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강'에 해당되는 글 3건
- 2010/07/2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2)
- 2010/02/08 통합 앞서 마산시민이 해야 할 일 (9)
- 2009/10/20 제안, <신(新) 7대 도시 마산> (8)
마산포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식민야욕을 불태웠던 각축장이었습니다. 시기는 개항 전후였고 그 절정이 「마산포사건」입니다.
「마산포사건」은 러시아가 부동군항(不凍軍港)을 얻기 위해 마산포를 점령하려했던 사건입니다. 사건개요를 요약합니다
러시아는 군사적 목적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우선 조선정부와 마산포 저탄소(貯炭所) 설치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일본이 러시아가 목적한 토지를 미리 매입해버림으로써 러시아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1900년 때 일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단념하지 않고 마산포 남쪽의 율구미(현 마산시 가포동의 국립결핵병원에서 MBC 송신소에 이르는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역)를 얻어 1900년 6월 4일 30여 만평의 러시아 단독조차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질세라 일본도 1902년 5월 17일을 기해 자복포(구 한국철강과 월영동 아파트단지, 구 국군통합병원 일대)에 일본 전관거류지 30여만 평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미 설치된 신마산 각국공동조계지 인근 두 곳에 러·일 단독조계지가 추가되는 기현상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나라 각축이 있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 단독조계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러시아 단독조계가 없어지니 일본도 굳이 단독조계를 설치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일본은 각국공동조계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처럼 사용하고 자복포의 단독조계는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 몇가지 소개합니다.
당시 마산의 분위기가 그랬던 만큼 강대국 군함의 마산 입출항도 많았습니다.
1899년 4월부터 1900년 11월까지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외국 군함의 마산항 출입 상황은 러시아가 가장 많은 28척, 일본이 10척, 영국이 4척, 독일이 1척이었는데 이 배는 모두 병함(兵艦) 혹은 수뢰정(水雷艇)이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는 가포 인근인 율구미에 군대까지 주둔시켰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의미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 두 장은 당시 러시아 해군이 율구미에 주둔했던 사진입니다.
먼저 것은 ‘율구미 주재 러시아 사관 및 부영사 가족’ 사진입니다. 사택으로 보이는 뒷 건물에 사용된 재료는 형태를 보아 조선 현지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조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율구미 주재 러시아 군대 체조장의 사관 및 수병’들 사진입니다. 수병들이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했습니다.
개항 나흘 후인 1899년 5월 5일, 러시아 고위공직자들이 마산포에 왔습니다. 주(駐)조선 러시아공사 파블로프가 일행과 함께 만추리아호를 타고 마산포에 도착합니다.
일행은 율구미라 부르는 자복봉 능선을 따라 30여만 평의 토지에 표석 500본, 표목 500본을 꽂아 임의로 그곳이 자신들의 영역임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국기가 달린 5.4m의 표간(標杆)을 자복포 배후의 구릉과 가포에 인접한 해안에 각각 12개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나중에 러시아 단독조계지가 됩니다.
위 그림 왼쪽에 그려진 것이 바로 그 표간입니다.
미의회 도서관자료인데 마산포사건과 관련한 일본해군대신 관방서류에 수록되어 있는 자료입니다.
이 도면에는 율구미 능선을 따라 늘어선 표석과 표목의 위치와 함께 러시아 국기가 달려있는 표간의 상세한 도면이 그려져 있으며 표시물의 위치와 숫자는 이 도면을 설명하는 보고서에 별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구미 일대에 꽂힌 표석과 표목 각각 500개, 그리고 율구미 능선과 가포해안에 선 5.4m 높이의 24개 깃발을 상상해 보십시오. 러시아의 위세가 당시 어떠했는지,,,,
표목과 표간은 이미 썩어 없어졌겠지만 표석 500개는 땅 밑 어딘가에서 아직 잠자고 있겠지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표석 발굴에 나서 보면 어떨까요?
이러한 러시아의 행동은 호시탐탐 마산포를 넘보던 일본을 자극하였습니다.
일본은 마산포의 당시 상황을 일일이 본국 정부에 보고하면서 마산포를 러시아보다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에 이어 일본도 자복포에 전관거류지를 설치하게 되었던 겁니다.
다음 그림은 그 시기에 첩보용으로 율구미를 촬영했던 사진입니다.
일본 해군소속 군함 '대도(大嶋)'의 첩보주임 이집원후(伊集院後)가 1900년 5월 1일에 촬영한 것입니다. 가운데 높은 봉이 갈마봉인가요?
마산포로 진출할 의사를 가진 나라가 러시아와 일본, 영국뿐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도 석탄하역장과 해군병원의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마산포 부근에 진출을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1885-1913년 외교보고서』 중 마산관련 자료입니다.
No 65
1901년 9월 17일, 동경
조선에서의 프랑스와 러시아
존경하는 백작각하!
제가 이미 이전의 보고에서 자주 말씀드렸던 바, 조선 내에서의 프랑스의 활동은 일본신문에 계속 표제화되고 있습니다․․․․․․․․
신문들에 의하면 이전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이제 프랑스도 석탄하역창과 해군병원의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마산포 부근에 위치한 작은 항구를 양도해 줄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암브로 <<<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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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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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통합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리들만의 일도 아니다. 유익하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합칠 수도 있고 나눌 수도 있는 것이 도시다.
마창진 통합은 당위성도 있다. 역사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 그리고 도시경쟁력의 측면에서 통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통합을 통해 세 도시의 약점은 보완시키고 강점은 키울 것이다. 나아가 100만 도시의 위상에 맞는 새로운 발전 가능성도 제시될 것이다.
오래 기다려온 만큼 통합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비전이 크다.
하지만 창원 진해시민과 달리 마산시민들은 통합에 앞서 짚어 봐야할 것이 있다.
진해 창원과 달리 90%에 달했던 마산시민의 통합 찬성률에 대해서이다.
마산은 수백 년의 역사가 있는 도시다.
3·15의거, 부마항쟁 등 현대사의 격랑을 몸소 겪은 만큼 어느 도시보다 애환의 농도가 짙은 도시다. 따라서 통합에 대한 기대도 크겠지만 서운한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90%라는 높은 찬성률이 나왔다.
왜 인가?
도대체 왜 이 오래된 도시가 인근 도시와 통합되기를 이렇게 바랐는가?
전국 어떤 도시에도 없었던 90% 찬성률을 두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100만 통합도시’의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는 중요한 시점이라, 진실한 눈으로 이 도시의 현실을 바라보고 싶다.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그만큼 이 도시의 사정이 어렵다는 말이었다.
통합 외에 다른 희망 찾기가 어렵다는 뜻이었고, 도시경영의 실패를 시민다수가 인정한 결과였다.
이 도시에 희망만 준다면 다른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겠다 는 절박함의 표출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따라서 마산시민은 통합시 출발에 앞서 물어야 한다, 왜 통합 외에는 이 도시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순서다.
반성 없는 역사는 반복한다.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그렇다. 도시 또한 마찬가지다.
잘못 가버린 도시를 잘못 가게 된 원인도 찾지 않고 다시 새 길을 가게 하면, 그 잘못을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이 전통 있는 도시가 스스로는 희망을 갖지 못하게 되었는가.
무엇 때문인가? 책임이 있다면 누구인가?
말없이 살아왔던 시민들인가?
시정을 비판했던 시민단체인가?
7대 도시를 꿈꾸었던 경제인인가?
3․15 민주 성지를 자랑했던 정치인과 지도층인가?
돌이켜보자.
이 도시의 쇠락은 80년대 말부터 시작되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산업구조가 개편되었고, 충분한 인프라를 구축한 창원공단의 기계 산업이 활발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기업들이 하나둘 마산을 떠나기 시작했고 사람들도 천천히 짐을 꾸렸다.
마치 옅은 안개에 옷 젖듯이 조금씩 다가왔지만 눈으로 확연히 볼 수 있었던 변화였다.
하지만 마산은 멀건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니, 구경만 하고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부추겼다.
떠날 날만 기다리던 한국철강의 공장 터를 주거지역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 뿐 아니다.
한일합섬 터는 아예 상업지역까지 끼워 주었다.
‘공장 그만하고 땅 비싸게 팔아 챙기고 떠나라’고 부치긴 셈이다.
그 서류에 시장이 관인을 찍었다. 이 도시 쇠락의 신호탄이었다.
기업의 이전이야 자유로운 것이지만, 있는 공장을 마산처럼 내보낸 도시는 일찍이 없었다.
앞 바다를 매립했다.
사업권을 가진 건설회사는 매립한 토지를 잘게잘게 토막 내 팔고 돈만 챙겨 떠났다. 공공(公共)은 외면하고 쓸 만한 땅은 모조리 팔아 챙겼다.
그 서류에도 시장의 관인이 찍혔다. 이 도시는 그렇게 허물어져 갔다.
역전의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한일합섬 터에도 한국철강 터에도 기회가 있었고 새로 매립한 신포동 해변에 좋은 터를 잡을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기회로 보지 못했다. 오히려 위기를 결정지우고 말았다.
쇠락해가는 도시를 빤히 바라보면서도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2-30년 전의 방식을 새로운 비전이라고, 거기에 미래를 걸어도 좋다고 믿었다. 이미 오래된 낡은 방식의 도시개발과 레드오션의 카드만 들고 있었다.
바다가 있었지만 이용하지 않았고 천혜의 자연도 방치하고 말았다.
관심은 그저 ‘뚫고 짓고 메우고 넓히는 것’ 뿐이었다.
90%의 찬성률은 이에 대한 정직한 평가였다.
통합 기뻐하기 전에 마산시민은 물어야 한다, 이 도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자신에게도 묻고 상대에게도 물어야 한다.
실패를 반복 않기 위해서 물어야 하고, 통합시의 앞날을 위해서도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
통합이 되어도 희망이 없고, 100만 도시가 되어도 길이 어둡다.
희망은 오직 이 질문의 답 속에 있다.
'오늘 마산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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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일 2010/02/08 12:02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한치 앞도
10년, 100년 뒤 도시미래를 계산하지 않고
지도자 주머니와
커넥션으로 연결된 건설사 몫만 챙겨준
어리석은 지난날의 행태가
오늘 우리의 마산의 현재와 미래를 망친 결과입니다.
아울러 감시를 소홀히 한 시민의 몫도 크다고 하겠습니다. -
허원도 2010/02/08 13:38
창원시민으로서 참으로 공감가는 글입니다..바로 이문제들 때문에 창원에서 반대하는겁니다..마산자체의 변화없이 통합으로 묻어가 거기에 주도권까지 잡을려고하니 창원쪽에선 열받을만하죠..
마산시정수뇌부들이 주도권을 잡아 통합시이끌면 창원,진해는 과거마산으로 회귀하는게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이렇게 옆에있는도시와 생각의 차이가 왜이렇게 큰지..
허정도님같은분이 마산에 계셨다니..참으로 다행입니다.. -
허원도 2010/02/08 14:45
저도 글을 공개하신이유를 잘알고있습니다..
시정수뇌부들이 허정도님의 뜻을 깊이 잘새겨 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창원시민이지만 편을 가를려고 하는건 아니고 과거 행동에 대한 반성없이 너무 밀고나가는 모습이 웃음만 나오게 하기 때문입니다..도와가면서 더불어 잘사는게 가장좋은 방법이죠..
하지만 근본적인 생각을 고치지 않고서는 아무리 겉멋만 멀쩡하게 들어도 제자리걸음입니다..님의 말씀 더 공감되고도 남습니다
같은 '도'돌림자인데 저는 도시공학과 재학중인 대학생입니다..앞으로 지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되고싶은일을 하고싶네요.. -
-
창원부 지명회복시도 100년 2010/02/14 12:27
창원광역시==창원부지명 100년만에 회복!
각 5개구~7개구지명
.........................
합포구(합포구 마산시에 바닷가지역.옛지명//마산구 사용가능성 있지만)
회원구(창원지명유래-의창,회원)
진해구(진해시와 진동 원래 가포진해현청 소재. 고성까지 관할역사. 고성통합 염두 )
의창구(함안 통합을 전제.창원소답동.팔용동.마산내서.함안칠서.의창구사용)
웅천구(창원 팔용동 밑으로 동읍,가음정,대방동,사림동,신촌,양곡,성주동,적현동 대부분)
그외-
함안통합시에 함안구 신설,
고성통합시에 고성구 신설
.........................
.........................
마산구 지명은 ,
현재 마산지역이 두척산(지금 무학산이라 부르지만, 쌀을 재량한 산이름)과 조창(쌀 세금)이 있던, 원래는 농산물이 아주 풍부한 지역유래를=> 일제때 , 쌀과 농산물을 없애는 말(馬)산(山)지명으로 풍수지리로 해한 지명으로 창원지명을 대체하고, 쌀을 측량하는 두척산(斗尺) 의미를 쌀을 먹어치우는 새가 활개치는 이름으로 확대 무학산으로 일인들이 부른것으로 ,,,마산 지명은 결코 좋지 않아 보인다는
마산을 염려하는 분들이 늘 하시는 말입니다.
‘한 때 전국 7대 도시였던 우리 마산이 이제는 경남 7대 도시가 될 판이다’
‘전국 7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
가슴 아픈 호소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산을 고향으로 둔 내 마음도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마산뿐 아닙니다.
한 때 잘나갔던 도시라면 어디 할 것 없이 이런 식의 한탄 한마디는 다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목포시의회 부의장에게 들은 말인데, 목포 사람들은 지금도 ‘전국 6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 한답니다.
전국 7대 도시 마산········.
어릴 때부터 많이도 들었던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인구가 전국에서 일곱 번째였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이 도시에 어떤 조건과 결과를 주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어른들로부터 ‘전국 7대 도시’란 말을 들으면서 어린 기분에 약간의 자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이가 든 후,
건축가로서, 대학에서 도시학을 강의하면서, 언론사 대표로 이런저런 정보를 접하면서, 내 고향 마산이 ‘전국 7대 도시’였다는 사실에 대해 자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세월 동안 이 도시가 겪었던 영광과 좌절의 부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의 미래를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국 7대 도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성찰해보았습니다.
이 글은 마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으로서 내가 던지는 ‘전국 7대 도시 마산’에 대한 질문과 답입니다.
-마산이 '전국 7대 도시'가 된 까닭-
마산은 근대기라 일컫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개항이라는 외세의 파도가 이 도시를 뒤덮으면서 시작된 변화였습니다.
우리나라 근대도시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궤적들이 이 도시를 관통했으며, 그 흔적들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 배어있습니다.
도시변화의 주역은 물론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변화는 일본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그들만의 잔치였습니다. 따라서 오직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했을 뿐 다른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든 단 한 번도 공익적 관점에서 이 도시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바라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도시는 단지 그들에게 이익을 퍼주는 식민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떠났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동포들이 대거 밀려들었습니다. 부산 목포와 더불어 귀환동포들이 이 도시에 넘쳤습니다.
갑자기 도시가 커진 겁니다.
내 부모님께서도 그 때 마산부두에 내려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시에 들이닥친 '귀환동포'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지 이를 패러디하여 '우환동포'라고도 불렀습니다.
해방 5년 후 전쟁이 나자 피난 내려 온 동포들이 또 한 번 대거 밀려들었습니다. 부산과 더불어 피난민들이 이 도시에 넘쳤고, 도시가 또 한 번 커졌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때 피난민들을 상대로 행상을 하며 호구를 연명했습니다.
나는 일본군이 군용 마구간으로 사용하던 회원동 500번지에서 전쟁이 끝나갈 즈음 태어났습니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두 번의 격랑을 거치면서 마산에 사람이 들끓었습니다.
내 노라 하는 문화예술인들도 마산거리에 허다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덕분에 얻은 도시 이미지 중 하나가 ‘문화예술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사람만 많았을 뿐 사람들을 받아드릴 도시기반시설은 전무했습니다. 단지 생존에 대한 욕구와 열정으로만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이 도시의 결정적인 변화는 60년대 후반부터 생겼습니다.
한일합섬, 수출자유지역, 한국철강 등 굵직한 산업시설들이 다투어 이 도시에 들어왔습니다.
전국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마산으로 마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도시에 사람들이 넘실거렸습니다.
도시가 젊어졌고, 또 한 번 커졌습니다.
동마산이라는 새로운 지역이 생겼으며 버스가 다닐 수 있는 간선도로가 여기저기 뚫렸습니다. 전세방 달세방이 동이 나자 너도나도 집을 지었습니다.
온 도시가 공사판처럼 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조그만 설계사무소 직원이었습니다. 제도판 위에서 밤늦게까지 쉬지않고 설계도를 생산해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도시의 팽창으로 남성동 창동 오동동 일대에만 모여 있던 중심상권이 분화되어 월영동과 합성동에 두 부심이 생겼습니다. 소비를 원하는 사람들을 중심상권이 모두 받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의 규모와 소비수준이 일약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국 7대 도시’는 지금까지 말한, 해방이후 이 도시가 겪었던 격랑과 성장의 과정에서 나온 마산의 압축된 표현입니다.
-다시 생각해야될 전국 7대 도시-
나는 생각합니다, 이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7대 도시’가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그리고 지금에 와서 ‘7대 도시’의 영광과 저력이 이 도시에 어떤 의미였는지.
뚜렷한 것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조건들이 7대였다면, 그리고 그것을 지켰더라면, 비록 사람 수는 수십대로 밀렸지만 자부심은 있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이 도시를 생각합니다.
지금은 도시수준이 경제력과 도시발전을 이끄는 시대입니다.
생활의 질을 따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시절에는 밥공기의 크기를 보지만 배가 불러지면 쌀밥 보리밥을 따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계의 여러 도시들이 도시를 확장보다는 삶의 질을 우선하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오두막에서 맑은 물만 바라보고 살자는 말이 아니라 맑은 물이 돈이 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마산에 생산시설이 적어 인근 도시로 인구가 유출되었다고 합니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산시설만으로 마산사람들이 떠났다고만 보면 정확한 진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2만 달러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충분히 이해 못한 탓입니다.
미국의 자동차도시 디트로이트의 쇠퇴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도시적 상황은 방치한 채 생산시설만 있으면 발전된다는 주장은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80년대 쯤 주장해야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은 산업시설과 도시환경이 동반되어야하는 시대입니다.
도시환경에 대한 대책 없이 생산시설만 유치하면, 그것 때문에 인구 100명 늘어날 때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 110명이 될 수 있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산업이 도시를 만드는 시대에서 도시가 산업을 만드는 시대라는 사실을 입증한 일본의 가나자와를 비롯해 영국의 밀턴케인스, 브라질의 꾸리찌바, 이태리 볼로냐와 라벤나, 네덜란드의 그로닝겐 등 세계의 유수한 도시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도시를 다시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도시가 다시 ‘전국 7대 도시’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만 되면 한없이 기쁘겠지만 그러기에는 수도권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린 것 같고 중앙과 지방의 격차가 심해진 것 같습니다.
-제안, 신(新) 7대 도시 마산-
그래서, 이 글을 빌어 ‘신(新) 7대 도시’를 감히 제안합니다.
양이 아니라 질적인 ‘7대 도시’로 가자는 제안입니다.
사람 수가 ‘전국 7대’가 되기는 불가능하지만 도시수준을 ‘전국 7대’로 높이는 일은 가능한 일입니다.
교육, 문화, 예술, 환경은 물론이고 공기, 인심, 물맛, 거리와 가로수, 공원, 경치 등 사람 사는데 정작 필요한 ‘도시수준이 7대’가 되도록 만들자는 말입니다.
임항선을 그린웨이로 만들어 키 큰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걷고,
파란 물 바닷가 잔디 위에 벤치가 놓이고 자전거가 달리고,
유모차를 밀고 나갈 꽃 가득한 공원이 도시 곳곳에 들어서고,
곧 추진될 생태하천으로 시내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른다면········.
첨단의 로봇랜드가 머지않아 들어온다니 금상첨화일 테지요.
이렇게만 된다면 이 도시를 떠난 사람 중 다시 돌아 올 분도 적지 않을 겁니다. 좋은 도시에 좋은 산업이 들어온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도시에서 입증된 사실이니까요.
‘도시수준 전국 7대’
얼마나 행복하고 희망 가득한 미래입니까.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못해낼 만큼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가슴아파말고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며 희망을 찾아야합니다.
해낼 수 있는 일을 목표로 삼으면 흩어진 힘도 모을 수 있습니다.
‘전국 7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는 뼈아픈 호소가,
‘양의 7대 도시에서 질의 7대 도시로 가자’라는 희망찬 외침으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이 도시에 살았던 선인들이 양적인 ‘7대 도시’를 물려주었으니, 우리는 질적인 ‘7대 도시’를 후손에게 물려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도시수준 7대’는 ‘경제수준 7대’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행복수준 7대’로 이어집니다.
구호 속의 일류도시가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일류도시로 이어질 것입니다.
소년 시절, 청년시절,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 도시에서 수 없이 들었던 ‘전국 7대 도시’라는 말이 우리 다음 세대에게 똑 같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드리는 간절한 제안입니다.
인구는 ‘7대 도시’가 불가능하지만,
도시수준은 ‘7대 도시’만이 아니라 힘을 모아 ‘1대 도시’까지 갈 수 있는 가능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마산사랑모임’에서 낸 『마산의 희망 마산의 꿈』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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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2009/11/17 19:38
선생님의 글을 따라 왔지만..
마산을 생각했던 저의 마음 같습니다.
너무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마산을 지켜낼 방법은 없을까...생각만 했는데..
정겨운 도시 마산을 꿈꿉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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