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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룡산6

100산-37 ; 창원 반룡산(팔용산) 학봉산악회 창원 반룡산(盤龍山) 산행기 2022년 10월 15일(토) 참석자 ; 신삼호 회장, 신승기 총무, 서익진 회원(글쓴이) 반룡산의 설움 팔용산(八龍山)도 팔룡산도 아닌 반룡산(盤龍山)이다. 반룡산은 억울하다. 팔용산이 근거가 박약하기 때문이다. 궁금하면 계속 읽으시길 바란다. 현재 사용되는 공식 명칭은 팔용산이지만 그럼에도 반룡산은 반룡산이다. 날은 10월 15일. 그러고 보니 양력 보름이다. 둥근 달이 아니라 둥근 해가 떴고 맑은 날씨로 먼 산들도 뚜렷하다. 하지만 전형적인 가을 날씨에는 2% 모자란다. 오늘 산행지는 원래 언제나처럼 무학산 둘레길이었다. 단톡방으로 확인된 참가자는 회장과 총무 그리고 필자밖에 없다. 회장과 총무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다. 평소에도 반룡산을 집 앞산 내지 뒷산.. 2022. 10. 19.
기억을 찾아가다 - 15 15. 정전 후의 체험들 Ⅵ - 공군 요양소 우리 동네 대여섯 채의 적산가옥(일본인들이 살던 집)들은 다 불하되어, 동네 사람들이 들어갔지만, '봉선각'은 그 얼안이 커서(500평은 되었을 듯) 동네 사람들은 엄두를 못 내었던 듯 한동안 비어 있었다. 그러다 시내의 누군가가 임대하여 영업을 했던지 한때 장구소리를 듣기도 했었는데, 시국이 시끄러워지고 팔룡산 꼭대기에 봉홧불이 오르고, 곧이어 전쟁이 나고 하면서 봉선각은 폐가로 되어갔고, 우리들도 거기 가길 꺼려했었다. 그래선지 내 어렸을 때 거기에 얼킨 이상한 얘기들 – 밤 되면 말 달리는 소리도 들리고, 여자 울음소리도 들린다는 투의 괴담들 –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곳이 부활한 건 공군 병원이 들어오면서다. 정전 직후부터 오륙년 동안 주둔했었는데,.. 2018. 1. 29.
기억을 찾아가다 - 13 13. 정전 후의 체험들 Ⅳ - ‘이용범 다리’ ‘용베미 다리’란 말을 언제 쯤 부터 들었는지를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용범(아래 사진 / 1905~1968)이란 인물의 이름이 널리 퍼진 계기로 미루어보면, 1954년 총선 이후였다고 생각된다. 참고 ; 자유당 전성기 건설업계는 이용범의 대동공업, 황의성의 조흥토건, 김용산의 극동건설, 이재준의 대림산업, 정주영의 현대건설, 조정구의 삼부토건 다섯 회사가 지배했다. 고장이 나면 불편이 컸던 양덕교(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정문 앞의 다리, 지금은 복개되어 다리로 인식되지 않는다)를 두고 불평과 비난의 말들을 많이 했었는데, 그때에도 공사자나 회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보거나 들었던 기억은 없다. 지금처럼 시공사의 이름을 써놓은 입간판 같은 건 그땐 .. 2018. 1. 15.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으로 갔던 곳은 오동동파출소 서쪽 옆길 건너편의 한의원 2층이었다. 꽤 넓었다고 기억되는 것이, 그 다다미 방에서 집단으로 ‘고상받기’(레슬링 식으로 상대방을 항복시키는 놀이. ‘고상(こうさん)’은 항복의 일본 말)를 하다 선생님으로부터 단체 기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얼마 후엔 파출소 2층으로 갔는데 거기선 담임선생님의 심한 매질을 여러 급우들이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국 때문에 파출소가 비좁을 정도로 경범들이 많았던 상황에서도 아랑곳할 리 없는 우리들의 난동(?)에 경찰.. 2017. 12. 4.
기억을 찾아가다 - 3 3.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Ⅰ- 좌익과 피난 내 초등학교 일이학년 때 팔룡산 상사바위 근처나 불암사 근처 산먼뎅이들에 봉홧불이 올라 있는 광경을 종종 보았다. 그리고 새벽에 한길에서 붉고 푸른 삐라들도 주워보았다. 주로 어미니, 형, 누나들과 같이 보았는데, 나는 잘 몰랐지만 다들 걱정 섞인 말들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동네 누구누구도 저기에 있을 것이란 말들도 들은 것 같다. 또 수원지 들머리 계곡들에서 좌익수 처형이 몇 번 있었고 계곡 물이 벌겋게 흘러내리는 걸 보았다는 어른들의 수군거림도 형들의 수군거림을 통해 들었다. 그리고 수원지길쪽과 봉덕동쪽을 가르는 산등성이 일대에 백여 기 가까운 무덤들이 있었는데(그래서 우린 공동묘지라 부르기도 했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과 연고 있는 무덤은 없었기네.. 2017. 10. 3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3) - 강점제2시기 통합 창원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팔룡산의 명칭은 원래 반룡산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이 산의 명칭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우리 지역의 지명을 연구한 민긍기 교수는 대략 1980년대 전후, 그러니까 30여년 전이라고 했습니다. 지명도 세월 따라 변하는 것이니 이 글에서도 팔룡산이라 부르겠습니다. 조선시대 이 산은 무학산과 함께 선재봉산(船材封山), 즉 선박 건조에 필요한 목재를 충당하기 위해 국가가 관리하는 산이었습니다. 마산포 해안가에 있던 전선소(戰船所)에서 무학산과 팔룡산의 재목으로 선박을 건조했던 겁니다. 두 산에 곧고 굵은 질 좋은 소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일제는 마산부에 상수도를 공급하기 위해 1927년 5월 이 산의 정상부에 수원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1930년 3월에 준공하였습니다.. 2012.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