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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섬1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2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1 수혈주거로 시작된 인간의 거주양식이 드디어 아파트라는 형식에까지 도달했다. 생활에 필요한 내외조건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달라졌고 인간의 삶을 담았던 주거시설의 형식도 변했다.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은 자연조건과 생산의 수단 및 관계 변화였지만 때로는 정치 사회의 변화가 요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주거형식이 가장 비약적으로 변한 시기는 소위 근대적 건축술이 등장한 개항기와 일제강점기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시작된 개항은 외국의 여러 문물을 직접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일본과 서구의 건축술도 들어왔다. 개항장에 건설된 일본인 주택들은 당연히 일본 자본에 의해 일본인의 설계와 시공으로 시행되었다. 대부분이 상.. 2018. 12. 3.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수출중심의 산업구조를 지향한 박정희 정권의 정책이 빚은 이농현상은 도시의 주택난을 더욱 심화시켰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수많은 가구(家口)들은 주택을 마련할 경제적 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도심지에 세(貰)를 얻을 형편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 상당수는 도시 변두리의 산이나 하천 등 국·공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여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이름 하여 ‘달동네’라 부르는 산비탈에서 도시 빈민들은 천막이나 판자 혹은 함석을 이용해 거처를 마련했던 것이다. 가난한 .. 2018. 5. 28.
도시를 살린 10가지 이야기 (0) 들어가며. 도시는 유기체입니다. 탄생하여 성장하고 발전하며 전성기를 누리다 쇠퇴하는 과정이 사람의 생애와 비슷합니다. 변화하는 도시환경에 잘 대처해 오래도록 전성기를 누리는 도시가 있는 반면, 산업구조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일터가 사라지기도 하고, 신시가지위주의 도시 확장으로 구도심이 낙후되기도 합니다. 도시가 노후화되는것을 막기는 어렵지만, 낙후되는것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도시재생'을 통해 오래된 도시가 안고있는 물리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중심의 살기좋은 도시로 거듭날수 있습니다. 이번 연재(총10회)는 도시재생의 다양한 분야와 방법 중 '지속가능한 친환경건축'이 도시를 어떻게 살리는지 세계 여러 도시의 선례를 통해 배워보려고 합니다. 영국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런던.. 2010. 9. 17.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18세기 후반부터 조창과 더불어 발달하기 시작한 마산포는 중서부 경남의 곡물과 남해안 수산물의 대표적 집산지로서, 화폐경제와 함께 성장한 굴지의 시장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마산포구에는 두 개의 굴강, 곧 조운선 전용 선착장인 서굴강과 민간전용인 동굴강이 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오산선창(午山船艙)․어선창(漁船艙-東城漁船艙)․백일세선창(百一稅船艙)․서성선창(西城船艙) 등 4개의 선창이 펼쳐진 유수한 어항이었습니다. 당시 경상도의 중심포구는 왜관이 있었던 동래와 부산포, 창원의 마산포, 김해의 칠성포였습니다. 창원에는 마산포 뿐만 아니라 지이포(只耳浦, 창원시 상복동 지귀상가 부근), 사화포(沙火浦, 창원시 팔용동 홈플러스 부근), 합포(合浦), 여음포(餘音浦, 귀산부근)가 있었습니다만 이 중에서 중심포구.. 2010. 7. 5.
통합 앞서 마산시민이 해야 할 일 도시의 통합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우리들만의 일도 아니다. 유익하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합칠 수도 있고 나눌 수도 있는 것이 도시다. 마창진 통합은 당위성도 있다. 역사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 그리고 도시경쟁력의 측면에서 통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통합을 통해 세 도시의 약점은 보완시키고 강점은 키울 것이다. 나아가 100만 도시의 위상에 맞는 새로운 발전 가능성도 제시될 것이다. 오래 기다려온 만큼 통합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비전이 크다. 하지만 창원 진해시민과 달리 마산시민들은 통합에 앞서 짚어 봐야할 것이 있다. 진해 창원과 달리 90%에 달했던 마산시민의 통합 찬성률에 대해서이다. 마산은 수백 년의 역사가 있는 도시다. 3·15의거, 부마항쟁 등 현대사의 격랑을 몸소 겪은 만큼 .. 2010. 2. 8.
‘구(舊) 마산형무소 터’ 의 추억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일곱 번째 길에 나섰다. 1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 반, 코아 양과점 앞, 30여명이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짙게 흐렸고 기온이 낮았다. 코스는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 시작하여→구 마산형무소 터→오동동 일대→오동동 아케이드→용마고등학교→지하련 거주지→산호동 효자각→용마산→구강포구까지였다.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는 특별손님으로 3.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님이 직접 나와 의거에 대해 설명해주어 의미가 더했다. 한때 화려했던 오동동의 밤 문화에 대한 설명은 이승기 선생님께서 맡았는데 두 분은 마산상고 동기생이시다. 가는 곳곳마다 새로운 걸 느꼈고 배웠지만, 여기서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구(舊) 마산형무소 터’에 .. 2010. 1. 24.
섬유왕국 '한일합섬'이 남긴 교훈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여섯 번째 길에 나섰다. 날씨는 차가웠지만 바람이 없었고 맑아서 걸을 만 했다. 회원도서관에서 만났는데 추운 날씨에도 참석자가 20여명이나 되었다. 봉화산과 이산미산 그리고 지금의 석전동에 있었던 조선시대 근주 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탐방을 시작하였다. 마산방직→한일합섬→한일전산여고→양덕성당→가톨릭여성회관→합포성지→하이트맥주→국립3·15민주묘지로 이르는 코스였다. 가는 곳곳마다 이야기할 것도 공부할 것도 많았지만 나는 한일합섬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몰락의 과정에 눈길이 많이 갔다. 거대기업 한일합섬의 흔적이 양덕동 일대 온갖 곳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유 교수의 도시탐방대 작은 제목이 「걸어서 만나는 마산이야기」인데 이 글은 「걸어서 만나는 한일합섬이야기」인 셈이다. .. 2010. 1. 7.
제안, <신(新) 7대 도시 마산> 마산을 염려하는 분들이 늘 하시는 말입니다. ‘한 때 전국 7대 도시였던 우리 마산이 이제는 경남 7대 도시가 될 판이다’ ‘전국 7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 가슴 아픈 호소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산을 고향으로 둔 내 마음도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마산뿐 아닙니다. 한 때 잘나갔던 도시라면 어디 할 것 없이 이런 식의 한탄 한마디는 다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목포시의회 부의장에게 들은 말인데, 목포 사람들은 지금도 ‘전국 6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 한답니다. 전국 7대 도시 마산········. 어릴 때부터 많이도 들었던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인구가 전국에서 일곱 번째였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이 도시에 어떤 조건과 결과를 주었는지 깊이.. 2009. 10. 20.
34년 전, 배움에 목말라 마산으로 달려갔어요 며칠 전에 ‘청산’이라는 분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름의 이미지가 강해서 당연히 무슨 공적인 편지이겠거니 생각하며 열었더니, 뜻밖에 제 책을 읽은 경기도 의정부에 사는 이순임(가명)이라는 여성이었습니다. 50을 막 넘겼다고 하니 저보다 몇 살 아래인 것 같습니다. 책이 출판되고 난 뒤 독자로부터 여러 번 편지를 받았습니다만, 이번 편지는 여느 것과 느낌이 달랐습니다. ▲ 전국 곳곳에서 학생들이 가져와 심은 한일여고의 팔도잔디 편지 중, ‘34년 전, 배움에 목말라 여기 경기도에서 마산한일여고로 달려갔었어요.’ 라는 한 줄의 글이 제 눈을 확 끌어 당겼습니다. 34년 전이면 1975년인데, 그 때는 저도 이 도시 마산에서 살고 있을 때였거든요. ‘……마산한일여고로 달려갔었어요.’ 라는 말이 .. 2009. 9. 15.
한일합섬 터에 아파트 대신 공원이 생겼다면? 2006년 11월 어느날. 마산 옛 한일합섬터에 분양하는 아파트의 청약을 위해 담요는 물론 난로와 텐트까지 준비한 수 천명의 사람들이 밤새 줄을 서 있었다. 이 모습은 저녁 9시뉴스의 메인 소식으로 전파을 타 전국에 소개 되었고, 지역에서도 한참 화젯거리였다. 이러한 현상은 분양가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꾼과 수도권 아파트값 폭등을 지켜보면서 투기심리를 자극받은 지역민이 가세해 빚은 촌극으로, 웃돈이 예상 만큼 되지 않자 당첨자 3명중 1명꼴로 계약을 포기해 청약광풍이 사실상 거품임이 증명되었다. 집이 주거의 목적이 아닌 투기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장면이면서, 우리나라의 주거정책이 의도했건, 안했건 집을 필요로하는 사람에게 공급 되어야하는 삶의 본질과 많이 어긋나 있음을 알 수 있다... 2009. 6.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