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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등실4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0. 신문기자 대회 120. 신문기자 대회 1919년에 제등 실(齊藤 實)이 조선총독으로 칙임 후 종래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탈피함으로써 총독부 어용지 경성일보(日文) 외 각 도마다 일인이 경영하는 신문은 있어도 한국민 민영지는 전혀 없었다. 제등(齊藤)은 선심이나 쓰는 양으로 우리 민간지로 조선일보를 비롯해서 동아일보 그리고 친일분자 민원식이 국민신문을, 그리고 시대일보(후에 중외일보-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 등으로 어두웠던 근역(槿域) 삼천리의 언론계에 처음으로 일조(一條)의 여명이 비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 방방곡곡에는 언론에 갈증 났던 열혈청년들이 솔선하여 각 사의 지국을 설치, 신문기자의 홍수시대를 이루었다. 때는 경향각지에 사회주의 사상이 팽창한 시절이라 조선일보 본사 간부급 대부분이 좌경사상에 침윤된 .. 2016. 10. 24.
김형윤의 <마산야화> - 91. 제등만의 참사 91. 제등만(齊藤灣)의 참사 진해 해군통제부 앞 부두 있는 곳을 일인들은 제등만(齊藤灣)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경성에 죽첨(竹添) 일본공사가 있던 곳을 죽첨정(竹添町), 장곡천정(長谷川町), 마산의 까치나루(작진, 鵲津 - 지금 발전소 있는 곳 / 현 남부터미널)를 일본 귀족원의장 근위(近衛)가 상유(賞遊)한 곳이므로 일인들은 하마(近衛濱)라 한 것과 마찬가지로 원조선총독(元朝鮮總督) 제등 실(齊藤 實)이 과거 진해 요항부(要港部) 사령관으로 있었던 것을 인연해서 제등만(齊藤灣)이라 명명한 것이다. 대한민국 수립 후로 일반 민간선박은 일체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나 그 당시에는 통제부 앞 솔섬 사이와 날부리(비봉, 飛鳳) 현동으로 작은 배들은 관통하였다. 1928년 창원-진해선 철도(일본 千葉공병대 병사들.. 2016. 5. 9.
김형윤의 <마산야화> - 46. 보천교, 47. 김차랑 문고 46. 보천교(普天敎) 중성동 내에 소재(번지 미상)한 2층 목조건물은 전대미문의 총각회 사건으로 한때 전국적 화재가 되었지만 총각회 변고로 집 주인은 어디로인가 가버려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몇 달 동안 비어있던 이 집에는 회색 도복에 행근을 찬 상투쟁이들이 날이 갈수록 삼삼오오로 몰려들기 시작하자 대체 이들 3,40명 되는 사람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하여 이런 차림의 사람들을 처음 보는 동네 어른 아니 할 것 없이 의아그럽고 기이하게도 여겨 구경꾼들이 뜰 안으로 붐비었다. 말하자면 장꾼보다 풍각쟁이가 많았다. 지식층은 대개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보천교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유사 종교의 교도들이다. 이 교의 요술에 걸려들면 깍가쟁이(삭발) 신사로 자처하던 자도 양모자발구식(養毛仔髮舊式).. 2015. 9. 21.
김형윤의 <마산야화> - 25. 기독교인과 마산신사, 26. 도리이를 닮은 문 25. 기독교인과 마산 신사(神社) 일본인 추방무골(諏訪武骨)옹의 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현 문화동의 높은 자리에 위치하였던 마산 신사는 1909년(원문에는 1910년으로 되어 있음 / 옮긴 이), 즉 명치 42년에 창건된 것이다. 정전(正殿)에는 천조(天祖)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곳이며 경내 우측에는 도하대명신(稻荷大明神)을, 그 곁에 사당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건조하여 경신(敬神)관념을 숭양(崇養)해 왔는데 신관(神官)으로서 발령된 사람은 고등관 3등의 수자춘충(須子春忠)이었다. 아침 미명 때를 기하여 일본인 노소남녀가 앞을 다투어 박장(拍掌) 참배하는 것은 그들의 경신(敬神)하는 정신적 관례이지만 일인 아닌 조선인의 별의별 각설이와 풍각쟁이 같은 아유배(阿諛輩) .. 2015. 6. 22.