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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학교13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7. 최초의 야학교 107. 최초의 야학교 1911년 창원군 외서면 고산포(高山浦, 구마산)에는 한국 최초로 야학교(남자)가 탄생하였다. 발기인과 간부들은 지금은 전부 타계한 분들이지만 명부에 나타난 인물은 설립자 유천(柳川), 구성전, 교장 남전(藍田) 옥기환, 교감 창산(蒼山) 이형재, 경리 소원(小園) 김철연, 외 허당(虛堂) 명도석, 일파(一波) 김용환, 나인한(호 망각) 등 그때에도 쟁쟁한 청년 선각자들이다. 장소는 현재 시가지 구역확장으로 통로가 되었지만 당시 도면을 보면 남성동 69번지 조그마한 창고를 수리하여 시작하였다. 여기 수학생 중에는 초기 보통학교와는 달리 변발한 총각, 상투 있는 기혼자들로서 생도 전부가 선창에서 어물상의 고용인 또는 삭발 아동 등 혼성부대들이었다. 연혁은 기록이 소멸된 관계로 초대 .. 2016. 8. 22.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 양악대 11, 감전사 제1호 10. 양악대(洋樂隊) 마산부내에 양악대가 시초된 것은 1911년 전후라고 기억되는데 현재 신마산에 자리잡고 있는 마산극장 위편 모 상점 자리에 일본인이 경영한 안부(安部)양복점이 있었다. 여기에 악기를 일본에서 구입하여 활동사진이나 일본 연극단체의 선전으로 신·구마산을 일주하면서 점원들의 후생사업을 하여 왔던 것이다. 그 뒤 몇 년이 지나서 마산 사립 창신학교에도 7인조 양악기를 구입하여 고등과 학생에 한해 연습케 하였는데 총지휘자는 안부(安部)양복점 주인과 직공 몇 사람이었고, 교습을 받은 생도들은 박군현(팔룡), 김인숙, 황장오, 김필석, 김영근, 박성우, 최사규, 김정기, 김상기, 강을렬, 박진우 등 제씨로 기억된다. 이들 창신학교 학생 밴드대는 교내 춘추 대운동회 때는 취악(吹樂)을 하여 선수 .. 2015. 4. 27.
마산창원 역사 읽기 (25) - 문화권력, 이은상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8 문화권력, 이은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 1923년) 봄처녀 오시누나 새 풀옷을 입으셨네 / 하얀구름 너울쓰고 구슬신을 신으셨네 / 꽃다발 가슴에 안고 누굴 찾아 오시는고. (, 1925년) 내 고향 남쪽바다 /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 꿈엔들 잊으리요 / 그 잔잔한 고향바다 / 지금도 / 그 물새들 날으리 / 가고파라 가고파. (, 1932년) 앞의 두 노래는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우리에게 친숙한 곡이고, 마지막 노래는 우리 국민들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다. 이 노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이은상이다. 가 국민들이 애창하고 또 마산을 상징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지면서 이.. 2014. 11. 1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1) -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4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마산의 역사 속에서 전후를 막론하고 옥기환(玉麒煥 1875∼1953) 선생을 능가할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 말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며 마산의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던 향토사학자 이학렬(李學烈) 선생의말이다. 옥기환은 마산에서 태어났다. 민족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암울한 시기,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 조선이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식민지 시기를 거쳐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를 살았다. 집안에 대해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4대째 마산에 정착하며 살았던지주집안이었으며, 어시장에서 객주(客主)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도 지주였으며, 사업가였다. 그는 마산지역 교육발전의 버팀목이었다. 한국 최초의 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설립.. 2014. 10. 13.
마산·창원 역사 읽기 (19) -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2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을 말하고자 할 때 ‘창신학교’는 마땅히 맨 앞자리에 놓을 만하다. 왜냐하면 창신학교는 우리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근대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그곳에서 배웠거나 가르친 이들이 뒷날 우리 지역의 크고 작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시기 창신학교가 경제적으로 운영이 어려웠을 때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살리고자 했던 노력은 바로 이런 까닭에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나라 잃은 시기의 민족교육활동가들 가운데 창신학교에서 삶의 중요한 한 때를 서로 부대낀 이들을 가려 뽑아 우리 지역의 정신맥락 하나를 가다듬고자 한다. -민족 교육자이자 광복 투사였던 안확과 이.. 2014. 9. 29.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 2014. 8. 25.
마산·창원 역사읽기(6) - 일본의 침략과 저항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6 일본의 침략과 저항 1876년 조선이 일본과의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개항 이후 마산지역은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하여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장악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들의 소굴로 변해갔다. 드디어 1899년 5월1일, 마산은 일본에 의하여 강제적인 개항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산포 남쪽 2㎞거리에 이쓴 창원군 외서면 해안의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가 각국공동조계지란 이름으로 계획도시(지금의 신마산지역)가 들어섰다. .. 2014. 6.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3) - 강점제3시기 1939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당한 사립 창신학교의 1930년대 사진 몇 장 소개합니다. 『창신학교 100년사』에 있는 자료들입니다. 이 사진들은 폐교되기 전, 창신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의 활동을 담은 장면입니다. 당시 우리 지역의 근대식 교육기관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 소개해봅니다. 어떻습니까? 불과 80년 전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과 교사들 모습이. 2013. 5. 2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1941년 간행된『약진마산의전모(躍進馬山の全貌)』와『마산개항백년사』에 게재된 내용에 의하면 1930년대 마산의 교육기관은 공립으로 마산공립중학교․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반면 사립으로는 창신․호신․의신학교․마산노동야학교 등이 있었으며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유아교육기관으로는 사립마산유치원과 사립대자유치원 등 몇 개의 시설이 있었으며 종교기관에서 사회교육차원에서 행한 교육시설도 있었습니다. 현 마산고등학교의 전신인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하였으며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몇 년 전.. 2012. 10. 15.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1938년, 전시체제를 총괄하는 기본골격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조선 전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법으로 일제는 한반도의 사람과 물자 모든 것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쌀의 자유로운 시장거래를 완전히 중지하고 공출제란 이름으로 빼앗은 후 배급하였으며,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각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금속식기류까지 공출이란 명목으로 탈취해 갔습니다. 세숫대야 솥 등 가정집에서 갈취한 금속류를 만족한 듯 바라보고 있는 일제관료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마산항에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수탈한 쌀가마니가 쌓였고 이 쌀들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래 사진은 미곡공출을 강요하는 전단지입니다. "한 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나라에 바쳐서 귀축미영을 때려부.. 2012. 10. 8.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1910년대에는 마산에 도시변화가 많이 없었던만큼 건축공사도 많이 없었습니다. 종교시설과 일부 교육시설만 약간 들어섰습니다. 개항기에는 식민지를 지배하기 위한 관아시설들이 주로 건설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개항기에 지어 놓은 건물들의 증․개축이 많았으며 관아건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산업용 건물이 많았습니다. 또한 목조건축물이 많았던 이전과 달리 이 시기부터는 벽돌을 이용한 조적조 건축물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적으로 보면 신마산에 집중되었던 건물들이 서서히 원마산 쪽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 장군천 이북에 지방법원지청이 들어섰고 현 마산시청 자리에 전기회사가 들어오는 등 공공건물들이 건축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일대(옛 마산시청부근)가 신마산의 마산포 진출이라는 의미 외에 마산포와 신마산.. 2011. 7. 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 2011. 7. 4.
시간은 피라미드를 두려워한다 이야기 하나,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지금 그 곳에 없다. 이십여 년 전 봉암동 골짜기로 이전한 후 그곳에는 덩치 큰 판상형 아파트만 덩그러니 몇 채 있을 뿐이다. 교복을 입은 채 까까머리 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운동장도 없어졌고 여름에는 그늘, 가을에는 낙엽청소를 시켰던 그 큰 활엽수와 그 아래 나무벤치도 사라졌다. 봉암동에 새로 지은 학교에서 지금의 아이들이 40년 전 나보다 얼마나 좋은 교육을 받는지 모르지만 나의 추억이 녹아있는 공간이 없어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의 고등학교는 생각 속에만 있고 찾아가볼 장소는 없다. 새로 지은 학교에 갈 일이 더러 있지만 행사만 있지 추억은 없어 여느 학교를 찾았을 때와 감흥이 다르지 않다. 이야기 둘, 어릴 때 살던 집을 떠난 지 30년이 되었다. 나는 좁은.. 2010. 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