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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2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5) -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9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은 신사(神社)였다. 마산 제일여고 터가 신사였다. 지금은 제일여고 뒤에 큰 도로가 나있지만 신사의 뒤쪽은 산이었다. 바다에서 보면 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급하게 상승하는 길의 끝이다. 길 양옆에는 벚꽃나무가 즐비했고 길바닥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으며 신사의 신주문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조선인이 거주했던 구마산 지역 산제당 가는 길의 꾸불꾸불하고 아기자기한 산길과는 몹시 대조적인 길이었다. 신주문 앞의 왼켠 마당에는 큰 대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대포도 신사와 함께 동향으로 서서 마산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마산시의 지붕.. 2015. 1. 19.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1938년, 전시체제를 총괄하는 기본골격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어 조선 전역에 시행되었습니다. 이 법으로 일제는 한반도의 사람과 물자 모든 것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땅의 백성들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에 빠졌습니다. 쌀의 자유로운 시장거래를 완전히 중지하고 공출제란 이름으로 빼앗은 후 배급하였으며,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각 가정에서 사용하고 있는 금속식기류까지 공출이란 명목으로 탈취해 갔습니다. 세숫대야 솥 등 가정집에서 갈취한 금속류를 만족한 듯 바라보고 있는 일제관료들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마산항에는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수탈한 쌀가마니가 쌓였고 이 쌀들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래 사진은 미곡공출을 강요하는 전단지입니다. "한 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나라에 바쳐서 귀축미영을 때려부.. 2012. 10.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