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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07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 (30)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여섯 번째 길에 나섰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바람이 없었고 맑아서 걸을 만 했다.
회원도서관에서 만났는데 추운 날씨에도 참석자가 20여명이나 되었다.
봉화산과 이산미산 그리고 지금의 석전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근주 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탐방을 시작하였다.
마산방직→한일합섬→한일전산여고→양덕성당→가톨릭여성회관→합포성지→하이트맥주→국립3·15민주묘지로 이르는 코스였다.
가는 곳곳마다 이야기할 것도 공부할 것도 많았지만 나는 한일합섬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몰락의 과정에 눈길이 많이 갔다.
거대기업 한일합섬의 흔적이 양덕동 일대 온갖 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 교수의 도시탐방대 작은 제목이 「걸어서 만나는 마산이야기」인데 이 글은 「걸어서 만나는 한일합섬이야기」인 셈이다.
<1970-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1964년 자본금 1,500만원으로 일본기술과 제휴하여 아크릴 섬유를 생산하면서 시작된 한일합섬은 1967년 1월 박정희 대통령까지 참석하여 기공식을 했다.
이른바 섬유왕국의 시작이었고, 마산이 산업도시가 되는 신호탄이었다.
1986년에 펴낸 『한일합섬20년사』에는 ‘양덕동 허허벌판에 기공의 삽을 힘차게 꽂은 지 만 1년, 마침내 준공 테이프를 끊게 된 아크릴 섬유공장은 ․․․․․․’ 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그곳은 허허벌판이 아니라 양덕동 석전동 산호동 일대에 살던 마산시민들의 곡창이었고 삼호천과 산호천 사이의 기름진 논밭이었다.
아크릴 섬유로 시작한 한일합섬은 후에 종합섬유회사로 발전하였다.
1967년에 방추(紡錘)가 22,400개였던 것이 1979년에는 무려 344,000 추로 세계 최대 규모까지 성장했다.
고용효과는 말할 것도 없었다.
1967년에 4,300명으로 시작했던 사원 수가 1976년경에는 27,000명까지 늘었다. 사원 수가 이랬으니 이 거대기업을 둘러싼 2차고용 3차고용 효과까지 계산하면 그 수가 얼마였겠는가.
‘수출입국’을 지향하던 정부시책에 맞춰 국가경제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다.
1967년 68만 불이던 수출액이 71년에 2,286만 불까지 급성장을 이루었고, 1973년 드디어 국내 최초로 수출 1억불을 달성했다.
창립 후 불과 5-6년 만에 수출액 15,000% 성장이라는 기적의 기록을 가진, 그 시절 최고최대의 기업이었다.
소위 '전국 7대도시 마산'도 이의 결과다.
한일전산여고에 얽힌 일화도 많다.
나이 어린 여공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 것도 큰 공이었지만 그 유명한 ‘팔도잔디’는 전 국민의 심정을 녹아내리게 했다.
1974년에 설립한 한일전산여고는 첫 해에는 28학급 1,680명 규모였는데 1980년에는 120학급 7,200명까지 되었다. 학급 수가 120, 한 학년에 40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규모다.
이른바 1970년대와 1980년대 마산은 ‘한일합섬의 시대’ 였다.
나는 탐방대원들과 함께 양덕동 찬바람을 맞으며 한일합섬의 옛 영화를 되새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머리 한 쪽에 솟아오르는 물음이 있었다.
국내 최고 최고최대의 화학섬유회사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몰락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지금도 잘나가는 SK나 CJ나 코오롱도 비슷한 업종이었는데 왜 한일합섬만 이렇게 몰락하였을까?
답을 찾지 못한채 길을 걷던 중, 눈 앞에 한가닥 실마리가 보였다.
어쩌면 나의 물음에 작은 답이 될수도 있는 '사라진 한일합섬'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
………그것은 아파트였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설명될수는 없겠지만, 한일합섬이 몰락하게된 원인 중 한조각은 짐작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한일합섬은 본 공장 외에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소규모 혹은 짜투리 땅들을 대부분 연립주택이나 아파트를 지어 분양 처분했다.
규모가 작은 땅들이라 한 채 혹은 두어 채 정도였고 저층이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지금도 양덕동 여기저기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은 건물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모두 ‘한일’이나 ‘한효’가 들어간 이름이었다.
'한일'이야 회사명이지만, ‘한효(翰曉)’는 한일합섬의 설립자인 김한수 회장의 호다.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
집을 짓기만 하면 재미를 보았던 시절이었다.
이 거대기업도 집 장사로 그 시절 재미를 좀 보았고, 사주(社主)는 쉽게 돈버는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
자신을 있게 한 기존의 섬유산업은 수명이 다해, 저 멀리 퇴조의 징후가 보였지만 미래를 위한 진지한 모색도 과감한 투자도 하지 않았다.
연구와 개발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사업의 탈출구를 찾는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오히려 집 장사의 단 맛에 빠져 본격적으로 공장규모를 줄이며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건설규모도 크게 늘려 그 때까지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다.
제품창고 헐고 아파트 지어 ‘1차’
기숙사 헐고 아파트 지어 ‘2차’
모노마 탱크 헐고 아파트 지어 ‘3차’
서쪽 편 공장 헐고 아파트 지어 드디어 ‘4차’까지.
아파트 단지의 차수가 늘어날수록 '한일합섬'은 왜소해졌고, 차수가 늘어날수록 사원들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비례해서 마산경제도 점점 쇠락해 갔다.
사람들은 이 아파트 단지들을 통칭 ‘한일 1차’ ‘한일 4차’ 등으로 부른다.
만약 '한일합섬'이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면 최근 태영과 한림에서 지은 대규모 아파트단지 '메트로시티'는 ‘한일 5차’, 바로 그 옆에 마지막 남은 터는 ‘한일 6차’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겨우 4차 만에 ‘한일’은 이름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모든 상황이 끝난 지금, 긴 시간을 한눈에 보면,
논밭이던 땅에 공장이 들어섰고 다시 그 모든 땅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양덕동 일대 주민들 땀이 밴 기름진 양덕 들이 30여 년 만에 아파트 터로 변한 셈이다.
아무리 이해하려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거대기업의 몰락,
섬유왕국 한일합섬의 몰락을 떠올리니 새로운 물음이 생겼다.
‘섬유로 시작해 아파트로 끝난 한일합섬’의 참혹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온갖 곳 보이는 땅마다 ‘아파트와 아파트’로 채우고 있는 이 도시 마산이 한일합섬 몰락에서 얻을 교훈은 무엇일까?
새로 탄생하는 통합시는 이 사라져버린 거대기업에서 얻어야할 교훈은 없는 것일까?
석양의 역광에 검게 물든 한일아파트의 수십층 높은 벽이 마치 몰락한 '섬유왕국 한일합섬'의 잔영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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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가실 2010/01/07 13:35
찬바람 맞으며, 도시탐방을 한 값을 많이 찾을 수 있군요^^
저렇듯이 아파트를 지어대고 있었다는 건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로 마산시민들이 한일의 몰락에서 교훈을 많이 얻었으면 합니다.
수고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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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 2010/01/07 22:43
마산에서 몰락한 기업들의 리스트를 만들면 어떻런지요? 유원산업, 경남건설 등등 많을것 같읍니다. 물론 몰락의 이유를 잘 분석해야겠지요!
실패사를 통해 교훈을 얻을수 있지 않을까요 -
최정건 2010/01/08 01:43
제가 지금까지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대학가지 나오고 직장을 다니는지라
관심이 많습니다. 유장근 교수님, 김주완 기자님 블로그도 자주 갑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삭막해진 것 같습니다, 신마산 댓거리도 그렇고,예전에
고등학교를 창원까지 다녔는데 지금의 밤거리는 사뭇 다른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아쉬운 것은 강남극장, 중앙극장은 몰라도 연흥극장이 아깝습니다.
지금도 쓸만한 건물인데 마산시에서 적극적으로 매입하여 시민들을 위한
소규모 공연장으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예전에는 세림상가에 극단마산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보기가 힘듭니다.
지금의 롯데시네마와 같은 멀티플렉스 극장이 이전의 극장체계보다 영화가 다양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일합섬이 아쉽습니다. 제가 한일유치원을 나오지라 저 팔도잔디에서도
많이 놀았는데 최소한 양덕동 로타리 쪽으로 공장 한 동이라도 남겨두어 예를들어
마산 근현대박물관이라도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저는 마산이 한국근현대사의 산업화시대의 긍정적인 면 보다 슬픔, 아픔, 모순이 내재된
도시라고 생각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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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신 2010/01/08 11:34
많은 교훈을 주는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토목*건설로 단기수익만 바라보다가는 근간이 무너진다는걸 현 정부도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자꾸 어디를 파낸다, 어디를 매운다 이런소리만 하고 있으니 걱정됩니다. -
말뫼 2010/01/08 13:27
죽은 애 고추 만지기이지만,
오래 전 한일합섬 철거.이전이 논의 될 때, 그 터는 마산의 공공업무지역+지역금융통상업무 중심지구로 개발해 마창진의 금융통상허브로 만드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때도, 그 전에도 마창진 통합 논의가 있었지만, 지리적으로도 그 중심지로는 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허선생님의 다른 포스팅 '통합시의 성패는 우리 손에...'에서 통합시의 행정구역도를 보고 그것이 다시 생각 났습니다. 그 구역도로 보면 그야말로 딱인 중심지다 싶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더 깊은 탄식이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돌이킬 수가 없으니...
한일합섬이 야금야금 집장사로 팔아 먹은 것도 그렇지만, 이후 본공장 터를 마산시가 집장사치들에게 팔아 치운 것은 겨우 숨줄만 붙어 있는 사람의 숨통을 짓눌러 버리는 것과 같은 폭력이었습니다. 그것은 지역의 역사에 씼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도시 살리기가 아니라 도시 죽이기 였습니다. 그게 무슨 영화를 볼 일이라고 그랬을까 싶습니다. 대규모아파트가 들어서면 인구가 늘어날 것 이라는 무지막지한 사기를 쳤던 자들의 뇌구조를 파헤쳐 보고 싶은 지경이었습니다. -
말뫼 2010/01/08 13:22
이미 죽었다고 말하는 마산이 진짜 죽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탄식만하고 앉아서는 막연한 바라기나 하고, 행정당국은 땅장사나 하고서는 그게 무슨 대단한 치적인 양 도취하고, 힘께나 쓸 듯 폼 잡는 지역국회의원들은 생색내기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사람들로만 살펴 봐도 두루두루 퇴락하고 망할 조건들만 갖추고 있었지요. 거기에 올바른 전문가들의 역할이 기능을 할 수 없는 것은 당연 합니다. 도시전문가들이 제 역할을 할 기회나 주어졌던가요? 도시재생위원회가 기능을 하긴 했던가요?
마산의 꼴은 '장'자리 차지했다고 거들먹거리기나하고, 방귀개나 낀다는 무식방창한 무리들이 제 세상인 양 마구 휘젓는 깡촌구석동네 분위기, 딱 그 수준 입니다. 제대로 뭘 하자는 사람들은 아무 역할 못하고...
십여년 전인 듯 한데, 마산의 도시계획에 대한 대대적인 논의가 있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허선생님도 전문가로서 그 가운데 계셨었는데, 그 때 논의 됐던 것들 중 기본적인 것들만이라도 실행 되었더라면 마산이 이토록 죽을 지경으로 나자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도시.지역문제에 정획한 문제인식과 진심으로 살리려는 노력이 없는 한 마산은 마창진통합에서도 뿌시래기나 빌어묵는 변두리 찌끼미 꼴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마창진 모두 지차체장 부터가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껏 그들의 같쟎은 자기도취적 치적 만들기는 이제 '신물징'이 납니다. 매립땅장사, 알짜배기 도시 중심중심지 팔아 치우기, 같쟎기 짝이 없는 생태도시, 복마전 같은 변두리 소도시... 그들이 만든것은 그런 것들 입니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도시도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신주의가 상식적 태도 처럼 만연한 대한민국, 사람과 자원의 반이 몰려있고 국가권력도 좌지우지한다는 서울공화국,수도권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지방'도시의 문제는 '지방'스스로의 혁명적 각성과 노력 없이는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지역공동체의 본떼있는 '실력'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한 지방도시의 환경은 변화조차 무망 하다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다면, 돈만 많으면, 부자동네만 되면.... 그 딴 생각으로는 절대로 서울공회국,수도권공화국의 지배를 벗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인구.면적규모로 최대지방도시? 그 따위로 어디에 견줄 생각을 한다는 것 부터가 '촌 것들'이라고 멸시 당하기를 자청하는 생각 일 것입니다.
그게 이 나라 '지방도시'의 처절한 현실이며 지방도시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허선생님과 같이 진정성을 지니신 전문가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한 때 입니다. 장차 지역도시문제에 큰 역할 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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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호 2010/01/11 23:26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우리마산이 않고있는 현실의 문제점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 마산의 그림을 잘 그려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마산이 되었으면 하는 마산시민 한사람의 소망입니다.
회장님께서 변화의 물고를 터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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