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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2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
- 2010/09/2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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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만으로 끝나버린 개항기의 매립 시도>
1) 김경덕의 매립 계획
개항이 되면서 외국상선들이 마산포에 드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외국군함들도 가끔 들어왔습니다.
외국 선박들이 들어오는 날이면 공물상인들과 잡화상들이 서부경남 각지에서 마산포로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으며 선창가에는 화물이 넘쳐났습니다.
하지만 당시 마산항의 규모와 시설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오산선창․어선창․백일세선창․서성선창의 네 개 선창과 동․서 두 개의 굴강이 있었지만 모두 수심이 얕아 선박접근이 쉽지 않았고 하역장소도 좁았습니다.
선착장도 자연적 지형을 이용한 초보적인 시설뿐이었습니다.
늘어가는 항만 물량을 도저히 수용할 조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때 동성리에 거주하던 김경덕이라는 사람이 마산포 앞에 매립을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마산포 개항 5개월 후인 1899년 10월 창원감리서에 매립청원서를 제출했던 것입니다.
‘매축청원서’ 원문과 해석문입니다.
〈請 願 抄〉
本港東城居 金敬悳
右請願은 際玆萬國通商之會하여 楚帆吳檣이 次第來泊일서 本港을 今旣設港 즉 商張之會集과 物貨之豊備는 理所必然이다. 온 自西城으로 以至 午山해 防築際漲灘을 限五十把退築成堰하와 舟揖往來에 無淺窄之慮하고 市廛布列에 免紛還之弊則無害於公而. 爲利於商民者誠大矣고로 繪成形址하야 玆敢粘連仰請하오니, 參商敎是後特爲認許하오데 俾爲商販興旺之地伏望함.
光武三年 十月 日
監 理 暑 閣 下
「서성리에서 오산리(현 오동동)에 이르는 창탄(漲灘, 간석지) 폭 50파(把, ‘발’의 뜻으로서 두 팔을 잔뜩 벌린 길이) 앞에 방축을 쌓아 배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고 선창가에 늘어서 있는 노점상들의 혼잡을 덜어 상인들의 이익을 높이고 상업의 발전을 위해 이 지역의 도면을 첨부하여 매축을 청원한다」
아래 그림은 김경덕의 매축청원서에 첨부된 도면입니다.
위 그림을 현재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그림의 방향이 거꾸로 되어 있었서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
파란 선이 당시의 해안선이고, 노란선이 김경덕이 매립하려했던 범위입니다.
김경덕의 구상은 옛적부터 내려오던 마산포의 해안(현 남성동 지역)을 매립해서 크게 넓히겠다는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특히 단순히 매립을 하여 땅을 만들겠다는 의미 외에 배가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하여 상인들의 이익을 높이겠다는 의도를 가진 것을 볼 때, 그는 항구도시에서 항만시설이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선각(先覺)이었습니다.
이런 김경덕의 뜻을 정부가 받아드려 그에게 매축권을 주었습니다. 마산 최초의 매립허가였습니다.
하지만 김경덕은 자금이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공사에 필요한 자금 중 부족한 금액 15,000량을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에게 차용하여 공사에 착수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갑자기 김경덕이 죽은 겁니다.
마산항을 근대식 항구로 바꾸어 보겠다던 김경덕의 꿈은 채 시작도 못해보고 그 순간 끝나고 말았습니다.
2) 일인(日人) 홍청삼에 의한 김경덕 매축권 승계 계획
김경덕 사망 후,
부산일본영사관 마산분관 이사관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은 김경덕이 받았던 매축권의 권리승계를 요구한 홍청삼(弘淸三)의 청원서를 1906년 4월 11일 창원감리서에 제출했습니다.
사유는 김경덕이 매축공사비 15,000량을 홍청삼에게 차용할 때 저당잡힌 전집표(典執票) 때문이었습니다.
전집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매축인허증을 저당하여 한화 15,000량을 차용하여 그 이자로 매월 3부를 지급하고, 만약 1902년 정월 말일까지 원리금을 갚지 못하면 매축권은 채권자에게 귀속된다」
아래의 글이 김경덕이 홍청삼에게 써준 전집표의 원문입니다.
〈金敬悳 典執票抄〉
大韓光武四年庚子二月初三日弘公前票
右票爲事段當比之時有急用處馬山浦前洋自西城午山至防築際漲灘限五十把退築成堰次監理暑認准文記典執是遺韓錢壹萬五千兩右前出債而邊則每朔每兩頭參分式爲定而限則 光武六年五月晦內俱本利準報是矣若過限不報則右認許文記永爲給而以比文記倂爲放賣文記退築成堰貴公自由任意而日後若有雜談之弊則以比票憑考事
票 主 金 敬 悳
이 전집표를 근거로 홍청삼은 매축예정지에 승인도 받지 않은 채 표목을 박는 등 공사를 서둘렀습니다. 매축권 이전 서류를 접수한 창원 감리는 상부의 승인도 받지 않고 허가를 해줘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있던 창원감리서 주사 김병철이 매립권승계에 관한 보고서를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올렸습니다.
이 보고서에 대해 참정대신은「이 사항은 가볍게 처리할 문제가 아닌데 사전에 이를 보고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허가한 일은 적절치 못하니 빨리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정부의 이와 같은 명령에 따라 창원감리는 홍청삼에게 매축권 이전이 불가하다고 전했지만 홍청삼은 창원감리의 지시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성의 통감부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홍청삼의 청원을 접한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1907년 10월 5일 청원에 대해 재조사할 것을 창원감리에게 훈령을 내렸습니다.
훈령 내용은
㉮ 창원감리 독단 인허의 문제
㉯ 김경덕에게 허가한 매립지의 규모 문제
㉰ 매립으로 인한 공동의 이익과 타인 소유권에 대한 방해 문제 등을 다시 보고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창원감리는
㉮ 김경덕에게 인허한 사실이 없었으며(허가를 해준 기록이 있는데 이렇게 부인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설령 홍청삼이 김경덕의 전집표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각종 인허가는 1년 내에 시행하지 못하면 무효라면서
㉯ 이 매립지역이 마산포 주민들에게 무척 중요한 땅이란 점을 설명하고 김경덕이 청원할 때 지정했던 매립규모에 관한 도면을 그려 보낸다면서 이 매축권은 마산포 주민들이 가져야 된다는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 이후의 진행은 관련자료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이 매립은 결국 홍청삼도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3) 마산포 주민 집단 매립 계획
같은 시기인 1907년,
마산포 주민들은 이미 일본인들에게 수많은 농토를 잃은 터라 어선창마저 일본인 홍청삼에게 빼앗긴다면 어시장에서 생계를 이어가던 주민들의 생존권까지 위협받게 될 것같아 자구책을 강구하였습니다.
곧 매립사업을 항민(港民)들이 공동출자하여 직접 시행할 결정을 하고 이를 창원감리를 통해 정부에 청원한 것입니다.
이 청원에 대해 창원감리는 11월 1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마산포의 항민 공동 매축청원을 살펴보니 이 기지가 항민들과 관계가 매우 깊고 중요할 뿐만 아니라 항민들의 공동 소유지로서 항민들이 매축하는 것은 역시 좋은 일이니 밝게 살펴 보신 후 항민들의 정상을 특히 유념하시어 청원대로 매축토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으로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서에 대해 이완용은 같은 해 12월 13일 창원감리가 제안한 항민공동매축의 명세서를 제출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이규철 등 15명의 마산포 주민들이 매축명세서를 다음과 같이 정부에 올렸습니다.
〈창원 마산항 탄지(灘址) 매축청원서〉
1. 평수는 서성선창에서 오산선창까지 총계 11,554평
1. 공사기간을 12개월로 예정함
1. 소요자금은 40,000원, 항민 자본가들이 합심 출자함
1. 자본인 성명은 아래와 같으며 서명 날인하여 지방관청에 보관함
이규철 5천원 이상태 5천원 손양손 5천원 강홍규 5천원 김노현 5천원 권태정 5천원 최병두 2천원 김창제 2천원 김정기 1천원 정인섭 1천원 박기수 1천원 김하수 1천원 강성도 1천원 이장환 5백원 송치권 5백원 계 4만원
마산항 발전을 위해 매립을 하되 마산포 주민들이 직접 돈을 각출해 시행하겠다는 포부였습니다.
이처럼 마산포 주민들이 생존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공동매축청원 허가는 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얼마 안있어 나라가 국권을 잃어 이에 대한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습니다.
최초로 시도된 김경덕의 매립구상과 이름 삼키려한 일본인 홍청삼, 그리고 이에 저항한 마산 항민들의 단결,,,,
마산포 최초의 매립을 둘러싼 각축은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 채 이렇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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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포만 내려다 본 일본 신사(神社)>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협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신사(神社)였습니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일본신사는 부산신사인데 이미 17세기에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개항된 도시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일본거류민들이 조계지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마산의 일본 신사(神社)건립계획은 순종이 마산을 방문했을 때 쯤 (1909년 초) 홍청삼(弘淸三)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마산경제회 등 일본인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신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아무도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날 홍씨가 마산의 일본인 유지 27명을 요정 ‘망월’에 초대하여 신사 창건을 호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산항지』의 기록에 의하면 홍청삼은 ‘거류민으로서 조상신을 애호하는 염원과 진충보국 정신을 발양할 목적’ 으로 신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합니다.
당시 마산이사관이던 삼증(三增)이 해관장의 사택 예정지를 신사 부지로 내놓았습니다. 바로 지금의 제일여고 교정입니다.
도시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위계가 높았던 자리로 아래 그림의 위치입니다.
밑의 사진은 1910년대에 발간된 마산지도에 나타난 '마산신사'입니다.
일제기 마산신사 전경입니다.
신사건립을 위해 1909년(명치 42) 2월 8일 마산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에서 일본인 유지 백여 명이 모여 마산신사 창건위원 10명을 선출하였습니다. 그 중 전전(前田) 민장이 위원장에, 뒷날 『마산항지』를 펴낸 추방사랑(諏方史郞)이 지진제(地鎭祭)의 신관(神官)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지진제는 3월 3일 삼증 이사관, 전전 민장, 홍청삼 민회의장, 민회의원, 상업회의소의원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하였으며 전전 위원장은 신사 창건기부금 5천원의 모금계획을 이사관에게 신청, 인가를 얻어 즉각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신사 지진제를 거행하는 장면입니다.
공사는 마산에 거주하던 말광기오랑(末光磯五郞)이라는 장인이 맡았습니다.
공사장에는 욕조를 두어 직공들과 함께 매일 아침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산신사에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봉안한 본전 외에 술 만드는 신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도 있었습니다. 송미신사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1936년에 증설하였습니다.
1920년 대 이후 번성했던 마산의 주류산업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업자들은 일 년에 한차례씩 송미신사 앞에서 성대한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지금도 제일여고 주변에는 당시의 신사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교문 안과 바깥 돌계단이 옛 신사입구 계단입니다. 이 돌계단은 일제기 마산포 주민들이 근로봉사작업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노역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정의 정원석으로도 신사의 흔적이 남아 사용되고있으며, 담벼락에는 축조발기인이라고 밝힌 일본인의 이름이 음각된 돌도 박혀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일제기 마산신사 입구 모습과 현 제일여고 정문 사진입니다.
정문 앞 계단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제일여고 교문이 신사의 신주문을 모방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것 같습니다.
『마산 창원 역사읽기』에서 설립자인 이형규 이사장이 제일여고 교문은 전주체육관의 정문을 모방한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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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가실 2010/11/29 20:31
아, 못보던 사진도 올라왔군요. 특히 지진제 사진....
어디서 구하셨나, 저 진귀한 사진을.....
그리고 추방사랑의 일본훈은 '수와(Suwa)입디다.
<김경덕의 매축청원도>
1900년 / 김경덕 / / / 매축청원서 첨부, 창원항안Ⅰ / 규장각
1900년에 마산포 해안을 매립하기 위해 김경덕이 정부에 제출한 매축청원서에 첨부되어 있는 지도입니다.
(1907년 창원감리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을 저지하기 위해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습니다)
지형만 알아 볼 수 있도록 붓으로 대략 그려놓은 지도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매립 전 마산포 선창과 굴강의 위치, 그리고 해안 주변의 길을 알 수 있습니다.
붉은 글씨는 당시 마산포 사람들이 사용했던 선창과 굴강의 명칭과 위치를 제가 표시한 것입니다.
이 지도에는 오산리․동성리․중성리․서성리로 기록된 당시의 리(里) 위치가 표시되어 있어서, 일제에 의한 행정구획 이전의 마산포 6개리 경계에 대한 자료로 가치가 있습니다.
윗부분의「매축차정계(埋築次定界)」라는 표시로 그어 놓은 ⊓ 모양의 선이 김경덕이 매축을 계획한 범위입니다.
이 경계를 측정해 보면 도면에 나타나 있는 계획매립지의 길이는 서성선창에서 오산선창까지를 망라하여 원마산이 접하고 있는 전(全) 해안으로, 현재의 지도를 이용해 확인한 결과 약 750m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매축의 폭이 58파(把, 두 팔을 잔뜩 벌린 길이)라고 했는데 1파를 1.8m로 보면 104.4m로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런 가정으로 매립부지의 면적을 계산해 보면 78,300㎡(약 23,700평)나 되는 대규모입니다.
건설장비는 꿈도 못 꿨던 110년 전,
마산포 동성리(현 동성동)에 살았던 김경덕이란 사람의 포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되는 대목입니다.
아래 그림은 실제로 존재했던 마산포 해안을 정밀하게 복원하여 현재 인공위성 사진 위에 오버랩시킨 겁니다.
(옛 마산포 해안의 복원과정과 복원 결과에 대해서는 차후 포스팅할 계획입니다)
위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보면 김경덕의 그림이 정확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기본형태는 충분히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도시 한복판이 되어버린 옛날 마산포의 저 해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사연을 안고 살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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