되었지만 당시 도면을 보면 남성동 69번지 조그마한 창고를 수리하여 시작하였다.

 

여기 수학생 중에는 초기 보통학교와는 달리 변발한 총각, 상투 있는 기혼자들로서 생도 전부가 선창에서 어물상의 고용인 또는 삭발 아동 등 혼성부대들이었다.

 

연혁은 기록이 소멸된 관계로 초대 교원의 성명은 도저히 찾을 길이 없지만, 선생은 대개가 창신학교 선생 혹은 보통학교 졸업자와 청년 유지들로서 보수는 봉사로 만족하였다고 한다.

 

처음 생도 수는 2, 30명에 불과하였으나 생도 수가 증가함에 따라 창동 64번지 민의소(현 시민극장)로 이전,

 

다음은 동 28번지에 목조 와옥(瓦屋) 4교실로 신축 이전하였다가 1926년 중성동 23, 전답 천여 평을 매입, 5개의 교실에 사무실, 수위, 사택 2동 그리고 회의실 등의 건축을 하여 이전하고, 창동에 있는 전 교사는 여자 야학교로 전용하게 되었다.

 

남자부 신축교사는 농촌공립학교보다 규모로나 건축 자체가 월등하여 전국에서 가장 하이칼라학교라고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교원의 봉급은 일인 평균 12원인데 모범교원에 한해서는 도 학무과에서 5원을 보조하기도 하였다.

 

학교운영을 옥기환 교장이 구마산 금융조합장으로서 받은 수당 3백 원을 1년 경상비로 충당하였으며 1936년에는 중학교 임시 준비책으로 옥기환 교장, 이형재 동아일보 지국장, 상원영(上原榮) 전 성호국민학교장 등이 합의하에 동 교내에 보습학원을 병설하기도 했다.

 

<1939년 마산 야학교 졸업사진, 가운데 앉은 노인이 남전 옥기환 선생>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일은 동교 출신 생존자라고는 거의가 없고 아니면 타처로 이사갔기 때문에 졸업생 수와 졸업 횟수를 알기에는 아득한 일이다.

 

* ; 보습학원의 전임강사는 박채우, 이영석

* 부기(附記) ; 교가 곡은 일본의 용감한 수병에서 흑동동칠야중(黑東洞漆夜中) 밤이 깊은데 억만창생(億萬蒼生) 잠들어 건곤(乾坤)이 적막(寂寞)’(가사 일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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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 양악대 11, 감전사 제1호

10. 양악대(洋樂隊)

 

마산부내에 양악대가 시초된 것은 1911년 전후라고 기억되는데 현재 신마산에 자리잡고 있는 마산극장 위편 모 상점 자리에 일본인이 경영한 안부(安部)양복점이 있었다.

여기에 악기를 일본에서 구입하여 활동사진이나 일본 연극단체의 선전으로 신·구마산을 일주하면서 점원들의 후생사업을 하여 왔던 것이다.

그 뒤 몇 년이 지나서 마산 사립 창신학교에도 7인조 양악기를 구입하여 고등과 학생에 한해 연습케 하였는데 총지휘자는 안부(安部)양복점 주인과 직공 몇 사람이었고, 교습을 받은 생도들은 박군현(팔룡), 김인숙, 황장오, 김필석, 김영근, 박성우, 최사규, 김정기, 김상기, 강을렬, 박진우 등 제씨로 기억된다.

이들 창신학교 학생 밴드대는 교내 춘추 대운동회 때는 취악(吹樂)을 하여 선수 학생들을 흥겨웁게 해주며, 또한 부민 대운동회 때도 지원해 주기도 하여 갈채를 받았으나, 이것도 대원들의 생활환경에 따라 지남지북(之南之北)으로 흩어지고 겨우 명맥을 이어 온 것은 5인조의 마산악대였다.

이들은 선전용으로 전락, 직업화되어 공락관 전용으로 되다시피 된 후로는 어찌된 일인지 악기조차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최후까지 마산악대 명의로서 일당 얼마로 단합된 사람은 우용익, 박진우, 최사규, 황장오, 김상기 등 제씨들이었다.

<창신학교 밴드부>

 

11. 감전사(感電死) 제1호

 

구마산 수정(壽町, 현 수성동) 유곽 골목에서 유까다(日衣) 차림의 중노인이 전주 위에서 감전사한 일이 있었다.

죽은 사람은 정미소를 하는 원국(原國) 某로써 그는 해군 기관병으로 전기에는 다소 상식이 있어 발동기와 트란스 같은 것은 간단히 수리하기도 한 사람이다.

참화를 당한 그날(1922년 9월 3일 우천)도 트란스에 고장이 생겨 전기회사에 전화연락을 하였으나 전공은 오지 않고 일거리는 밀려들어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전주로 올라간 것이다.

마침 궂은 비가 내리던 때라 전선에 손을 대자마자 감전되어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흠칫했는데 그 순간 나선(裸線)인 고압선이 허리에 걸려 즉사하고 만 것이다.

이 광경을 전주 밑에서 보고 있던 그의 노처(老妻)와 아들은 “아버지!”라고 목 메어 절규하며 발버둥을 치고, 개도 높은 전주 위에서 불타는 참상을 알았는지 위만 쳐다보고 이리저리로 킁킁거리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이 딱한 꼴을 보면서도 아무도 어찌할 수 없었다. 글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굵다란 전선이 허리뼈가 허옇게 드러나도록 파고 들어가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는 가제에 싸여 전공에 의하여 내려졌으나 책임소재는 밝힐 곳이 없었다.

전공이 아닌 사람이 전주에 올라가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회사 측에서 검찰관에게 진술하며 주장했다.

그런 불행한 일은 연쇄적으로 생기는 모양인가.

이 사고가 난 얼마 후 포교당 앞 전주에서도 목야(牧野)라는 일인 전공이 감전되자 재빨리 떨어져 목숨을 건졌는가 하면 2개월 전후하여 조선인 전공 두 사람도 역시 감전되었으나 비하(飛下)하여 목숨은 건졌으나 모두 상당한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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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5) - 문화권력, 이은상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8  문화권력, 이은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고향생각>, 1923년)

봄처녀 오시누나 새 풀옷을 입으셨네 / 하얀구름 너울쓰고 구슬신을 신으셨네 / 꽃다발 가슴에 안고 누굴 찾아 오시는고. (<봄처녀>, 1925년)

내 고향 남쪽바다 /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 꿈엔들 잊으리요 / 그 잔잔한 고향바다 / 지금도 / 그 물새들 날으리 / 가고파라 가고파. (<가고파>, 1932년)

 

앞의 두 노래는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우리에게 친숙한 곡이고, 마지막 노래는 우리 국민들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다. 이 노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이은상이다.

<가고파>가 국민들이 애창하고 또 마산을 상징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지면서 이은상은 마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노산 이은상 (1903~1982)>

 

-노산, 그는?- 

노산 이은상은 19031022에 마산에서 교육가 이승규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부친이 관계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한다. 창신학교 시절 그는 안확(자산)의 민족주의와 국학에 대한 연구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는다.

1923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부와 동양문고에서 사학과 국문학을 공부한 후 귀국한다.

1928년 마산에 돌아와 고향의 노비산(鷺飛山)에 올라 시조 한 편을 쓴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 예 섰던그 큰 소나무 베허지고 없구려 (<옛동산에올라>, 1928)

 

이은상은 고향의 산인 노비산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노산’으로 짓는다.

그는 1929년 월간잡지『신생』의 편집장을 한 후, 1931년-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조선일보사에서 발행되는『조광(朝光)』의 편집주간을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홍원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일제 말에 전라도 광양에 은신해 있다가 해방이 되자 노산은 광주에서 194512월에「호남신문」을 창간하여 1947815일자부터 처음으로 가로쓰기로 종합일간지를 간행했다.

이은상은 일제하에 낭만적 민족주의자로서 전통시조를 계승하여 많은 시조를 창작하였다.

1933년에 나온『노산시조집』은 생동적이면서도 뛰어난 언어적 기교를 발휘한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시조 창작과 기행문 등을 통해 조선의 자연을 노래하고 우리말을 지키는 노력을 했다.

노산의 작품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지한 역사의식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또『조광』의 편집주간을 한 것 등 때문에 그의 일제 때 친일 행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분명하게 입증된 것은 없으므로 일단 기존의 연구 결과에 따르기로 한다.

일제 때의 소박한 낭만적 민족주의자들이 해방 후 좌우익의 갈등에서 우파적이 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노산은 일찍이 1920년대 후반 카프(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해 국민문학을 주창하고 이에 기초한 작품활동을 했으므로 그에게 이승만에 의해 주도된 분단국가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국가였다.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북한공산주의 집단에 대한 분노와 북진통일(‘고지’)에 대한 염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 고지(高地)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 (<고지가바로저긴데>, 1953년)

 

이처럼 소박한 민족주의자로서 또 반공주의자로서 노산은 이승만정권 하에서 전남대학교 재단이사장, 이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 등 굵직한 직함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한다.

3·15가 일어나기 얼마 전 이은상은 ‘문인유세단’을 조직하여 자유당 대구 유세에서 당시 시국을 임진왜란과 비교하면서 “이순신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1960년「서울신문」35일자에는 “대통령선거 유세 중에 시인 이은상씨는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과 아울러 이기붕 의장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인간성을 설명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39일 오후 1시 마산무학초등학교에서 정부통령 선거유세를 지원하는 강연회가 열리는데 이 때 소설가 박종화 등과 함께 이 강연에 참여하여 선거유세를 했다.

그러므로 마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3·15민주화의거가 일어나자 노산은 이를 비판하면서 3·15의거는 “무모한 흥분”으로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불합리·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이며 따라서 시위가 확대되는 것을 ‘마산사람’으로서 염려하며 마산시민들에게 “자중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이은상이 박종화 등과 함께 마산무학초등학교에서 리승만의 선거유세를 한다는 벽보>

 

-박정희를 미화하고-

이승만 외에도 이은상이 이순신 같은 구국의 영웅으로 미화한 또 다른 인물이 박정희이다.

박정희는 만주국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1944년에 만주군 보병부대에 배치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 부대에 있으면서 항일무장투쟁 세력에게 총부리를 겨눈 경력이 있다.

박정희는 해방 후 한때는 남로당의 박헌영 계열에 속해 있다가 군내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숙군작업에서 자신의 동료들을 팔아 목숨을 건졌고, 6·25를 거치면서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소장으로서 5·16쿠데타를 주도하여 군사정권을 세운다.

이은상은 5·16쿠데타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협력했다는 사실도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은상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고 박정희의 문화행정 자문역으로 민족문화협회장 등 다양한 감투를 쓰고 박정희정권의 문화,교육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은상은 박정희 묘비 헌시비문에 “…조상의 얼과 전통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 내디뎠기 /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외다”라고 찬양할 정도로 독재자 박정희를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숭배하였다.

<이은상이 지은 박정희 조곡>

 

노산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협조와 찬양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도 협조하고 찬양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이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자『정경문화』19809월호에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글을 실“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경하하며”,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쓰고 다음 해 4월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이 된다.

 

노산은 다음 해(1982년) 9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노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극단적이다. 뛰어난 시조작가이자 민중시인으로 또 훌륭한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제시대의 친일 혐의를 제기하고 특히 해방 후의 독재정권에 아부하여 출세하고 명예를 얻으며 권력을 좇아 산 어용 지식인으로 폄하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볼 때 노산의 문학적 업적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가 이승만,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심지어는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까지 찬사를 보낸 것이 명백히 사실로 드러난 이상, 노산에 대해 다시 냉정하게 평가해야할 시점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재현 / 경남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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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비단안개 2014.11.10 11: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평소 궁금했던 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허정도 2014.11.11 13:1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2. 김기철 2014.12.21 07: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하시는 일과 생각하시는 모든것에 늘 박수를 보냅니다.
    늘 건강 하시길 ....
    많은 자료와 글 들이 너무 좋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2014.10.13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1) -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4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마산의 역사 속에서 전후를 막론하고 옥기환(玉麒煥 1875∼1953) 선생을 능가할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 말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며 마산의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던 향토사학자 이학렬(李學烈) 선생의말이다.

옥기환은 마산에서 태어났다.

민족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암울한 시기,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 조선이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식민지 시기를 거쳐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를 살았다.

집안에 대해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4대째 마산에 정착하며 살았던지주집안이었으며, 어시장에서 객주(客主)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도 지주였으며, 사업가였다.

그는 마산지역 교육발전의 버팀목이었다. 한국 최초의 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설립하고,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상업학교, 마산중학교 등 오늘날 마산의 유서 깊은 학교의 육성에 적극 관여했다.

민족자본가이기도 했다. 경제인으로서 한국인 최초로 마산에 무역회사이자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마산경제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얻어진 수익을 교육에 투자하여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였던 민족자산가였다.

 

-마산 교육의 버팀목-

옥기환에 대한 기억은 일제시기 민족의 각성을 촉진하고 지역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교육방면에 열정을 쏟은 교육지사로서의 모습이 가장 뚜렷하다.

“인재양성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고 선생이 교육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1907년이다.

선생은 구성전(具聖傳) 등과 함께 재원을 마련하여 한국 최초의 노동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개설하고 스스로 교장에 취임하였다.

마산노동야학은 처음에는 지금의 남성동 69번지에 있는 창고 하나를 수리하여 교실로 사용하였다. 학생 수도 20∼30명에 불과하였다. 학생들은 주로 선창 어물상의 고용원이나 공장근로자, 농민, 도시빈민의 아이들이었으며 수업연한은 1년이었다.

교과목은 조선어, 일본어, 한문 등이었는데, 당시의 일반 공립보통학교가 일본어로 된 교과서에다 일본어로 수업하였던 것에 비해, 노동야학은 조선어를 첫째 과목으로 가르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과 교사 수는 늘어갔다. 교사들은 대부분 창신학교의 교사들이었으나 김철두, 명도석, 김용환 등과 같은 청년지식인도 노동야학의 교사로 참여했다.

이들은 민중의 각성과 계몽이 우리 민족을 강력하게 만드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보수 없이 무료로 교육을 담당하였다.

노동야학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재 등도 무료로 학생들에게 지급하였다.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은 컸다. 경영에 참여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면서 급기야 운영비 자체를 선생이 혼자서 부담해야 했다.

191410월에는 기존의 교사(校舍)를 대신하여 마산시 창동에 교실 여섯 개의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였는데, 이 때도 선생이 주도적으로 나서 1,300의 거금을 조달하여 보다 많은 학생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노동야학이 번창할수록 일제의 견제도심해졌다. 일제는 ‘노동’이라는 학교명에 대해 사상적인 트집을 잡았다. 때문에‘노동야학’은 학교 이름을 마산중앙야학교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마산중앙중학교와 마산공업고등학교는여기에서 출발하였다.

 

<중앙야학교 졸업식(1939년) / 앞줄 가운데가 옥기환 선생>

 

한편 그는 야학 하나만으로는 일반의 교육수요를 충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야학이나 일반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보다 상급의 학교가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때마침 3·1민족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지배 정책도 일방적인 탄압과 수탈로부터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그 방향이 바뀌면서 뜻있는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고등교육의 필요성과함께 그 설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마산에서도 선생을 중심으로 지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마산에 실업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선생은 기성회의 회장을 맡았으며, 19211228일에 3제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는 훗날 5년제의 정식 상업학교(지금의 마산용마고등학교)로 승격하게 된다. 이 때도 선생은 기성회장을 맡았다.

그밖에도 선생은 19215월 마산구락부 평의장으로 있을 때, 마산구락부에서 운영하던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교에 당해 년의 운영비로 200원을 기부하였고, 1924년에는 북간도에 있던 민족학교인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의 확장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할 때 마산지방을 방문한 김홍선 등에게 지역인사들과 함께 약300원에 가까운 자금을 제공하였다.

1927년 신마산을 근거지로 삼은 조선인들이 중심이 되어 마산고등보통학교 창립기성동맹회를 조직하여 그 설립 준비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이때도 이우식, 구성전 등과 함께 각각 1만원을 기부하기로 하였다.

결국 일제의 방해로 설립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일제가 마산중학교(현재 마산고)를 설립하는데 있어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마산중학교의 설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이 60%, 한국인이 40%의 설립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그 기성회가 결성되었을때, 선생은 한국인을 대표하여 부회장을 맡음으로써 그 실현에 기여했다.

그리고 193561일에는 선생의 회갑연 비용으로 쓸 작정이던 1,300원이라는 거금을 마산부 내의 각 공사립학교와 유치원에 극빈자 구제비로 기부하기도 하였다.

 

-성공한 사업가-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자신이 이룩한 사업 등으로 많은 부를 축적함으로써 마산을 대표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부를 바탕으로 선생은 교육사업에 자신의 열정을 투자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진영과도 연결될 수 있었다.

19199월 당시 원동상회(元東商會)를 운영하고 있던 선생은 명도석, 김철두 등과 함께 경제적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해 자본금 50만원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에 주식회사 원동무역을 정식으로 출범시키게 된다. 이 회사는 마산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대표적인 주식회사이며 무역회사로 성장하게 되며, 마산 경제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모태가 된 원동상회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1915115일 경북 달성군 수성면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이시영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자금원으로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한다.

조선국권회복단과 원동상회가 관계를 맺게된 것은 마산을 근거로 활동하였던 민족주의자이자 국학자였던 안확(安廓)에 의해서였다.

안확과 원동상회간의 연결고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안확이 일찍이 창신학교의

교사를 지낸 경험이 있는데다가, 이 학교 교사들이 ‘마산노동야학’에 참여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원동상회 운영자인 옥기환은 일찍부터 노동야학을 개설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노동야학을 중심으로 안확과 옥기환과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원동상회가 조선국권회복단의 ‘자금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원동상회와 조선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는 원동무역회사가 성립된 이후에도 계속된 듯 하다.

그 구체적이고 명확한 관계는 현재의 상태로는 밝히기 어렵지만,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시경제통제의 강화로 이 회사가 문을 닫기 전까지 해외의 독립운동단체에 회사의 이익금 중 일부를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초대 마산시장으로-

일제시기 교육과 경제인으로서의 옥기환의 업적은 마산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만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선생의 업적은 마산의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도 충분했다. 그것은 선생이 미군정의 초대 부윤으로 추천되었다는 것에서도알수있다.

194512월에 마산에도 미군정청이 정식 발족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미군이 맡은 미군정 부윤 외에 한국인 부윤을 임명하여 양두체제를 갖추었는데 이 체제는 19473월 군정이 2선으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됐다.

이 시기로부1949621일까지 마산부엔 4명의 부윤이 있었다. 그 초대 부윤으로옥기환 선생이 임명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선생은 약 5개월 간(19451215일부터 1946514일까지) 군정의 부윤직을 맡았다.

당시 군정 부윤은 행정이야 별문제로 여기지 않았으나 어수선한 당시 사회분위기의 안정을 위해서는 덕망있고 지역민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는 지역 인사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군정부는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선생을 한국인 부윤에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군정부윤을 비롯한 부내 유지와 부청관계자들의 집요한 요청에도 수락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에 군정청에서는 7번째로 선생을 찾아가 “당신에게 당신 나라 일과 당신이 사는 사회의 일을 해달라는데 거절할 수 있느냐”고 강하게 다그치며 민족감정을 자극하자 선생은 마침내 그 직을 수락하였다. 그나마 그것도 마땅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 몇 개월만 맡겠다는 조건부 수락이었다.

또한 초대 마산시장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주위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던 그는 시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역시 다음을 위해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아름다운 미덕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도 일제에 협력했던 발자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민족자본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에 대해 굴신(屈身)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1911년 마산경찰서장이 조선인의 풍기교정과 공익증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최초로 발기한 교풍회(矯風會)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일이나, 명치신궁(明治神宮) 봉찬회(奉讚會)에 많은 성금을 기탁하고 부협의원(府協議員)으로활동하였다는점등이그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분명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역사 인물의 평가에서 지나치게 공만을 드러내고 허물을 감춘다면 그 또한 일종의 역사왜곡이다. 또한 너무 허물만을 강조하여 그 사람의 역사적 평가마저 부정한다면 그 역시옳지 않다.

옥기환 선생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교육과 경제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육계에서 그의 활동은 당대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마산지역이 민주성지로 우뚝 서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치었다.

그가 세웠던 노동야학의 교사들과 졸업생들은 일제시기 마산지역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 3·15, 4·19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사회의 행복은 그 사회가 존경할만한 인물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산의 역사 인물 발굴은 더없이 중요한 사업의 하나라 생각되며, 선생에 대한 공과의 연구도 그런 차원에서 보다 심도있게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김원규 / 당시 경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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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동추 2014.11.08 10: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이 그나마 민족정기를 이어받은 유서깊은 도시가 되는데는 이와같은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 특징없는 지리멸렬한 도시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2014.09.29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9) -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2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을 말하고자 할 때 ‘창신학교’는 마땅히 맨 앞자리에 놓을 만하다.

왜냐하면 창신학교는 우리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근대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그곳에서 배웠거나 가르친 이들이 뒷날 우리 지역의 크고 작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시기 창신학교가 경제적으로 운영이 어려웠을 때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살리고자 했던 노력은 바로 이런 까닭에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나라 잃은 시기의 민족교육활동가들 가운데 창신학교에서 삶의 중요한 한 때를 서로 부대낀 이들을 가려 뽑아 우리 지역의 정신맥락 하나를 가다듬고자 한다.

 

-민족 교육자이자 광복 투사였던 안확과 이극로-

창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펼친 이 가운데 비교적 앞자리에 놓이는 이는 바로 안확(호는 자산, 1886-1946)이다.

<안확(1886~1946)>

 

우리나라 근대 학문의 기초를 마련한 이로 평가되는 안확이 창신학교에 처음 부임한 때는 1910년이다.

2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1916년 다시 창신학교로 돌아와 역사와 한글을 가르쳤고, 이듬해인 1917에는 그의 첫 저술서인『조선문법』을 펴냈다.

이 때 창신학교에는 주시경의 제자로서 일찍이 한글운동에 힘을 쏟고 있던 김윤경이 함께 일하고 있었고, 역시 주시경의 제자로서 평생을 한글교육과 보급에 힘을 쏟은 이윤재가 가까이 의신여학교에 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안확은 비록 우리말에 대한 주시경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기도 했지만, 나라잃은시기에 ‘우리말이 곧 우리얼’이라는 언어민족주의적 교육관에 있어서는 김윤경이나 이윤재와 다르지 않았다.

마산에서의 안확은 단순한 민족교육가로서의 면모만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1916년에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을 맡아 일하면서, 일제에 대한 적극적 투쟁을 실천해 보인 광복투사이기도했다.

1919년에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가 주도한‘4·3 진동의거’가 있은 뒤 그는 곧바로 마산을 떠났는데, 창신학교 시절 이은상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에 대해 이은상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선생이 교단에 올라서면 글을 가르치기 전에, ‘너희들은 대한제국의 국민이다’하고 우리들의 가슴에 불을질렀다. 이미 대한제국은 무너졌었다. 그러나 마산 창신학교의 교단 아래 앉았던 우리들의 가슴 속에는 대한제국이 살아 있었다.

 

안확이 교사로 일하고 있던 1910년에 창신학교에서 공부한 이 가운데 눈여겨보아야 할 이가 이극로이다.

 

<이극로 (1893~1978), 국어학자, 정치인>

 

이극로(호는 고루, 1893-1978)는 경남 의령 사람이다.

넉넉치 못한 농군의 살림이 싫어 나이 열 여섯에 집을 뛰쳐나와 길렀던 머리를 깎고 창신학교에서 2년 동안 신학문을 배웠다.

이극로는 이은상의 창신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가족의 아무런 지원 없이 가난한 고학생으로 스스로 벌어 공부를 하던 그를 두고 이은상의 아버지는 수 차례 이은상의 생활 태도를 나무랐다고 한다.

창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곧 멀고 험한 유학의 길에 오른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그저 의기만 드높았던 시골 소년의 유학길이었다.

불가능해 보일 것 같던 그의 유학은 갖은 고생과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결국 현실이되었다.

첫 유학지였던 중국 동제대학에서 그는 한글학자 김두봉을 만나 함께 한글 자모체계를 연구했다.

그리고 192310월, 독일 유학 시절에는 베를린대학에 마련된‘조선어과’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김두봉이 만든 한글 자모분할본 활자판을 이용해 <허생전>을 외국에서 최초로 인쇄, 배포하여 조선어를가르쳤다.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던 해(1927)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부터 영국과 프랑스에서 정치, 경제, 음성학 등을 배워 1929년 귀국했고, 곧이어 ‘조선어연구회’ 회원으로 일하다가 1929년에‘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본격적인 한글사전편찬 사업에 힘을 쏟게 된다.

194210월에는 ‘조선어학회 박해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어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6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뒤1946년엔 교육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제도를 정부에 건의하여 통과시켰고, 다음해인 1947년엔 민주독립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에 건민회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가 평양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김두봉과 함께 우리말 연구에 계속 힘쓰다가 1978913일에 숨을 거두었다.

 

-김윤경과 이윤재, 그외 한글운동에 헌신한 사람들-

이극로가 창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에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준 이 가운데에는 김윤경도 있었다.

김윤경(호는 한결, 1894-1969)은 경기도 광주에서 나고 서울에서 공부했다.

1911년 주시경을 만나 처음으로 한글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114월에 창신학교 고등과 교원으로 부임해 1917년까지 일했다.

이때에 그의 첫 논문이랄 수 있는 <조선어학연구의 기초>라는 글을썼다.

이후 1921123에는 ‘조선어학회’의 전신이랄 수 있는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회원이 되어 우리말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다가, 1942101일에‘조선어학회 박해 사건’으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창신학교의 모습 (1909년)>

<창신학교 설립인가서(1909년)>

 

창신학교에서 김윤경을 만나 처음 한글에 대한 깊은 뜻을 배우고, 그 뒤 평생을 한글교육과 보급에 힘쓰게 된 이가 이윤재이다.

이윤재(호는 환산, 1888-1943)는 경남 김해 사람이다.

김해공립보통학교를 마친 뒤 김해·대구 등지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마산으로 내려와 창신학교(1911-1913)와 의신여학교(1913-1917)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충무공 이순신을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애국자로 여겼던 그가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교단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능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윤재는 1919년에 평안북도 영변에 있는 숭덕학교에 교사로 일하였는데, 기미만세의거가 일어나자 학교 안에서 만세 운동을 주동하여 옥고를 치르기도했다.

1925년에는 서울의 협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는 안확이 교사로 일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사람에게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음’을 통탄한 이윤재는 1927년에 최남선, 정인보 등과 힘을 모아 ‘조선어사전 편찬’에 힘을 쏟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929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극로와 동래 출신의 한글학자 최현배 등과 뜻을 모아 본격적인 사전편찬사업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한글교육을 통해 민족의 얼을 오롯이 지켜내고자 애썼던 그는 옥중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한글교육과 우리말사전편찬 사업에서 잠시도 손을 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박해’사건으로 투옥되어 그가 겪은 고초가 어떠했는가는 경남 언양 출신의 한글학자인 정인섭의 회고를 통해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긴 나무 걸상에 이윤재씨를 온통 맨몸으로 홀딱 벗겨 걸상에다 눕히고는, 몸과 허리와 두 발목의 세 군데를 노끈으로 걸상에 매어놓고, 순사 부장과 한국 순사 한 사람이 옆에 서서 그 일본놈이 주전자에서 찬물을 이윤재씨의 코와 입언저리에다가 부으면서 “상해 임시정부 문교부장 김두봉에게 독립운동 지령을 받았지”라고 물었다.

 

결국 이윤재는 이러한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의해 1943128일 함흥감옥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었다.

나라 잃은 시기에 남녘의 조그마한 갯가에서 나라 잃은 울분을 어금니로 깨물며 어린 영혼들을 조용히 일깨우던 이들과, 그 뜻을 이어 받아 뒷날 나랏말을 다듬고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안확, 이극로, 김윤경, 이윤재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 옮겨 알리진 못했으나, 김두봉(기장), 안호상(의령), 안희제(의령), 윤병호(남해), 이우식(의령), 정인섭(언양), 최현배(동래) 등도 모두 이 시기 나랏말을 다듬고 지키는 일에 온힘을 쏟거나 보태신 우리 지역 분들이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삶의 곤궁함 속에서도 꼿꼿이 몸을 세워 평생 나랏말글 다듬기에 힘을 쏟고 보탬을 주신 분들이기에 나랏말이 헝클어지고, 민족 얼이 흐트러지는 이 때에 더욱 그분들의 삶을 돌이켜 그 뜻을 새겨야 할 필요가 있으리라 여긴다.

아울러 한때 그런 민족정신의 한 바탕이 되었던 우리 지역에 대한 정신사를 제대로 짚어 앞으로 올바른 지역사랑의 나아갈 바를 분명히해야 할 일이다.<<<

차민기 / 창신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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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젤리 2015.10.20 20: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정말 이분들덕분에 우리가 있는것임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2. 젤리 2015.10.20 20: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정말 이분들덕분에 우리가 있는것임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3. 젤리 2015.10.20 20: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정말 이분들덕분에 우리가 있는것임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2014.08.2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창구로 변질되어 갔다.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쌓아둔 인천항의 쌀가마니>

 

또한 일제는 과거 일본인 조계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식민도시를 건설하기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마산사람들의 저항도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가게 되었는데, 시장권과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과 어용단체 신상회사(紳商會社) 철폐 및 국채보상운동 등이 그 한 예이다.

또한 마산의 토착 상인들은 일본상인들과 대결하기 위해 민의소와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어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천황만세’를 거부한 창신학교 학생들-

1910년 조선을 완전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인 지배를 위해 무단통치라는 극악무도한 지배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의병전쟁의 패배로 그 힘이 약화되어 본격적인 투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점차 독립에의 꿈을 버리고 일제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산의 민의소와 조선인상업회의소에 관계하였던 많은 조선인 자본가들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하여 일제에 굴복하였으며, 일제를 칭송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대표적 친일단체 마산교풍회를 설립하고 민중들을 통제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김병선, 손덕우, 김선집, 옥기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한말 이후 교육과 계몽을 통해 마산의 근대화에 앞장선 점도 있지만, 또한 친일의 길을 걸어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에 비해 같은 자본가였지만,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 상인들도 있었다.

191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의 지부장 안확, 이형재, 김기성, 배중세 등이 그러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그리고 마산노동야학교에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도 1910년대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독립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1년에 일어난 창신학교 학생들의 항거사건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있다.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였던 일본국왕 명치(明治)가 죽고 대정(大正)이 즉위하자 일제는 이를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각급 기관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천황만세를 소리 높이 외칠 것을 주문한 일제에 대해 당시 행사에 동원되었던 창신학교 학생들은 호응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기마경찰과 충돌한 학생들은 일제 경찰들을 공격하여 자산천(지금의 무학초등학교 옆 개울)에 밀어넣어 버렸다. 이 일로 창신학교는 많은 곤욕을 치룬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에 강점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의 투쟁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조직적으로는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러19193월 만세시위는 그 사정이 달랐다. 그 시위는 일제를 놀라게 하였고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기개를 만방에 드높인 것이었다.

당연히 마산에서도 시위는 조직되고 시도되었다. 마산의 3·1운동은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민족대표 33가운데 1인)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지만,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세력과 연결이 되고 있었던 김용환, 이형재 등 전투적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창신학교와 의신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와 박순천 등도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다.

만세 시위의 주 참가자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산 시민과 인근 지역의 농민 등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가하였다.

특히 마산의 시위는 33일 두척산(무학산) 시위를 필두로 321일, 325일, 331일 등 4차례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에는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도 만세시위를 감행하는 등 어느 지역 못지 않게 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일제는 김용환, 이상소, 박순천 등 48명을 감옥살이를 시켰으며, 특히 김용환은 일제의 심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옥사할 정도로 그 기개가높았다.

3·1 운동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민족적인 민족해방과 독립에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민족해방운동 진영에서는 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운동세력들이 나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개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그러한 상황은 마산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마산지역에서도 3·1동 이후 실력양성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1920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마산구락부’를 창립하고 교육·체육·계몽·교류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마산구락부를 만든 사람들은 과거 마산 민의소의 회원들이 많았으며, 손덕우, 옥기환, 김치수 등 대개가 상인을 비롯한 지주 출신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들은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조선인 전용의 운동장을 만들어 각종 체육행사를 열었으며, 강연회, 토론회 등도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화운동에 나섰다.

밖에도 마산지역의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로 기독교 계통의 면려청년회와 면려청년회를 지원하던 문창예배당(교회)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01년 설립된 마산문창교회의 1919년 모습>

 

그러나 마산지역의 문화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22년 이후에는 극심한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1920년 이후의 경제공황과 더불어 조선인 자본가들의 자금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며, 또 일반 대중을 조직과 사상면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집회장소로 자주 이용되던 문창예배당을 교회측이 더 이상 집회장소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문화운동이 대중과 분리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주도한 노동·농민 운동-

한편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할 즈음 마산지역에서는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다.

김명규, 김형두, 손문기, 이주만, 이근우 등은 19221111일 ‘신인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였다.

사상단체란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사상을 연구하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도했던 단체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인회는 19238월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는데, 신인회와 혜성사의 초기 회원 중에는 민족해방과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고유한 목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혜성사의 조직 이후 혜성사의 주요 조직원들은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연구와 전파, 그리고 성장하는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을 지도하려고 하였다.

 

<1921년 준공된 마산 경찰서>

 

1924년 마산노동 동우회를 통하여 경남지방의 노동·농민운동 단체를 ‘조선 노동 총동맹’에 가입시킨 것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또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강습회를 개최하였으며, 동경대지진 학살 동포에 대한 추도 및 기근 구제활동 그리고 지역내부의 파업활동에 대한 지원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25년 건설되는‘조선공산당’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마산 야체이카(세포 -당원)가 되었다.

특히 김영규와 김형선은 1926년 조선공산당의 경상남도 집행위원회의 당과 공산청년회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인회와 혜성사 출신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이 경남지역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1926년 조선공산당이 계획하고 주도한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서 김명규, 김기호 등 10명이 검거되고 김형선은 상해로 탈출을 하게 되는데, 지도부가 검거되자 마산지역의 조선공산당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당원의 대부분이 일제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대중단체의 간부직에 있었던 그들 자신들의 잘못된 활동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외에도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계열의운동도 존재하였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이 바로 그들이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은 1925년 김형윤을 중심으로 조한응, 김계홍 등이 최초로 시작하였는데, 본격적 활동은 1927년 서울에서 ‘김산’이라는 무정부주의자(직업은 목사)가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일제로부터 벗어난 자주적인 독립교회 활동을 전개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마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연맹’과 연계하여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8년 상해에서 개최된‘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대회’에 회원인 이석주를 파견하여 국제단체와 연계하기도했다.

그러나 마산과 창원에서 활동하던 이석주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김형윤 등 다른 조직원들도 검거되어 마산아나키스트 그룹의 활동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29년 조선전역을 강타한 광주학생운동의 여진 속에서 발생한 ‘친일교사 배척운동’ 시위사건과 1937년 신사참배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노동자·농민 등 생산대중의 일제에 대한 투쟁도 일제하 마산지역의 민족해방운동에서 당당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자리잡은 마산의 역사적 위상은 바로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마산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이미 예고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신춘식 / 당시 동아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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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30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6) - 일본의 침략과 저항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6 일본의 침략과 저항

 

1876년 조선이 일본과의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개항 이후 마산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하여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장악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들의 소굴로 변해갔다.

드디어 1899년 5월1일, 마산은 일본에 의하여 강제적인 개항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산포 남쪽 2㎞거리에 이쓴 창원군 외서면 해안의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가 각국공동조계지란 이름으로 계획도시(지금의 신마산지역)가 들어섰다.

같은 해 11월1일, 부산해관 마산출장소로 사용되던 남성동 조창건물에서 시행된 제1차 경매를 시작으로 총 4차례의 경매를 통해 조계지는 외국인들이 소유가 되었다.

1.2차 경매까지만 해도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등이 참여한 공동조계 성격이었지만, 1908년 일본의 러일전쟁 승리와 을사조약 체결, 그리고 마산과 삼량진 사이에 건설되었던 철도 마산선의 개통으로 일본인의 독차지가 되었다.

1910년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면서 구마산지역까지 일본인의 영역이 되었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전진기지로 바뀌었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창구로 변질되어갔다.

<식산은행 마산지점 / 옛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

 

이에 따라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마산사람들의 저항도 점차 거세어졌다. 시장권과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과 어용단체 신상회사 철폐 및 국채보상운동 등이었다. 또한 마산의 지역 상인들은 일본상인들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민의소와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었다.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 자본가들도 있었다. 1910년대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적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의 지부장 안확, 이형재, 김기성, 배중세 등이 그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그리고 마산노동야학교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도 1910년대의 어려운 조건속에서도 독립에 대한 꿈을 계속 이어갔다. 1911년에 일어난 일본국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시가행진에서 일제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일제에 강점 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의 투쟁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조직적으로는 전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19년 3월의 만세시위는 달랐다. 일제를 경악하게 만들었으며 독립에 대한 조선인의 열망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역에서도 시위는 조직되었고, 만세의 물결이 모든 거리에 넘쳐났다.

만세시위는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되어 시작되었지만,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세력과 연결되고 있었던 김용환, 이형재등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외에 창신학교와 의신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와 박순천 등도 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했다. 만세시위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등의 학생들이 중심이었지만, 마산 시민과 인근 지역의 농민 등도 참여한 광범위한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마산의 시위는 3월3일 두척산(무학산)시위를 시작으로 4차례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창원지역의 구창원읍(지금의 창원시 소답동)의거, 상남면(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의거는 창원지역민들의 독립의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민족적인 민족해방과 독립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하지만 민족해방운동 내부에서는 해방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자는 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통해 즉각적으로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마산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산지역에서도 실력양성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1920년 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 ‘마산구락부’를 창립하고 교육.체육.계몽.교류 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마산구락부를 만든 사람들은 과거 마산인의소의 회원들이 많았으며, 회원은 대개가 상인을 비롯한 지주출신 자본가들이었다. 손덕우, 옥기환, 김치수 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계열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할 즈음 이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1922년 11월에 결성된 사상단체 ‘신인회’가 바로 그것이다. 이듬해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다.

혜성사는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연구와 전파 그리고 성장하는 민중운동 즉 노동. 농민운동 단체를 ‘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시킨 것은 이들의 활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25년 건설되었던 ‘조선공산당’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마산 야체이카(세포-당원)가 되었다.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발생한 ‘친일교사배척운동’ 시위사건과 1937년 신사참배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이외에도 노동자.농민들의 일제에 대한 투쟁도 계속되었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1910년 당시의 창신학교(지금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 87번지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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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원중 2014.06.30 16:2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상세한 포스팅 내용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읽어오고 있는데
    정말 도움이 많이 됩니다.

    • 허정도 2014.06.30 21:0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2013.05.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3) - 강점제3시기

<1930년~1945년 당시의 마산 - 사립 창신학교>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당한 사립 창신학교의 1930년대 사진 몇 장 소개합니다. 창신학교 100년사에 있는 자료들입니다.

이 사진들은 폐교되기 전, 창신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의 활동을 담은 장면입니다. 당시 우리 지역의 근대식 교육기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 소개해봅니다.

<1933년 창신학교가 병설한 복음농업실수학교 학생들의 사진입니다> 

 

<1934년  복음농업실수학교 벼베기 실습 장면입니다> 

 

<다음 사진은 1935년 복음농업실수학교 졸업 기념 사진입니다> 

 

<1936년 진급기념사진. 강제 폐교 후 이 학생들은 현 완월초등학교에 편입했습니다>

<다음 사진 사진은 1925년 일제의 탄압을 비켜가기 위해 창신학교 고등과를 고등보통학교(4년제 중학교 과정)인 호신학교로 바꾸었을 때의 졸업사진입니다. 대략 1930년 전후 어느 시기의 사진 같습니다. 호신학교는 1932년 폐교>

어떻습니까? 불과 80년 전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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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삼식 2013.05.27 11:4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 땅에 먼저살다간 민초(선조)들의 모습들을 보게되는군요,
    어느 누구의 할아버지, 할머니일 수도 있겠죠~

2012.10.1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강점3시기 마산의 교육기관>

1941년 간행된『약진마산의전모(躍進馬山の全貌)』와『마산개항백년사』에 게재된 내용에 의하면 1930년대 마산의 교육기관은 공립으로 마산공립중학교․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반면 사립으로는 창신․호신․의신학교․마산노동야학교 등이 있었으며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유아교육기관으로는 사립마산유치원과 사립대자유치원 등 몇 개의 시설이 있었으며 종교기관에서 사회교육차원에서 행한 교육시설도 있었습니다.

현 마산고등학교의 전신인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하였으며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몇 년 전 용마고등학교로 바뀐 마산공립상업학교는 대부분 한국 학생들이었습니다.

1922년에 개교한 마산공립상업학교는 1939년 수학연한 5년제 상업학교로 바뀌었으며 1940년에 이르러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습니다. 이 학교는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수학연한을 4년으로 단축하였고 1942년에는 신입생의 50%가 일본인 학생으로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다음 사진은 마산공립상업학교가 현재 자리로 옮기기 전 건물입니다.

 

 

마산공립고등여학교는 1927년 수학연한 5년제의 고등여학교로 개정한 현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입학생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한국인 입학은 매우 어려워서 전체 재학생 수의 20%에도 못 미쳤습니다.

1932년 공사비 36,000원을 들여 기숙사를 지었는데 이 기숙사가 전국의 모범이 되어 각 지에서 온 시찰단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산고녀는 1936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특히 1937년에 준공한 대강당은 기숙사와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드높아 부인회 등 그 밖의 집회에도 자주 이용되어 부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민(府民)이란 당시 마산에 살았던 일본인을 말합니다.

다음 사진은 마산고녀 이전 개교기념식 장면입니다.

 

 

 

하지만 창신학교에서 고등과로서 분리된 호신학교(濠信學校)가 1932년, 창신학교는 1939년에 문을 닫았고 여학교였던 의신학교도 이 시기에 문을 닫았습니다.

노동야학은 강점3시기에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사설교육기관이었던 마산노동야학은 그 전통이 깊습니다.

1907년 시작된 마산노동야학은 1931년에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옥기환교장이 지역유지들과 협력하여 6,000엔의 교육기금을 마련하여 중성동에 있는 전답 1,000여 평을 사들여 여기에 5개의 교실과 사무실․회의실 및 2동의 사택 등이 있는 신교사(新校舍, 전 영남자동차학원자리)를 지었습니다. 원래의 노동야학교이었던 창동 교사는 마산여자야학교의 교사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외에 일본인이 운영한 복수야학회도 있었습니다. 일본 조동종복수사(曹洞宗福壽寺)의 사회교화사업으로서 광영박명사(光英博明師)가 경영하였습니다. 한국인 자제를 대상으로 했으며 1924년 교사 신축을 하였습니다.

현재의 성호초등학교인 공립보통학교는 1938년 학교명이 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인 가정에서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통학거리 등을 감안하여 완월동에 분교를 설치하였는데 이 분교는 1938년 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로 독립 개교하였습니다. 지금의 완월초등학교입니다.

1904년에 일본인거류민회에 의해 발족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는 1936년 4월에 마산공립중학교가 설립된 이후 고등과를 폐지하고, 1938년경부터 마산포(원마산)에 사는 일본인 자녀 1․2․3학년에게 통학상의 편의를 위해 자산동에 분교를 두었습니다. 그 분교가 지금의 무학초등학교입니다.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개항 직후부터 패망까지 운영된 마산 유일의 일본인 학교로서 현재의 마산월영초등학교 전신입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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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1938년, 전시체제를 총괄하는 기본골격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조선 전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법으로 일제는 한반도의 사람과 물자 모든 것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쌀의 자유로운 시장거래를 완전히 중지하고 공출제란 이름으로 빼앗은 후 배급하였으며,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각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금속식기류까지 공출이란 명목으로 탈취해 갔습니다.

세숫대야 솥 등 가정집에서 갈취한 금속류를 만족한 듯 바라보고 있는 일제관료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마산항에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수탈한 쌀가마니가 쌓였고 이 쌀들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래 사진은 미곡공출을 강요하는 전단지입니다.

"한 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나라에 바쳐서 귀축미영을 때려부셔버리자. 공출미는 우리 마을의 공동책임이니 하루라도 빨리 공동출하합시다" 라는 문구가 있네요.

 

 

그런가하면 마산에 진출해 있던 일본의 기업 중 조선업․철공소․방직공장 등 주요 산업들이 군수산업체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악랄한 식민 정책들 때문에 전쟁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휘발유로 움직이던 택시나 버스 등의 모습은 사라졌으며, 마산에는 신마산역에서 구마산역을 거쳐 북마산역으로 운행되던 시내버스 대신으로 마차가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화물자동차와 시외버스는 목탄을 연로로 하는 목탄차나 카바이드차로 바뀌었습니다.

전쟁 지원을 위한 학생 동원령 이야기도 많습니다.

평생 지역사 연구에 헌신하신 고 이학렬 선생님께 직접 들은 이야깁니다. 이야기 몇 토막을 옮겨보겠습니다.

강점 말기, 마산의 두 남자중등학교였던 마산중학교와 마산상업학교에 동원령이 자주 내렸는데 한국인 학생이 많았던 상업학교 학생들에 대한 강제 노역과 군사훈련이 더 많았고 강도도 심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노역은 월영동 중포병대대 고사포 진지공사․마산중앙부두의 하역작업․철공소의 선반공․군수공장 건설노동자로 다양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천비행장까지 끌려가 노역을 한 학생도 있었답니다.

덧붙여서, 1년에 한두 켤레씩 배급받는 일본식 작업화를 기우는 노상수리공들이 번화가인 창동 거리 여기저기에 있었노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제의 강압통치 속에서도 마산의 항일운동은 면면히 이어졌습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간단한 사건 한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1937년 12월 17일 중일전쟁 중 남경이 함락되었을 때, 마산의 일본 관리들은 승전을 축하하는 제등행진을 벌이도록 시내의 학교와 각 단체에 지시했습니다.

지시를 받은 학생들과 단체 대표들은 시내 행진에 나섰으며 대열이 현 제일여고 자리에 있던 신사 앞을 지날 때 모두 머리를 숙여 참배했습니다.

이 때 신사 앞을 지나던 창신학교 학생들이 참배를 하지 않고 머리를 든채 행진을 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악명 높았던 남성동 파출소장 시마다(島田) 순사부장이 이를 제지,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창신학생들은 참배강요를 끝내 거부, 경찰과 2시간 이상 대치했던 사건입니다.

식민지 시대 창신학교 학생과 교사들의 항일운동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하나 둘 쌓여 결국 조선총독부는 결국 창신학교 학생들을 공립 마산보통학교로 전학시키고 1939년 7월 20일자로 폐교 시켰습니다.

이 외에도 비록 그 세력이 크지는 않았지만 신간회 마산지회를 비롯한 민족운동과 학생들의 항일지하조직의 확산 등 마산에서의 민족 사상의 고취와 배일사상의 확산을 위한 운동은 강점기 내내 지속되었습니다.

도시변천이 글의 주제인 까닭에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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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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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찬주 2013.01.23 11:2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기사. 확실히이 웹 사이트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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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현 해동지도(1750) 칠원현의 범위는 현재의 함안군 칠원읍, 칠서면, 칠북면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 지역에 해당된다. 칠원현이 현재의 창원시 지역과 연관이 있는 것은 구산면 때문이다. 구산면은 실제 현재의 칠원읍에..

한국 100명산이야기 22 : 부처님이 누워계시는 대륜산

● 3월 25일 토요일 아침 메트로시티 정문과 후문을 통과하여 학봉산악회 대원 5명이 새벽6시 30분에 출발했습니다. 새벽녁에 출발한 터라 섬진강 휴게소에서 유부우동과 준비해 온 충무김밥으로 아침요기를 했습니다. 예상대로 두륜..

고지도로 보는 창원3. - 진해현 해동지도

● 진해현 해동지도(1750) 진해현은 현재의 마산합포구 삼진(진동, 진전, 진북)지역에 해당된다. 지도의 중심에 진해현 읍성(현재 진동초등학교 일대)을 배치하고, 하천으로 구획된 지역을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읍성내에 아사와 ..

핵발전소 이대로 좋은가?   - 2

집만 제대로 지어도 전력난 극복할 수 있다. 전 세계의 에너지 소비형태를 보면 건물 부문이 36%를 차지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경우는 전체 에너지소비의 20%를 차지한다. 세계 평균보다는 낮지만 단위 면적당 에너지 소비는 ..

고지도로 보는 창원2. - 웅천현 해동지도

● 웅천현 해동지도(1750) 고지도상의 웅천현 지역은 구. 진해시 일대을 말하며, 웅천현의 명칭은 본래 신라의 웅지현으로 경덕왕이 이를 고쳐 웅신현으로 고쳤으며, 고려시대에는 웅신현과 완포현으로 승격되었으며, 이후 조선조에 ..

핵발전소 이대로 좋은가? - 1

오늘부터 시작해 매주 목요일은 핵발전소에 관한 글을 포스팅할 것입니다. 2014년 2월 17일 부산외국어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폭설로 발생한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 사건 기억하실 겁니다. 사망 10명, 부상 100명..

고지도로 보는 창원1. - 창원부 해동지도

오늘부터 매주 월요일 포스팅될 주제는 조선후기 창원지역의 고지도를 소개하고 해제하는 것입니다. 준비는 신삼호 건축사가 합니다. (주)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이면서 경남건축가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신삼호 건축사는 건축작품활동을..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년 3월 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이번 회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2. 영불의 함대 입항

142. 영·불(英·佛) 함대 입항 1920년 여름, 안남(安南, 월남)에 있는 불함(佛艦)이 마산 저도 좌편 안쪽에 투묘(投錨)했다가 삼일 후에 출항한 뒤를 이어, 상해에 주둔하고 있는 영함(英艦) 호오킨스호가 동도(同島)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