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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두2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2. 포시의 명 강연 112. ‘포시(布施)’의 명 강연 포시진치(布施辰治)라고 하면 50대 이상의 조신인 사회주의자나 민족운동가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수많은 자유주의자 혹은 좌경 변호사 중에도 상촌진(上村進), 산기금조미(山崎今朝彌) 포시(布施) 등은 학의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하천풍언(賀川豊彦)을 종교가라기보다는 사상가로 보는 것처럼 포시(布施)도 급진 사상가로서 일반은 간주하였다. 사법성과 내무성에서는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인데, 일본 공산당 사건의 변론공판 변론 중 당국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정부 당국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어 치안 유지법을 적용하여 4년 형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피고인 포시(布施)는 판에 박은 주소, 성명을 묻는 판사에게 무직이라고 하기는 싫었던지 ‘법률 기술자’라고 비꼬아 답변을 해.. 2016. 9. 12.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923년 1월 당시 동경서 유학한 몇몇 청년 김형두(明大 법과 재학 중, 변호사 시험 합격)를 필두로 손문기, 이주만 등이 연휴(連携)하여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그 해 여름에는 ‘노농동우회(勞農同友會)’라는 것을 조직 발족하였다. 명칭은 ‘노농’으로 있으나 그 대상은 공장 노동자가 아니고 부두에서 일하는 하루살이 자유노동자들로서 그 숫자는 극히 적었다. 최초에는 오월절이란 이름 아래 프랑스를 위시하여 세계 남녀 노동자들은 하루의 행락을 마음껏 즐기는 극히 평화로운 날이었다. 호주 멜본 시에서는 시위 행렬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시장은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였지마는 그 반대로 미주 시카고에서는 헤이 마켓에 이르는 평화시위 군중과 경찰이 충돌함으로써 발포.. 2016. 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